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 K
돈 드릴로 지음, 황가한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돈 드릴로. <화이트 노이즈>를 읽고 이런 작가를 모르고 있었다는 걸 잠깐 억울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던 작가. 평생 뉴욕에서 낳고 살면서 토머스 핀천과 더불어 미국의 포스트 모던 소설의 양대 축을 형성한다는 말을 들으며, 올해도 영국의 베팅업체에 의하여, 물론 미역국을 먹긴 했지만,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자 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었다. 이이의 작품 중에 읽어본 것이 <화이트 노이즈>, <마오 Ⅱ>, 그리고 케네디 암살범 리 오스월드를 그린 <리브라>, 이렇게 세 권인데, 어느 것 하나 빠뜨릴 수 없이 하나 같이 재미있었다. 흥미진진하고. 이번에 읽은 <제로 K>를 굳이 한 바운더리로 말하자면 <화이트 노이즈>와 가까운 곳에 두어야 할 듯. 현대인의 삶에 깊이 개입한 첨단 문명. 호모 사피엔스는 자발적으로 인공지능과 데이터화 속에 함몰되어 버리고, 심지어 지난 1960년대 말부터 이 문명 가운데 하나로, 백만장자 또는 그 근처를 향유하던 불치병 환자들의 영생을 위해 그들이 앓고 있는 불치병을 치유할 수 있는 과학 또는 의술이 발달된 시점에 해동시켜 치료하고자 대기하기 시작했다 한다. 역자 황가한이 해설에 썼듯이, 현재 이런 냉동보존 회사가 미국에 세 곳, 러시아에 한 곳이 있다고 하며, 2017년 기준으로 미국 앨코어의 냉동 보관자가 152명, 대기자가 1,151명. 전신 보관 비용이 20만 달러, 머리만 보관하면 8만 달러라고 한다. 반면에 러시아의 크리오루스에서는 전신 보관이 3만6천 달러, 머리만 보관하면 1만2천 달러로 비용 면에서 미국에 비해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고 하니, 배우이자 가수인 신신애의 노랫말처럼 참으로 “세상은 요지경 속이다.”
  머리만 보관한다고? 그렇다. 언젠가는 뇌를 포함한 머리통을 건강한 상태에서 죽은 젊은이의 몸통과 연결시킬 수 있는 이식수술에 성공할지 누가 아는가. 이 책 <제로 K>는 내놓고 처음부터 우즈베키스탄 아니면 타지키스탄의 황무지 지하에 건설해놓고, 지각변동을 제외한 세상의 웬만한 재앙들, 그러니까 지름이 여의도만한 운석이 지구와 충돌한다든지, 큰 지진이나 화산폭발이 일어나더라도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놓고 그걸 냉동 보관 시술 및 보존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딱 정해버렸다. 이 가운데 앞 문단에서 보다시피 머리만 보관하는 신청자가 있을 거 아닌가. 그럼 몸통은 처리해야 하는 폐기물이 되어, 중앙아시아의 건조한 황무지에 그냥 내다 버리면 새들의 먹이가 되거나, 모래바람에 파묻혀 바싹 말라 목 없는 미라가 되기 십상일 터. 여기에 신소재도 아니고 20세기 들어 오래 사용해온 소재, ‘리넨에 제소’ 즉 석고와 아교의 혼합물이 등장한다. 몸통에서 혈액과 장기를 제거하고, 피와 수분 대신 글리세린 및/또는 유사한 액체로 채워 부피의 손실이 없게 한 후, 몸통의 부패를 막기 위해 석고와 아교의 혼합물을 발라 근사한 포즈를 취하게 해, 시설 곳곳에 손색없는 예술품으로 만들어 놓았다. 참으로 엽기만장한 아이디어다.
  그럼 제목 ‘제로 K’가 무엇인가. 중1 수준 정도의 생 기초 물리학 가운데 ‘샤를의 법칙’이라고 있다.
  Vt = Vo + Vo * t/273
  말로 풀어 설명하면, 온도가 t일 때 기체의 부피는 o도 일 때의 부피 곱하기 (1+t/273)이란 뜻. 즉 온도를 273도까지 가열하면 ‘섭씨 영도일 때의 부피 곱하기 (1+273/273)’이니까 영도 때 부피의 두 배가 된다. 무슨 뜻인지 헷갈리는 문과 출신들을 위해 그래프를 볼까?

