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차를 모는 기수들 1 대산세계문학총서 165
패트릭 화이트 지음, 송기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나라에 번역 출판한 작품이 있는 사람이지만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아 낯선 작가였다. 오스트레일리아가 유일하게 배출한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고 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대농장주 화이트 부부가 유럽 여행을 하다가 1912년의 런던에 도착해 낳은 아들이 패트릭이었다. 십 대 시절에 영국 학교에 다니며 적응을 하지 못해 오스트레일리아 농장에 왔다가 스무 살에 다시 케임브리지의 킹스 칼리지에 입학해 언어를 전공한다. 대지주의 아들답게 집안의 후원에 힘입어 아버지가 다달이 송금해주는 돈으로 예술가 가문의 유명인들과 친교를 다지며 작가의 기틀을 다져가는 동시에 이미 십 대 시절에 싹이 보였던 동성애 기질을 이어간다. 특히 화가 루아 드 메스트르와 돈독하게 지내 조금의 구설에 오르긴 했어도 드 메스트르와는 연인 사이가 아니었단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공군으로 참전을 했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인 장교 메놀리 라스카리스를 만나 평생의 동반자가 되어 오스트레일리아에 정착한다.
  이이의 작품은 유머, 화려한 문체, 서술의 전환, 의식의 흐름 등을 특징으로 한다는데, <전차를 모는 기수들>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듯하다. <전차를....>에서 유머나 화려한 문체 같은 건 거의 눈에 띄지 않으며, 현대 소설에서는 서술의 전환이나 의식의 흐름이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작품도 거의 없는 편이니까.

 

