벨벳 애무하기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세라 워터스의 책을 읽으려 마음먹은 것은, 흥미롭게 읽은 <나이트 워치>에 이어서 출판사 열린책들이 창사 30년 기념행사로 베스트셀러 열두 편을 선정해 소위 리커버 판으로 내놓았는데, 여기에 세라 워터스의 <핑거 스미스>가 포함되어 있었고, 무려 912쪽의 두꺼운 책을 정가 만 원, 할인가 9천 원으로 판매를 했음에도 그걸 발견하지 못해 품절의 딱지를 쓰고 말았으나, 거의 완벽하게 새 책 같은 헌책을 6천 5백 원 주고 살 기회를 포착했기 때문이었다. <핑거 스미스>가 다른 건 다 빼고 무지하게 ‘재미’있었던 건 사실이었으며, 그게 워터스가 초기에 쓴 소위 빅토리아 3부작 가운데 마지막 작품이라는 얘기를 주워들었으니 어찌하여 그토록 재미난 이야기 시리즈의 나머지를 안 읽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낮추는 얘기는 결코 아니지만, 전형적으로 잘 쓴 대중문학인 <핑거 스미스>를 헌책으로 읽은 바에야, 어떻게 <벨벳 이야기>와 <끌림>의 새 책을 선택하겠는가. 새 책이라야 ① 한 페이지에 서른 줄을 넣던 걸 스물다섯 줄로 줄 간격을 늘이고, ② 한 줄의 글자 수를 줄이는 편집과 ③ 제목을 영어로 쓴 거밖에 없는데 정가를 무려 13퍼센트 인상하는 출판사의 특출난 상도덕도 나로 하여금 헌책을 사게 만드는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 ③이 제일 큰 이유였을 것이다. 얘네들이 가격 13% 올리는 걸 너무 우습게 알아. 짜식들아, 봉급 13% 오르려면 요즘 같은 시대에 적어도 3년은 걸린다. 하여튼 이래서 합정동 알라딘 헌책방에서 한 권에 만 원씩 주고 사서 읽었다.

 

