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기사 열린책들 세계문학 264
레오 페루츠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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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 강명순에 의하면 함부르크 대학에서 현대 독일문학을 전공했던 은퇴교수 한스-하랄트 뮐러는, 레오 페루츠를 브로흐, 무질, 에른스트 바이스 같은 거장들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뮐러 교수는 자신의 대표 저작이 바로 <페루츠 전기>라는 점이 좀 거슬린다. 에른스트 바이스는 (읽어본 책이 없으니)제쳐두고, 브로흐와 무질에 대고 비벼? 자신이 전기를 쓴 인물이니 조금 과장했거나, 뮐러 교수의 독특한 기호가 페루츠하고 딱 맞아 떨어진 경우라고 보이는데, 뭐 아니면 말고.
  또 다니엘 켈만은 페루츠를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가’라고 했고, 오스트리아 작가 프리드리히 토어베르크는 ‘환상소설의 거장’이라 했다 하지만, 진짜로 <스웨덴 기사>를 읽어보면 이 책을 근거로 마술적 리얼리즘이나 환상소설을 운운할 수는 있겠으나, 대가나 거장이란 칭호까지는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라틴 아메리카의 붐 소설을 연상하게 하는 ‘마술적 리얼리즘’ 또는 ‘환상소설’이란 말 대신에 그냥 우리가 흔히 쓰는 ‘액자소설’이라고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서문과 결론 형식의 마지막 장 사이에 세 개의 장part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소설은, 서문에서 문제제기를 하고, 본문 세 장이 독립된 단위로 이를 풀어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소설을 굳이 ‘마술적’이라거나 ‘환상’이란 말을 쓰는 건, 서문에 등장하는 한 여인, 결혼 전의 성姓이 토르네펠트였던 마리아 크리스티네가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 될 여섯 살 때의, 이미 죽은 아버지와의 만남, 그리고 아버지가 9년 전과 당시에 만나게 될 어찌 보면 악마 또는 악마가 현현한 주교의 시종 정도 되는 물레방아 주인의 영혼 장면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괜히 거창하게 말하지 말자. 우리가 쉽게 빠지는 함정이, 다니엘 켈만과 프리드리히 토어베르크가 어떤 환경에서 그렇게 말하는지 밝히지 않았다는 걸 간과하는 일이다. 신문 문화면 한 페이지 전체를 장식했던 서평일 수도 있지만 책 뒤표지에 작은 글씨로 쓰인 한 마디의 추천사일 수도 있으니.
  이 책? 재미있다. 마음먹으면 휴일 하루 동안 책 다 읽고 독후감도 쓸 수 있다. 3백 쪽 분량의 장편이라 비교적 가볍게 읽을 수도 있고, 책의 스토리가 독자를 확 끌어당기는 매력도 있다. 물론 명작이나 수작이란 수식이 달리기는 힘들다. 그래 위에서 브로흐와 무질에게 비빌 정도는 아니라는 말을 했던 것. 하지만 나더러 무질을 읽을래, 페루츠를 읽을래? 묻는다면, 어차피 끝까지 읽지 못할(지도 모르는) 무질이 아니라, 하루 이틀의 즐거움을 확실하게 줄 수 있는 페루츠를 선택할 확률이 높다.
  스토리는 딱 서문만 소개한다. 소설 자체가 서문에 나오는 일종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마리아 크리스티네는 첫 남편과 사별하고 덴마크 왕국 추밀원 의원이자 훌륭한 외교관인 라인홀트 미하엘 폰 블로메와 재혼을 하는데, 18세기 중엽, 50세가 되자 옛 기억들을 모은 책 <내가 살아오면서 만난 다양한 인물들의 풍경화>를 집필했고, 이 자료는 사망 후 수십 년이 지난 19세기 초에 원고를 발견한 손자가 이를 출간한다. 책에는 18세기의 다양한 폭동사건, 이를테면 잘츠부르크 대교구에서 발생한 개신교 소작농 추방사건, 콘스탄티노플 필경사들이 일으킨 폭동 같은 것들 들어 있고, 이들 사이에 가장 인상 깊고 강력한 이야기가 있었으니, “스웨덴 기사”라는 제목을 붙인 자신이 어렸을 때 돌아간 아버지에 관한 것이었다.