  책에는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윈야드의 와인 중개상을 해서 막대한 부를 쌓은 노老 헤어 씨의 재산을 물려받은 과시 소비형 인간 노버트 헤어 씨. 이이의 무남독녀 따님 헤어 양.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지적을 받는 자그마하고 못생긴 외모이지만 사람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도 같다. 아일랜드로 추정할 수 있는 유럽의 영어사용 지역에서 보편적 서민으로 살다가 아버지가 재혼하는 바람에 독립해 오스트레일리아 배에 오른 신체 건강한 여성 고드볼드 부인. 착실한 하녀 출신으로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당시 여주인이었던 노파에게 성녀로까지 기억이 될 만한 심성을 지녔으나 운명이 늘 그렇듯이 불성실하고 가정폭력을 서슴지 않는 악당과 혼인하여 딸만 여섯을 낳아 키우면서도 주위의 힘들고 불쌍하고 아픈 이웃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아끼지 않는 여성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을 일컫는 애버리지니 출신의 ‘검둥이’로 개화를 위해 성공회 신부 남매의 집에 입양되었으나 동성애 성향 신부와의 관계가 발각이 나 도망쳐버린 청년 앨프 더보. 그림에 특별한 자질이 있어서 작품의 제목과 같이 불의 전차를 모는 네 명을 그려내는 결핵성 출혈 환자.
  그리고 가장 중요한 주인공 모르데카이 히멜파르프. 1880년대 독일 태생의 유대인이지만 아버지는 사업을 위해 배교를 하고 가톨릭에 귀의한다. 이이는 사업 대신에 공부하는 쪽을 택하여 1910년대 초반에 영어 박사학위를 받고 옥스퍼드로 유학해 학구적인 생활을 하다가 1차 세계대전이 터져 독일로 돌아와 사병 신분으로 참전한다. 전쟁 중에 아버지가 재혼해 고향을 떠나 작은 도시인 비넨슈타트의 대학 부교수로 임용한 그는 그곳에서 통통하고 꽤나 촌스러운 소녀 레하를 만나 결혼에 이르러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유한다. 이후 독자 누구나가 다 짐작할 유대인들의 정해진 코스를 따라 레나가 먼저 잡혀가고, 히멜파르프는 도피 끝에 결국 자수를 해 수용소로 가게 되는데, 가스실 바로 앞에서 극적으로 죽음을 면한다. 대신 수많은 벌거벗은 시신들을 목격하고, 그들을 땅에 묻어야 했으니 히멜파르프가 남은 생애 동안 외상 후 스트레스를 겪어야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이이는 전쟁이 막바지를 향해 갈 때 레지스탕스와 수용소 내 유대인 노동자들이 연합해 벌인 작전으로 탈출에 성공해 이스탄불과 팔레스타인을 거쳐 최종 목적지인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해 교수직을 버리고 일용 노동자의 삶을 살면서 동포들의 죽음을 수수방관했다는 죄의식 속에서 지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사는 시간과 장소가 1958년 이전의 오스트레일리아라는 것. 당시 세상 어디가 그렇지 않은 곳이 있었을까만, 오스트레일리아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더불어 가장 차별이 심한 곳이었다. 원주민 애버리지니는 아직 진화가 덜 된 미개인으로 치부하여 이들을 보다 사람과 가까운 인류로 만들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와 교회는 어린 원주민 자녀들을 강제로 빼앗아 백인 가정에 입양해 사람 꼴을 그나마 갖추게 하는 캠페인을 1900년부터 무려 70여 년 동안이나 벌였다. 그러니까 1970년대에도 원주민의 아이들을 폭력으로 빼앗아 왔다는 말이다.
  이런 차별은 원주민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계 흑인은 물론이고 아시아 유색인종까지를 망라해 악명높은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백호주의의 시작은 골드러시 시절에 중국인과 인도인의 대량 유입에 위협을 받은 백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차츰 모든 외국인에 대한 반대로 번져 백인 유럽인 말고는 인간 취급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 ‘더러운’ 유대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쨌든 피부색이 비슷한 유대인들은 적응력이 유별나게 뛰어나 책에서도 나오듯 ‘하임 로젠바움’이 영국식 이름 ‘해리 로즈트리’로 개명을 하고, 가톨릭이나 성공회로 개종도 하고, 자신들이 결코 유대인이 아니라고 확신에 차서 거짓 맹세를 한 다음에 사업을 하는 경우엔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도 뻔히 알면서 모른 척해줄 수 있었다.
  조금 뒤집어 생각해보자. 돈 많은 유대인이 개명만 하면 알면서 모른 척했다, 이건 선조가 잉글랜드에서 살인, 방화, 신성모독 등의 죄를 짓고 유배를 온 순혈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회 밑바닥 신분으로 떨어졌거나, 자신 혹은 (여성의 경우엔)남편의 행실이 개차반이라거나, 빈곤의 수렁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지 않거나, 천한 직업을 가지고 있거나, 아무리 부자라도 신체와 정신이 건강해 보이지 않는, 이런 것들을 다 합해서, 약자 또는 실패자라고 여길만한 타당한 근거가 있다면, 이들 역시 다른 어느 사회에서보다 냉혹한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는 뜻이다.

 