  이 책은 1870년 템스강 하류 켄트 지역에 있는 영국 최고의 굴oyster 산지 윗스터블 출생의 아가씨 낸시 애슬리 양의 이야기다. 영국에서도 굴이라고 다 같은 굴이 아니라, 윗스터블의 굴로 말씀드리면 일찍이 에드워드 7세 폐하께서도 늘상 옆구리에 달고 다니는 어여쁜 정부 케펠 부인과 함께 잉글랜드 전역에서 가장 알이 굵고, 즙이 많으며 풍미가 있으면서도 섬세한 맛이 나는 특별한 굴을 자시러 왕림했다고 한다. 참 곤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제목, 벨벳 애무하기. 자, 애무하려고 하는데 벨벳이라? 사람의 신체 가운데서도 마치 굴처럼 즙이 많으며 풍미가 있고, 심지어 감촉마저 굴과 비슷한 장소가 있으니, 굳이 발음은 하지 마시고 그게 어딘지 상상만 하시라. (사이)… 맞다. 당신이 상상한 곳. 거기가 벨벳이다.
  윗스터블에서도 유명한 굴 전문 식당 “애슬리 굴, 켄트 최고의 맛”의 주인장 에슬리 씨에게 일남이녀가 있었는데, 이중의 막내딸이 우리의 주인공 낸시 애슬리 양. 열여덟 살 먹을 때까지는 이 굴 식당에서 굴 껍데기 까는 일을 하다가 딱 하나 취미 붙인 것이 연예장演藝場, 일종의 서커스에서 공연, 특히 춤과 노래를 즐기는 것이었다. 인근 켄터베리의 연예장의 매니저인 트리키 리브스의 조카 토니가 언니 앨리스의 남자친구였던 관계로 돈 안 내고 좋은 자리에서 만날 구경을 할 수 있었는데 그만 남장여자 키티 버틀러에게 한눈에 반해버리고 만다.
  이게 낸시 양의 인생을 뒤집어 놓는다. 만일 연예장 공연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좋아했더라도 키티 버틀러의 남자 복장과 노래에 반하지 않았더라면 당시가 19세기 말이니까 불과 1년 후엔 남자친구 프레디와 결혼하고, 2년 후엔 엄마가 되어 가을부터 봄까지 쉬지 않고 굴을 까고, 찌고, 튀기고, 삶느라 날이면 날마다 퉁퉁 불은 손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살다가 당시 잉글랜드의 평균 수명 29.9세에 달하면 한 많은 한 세월, 내가 언제 한 오백 년 살잖느냐, 궁상 한 번 떨고 숟가락 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낸시는 키티 버틀러를 본 순간 그가 웨스트엔드의 신사이며, 특히 짧게 친 견과류의 갈색 머리카락과 그로 인해 드러난 하얀 목덜미를 보고는, 온몸에 경련, 까지는 아니고 전율이 머리끝부터 아랫배 깊숙한 곳까지 찌릿! 뼈마디가 녹작녹작하니 그냥 반해버리고 말았다. 이날 이후 낸시는 매일같이 자기 일을 끝내기가 무섭게 홀로, 당시에 아가씨 혼자 무려 기차를 타고 켄터베리까지 가서 버틀러 양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버틀러 양과 친교를 맺게 된다.
  이리하여 기관차의 질주에 드디어 시동이 걸린다. 이제쯤 얘기해도 좋겠다. 세라 워터스의 빅토리아 삼부작은 여성의 동성애를 주제로 한 작품들로 구성한다. <핑거 스미스>를 대폭 각색해 영화로 만든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포함해서. 연예장에서 남장 여인, 즉 매셔인 버틀러를 본 순간 낸시의 몸을 관통한 전율은 성적 접촉을 기대하는 사랑, 사실 그게 진짜 사랑이긴 하지만 그런 몸의 갈망을 전제로 한 사랑이었다. 원래 사랑이라는 것이 순간에 마치 확 불이 붙는 성냥의 황 같아서 이들은 금세 친밀해졌고, 이걸 우정이라고 착각한 식구들은 친구를 집으로 초청하기에 이르는데, 그리하여 진짜로 굴 식당에 일차 왕림하게 된 버틀러 양은 식구들과 예상외로 친밀한 저녁 시간을 보내고 낸시에게 벼락같은 부탁을 해버린다. 런던에서 온 기획사 대표 월터 블리스 씨가 자신을 런던의 극장에 데뷔시키겠다고 오퍼를 했다는 것. 그래서 낸시더러 자신의 의상 코디네이터가 되어 함께 런던에 가자고 하고, 당연히 낸시는 사랑하는 키티 버틀러를 따라 당시 세계의 수도, 런던행 열차를 타게 된다.
  차링크로스역에서 내려 마중 나온 월터 블리스의 마차를 타고 런던 시내를 드라이브하는 두 젊은 아가씨들. 이들의 눈에 차례로 허메저스티스, 엠파이어, 알함브라 극장 같은 호화로운 초대형 극장을 둘러보게 한 후 이런 거리와 비교해 좀 추레해 보이는 브릭스턴의 덴디 부인의 하숙집 계단꼭대기 한 칸짜리 방에 숙소를 정한 키티와 낸시. 낸시는 집에서 늘 그래왔듯이 자연스럽고, 키티는 별로 경험이 없는, 한 침대에서 둘이 자야 하는 상황이 된다. 여기서 키티는 낸시에게 요구한다. 이제 자매, 자기의 여동생이 되어달라고. 실망하는 낸시. 그러나 낸시는 키티가 사랑하는 방식대로 키티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리라. 아니면 아예 키티를 사랑하지 말든지. 그러나 그건(키티를 사랑하지 않는 일) 끔찍하리라는 걸 아는 낸시.
  그러나 이렇게 내버려 둘 작가 세라 워터스가 아니다. 성공적인 공연을 이어가는 키티 앞에 매우 많은 다른 매셔, 즉 복사본들이 등장해 경쟁이 심해지고, 낸시 역시 춤과 노래에 자질이 있었던 터라, 이를 발굴한 블리스 씨는 둘이 함께 남장여자로 공연을 하게 해 대박을 친다. 이렇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돈 좀 번 낸시는 키티에게 진주목걸이를, 키티는 낸시에게 비싼 이브닝드레스를 선물한다. 비싼 속옷과 이브닝드레스의 진짜 목적은 입기 위한 것이 아니라 벗기 위한 것이라서, 한 침대에서 자야 하는 이들은 어느 무시무시하게 추운 날, 드디어 드레스를 벗었고, 굴 까기의 달인 낸시는 급기야 굴 껍데기를 벗기듯 드레스를 벗고 벨벳을 애무하기에 이른다.

 

