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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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오테사 모시페그는 도대체 어떤 여자일까. 특이한 이름이고 성姓이라 위키피디아 검색을 해보았더니 크로아티아 출신 어머니와, 이란 태생의 유대인 아버지 사이에서 출생했단다. 설마 이름만 특별해서 영어로 된 위키피디아까지 검색을 해 침침한 눈을 부비면서 읽어봤을까. 이이의 첫 장편소설이라는 <아일린>을 읽으면서 내내 문장을 참 ‘감각적’으로 쓴다는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소설은 2010년대의 어느 날, 1964년에 스물네 살이었던 70대 노파가 저 먼 먼 옛날, 극동의 작은 나라의 수도 서울에서는 포장마차에서 낯선 두 남자가 우연히 만나 술잔을 기울이던 그해 겨울의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을 골라 자신이 낳고 24년 동안 자란 뉴잉글랜드의 X빌을 떠난 한 주일 동안을 회상한다.
 겨울만 되면 살벌하게 추웠던 소도시. 겨울동안 눈이 내려 일 미터 가까이 쌓이고 모든 집 앞마당에 견고하게 다져진 눈 위에 다시 또 눈이 쏟아지던 X빌. 아일린의 집에는 현관 처마에 두꺼운 고드름이 달려 있었는데 그것을 올려다볼 때마다 깨진 고드름이 자기 가슴을 뚫고 들어가거나, 총알처럼 어깨의 두꺼운 연골을 저미거나, 뇌를 조각조각 가르는 상상을 하며 살았다. 중증 알코올 중독증에 시달리는 아버지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죽을 확률이 높고, 계속 마시면 확실하게 죽을 것이란 판정을 받았으며, 이미 알코올성 치매증상이 심각한 수준에까지 이른 것을 독자는 눈치 챌 수 있다. 아일린의 유일한 동거인인 아버지는 하루에 약 1.5 리터의 진gin을 섭취하지 않아 혈중 알코올 농도가 정상인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지면 대단히 조급해지고 격하게 화를 내며 아일린이 자신의 무릎을 붙들고 잘못했노라 사정할 때까지 딸을 비난하곤 한다. 엄마가 죽음의 침상에서 지르는 비명소리를 피해 삼층 지붕 밑 다락방으로 거처를 옮긴 후 그대로 거기서 지내고 있는 아일린.
 흠집투성이 닷지 트럭을 몰고 다니지만 배기관 고장으로 창문을 올리고 십 분 이상 운전하면 당장 일산화탄소 중독증상으로 두통과 졸음을 피하지 못해 12월 말의 혹한일지라도, 방금 감은 머리카락이 아직 제대로 마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얼굴을 베 버릴 것 같은 바람을 맞으며 직장인 소년 교도소로 출퇴근을 해야 한다. 거의 청소를 하지 않는 집은 설거지 하지 않은 그릇과 술병, 먼지는 물론이고 온갖 오물과 담뱃재로 뒤덮여 있고, 처마에 두껍고 무거운 고드름이 달린 X빌의 유일한 집인 것도 모자라, 겨울이라 목욕을 거의 하지 않는 아일린은 스스로의 몸에서 풍길지도 모르는 냄새에 모든 감각이 곤두서 있으며, 심지어 닷지 트럭의 조수석 사물함에는 죽은 쥐도 한 마리 빳빳하게 얼어붙어 있다.
 직장인 소년교도소에서 아무도 아일린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지만 교도관 랜디의 잘생긴 얼굴과 두둑한 사타구니를 바라보는데 재미를 들렸고, 어느덧 자신이 랜디를 사랑하고 있다고 단정해 랜디의 집 주위에 닷지 트럭을 세워두고 불 켜진, 혹은 불 꺼진 랜디의 창문을 바라보는 일에 열중하기도 한다. 그러나 랜디 역시 적어도 책에서는 아일린에게 말 한 마디 붙이지 않고, 아일린은 직장에서 온화한 탄력의 분위기를 유지한 채 얼굴을 이완한 표정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는데, 그 모습을 아일린은 자신의 데스마스크라고 단정한다. 마치 공공도서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링컨, 베토벤, 아이작 뉴턴 경 같은 인물의 사후 얼굴을 본뜬 석고상처럼.
 이렇게 집에서, 지역사회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루저loser로 살아가는 조그만 체구에 깡마른 아일린에게는 아무것도 중요한 것이 없다. 그에게 걱정은 쓸모없고, 이유를 묻는 것은 부질없으며, 도우려는 시도는 자살행위라는 분명한 자각이 생긴 것도 자연스럽고,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곧 죽을 것이 뻔한 아버지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음울한 분위기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직장인 소년교도소에서, 지독하게 추운 X빌에서 탈출해 거대도시 뉴욕의 삶을 꿈꾸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때는 1964년. 미국이라도 스물네 살의 미혼이면 노처녀였으며, 거기다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게 여전히 숫처녀 상태를 유지하는, 아버지 말마따나 먼지 같은 여자 아일린.
 크리스마스가 든 월요일에 소년교도소에는 하버드를 나온 교육전문가 리베카 세인트존이 새로 발령받아 들어오고, 아일린은 갑자기 생리가 터져 1960년대 미국 교도소의 화장실에서 쓰던 갈색의 거친 화장지를 둘둘 말아 퇴근해 집에 돌아갈 때까지 임시대응을 한다. 그러나 누가 알았을까. 하버드를 졸업한 재원 리베카가 자신에게 접근해 난생 처음 누구로부터 ‘친구’라는 호칭을 받게 될지. 리베카가 만들어준 기회를 잡아 꿈에도 그리던 X빌에서의 탈출을 성공하게 될지.
 여기서부터 내 발언은 조심스럽다. 리베카가 등장하면서 사건은 급반전하여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닫게 되는데 그게 불만이다. 작가 오테사 모시페그의 문장이 담고 있는 감각적 섬세함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소설이 될 수 있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굳이 작품을 위에서 말한 ‘특별한 사건’에 연루시켜야 하며, 그것도 ‘극적’ 상황을 만들어야 했을까. 한 단락을 읽을 때마다 의미심장한 문장들에 감동을 하며 조용히 파동 없는, 그게 좀 섭섭하면 잔잔한 소란 속에서 작품 읽기를 마감했으면 어땠을까가 궁금하다. 충분히 감동하며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수 있는 소설을, 물론 전적으로 아마추어 독자의 의견이지만, 할리우드 영화로 만들어버리고 만 것이 참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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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9-27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 봄에 읽다만 책이네요...

