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자 민음의 시 155
김언 지음 / 민음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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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가오는 날씨

 


  다가오는 수요일 어디쯤엔가 연기가 난다.
  나는 물감을 짜 놓고 기다렸다.

 

  머리와 다리 사이에 이토록 먼 공백이 있는 줄 몰랐다.
  나의 이쪽과 저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게 물어보아도
  영면하는 아이는 말이 없다. 큰 혼란에 빠진 것 같다.

 

  파도와 선원들이 하루 종일 싸우느라 모두 지쳐 있었다.
  나는 이토록 먼 석고상에 빠져서 묵상 중이었다.
  수백 개의 목발이 떨어지는 비는 복사뼈까지 차오르는 돌로 변해 간다.

 

  나는 터무니없이 늘어난 당신 발가락을 보고 기다렸다.
  수요일 어디쯤엔가 우산이 떠 있는 하늘이 보였다. (전문)

 


  이 시를 읽고 나니 저절로 로베르토 볼라뇨의 작품 <야만스러운 탐정들>에서 나오는 내장사실주의가 떠올랐다. 말 그대로 자동으로. 신시nouveau poésie 또는 전위시를 한다는 명목으로 모인 일련의 젊은 시인들. 첫 문장부터 기가 질린다. “다가오는 수요일 어디쯤엔가 연기가 난다.” 수요일은 현재나 과거가 아닌 미래. 다가올 것이기 때문에. 어디쯤도 아니고 언제쯤, 즉 시간 단위여야 하며, 그래서 연기가 나고 있을 수 없다. 연기가 날지, 나지 않을지 지금은 확인할 수도 없다. 물론 시인 김언에게 확인할 수 없음, 즉 ‘미확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미 앞의 시 <미확인 물체>에서 비 오는 날에 확인되지 않은 미아삼거리에서 칼국수를 먹었고, 어제는 확인되지 않은 중국 요리를 먹었는데, 확인되지 않은 중국집 이름은 진짜루이고 확인되지 않은 단무지와 양파와 서비스로 나온 군만두까지 사이좋게 나눠 먹었기 때문에. 시인에겐 세상살이의 모든 것이 미확인 물체, F가 빠져서 UO, 즉 Unidentified Object들로 가득하다고 선언한 바 있으니까. 이 시 <다가오는 날씨> 수준이면 꽤 오랜 세월 나를 괴롭혀온 현대의 해체시나 시의 파편화 경향을 가뿐하게 능가하지 않는가.
  김언의 시집을 고른 이유는 첫째가, 그래도 우리나라의 현대시를 읽어야 하지 않겠는가 싶은 마음이었고, 둘째가 많은 독자들이 읽어보고 좋은 시인이라고 평했기 때문이다. 김언은 1973년생. 부산대 공대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하다가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읽어보고 시인을 꿈꾸었다고 한다. 그럴듯하네. 내가 외우고 있는 황지우의 유일한 시 <귀소歸巢의 새 2>가 실린 시집이다. 우쭐한 마음에 <귀소의 새 2>를 암송해볼까?

 

  숲새는 지 울음이 들릴락말락한 까마득한 달팽이관管 속으로 날러 가부럿다 지 울음으로 숲 둘레를 막아 놓고 그 숲에 집지은 숲새는 가청권可聽圈 몇 옥타브 우에서 끝없이 목이 쉬었다……사이사이에……지가 깃든 수풀 밖으로 또다른 숲이 있능가 없능가 의심하면서  (전문)

 

  황지우가 이 시집을 냈을 때가 1983년, 난 아마 다음 해 제대하고 사 읽은 거 같다. 몇 년 후 황지우는 신문 인터뷰를 통해 인기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를 이해하는 사람은 극도로 적을 것이라는 취지로 말한 적이 있다. 즉 독자들은 제대로는커녕 대충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쓴 시를 읽고 좋다고 한다는 뜻이었다. 그게 아마 민음사에서 《겨울 나무부터 봄 나무에로》를 낸 다음이었을 거다. 황지우를 읽고 배우고 닮기 위해 애를 쓴 것처럼 보이는 김언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간다. 평론가 신형철이 쓴 시집의 해설을 읽어보면 첫머리에 김언은 자신의 앞선 시집 《거인》에 실린 <시집>에서 이미 “한 명의 과학자를 움직일 것. / 백 명의 민중을 포기할 것. / 그 이상도 가능할 것. / 다른 문장일 것.”이라 노래했다고 썼다. 즉 백 명 이 훨씬 넘는 자신의 시를 읽는 독자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시인이 쓴 시를 원심분리기에 넣고 돌려가며 해석하고 분석할 수 있는 소수의 전문교육을 받은 자들과 향유할, 여태까지 쓴 적이 없는 문장을 탐구할 것을 시인으로의 기치로 삼은 거다.
  그러니 내가 김언의 시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남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다. 시인 자신이, 자기가 시를 쓰는 행위는 애초부터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한 바 있는 탁월한 자, 탁월한 소수의 쾌락을 위한 것임을 천명하였으니. 예를 들어 이런 시.