  참 제목부터 자극적이다. 책을 살 때는 무슨 뜻인지 몰라 무덤덤했지만 뜻을 알고 나니까 오프라인 책방이라면 못 샀을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무척 야한 장면도 마구 나오는데 영국인들은 베드씬도 이리저리 돌려서 말하는 인종이 아니다. 전철에서 읽기 곤란한 수준.
  그건 그거고. 촌 바닷가 윗스터블에서 세계 화폐의 중심지이자 자본주의의 얼굴이며 사회주의 운동의 수도, 거대한 우범지역인 런던으로 거처를 옮긴 낸시. 낸시는 오직 하나, 자신이 애인으로 키티를 사랑한다는 것이 중요한 반면, 키티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사회와 시민들의 시각, 커밍아웃 이후에 자신에게 돌아올 손실과 따돌림 같은 것에 아주 민감하다. 그러니 이들 사이의 사랑은 언제가 될지 시간문제일 뿐 처음부터 폭파가 예정되어 있던 것. 아니나 달라, 이들은 얼마 가지 않아 헤어지게 되는데, 세상에는 애초에 아름다운 이별이 없다고는 하나, 가장 안 좋은 방법으로 종막을 고하고 저 거친 황야, 런던이라고 하는 정글 속에 홀로 내동댕이쳐지는 낸시가 어떻게 자신을 돌보고 이루지 못한 사랑을 달래가는지, 재미 하나는 죽여주는 작품이니 직접 확인해보심이 어떠하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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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5-31 09:2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이거 책표지 보이게 들고 전철에서 읽으셨으면 ㅋㅋㅋㅋㅋㅋ
이 작품은 BBC에서 미니시리즈로 만들었는데, 그 드라마도 무척 재미나요. 근데 폴스타프 님께 추천은 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5-31 09:26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마치 미니 시리즈 보라고 하신 말씀 같아서, 뜻을 저버릴 수 읎잖아요, 얼른 작은 애 불러 다운 받아달라 해야겠습니다.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5-31 09:50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자제분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봐도 책이 못집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1-05-31 09:52   좋아요 2 | URL
검색할 때 제목은 <티핑 더 벨벳>이고요, 자매품으로 <핑거스미스>도 재미납니다. 미니시리즈라고 해도 두 작품 다 3부 안으로 끝났던 거 같아요.

Falstaff 2021-05-31 09:53   좋아요 3 | URL
제 집은 애초 삼강오륜이 거꾸로 서 있는지라 박찬욱의 <아가씨>도 엄마, 아빠(나), 작은 아들, 셋이서 아주 재미있게, ˝아, 탁월해, 탁월해!˝ 하면서 봤는 걸요. 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05-31 11:04   좋아요 2 | URL
저는 <핑거스미스>가 너무너무 재밌었어요! 그 모드 역 맡은 여자가 너무 이뻐서...근데 이 여자가 <디 아더스>에서 벙어리 하녀로 나오더라구요.

coolcat329 2021-05-31 09:3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bbc드라마로 이거 봤는데 정말 재밌었어요. ㅋㅋ

Falstaff 2021-05-31 09:34   좋아요 3 | URL
저..... 야~한가요? ㅋㅋㅋ

coolcat329 2021-05-31 11:01   좋아요 3 | URL
2003,4년인가 봤는데,
당시 파격적인 소재라 좀 충격을 받긴 한듯 한데요...지금은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요 ㅎㅎ

다락방 2021-05-31 10: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세라 워터스의 [핑거 스미스]도 엄청 재미있게 보았거든요. 오옷 뭐야 재밌어 재밌어 이러면서 봤는데 벨벳 애무하기도 이 리뷰 읽으니 엄청 재미있을 것 같아요. 으앗. 사야겠어요. 근데 제가 세라 워터스의 책을 하나 더 사둔게 있긴 한데 설마 이건 아니겠죠? 아아 사야겠어요. 읽고 싶습니다. 완전 재밌을것 같아요. 그리고 저 이 리뷰 읽기 전까지 벨벳 애무하기가 그런건줄 몰랐습니다... 세상 순진한 다락방인 것입니다..

다락방 2021-05-31 10:50   좋아요 1 | URL
구매함 검색해보니 [나이트 워치]랑 [게스트]를 사두었네요. 아니, 벨벳.. 은 왜 안사뒀을까요? -.-

Falstaff 2021-05-31 11:20   좋아요 1 | URL
ㅋㅋㅋ 지금 워터스의 <끌림> 읽고 있거든요. 중간 좀 못미쳤는데요, 이건 아직까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얘깁니다. 월요일 오전이라 더 그렇겠지만 하품만 뻑뻑 하고 있습니다.

벨벳은 암만해도 시청각으로 봐야 제격일 거 같아요. 흐흐흐흐.... 얼른 봐야겠습니다.

잠자냥 2021-06-02 11:13   좋아요 0 | URL
다 부장님이 <나이트 워치> 산 거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 부장님 비서할까부다... ㅋㅋㅋ

다락방 2021-06-02 12:28   좋아요 0 | URL
아니 저도 모르는 걸 어찌 기억하세요 잠자냥님? @.@

잠자냥 2021-06-02 13:24   좋아요 0 | URL
<나이트 워치> 제가 리뷰 쓴 적 있는데, 그때 뭔가 사겠다고 하셨던 거 같기도...(근데 그 글에 사셨다는 댓글은 안 보이는데... 뭐지? 독심술인가?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6-02 15:04   좋아요 0 | URL
하아- 제가 안그래도 이거 왜 샀나, 혹시 잠자냥 님 때문인가.. 의심하긴 했었는데 의심이 사실로 드러났네요. 다 잠자냥 님 때문입니다.. ㅠㅠ

잠자냥 2021-06-02 15:13   좋아요 0 | URL
다부장님 제가 비록 부장님께 40평대 아파트를 장만해 드릴 수는 없지만, 그 40평 아파트를 책으로 가득 채울 만큼 낚시질은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충성! 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