 

 

  546도로 더 가열을 하면 영도일 때 부피의 세 곱이 된다.
  그런데 온도라는 것이 참. 끓이면 끓일수록 올라간다. 태양의 표면 온도가 5,860K도. 섭씨로는 5,860 - 273 = 5,587도. 여기서 나오는 K가, 책의 제목 <제로 K>의 K다. 절대온도. 제로 K는 영하 273도. 유효수자를 늘이면 영하 273.15도. 이게 아래로 내릴 수 있는 온도의 최저치다. 즉 태양의 표면 온도도 은하계 어떤 행성의 온도에 비하면 그저 따끈한 정도이지만, 아래로는 영하 273도 밑으로는 내릴 수 없다. 적어도 유클리드 물리학적으로는. -273도가 되면 그 때 기체의 부피는 영도 때의 부피 곱하기 (1-273/273) = 영도 때의 부피 곱하기 ‘0’이니까 말 그대로 영(zero), 부피가 없어지게 된다. 놀랍지? 나도 이거 처음 배우고 엄청 놀랐다. 소년 폴스타프가 이과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게 된 중요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물론 결과는 비극으로 마감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확한 건 아니고 한 1950년 생 정도의 남자가 있었다. 이름을 니컬러스 새터스웨이트 Nicholas Satterswaite라고 하는 미국 남자가 살았다. 이이가 젊어서 한 여자를 숙명처럼 사랑하고 그래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는데, 정작 살면서 보니까 숙명이 아니라 악몽이었던 거였다. 물론 부부사이에 있었던 일은 당사자 둘 다에게 직접 들어봐야 알겠지만 어쨌든 정확한 사실 가운데 하나가 스카르피아를 찔러 죽인 토스카처럼 어느 날, 남편의 성姓을 따르지 않은 젊은 아내 매들린 시버트가 스테이크 나이프로 남편의 어깨를 푹, 찔렀다는 사실이다. 남편은 하다못해 파출소에도 알리지 않고, 병원에도 가지 않은 채 그저 퍼스트에이드를 꺼내 소독을 하고 붕대를 감는 것으로 처치를 하고 소염진통제를 꿀꺽 삼킨 다음, 이날도 다른 날처럼 한 침대에서 잤고 평상시처럼 아무 말도 혹은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다. 그러고는 이름을 로스 록하트로 개명을 하는 가 했더니 그길로 집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로스 록하트의 아들 제프리 록하트도 다 성장해 어느 날 외출을 했다가 가판대에서 뉴스위크 표지를 힐끗 내려다보니, 세상에나, ‘세계 3대 금융의 신’이란 제목으로 로스 록하트 특집이 실려 있던 거 아닌가 말이지. 그래 뉴스위크를 뒷주머니에 꼽고 엄마 매들린에게 전화를 하니까 엄마 대신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옆집 할머니가 전화를 받더니 방금 전에 엄마한테 뇌졸중이 닥쳐 쓰러졌으니 빨리 집에 오라고 불같이 재촉을 했다. 이후 3일 동안 엄마는 자신의 침대에 누워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옆에 앉아 손을 잡고 있는 남자가 자기가 낳은 친아들인지도 모른 채, 지팡이를 짚은 옆집 할머니가 문틀에 기대 내려다보고 아들이 엄마의 손에 이마를 댄 채 졸고 있는 가운데 운명을 하고 만다. 그냥 대충 읽으시라. 여태까지는 진짜 스토리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내용이니.
