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들이 참 좋았습니다. 근래 읽은 책들 가운데 마음에 든 책 열권을 꼽았습니다. 골라놓고 보니 정말 하나도 빼지 않고 참 괜찮은 책들만 골랐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편집도 두 권, 시집이 한 권 들어 있는데, 외국사람이 쓴 단편집을 이번만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없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장편의 경우엔 약간의 책 읽은 세월을 가진 분이 읽기 좋은 작품이 한두 권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아니더라도 별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다만 제가 읽기에 감동도 받고, 공감도 하고, 새롭게 느끼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역시 책 읽는 일은 읽는 본인과 작품이 어떤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는지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그리 소양이 깊지 않은 제 추천이 믿을 만하지는 않다는 말씀입니다. 어쨌든 책을 선택하시는데 약간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순서는 제가 읽은 날짜순입니다.




1. 유도라 웰티, 《유도라 웰티》, <낙천주의자의 딸>

 

  대표 단편선과 장편소설 한 편. 둘 합쳐서 한 권으로 쳐주시라. 낯설지만 좋은 작품을 쓴 미국 남부 작가 웰티의 단편소설 서른두 편과 장편소설 한 권을 말 그대로 “우연히” 읽는 행운이라니. <낙천주의자의 딸>은 아쉽게 품절이지만 기회가 닿으면 선택하시기를. 《유도라 웰티》, 완고하다는 선입견을 주는 미국 남부에서 곱게 자란 부르주아의 딸 같지 않게 작품 속에서 마치 고딕소설에서 본 듯한 신체 결손자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다른 미국의 남부 출신 작가들답게 삐딱하지 않다. 미국식 지방주의 작품 가운데 이만한 단편소설을 읽을 기회도 그리 많지 않을 듯.


 

2. 박재삼, 《박재삼 시집》

 

  가난한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평생 아련한 추억과 고독과 궁상스런 삶을 살았던 시인이 빚어내는 깔끔한 슬픔. 이런 것을 일컬어 우리는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넘치지 않는 미학, 피를 토함도 없고, 술기운에 기댄 울분도 없고, 스스로를 산산이 헤치는 자해도 없이 자신의 슬픔을 노래했던 시인.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 소리 죽은 가을 江을 처음 보겠네.” 젊음이 가질 수 있는 슬픔이라는 특권. 아, 저 먼 먼 곳에서, 잊고 살았던 당신의 슬픔이 문득 까마득한 바람소리로 당신의 허파를 지날지도 모른다. 한 시절에 시인들은 이런 시를 썼다.



3. 블라디미르 나부코프, <창백한 불꽃>

 

  더 이상 황당한 상상력도 없다. 말 그대로 인간 상상력의 끝을 보여주는 작품. 이 책을 읽다가, “이게 뭐지?” 의문을 한 번 이상 품어보지 않은 독자들 있으면 거수 바람. 겉으로는 영문학자 킨보트가 위대한 현대 미국 시인 존 셰이드가 쓴 <창백한 불꽃>을 출판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 자신이 머리말과, 존 셰이드의 시, 그리고 무려 280여 쪽에 달하는 킨보트의 주석을 달아 만든 책이다. 그런데 문제는 머리말부터 시작해 독자들이 일반적으로 지루할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주석을 읽으면서 확 깬다. 그리하여 첫 페이지로 돌아가 다시 읽어야 할까, 독자를 진퇴양난으로 몰아가는, 나부코프는 진짜 장난꾸러기.



4. 헤르만 브로흐, <현혹>

 

  한 집단이 전체주의화하는 것을 경계하는 브로흐. 우상 한 명을 만들어 우상으로 하여금 한 커뮤니티를 훌륭하게 이끌고 갈 수 있다는 착각이 땅 위를 덮을 때, 어떤 지경이 벌어지는가 하는 경고. 단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이웃에게 린치를 가할 수 있는, 과거 순수했던 사람들. 이들의 세계는 오직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만 국한되어 있다. 한 무리의 생각할 수 있는 포유류에게 헛된 꿈을 주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브로흐는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처음엔 꿈이 헛된 것인 줄 알다가 점차 꿈이 이루어질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지는 무리들. 불행하게도 그 무리를 우리는 ‘인간’이라고 부른다.



5. 막스 프리슈, <슈틸러>

 

  ‘화이트’라는 이름의 독일계 미국인 ‘나’. 미국과 멕시코에서 살다가 이제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스위스 취리히로 가는 열차 속에서 몇 년 전 스위스에서 있었던 소련 스파이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행방불명 상태에 빠진 ‘슈틸러’라는 인물로 지목받아 스위스 경찰당국에 체포되고 만다. 그런데 문제는 슈틸러라는 인물을 아는 모든 사람, 친척, 친구, 애인들이 ‘나’가 슈틸러임이 분명하다고 증언하고 나선 것. 심지어 내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 임무를 띤 국정변호사까지도. 나는 정말 나일까? 나가 한 공간에서만 나이고 다른 공간에서는 다른 이름을 가진 타인일 수도?



