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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의 회고록 ㅣ 환상문학전집 24
도리스 레싱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책 뒷면에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의 유력 신문매체인 포스트디스패치가 이 책을 평한 내용을 적어놓았다.
“레싱의 소설들 중 가장 술술 읽히는, 그러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
썅. 속았다. 이 책 읽느라고 죽을 똥을 쌌다. 레싱이 쉽게 읽히는 작가는 아니지만 여태 읽어본 레싱 가운데 가장 곤혹스러웠다. SF 소설이라 뻥을 쳤지만 절대로 과학픽션 아니다. 환상소설이라고 해도 별로 맞는 의견은 아닌 거 같다. 그럼 뭐냐고?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상상력으로 만든 은유의 골짜기. 가장 비슷한 작품을 들라면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 사라마구는 그래도 줄줄 읽히기나 하지.
그러나 만일 포스트디스패치의 의견이 맞는다면? 먼저 우리말로 번역한 책을 읽고 단언을 하면 안 되겠지만, 서부로 가는 관문 역할을 백 년 넘게 해온 거대도시 세인트루이스, 그래봤자 박물관 가보면 인디언들 유물밖에 없지만, 그 동네 대표 신문사의 의견이니 틀린 말은 아니라고 가정을 한다면, 간결하지 않은 레싱의 “영어문장”에 뭔가가 있는 거 아닐까 싶다. 만일 그렇다면 그걸 우리말로 번역한 이선주도 고생 깨나 했을 거 같아, 일단 노고에 감사의 말을 보탠다. 하지만 솔직한 심정은 우리말 문장을 읽는 일이 고통스러웠다는 거다. 당연하지, 번역서를 읽었으니. 요리가 다 끝나 마지막으로 내 앞에 정찬이라고 차려준 게 이 책이었으니까.
지금 역자 이선주 탓을 하는 거 아니다. 이건 분명히 이야기하고 넘어가야겠다.
도리스 레싱,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3년 전에 읽은 <마사 퀘스트>라서 이이의 문장이 원래 그런지는 가물가물 기억이 나지 않는데, <생존자의 회고록>의 문장은 누보로망을 읽는 거 같았다. 누보로망처럼 미분하는 듯한 세밀함은 아니지만 특정 상황이나 사물을 자신이 만족할 정도로 묘사하기 위해 한 문장 안에서 중언부언 하는 거. 이런 문장은 주로 작품의 앞쪽에 많이 배치되어 있어서 초장부터 독자에게 가랑비에 옷 젖듯이 자잘한 펀치, 잽을 날리기 시작한다. 여기에 역자의 정성이 가세해, 우리말로 쓰면 조금 어색한 수동태와 지시대명사를 반복하기 시작하면 이젠 정신이 가물가물해진다.
이 책, 겨우 278쪽. 이 정도면 하루에 뚝딱할 분량이다. 그러나 도리스 레싱이라서 처음부터 하루엔 도저히 불가능하고, 하루 반나절이면 될 줄 알았다. 천만의 말씀. 이틀 꼬박 걸렸다. 그리고 지금 독후감을 쓰려 화면을 열어놓고 보니, 한 반 정도나 읽었을까, 싶은 마음이 드는 거, 이거 어떻게 해. 뒤에 해설이라도 달렸으면, 분명하게, 나는 처음에 본문을 읽기 시작했다가 한 스무 장 넘기고 나서, 커피 한 잔 마신 다음, 겸허하게 역자 해설을 살펴보고, 본문의 첫 페이지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을 거다. 불행하게도 이 책에 역자 해설, 없다.
그래 무턱대고 읽다보니,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의 영국 땅이 무대인데, 큰 재해, 책에서는 ‘그것’으로 인해 기존의 문명 대부분이 사라져버리고 이제 혼돈의 상태로 접어든 디스토피아의 단계로 접어든 상황이다. 주인공 ‘나’는 아파트에 거주하는데 아파트의 특징은 한 셀, 네 면의 벽으로 된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는 거. 그러던 어느 날, ‘나’ 앞에서 작은 진동이 생기는 거 같더니, 이게 웬일이니, 벽이 열리고 다른 세계가 보이는 거였다. 벽이란 무엇일까? ‘나’의 강박관념? 그럴 수도 있다. 벽이 상징하는 바가 ‘나’를 배반할 준비가 되어 있던 것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지. 그리고 등장하는 중년 남자와 열두어 살의 에밀리 카트라이트. 남자는 ‘나’에게 에밀리를 맡겨놓고 다시 벽 너머로 사라져버린다.
아파트 밖은 이미 야생 비슷한 상태. 기존의 질서가 무너진 곳을 떠돌이들이 무리를 지어 모였다가 떠나버리고, 가끔은 거주자들이 떠난 빈 건물이나 빈 아파트에 둥지를 틀고 잠깐씩 산다. 나는 여기서 벽 너머와 현재 ‘나’가 거주하는 곳의 차이, 에밀리와 ‘나’ 사이에 연관성 등을 탐색 또는 추리하기 시작한다. 혹시 벽 너머는 작가 도리스 레싱의 과거, 불우했던 아프리카 시절의 덜 자란 자신이고, 화자 ‘나’는 현재의 작가는 아닐까 싶었다. 이때부터 거의 이런 시각으로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현재 중년 여인이 된 ‘나’가 과거의 ‘나’, 작중 에밀리 카트라이트를 보호하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할 테니까.
에밀리는 ‘나’에게 올 때 휴고라는 이름의 동물을 한 마리 데려온다. 어쨌거나 동물이다. 불독 만한 크기에 고양이라기보다 개처럼 생긴 몸통이지만 고양이의 노란 얼굴을 한 생물. 애완 말고 말 그대로 반려견/묘 사이의 애매한 짐승인데 저 뒤편에 가면 의인화까지 벌어진다. 그러나 기대하지 마시라. 독자는 결코 휴고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할 터이니.
이게 내가 읽은 <생존자의 회고록> 전부다. 작품의 디스토피아를 초래한 “‘그것’은 역병, 전쟁, 기후변화, 인간의 정신을 왜곡시키는 폭정, 종교의 야만일 수 있”다고 친절하게 말해준다. 그리하여 속수무책으로 인류의 문명이 사라진 이후를 묘사한 것까지는 알겠는데, 더 이상의 이 책에 대한 사색은 나로 하여금 뇌경색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말고는 없다. 그러니 더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겠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