  이런 땅 위에 우리의 주인공 네 명. 화려한 대 저택과 장원의 지주이지만 못생기고 왜소하고, 늘 덤불 속이나 고목 사이에 숨은 듯 앉아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늙은 헤어 양. 나는 헤어 양의 에피소드가 집중된 1부를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노 헤어와 아버지 노버트 헤어 씨. 그의 과시욕에 의하여 지어진 저택 제너두. 세계 일주 도중에 들르게 된 어머니 쪽 친척 유스터스 씨와 그를 위한 무도회, 이를 지켜보는 어린 헤어 양. 세월이 흘러 은둔생활을 하는 늙은 헤어 양에게 저 멀리 저지섬에서 헤어 양에게 가정부를 두고 살라고 용돈을 보내주기 시작한 더 늙은 유스터스 씨. 그리하여 다 쓰러져가는 저택에 입주하게 된 졸리 부인.
  헤어 양이 졸리 부인의 선한 의지에 기대 점차 사회에 적응해나가는 의지의 호주인 시리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졸리 부인이 등장할 때부터 헤어 양과 있을 수 있는 오해와 신경전 같은 것을 펼치는 것도 적절한 긴장으로 보기에 충분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래전에 헤어 양이 친절을 베풀어준 유스터스 씨가 보답으로 보내주는 현금으로 고용한 가정부이니. 그러나 천만의 말씀. 오해였다. 졸리 부인이 후에 등장하는 플랙 부인, 플랙 부인의 조카라고 주장하는 블루라는 이름의 청년을 포함한 일곱 악당과 더불어 도무지 개전의 정이 없는 악역을 맡을 줄이야.
  서양에서 여성이 하는 가장 천한 일 가운데 세탁이 있다. <목로주점>에서도 제르베즈 아줌마의 직업이 세탁부다. 조금의 이익을 위해 여성끼리도 악다구니와 주먹다짐을 주저하지 않는 천민들의 직업으로 묘사된다. 이 책에서는 그렇게 상세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존중할 직업은 아니며, 건장한 체격의 고드볼드 부인은 여기에다가, 흰 피부 곳곳이 퍼렇게 멍이 든 상태이니 시민들이 곱게 볼 이유는 없다. 원주민 앨프 더보와 더러운 유대인 모르데카이 히멜파르프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책을 읽는 일이 상쾌하지는 않다. 두 권 860여 쪽을 읽어가며 대중에 의한 약자들에 대한 비방, 비웃음, 멸시, 폭력과 결과적으로 이것들에 대항하는 또는 서로를 치유하는 형태를 띠는 약자들의 연합이 애초에 즐거울 수는 없을 것이다. 읽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엔 특정한 개인 또는 소수의 집단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것보다, 침묵하는 다중들, 일찍이 마르셀 파뇰이 <마농의 샘>에서 이야기했듯, 침묵하는 자들, 그러면서 구경할 건 다 구경하고 마음 한쪽에서는 부당하다는 것도 인식하며 고요히 침묵하는 모든 자들이 더 싫었다. 어떤 내용인지는 차마 내가 여기에 쓸 수는 없고 직접 읽어보시기 바란다.
  책에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의가 저질러질 때, 모든 침묵하는 자들은, 유죄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1-05-20 09:19   좋아요 8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1960년대나 늦어도 80년대에 읽었으면 더 감동이었을 듯하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동안 TV에서는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공습을 연일 보도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수천년 동안 핍박받았기 때문에 이제 자기들이 저지르는 어떤 폭력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 역겹다.

잠자냥 2021-05-20 09:37   좋아요 6 | URL
저 요즘 이스라엘 하는 꼴 보기 정말 역겨워서;; 홀로코스트 다룬 문학 읽을 때 예전처럼 감정이입이 잘 안되더라고요;; -_-; 썩을놈들... 에휴.

Falstaff 2021-05-20 09:46   좋아요 4 | URL
심지어 이 책은 유대인이 아닌 호주 사람이 쓴 글인데, 아직 살았다면 정말로 이스라엘을 지지했을까 싶은 생각이 자꾸 들어서, 얘기하신대로 감정이입을 무지하게 방해했답니다. 아 증말 짜증나더라고요.

coolcat329 2021-05-20 18: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읽고 호주에 갑자기 관심이 생겼는데, 이 소설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했다니 상받은 작품 좋아하는 저는 또 끌리네요 ㅎㅎ
자진해서 낚이겠습니다~

새파랑 2021-05-20 18:3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리뷰 보니 뭔가 혈압 오르는 느낌이 드네요. 폴스타프님 🌟5개에 혹하긴 하는데 ㅎㅎ

Falstaff 2021-05-20 20:17   좋아요 3 | URL
괜찮습니다! 요즘 이스라엘 하는 짓거리만 아니라면 더 실감나게 좋은 책이라고 난리를 쳤을 작품이어서 아쉬운 게 참.....

coolcat329 2021-05-20 18:3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쵸 ㅋ 피가 솟는 내용일거 같은데 별5개 노벨이가 또 ...

Falstaff 2021-05-20 20:19   좋아요 3 | URL
별 다섯 개의 이유가요, 피가 솟기 전에....
심장 부근이 뻐근해지면서 감당하기 힘든 애뜻함과 가여움, 뭐 이런 약한 형용사들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는 겁니다. 아, 이건 정말 읽어보셔야 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