  마리아 크리스티네 폰 블로메는 슐레지엔의 대단한 집안이 소유한 거대 장원에서 태어난 소위 은수저였는데, 매우 매서운 눈빛을 가졌지만 딸을 바라볼 때는 파란 하늘이 열리는 것 같았던 아버지가, 마리아가 여섯 살 때 스웨덴 왕 칼 12세의 악명 높은 군대에 들어가기 위해 러시아로 떠난다.
  칼 12세는 강력한 스웨덴을 건설하고 더 큰 왕국의 기틀을 닦고자 러시아와의 전쟁에 돌입했으나, 아뿔싸, 당시 러시아엔 불세출의 영웅이자 2미터가 넘는 신장, 건장한 남성을 품에 안고 팔로 조여 갈비뼈를 부러뜨려 죽이는 완력의 소유자, 게다가 젊은 시절에 네덜란드를 비롯한 서유럽 방면에 직접 가서 조선술 등을 배워온 실천가인 공포의 표트르 대제가 집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전 초기의 스웨덴 군은 파죽지세로 러시아 영토를 침공해 들어가고 있었고, 마리아의 아버지 토르네펠트 경은 전투에서 용맹하고 탁월한 기량을 발휘해 예타 강 서부 기병대 장교로 임관하고 이어서 아주 빠른 속도로 스몰란드 용기병 연대의 사령관으로 진급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골스크바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원동력이 되어 숱한 병사들과 장교들이 보는 앞에서 왕이 토르네펠트 사령관을 직접 포옹하고 양쪽 볼에 키스까지 해주는 영광을 누린다.
  그러나 그 해 7월, 스웨덴 군은 폴타바에서 전투 초기에 용기병을 지휘하던 토르네펠트 사령관이 총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죽고, 스웨덴 군도 표트르 대제가 이끄는 러시아 군에 쌍코피가 터져 심지어 칼 12세는 어머나 뜨거워라, 맹렬하게 도주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토르네펠트 경이 장원에서 떠나기 전날, 외동딸 마리아 크리스티네는 아버지와 함께 전장으로 떠날 하인에게 들은 주술, 흙과 소금으로 속을 채운 오자미를 아버지의 군복 안감 사이에 꿰맨다. 이것이 두 사람이 영원히 헤어지지 않기 위한 이미 검증된 방법이라면서. 몇 주 후, 밤에 누군가 마리아의 침실 창문을 누군가 두드렸고, 러시아로 떠난 아버지가 한 시간에 만팔천 킬로미터를 날 수 있는 말을 타고 와서 잠에서 깬 마리아의 얼굴을 감싸고 십오 분 가량 머물다 가버린다. 이후 가끔 찾아오긴 하지만 십오 분을 넘지 않는 시간만 이야기하고 얼굴을 감싸주고는 떠난다.
  그러다 파발마가 러시아 전장에서 도착해 아버지가 삼 주 전에 이미 죽어 매장을 했다는 기별을 가져오고, 이후 정말로 아버지는 찾아오지 않는데, 마리아는 도무지 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아버지의 유령? 영혼? 마리아의 꿈? 몽유? 그러나 생생하게 와 닿는 피부와 목소리는 틀림없이 마리아의 진짜 아버지였던 것을.
  재미있는 작품. 읽어보셔도 후회하지는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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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1-11 09: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보다 먼저 번역된 <9시에서 9시 사이> 소개 문구 중에는 카프카와 비교하는 문장이 있었습니다. ㅎㅎㅎ 너무 엄청난 거장들하고 자꾸 이름을 나란히 올리는 감이 없잖아 있는 듯하네요. 아무튼 또 다른 작품이 번역되어 나오면 계속 읽을 것 같기는 합니다. 일단 재미는 있어요.

Falstaff 2021-01-11 09:40   좋아요 2 | URL
넵? 카프카요? ㅎㅎㅎ 재미있습니다.
<9시 - 9시>도 함 봐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까지 썼다가 책 검색해보니, 이거 영, 재고해봐야겠습니다. 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01-11 09: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무섭지만 ... 내 아빠도 아닌데 머... 읽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21-01-11 10:07   좋아요 1 | URL
아하, 제가 제목을 무섭게 달아놨군요. ㅋㅋㅋ
재미있으니 금방 읽으실 겁니다.

붕붕툐툐 2021-01-12 00:3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내 아빠도 아니래..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