 


  이중근 j

 


  j와 k는 천박한 방정식을 푼다
  그와 그는 동명이인이지만
  하나의 근을 가진다
  사이에 f가 들어간다 미스터리한 사건일수록
  해도 없고 부작용도 없다 과학자의
  책임이 크다
  소설가는 이름 때문에 고민한다
  하나의 근이 없다면 여러 개의 용의자가
  수사 선상에 올라왔다 견해 때문에
  j와 k는 모였다 이견이 없는 한
  우리는 흩어지고 있다
  단 하나의 이름이 물망에 올랐다
  j는 그 영화를 두 번 봤다
  그는 그를 반박한다
  동시에,  (전문)

 


  이중근. 사람 이름인 줄 알았다가 시 본문을 읽어보니 2차 이상 고차 방정식에서 근이 겹치는 중근重根을 말한다. 제일 쉬운 2차 방정식을 떠올리면서 잠깐 중딩 시절로 가볼까? 근의 공식은 다 잊어버리셨을 테고, f(x) = ax2+bx+c에서, 판별식 b2–4ac=0 일 때 근이 하나, 즉 이중근이 된다. 근데 시에서 이중근을 설명하려니까, 굳이 j와 k를 따왔다. j와 k가 다르지만 사실은 하나, 즉 같은 것. 이들 사이에 f가 빠졌으니까, 빠진 걸 다시 넣으면 jfk, ‘존 F. 케네디’의 미스터리 사건으로 넘어가고, 그래서 용의자, 수사 선상 등으로, 심지어 두 번 볼만한 영화로도 확장시킨다. 시인은 이런 걸 소설 쓰기로 말하는 거 같다. 아무리 전희를, 아니, 전위를 목표로 삼는 시인이라도 가끔은 이 시처럼 평민도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쓰기도 한다. 이이가 이 시집에서 주목하고 있는 다른 하나는 말, 즉 인간의 입 안에서 구강과 혀를 통해 만들어져 밖으로 표출하는 의미다. 말은 같은 말이더라도 시인의 말은 최초에 있었던 말씀과 유사하다. 말 그대로 창조자의 말이니까.

 


  자연

 

  그건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털커덩 톱니바퀴가 내려놓는 소리였는지 모른다. 그다음에 부는 바람이 정확히 어느 방향이었는지 당신은 모른다. 어떤 형태도 말을 가지지 못할 때 우리는 인간의 입을 빌려서 짐승을 말한다. 자연이 말한다. 비가 말하고 바람이 울고 새는 도착한다. 그들의 어깨가 몹시 피로하다고 말한다. 자유 때문에?  (1연. 하략)

 

  자연의 모든 것이 인간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을 매개로 인식된다는 뜻이겠지. 물론 1연만 읽는다면. 시인의 말은 태초의 말씀과 같을지니 같은 인간들은 어떻게 될까. 시인 또는 시인이 전위적 문장을 통해 되고 싶어 하는 소설가는. 그건 처음 등장하는 시로 설명할 수 있다.

 


  감옥

 


  내가 덥다고 말하자 그는 문을 열었다.
  내가 춥다고 말하자 그는 문을 꼭꼭 닫았다.
  내가 감옥이라고 말하자 그는 꼼짝 말고 서 있었다.

 

  2 더하기 2는 네 명이었다. 남아도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내가 유죄라고 말하자 그는 포승줄에 묶였고
  내가 해방이라고 말하자 그는 머리띠를 묶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꼼짝 말고 서 있었다. 버스 안에서

 

  이젠 그만 내릴 때라고 말하자 그는 두 발을 땅에서 떼었다.
  내가 명령이라고 말하자 그는 망령처럼 일어서서 나갔다. 누군가의 입에서.  (전문)

 