6.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약속>

 

  뒤렌마트의 범죄소설은 <판사와 형리>도 읽었으나 <약속>이 더 재미있었다. 왜 ‘더’라고 하는가를 이야기하면 책의 결말을 말해버려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고, 뒤렌마트, 프리슈와 더불어 20세기 중반 ‘독일어’ 문학계를 흔들었던 인물이 추리물을 썼으니, 우리가 여태 읽어왔던 일반 추리소설과는 아예 기초부터 다르다. 소녀를 대상으로 하는 연쇄살인 사건이 벌어지는데 사건이 당대의 천재로 불리고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있는 늙은 형사 마태 박사에게 배당이 된다. 근데, 소설을 시작하자마자 뒤렌마트는 마태의 현재 직업이 취리히 변방 목 좋은 주유소의 주유기 앞에 쪼그리고 앉은 모습을 스케치해버린다. 이 주유원이 왜 이 모양이 됐을까, 하는 내력을 밝히는 건데 뒤렌마트답게 제대로 뒤틀어버렸다.



7. 앤절라 카터, <써커스의 밤>

 

 고딕소설의 끝판 왕. 맨발로 서서 188cm의 키에 넉넉한 몸매. 이런 체격이면 도무지 서커스의 공중그네와는 어울리지 않을 걸? 그러나 천만에.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헬렌 페버스에게는 진짜 날개가 달려 있어 날갯짓을 훨훨 몇 번 하면 서커스 천막 꼭대기까지 한 번에 훅 솟구칠 수 있는 것. 헬렌을 캐스팅할 수만 있으면 서커스 단장은 커다란 수익을 잡을 수 있어서 헬렌이 주로 머무는 장소는 호화호텔의 스위트룸이고 가능한 한 최고의 사치를 하지만 원래는 버려진 기아 출신으로 한 창녀가 데려다 키웠다. 이 놀라운 서커스의 여왕이 영국과 대륙, 시베리아까지 누비면서 자신의 것을 하나하나 상실하게 되는데 이게 무슨 뜻인지는 읽어봐야 아실 것.



8.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사탄탱고>

 

  크러스너호르커이의 필력을 유감없이 증명하는 명작. 가을비의 첫 방울이 쏟아지는 추운 새벽, 호흐마이스 벌판을 가르며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근동에는 폐허가 된 성당밖에 없고 그나마 종탑이 무너져 종소리가 벌판을 가를 수는 없는 일. 음울한 종소리와 함께 이 망해가는 집단농장에 들려온 소식 하나. 모두가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나가 농장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는 것. 이리하여 집단농장은 다시 한 번 활기가 생기기 시작하고 일종의 착란 현상이 벌어진다. 이것은 누가 읽어도 카프카를 한 단계 확장한 작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강력 추천.



9. 유디트 헤르만, 《단지 유령일 뿐》

 

  유디트 헤르만, 단번에 이 여자를 사랑하게 만든 소설집. 일곱 편의 단편소설을 실은 단편집. 무대는 독일의 뷔르츠부르크를 포함해 세계 각국. 이를테면 아이슬란드의 여름별장, 베네치아, 체코의 온천도시 카를로비바리와 몰다우가 내려다보이는 프라하, 미국 네바다의 사막, 노르웨이의 트롬쇠를 망라하는데, 각 지역의 자연풍광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현지인과 독일인, 또는 그곳에 간 독일 사람들 사이의 의식의 흐름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완전 내 스타일. 세상 어디에 있어도 사람들 사이에는 이해와 오해, 관심과 무관심, 신경전 같은 미묘한 의식의 떨림이 있게 마련. 이런 투명한 거미줄을 포착하는 작가의 예리한 눈매를,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10. 알레산드로 바리코, <이런 이야기>

 

  사람의 꿈에 관한 이야기. 자기만의 ‘길’ 즉, 차가 다니는 도로를 만들겠다는 꿈을 꾼 한 사람의 일생을 그린 책. 일찍이 허약한 체질과 체격을 가지고 태어나 어려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못 생긴 남자 울티모. 그러나 ‘금빛 그늘’을 지녀 어디서든지 돋보이고 다중 속에서도 누구나 쉽게 찾아낼 수 있는 분위기를 가진 사내. 20세기 초에 울티모는 자신의 아버지가 열광했던 차를 타보고, 관찰해본 바, 차와 차 비슷한 유동물체를 근본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길, 도로에 관심을 두면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기 위한 인생으로 접어든다. 삶의 모든 굴곡을 한 도로로 만드는 질료로 사용해버린 울티모. 책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아름다운 상상에 관한 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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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03-31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약속>
.. 이거 끌리네요. 보관함 푱~

Falstaff 2020-03-31 12:30   좋아요 0 | URL
ㅎㅎ 예상치 못한 범죄 소설일 겁니다.
정의라고 언제나 이기지는 못한다더군요. ^^;;

잠자냥 2020-03-31 14:04   좋아요 0 | URL
저도 담았어요! 전자책 있으면 더 좋은데 이건 아직 없더라고요.

Falstaff 2020-03-31 14:32   좋아요 1 | URL
유령은 전자책 있던데요.
그것도 담으시지.... ^^

비로그인 2021-04-21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감사합니다. 고전만 한참 읽고 있었는데, 추천해주신 책 천천히 다 읽어볼게요. 또 좋은 책 있으면 추천해주세요. ^^

Falstaff 2021-04-21 21:33   좋아요 0 | URL
이렇게 얘기해주시니 제가 더 고맙고 ㅎㅎㅎ 조금은 당황스럽습니다.
그래도 기분이 무척 좋습니다. 즐겁게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

비로그인 2021-04-21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에요. 저 알라딘 책만 사고, 댓글 처음 다는데, 20년 전 센스네요. 보헤미안... 아 부끄럽다.. 폴스타프, 멋진 캐릭터죠. 정말 멋진.. 추천 감사드리구요. 좋은 밤 되시길! ^^

Falstaff 2021-04-21 21:48   좋아요 0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