아마 교도소에 리베카가 등장하는
장면까지 읽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띄우는 작가처럼 보이는
데, 일단 다 읽어봐야지 싶습니다.

첨언으로 미국 영화산업에서는 좀
갠춘하다 싶은 이야기들은 모조리
영화로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보이
네요.

Falstaff 2019-09-27 09:57   좋아요 1 | URL
ㅎㅎㅎ
마지막 갈등과 절정 부분이 마치 할리우드 영화 비슷하다는 취지였습니다.
에휴, 제가 글이 짧아서... 죄송합니다. ㅜㅜ

잠자냥 2019-09-27 10: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는 그렇게 쌓아올린 이야기들이 그 사건으로 이렇게 연결되는구나 싶어서 놀라웠는데, 폴스타프 님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어요. 암튼 아일린이라는 인물은 물론 그 척박한 환경, 심리 묘사 등은 절대 안 잊힐 것 같습니다. ㅎㅎ

Falstaff 2019-09-27 11:26   좋아요 1 | URL
책이야 뭐, 사서 읽는 독자 마음이지요. ㅋㅋㅋ
이 책은 정말 첫 장부터 시작해서 어찌 그리 섬세하고 시니컬하게, 툭툭 던지듯이 마음을 헤치는지 깜짝 놀라게 되더라고요. 문장 자체에 깊이 빠져 오히려 내용의 격렬함에 반감이 들었던 거 같습니다. ^^

coolcat329 2019-09-27 13: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마지막 절정에서 어떤 느낌이셨는지 이해갑니다. 저도 영화같은 설정에 살짝 뜬금없다 생각이 들었거든요. 워낙 아일린이란 인물이 독특하고 강렬한데, 그런 인물의 심리묘사가 너무 뛰어나 희석이 되더라구요.

Falstaff 2019-09-27 13:55   좋아요 1 | URL
ㅎㅎㅎ 비슷한 생각을 하셨다니 기쁩니다.
정말 매력적인 캘릭터입니다. 좀 과하게 지저분하긴 하지만요. ㅋㅋㅋ
근데 모시페그의 문장들이 참 매혹적이지 않나요. 깜놀이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