  그는 누구? 혹은 뭐? 답은 마지막 문장.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말. 시집의 제목이 《소설을 쓰자》임을, 시집을 읽는 내내 기억해야 한다. 물론 오독이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나’는 시인이 되고자 하는 소설가. 그래 소설가가 말로 덥다고 하면 문을 열어주고, 춥다면 꼭꼭 닫아주고 별의별 짓을 다 해주는 그는 누군가? 누군가의 입? 당연히 현재는 시인, 나중엔 소설가가 될지도 모르는 시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 존재로의 말. 즉 작품 아니겠느냐, 하는, 분명히 틀리고 말 나의 독법이다. 기억하라. 시인은 창조주다.
  백 명, 그 이상의 민중을 희생시키고자 하는 시인이여, 다른 민중들은 모르겠고 내가 미쳤냐, 내 돈 내고 스스로, 눈 하나 까닥하지 않고 희생시켜 버려도 되는, 시인이면 무시해버려도 좋을, 적어도 무시해도 좋다고 여길 만한 민중이고자 하게. 그러느니 이젠 당신의 시를 읽지 않는 방법을 택하리라. 시 좀 읽어볼까 하는 무지렁이 민중들을 부디 원망하지 말라. 민중 없이 잘 먹고 잘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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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5-26 09: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에게 시를 읽는 기쁨은 공감때문인데 이 시들은 공감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멀리 있네요. 그렇다고 뭔가 내가 모르는 새로운 세상이나 시각을 보여주는것도 아닌거 같고.....
요즘 Falstaff 님의 시 이야기들을 읽는거 참 좋습니다. ^^

Falstaff 2021-05-26 09:42   좋아요 3 | URL
요즘 시집들이 대개 우울하고 아프고 그렇더라고요.
이해는 그만두고 읽기 부터 힘들어서 시집 몇 권 사 놓고 참 고생하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오독을 했을 텐데, 저는 늘 주장하기를, 제가 쓰는 건 서평이 아니라 독후감, 즉 독자가 ˝책을 읽고 느낀 점˝을 쓰는 인간이라 오독이건 아니건 하여튼 느낀대로 써제끼고 있습니다.
ㅋㅋㅋㅋ 그러니 절대 제가 하는 말을 믿으시면 안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바람돌이 님처럼 즐겁게 읽어주시면 기분이 대빵 좋습니다. ㅋㅋㅋ

잠자냥 2021-05-26 10: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리 전희를, 아니, 전위를 목표로 삼는 시인‘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그래놓고 소설 쓰고 싶다고 제목을 에라이 이놈앜ㅋㅋㅋㅋㅋㅋ 민중 없이 잘 먹고 잘 살아라.ㅋㅋㅋㅋㅋㅋㅋ 아오 이런 시 전 싫어요. 김언 시인은 민중 없이 잘 먹고 살아야겠어요.

Falstaff 2021-05-26 10:23   좋아요 4 | URL
그래도 이이를 좋아하는 애독자가 무척 많아요.
저도 독후감 쓰면서 젊어서 쓴 시 하나 때문에 너무 심하게 말한 건 아닌지 하다가, 에잇, 자기가 쓴 건 책임도 져야지, 하는 심정으로 수정하지 않은 건데요. ㅋㅋㅋ
근데 기분은 정말 좋지 않더라고요.
제가 가장 이해 못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욕쟁이 할머니 밥집에 가서 돈 주고 밥 먹다가 욕 들어먹는 인간들입니다. ㅋㅋㅋㅋㅋ

청아 2021-05-26 10:1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공대생 티를 내는 걸까요? <‘시‘읽어주는 남자>나 <팔스타프와 ‘시‘ 읽기>이런 책 내시면 베스트셀러도 무리 없으실듯 합니다ㅋㅋㅋㅋ물론 김언같은 시인들이 마구까기도 견뎌주면요.^^* 음..대중과 가까워질테니 싫어할지도 모르겠어요.ㅋㅋ황지우 시인의 목이 쉰 새가 더 좋네요!

Falstaff 2021-05-26 10:28   좋아요 4 | URL
아이고, 안 됩니다.
독후감 올렸을 뿐인데, 저/역자, 출판사 관계자들한테 항의 받은 일도 많은데 그걸 모아 책을 냈다가는 당장 형사범 됩니다.
감방 가서 읽어버린 시간들 재독할 생각 없어요. ㅋㅋㅋㅋㅋ
(하루키의 1Q84에서 징용 조선인의 아들인 인간병기 보디가드가 여주 아오마메한테 잃어버린...은 감방 가서 읽기에나 좋은 책이라 하더군요. ㅋㅋㅋ)

잠자냥 2021-05-26 10:39   좋아요 4 | URL
폴스타프 님이 그런 책을 내신다면 책 제목은 제가 지어드리겠습니다.
<주정뱅이 오늘도 홀로 시(詩)잔을 기울이다> 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