  하여튼 억만장자, 금융의 황제 로스 록하트가 그동안 독신으로 살았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겠지? 맞다. 부동산 부자 도널드 트럼프처럼 예쁘고 젊은 고고학자 아내 아티스를 만나고 이번엔 진짜 운명 같은 사랑을 해 두 번째 결혼을 한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아티스한테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다발경화증이 생겨, 남은 생이 얼마 되지 않게 되어버렸다. 로스는 그동안 냉동보존에 관심이 지대해 거액을 후원하기에 이르렀던 바, 이제 두 번째 아내이자 남자 주인공 제프리 록하트의 의붓엄마인 아티스를 냉동처리하기로 결정을 하고, 아티스 역시 의학적, 기술적, 철학적으로 동의를 했지만, 로스가 일면 끔찍한 처리 당일 시술 현장에 혼자 있을 강심장은 아니라서, 혹은 작가 드릴로가 소설을 쓰기 위해 필요한 화자를 등장시키기 위하여, 외아들이자 천문학적인 자산의 법정 상속인이 될 제프리에게 함께 자리를 지켜달라고 부탁해 승낙을 받았다.
  그리하여 지상 최대의 화려하고 안전하고, 외진 냉동처리 보관소를 방문하고, 평상에 누운 의붓어머니의 머리카락과 눈썹을 깎고, 체모는 동행이 방에서 나간 후에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은 다음, 몸에 주사액을 투여하는 것까지 직접 눈으로 본 제프리는, 이 행위가 명백한 살인일 수도 있고, 지독하게 때가 이른 조력 자살일 수도 있으며, 철학자들이 분석해야 하는 형이상학적 범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아이고 이걸 어쩌나, 두 번째 아내를 그리도 사랑하던 제프리의 유일한 아버지인 로스 록하트가 자기도 아티스를 따라 가겠다고, 그래서 영생토록 함께 머물겠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어느새 아들 제프리의 앞날, 먹고 살 모든 방법까지 이미 정해놓았다고 하기에 이르렀으니.
  말은 이렇게 하지만 여태 읽은 돈 드릴로의 작품들에 비하면 읽는 재미가 덜했다. 드릴로의 특허 비슷하게 과도하게 발달한 현대문명에 의한 인간 침습을 정면으로 다루기는 했으나 이번엔 마치 길고 긴 에세이를 읽는 듯한 느낌이 강해서였을까. 드릴로는 드릴로다. 작가의 다른 작품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말이지, 이 책이 지루하다거나 재미없다는 말은 아니다. 근데 왜 이 길지 않은 책 한 권을 읽는데 3일이나 걸렸지? 아 몰라. 말 더 시키지 마.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0-10-21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과 출신을 위해 그래프를 그리셨지만 더 헷갈립니다.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0-10-21 10:13   좋아요 0 | URL
이런 거 몰라도 세상 사는데 전혀 불편한 거 없어요. ㅋㅋㅋㅋㅋ
걍 패스 하시면 됩니다. 이런 공식 또는 그래프 보는 순간 오호, 거 신기하네, 라고 생각하면 이과, 아이고 뭔 지랄들이여, 하면 문괍니다. ㅋㅋㅋㅋㅋㅋ

mini74 2020-10-21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ㅠㅠ 중학교를 건너뛴걸까요 ㅎㅎㅎ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항상 ~

Falstaff 2020-10-21 19:04   좋아요 0 | URL
ㅎㅎㅎ 모르셔도 인생하고 전혀 관계 없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syo 2020-10-21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년 폴스타프는 어떤 소년이었을지 격심히 궁금합니다. 저는 우주 정복을 위해 이과를 골랐습니다만, 결과는 폴스타프님보다 훨씬 희극적으로 마감되었네요 ㅎㅎㅎ

Falstaff 2020-10-22 08:48   좋아요 0 | URL
ㅋㅋㅋ 그냥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좀 외로운 소년이었습니다. 딱 하나 친한 친구가 학교에서 짱, 요즘 말로 일진이라 악동들이 범접을 하진 않았습지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