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대기발령 받은 적 있었습니다. 나이 먹었다고 그만 두라고 하더라고요. 싫다고 했더니 대기발령. 그때 시간이 남아 돌아 꽁트 몇 개 써봤습니다. 그 중에 하나 소개합니다. 원래 한 번 써놓으면 그걸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이라네요.

 

 

 

쌕쌕이 날다

 

 

 

 주둔하고 있는 군인과 그들을 면회 온 사람들한테 전적으로 의지하여 그나마 생계를 이어간다고 해도 그리 큰 까탈을 잡히지 않을 주정면 토하리에서 토상리로 올라가는 251번 지방도로 버스 정류장 앞. 그리 위생적으로 보이지 않는 울산상회 점주 박여사로 말하자면, 동네 하사관하고 눈이 맞아 첫 딸을 배 안에 넣고 스무살에 혼인을 한 뒤 연년생으로 2남 1녀를 슬하에 두고 한참 재미나게 살기 시작하려는 찰라, 한 겨울 동계훈련 나갔던 서방이 오발사고로 저 세상으로 가는 바람에 스물여섯 어린 나이의 청상이 되었던 것인데, 서방 세상 등진 댓가로 받은 위로금과 달마다 꼬박꼬박 국가에서 나오는 연금 모아놓은 것을 한 번에 사기 당한 다음에야 세상이란 것이 과부 혼자 살기에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 조금 손톱을 세워 그 많은 세월을 지독하게 견디며 2남1녀 모두 성가해 내보내고 환갑이 넘은 이날 이때까지 굳세게 혼자 살고 있는 터였다. 홀아비 삼년에 이가 서 말이고 과부 삼년에 은이 서 말이라는 말이 허튼 것이 아니어서 박여사를 보아하니 아직도 달마다 국가에서 나오는 연금만으로도 그까짓 구멍가게가 아니더라도 실컷 먹고 살만하겠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동네 여자들 남자들한테 쪽방 하나를 내어 심심풀이 고스톱을 쳐보라며 은근히 권하다가 자연스럽게 소위 말하는 고리를 뜯기 시작했다. 고리라고 함은, 고스톱 한 판 마다 딴 사람에게 일종의 방 사용료로 딴 돈의 일정비율을 정해 거두는 것을 말하거니와 고스톱 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결국 고리를 받는 사람만 돈을 따게 되어 있는 것은 자명하겠다.
 그것 말고도 하는 것이 하나 더 있었으니 급한 동네 사람들한테 돈을 꿔주고 월 2부에서 3부의 이자를 받는 것으로 토하리 사람치고 여사에게 돈 한 번 꾸어보지 않은 치가 없을 정도라 동네에서 알부자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황영감 너도 알지? 그 영감이 글쎄 먹고 떨어지겠다는 거야. 쭈그렁 바가지 같은 게 감히 내 돈을 떼먹으려고? 나 참 같지 않아서. 공동묘지에서 여우 해골 파먹는 소리하고 자빠졌다니깐. 내 오늘 찾아가서 아예 결단을 낼 거야, 결단을.”
 아침 댓바람부터 시집 가 아들 딸 낳고 잘 사는 딸한테 시외전화를 넣은 박여사의 목소리가 통화 내용하고 비교해 볼 때 평소처럼 그리 결기를 뿜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잠시 뿐.
 “어느 오살을 한 작자가 그래, 그래, 그래, 하필이면 그걸 훔쳐가, 가져갈 것이 따로 있지 말야. 이거 원 남사스러워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냔말야.”
 갑자기 무려 두 옥타브는 좋이 넘을 목청으로 길길이 뛰기 시작하는 박여사의 이마에 돋은 힘줄과 높은 음정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뭔가 사달이 나도 큰 사달이 난 것 같긴 했지만, 이 광경을 여사를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과연 사람이 저토록 순간적으로 감정 폭이 돌변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음직하다. 그러더니 다시 목소리가 잦아드는 거였다.
 “그저께야. 영식이 엄마 있잖아, 그게 어디서 주워 왔는지 한 열 개를 가져왔다니까. 그래. 응. 응. 아 그렇다니까. 에라, 내가 보긴 뭘 봐. 얘 봐라? 이것아 내가 그런 거 팠으면 어떻게 이날 이때까지 수절하면서 살 수 있겠냐? 철 좀 들어라. 그래, 그렇다니까, 쌕쌕이.”
 말을 요약하면 이틀 전 고스톱 치러 온 영식이 엄마가 포르노 비디오테이프를 열 개 정도 가져왔다가 두고 갔는데, 정말인지 아닌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여사의 말에 의하면, 여사가 관심이 없어 문턱 돈 통 옆에다 그냥 쌓아 둔 것이 화근으로 오늘 아침에 일어나보니 집에 도둑이 들었고, 늙은 과부 혼자 사는 구멍가게에 훔쳐갈 게 없는 건 당연한 이치로 잃어버린 것이 없는 것 또한 당연하다 하겠으나 하필이면 빈 돈 통 옆에 두었던 포르노 테이프를 몽땅 가져가 버린 거였다.
 “응. 응. 하, 참 열불이 나도 이런 열불이 있니? 그 도둑놈이 가게 앞에 지나가면서 날 힐끗 쳐다보며 그럴 거 아냐. 에이그, 늙은 과부가 오죽했으면 이런 걸 이렇게 많이 싸두고 볼까, 불쌍하다, 불쌍해.
 나 참 아주 미쳐버린다니까. 응. 응. 너도 생각 좀 해봐라. 뭐라? 이 작것아, 내가 어떻게 신고를 하니? 지서 가서 순사들한테 그러라고? 우리집에서 쌕쌕이 훔쳐갔어요.
 에라. 이걸 딸이라고 전화를 건 내가 미쳤지. 잔소리 더 하지 말고 끊어. 끊으라니깐.“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은 박여사가 일단 한숨을 한 번 푹 쉬고 나서 가게 밖을 한번 휘둘러 보았다. 혹시 아는가, 딸하고 전화하면서 제풀에 겨워 소리소리 지르며 딸한테 쏟아놓은 넋두리를 들었는지. 진짜였다. 하필이면 테이프만 훔쳐간 도둑놈이 가게 앞을 지나가거나, 하다못해 라면 한 봉지라도 사는 시늉을 하며 가게에 들어와 자신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짐작할 때보다 얼굴이 더 홧홧했던 기억은 쉰둘에 맞은 폐경기 때뿐이었다.
 황영감, 이때 딱 황영감이 떠올랐다. 내 이 영감탱이를 그냥 둘 줄 알아? 천만 만만의 말씀이야. 애기 똥구멍에 붙은 보리쌀을 떼먹지 내 돈을 떼먹으려고? 허.

 

 황영감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그로 말할 것 같으면 나이 서른에 이 토하리로 흘러 들어와 처음엔 이장집 머슴을 사는가 했더니 사람이 얼마나 착실하고 열심인지 이장이 자기 딸을 선뜻 건네줘 촌에서는 나름대로 개천에서 용이 난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 말이 과거형인 이유는, 장인이 세상 뜨자마자 건축업 사업을 합네, 하고 처갓집 논이며 밭이며를 몽땅 내다 팔아 깨끗하게 말아먹고는 성격마저 변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가 그랬는데 그동안 아닌 척을 했던 것인지는 몰라도 쉰 김치 안주로 막걸리 마시고 마누라 패는 걸 인생 최대의 낙으로 삼은 종자인데 더 이상 그 취미를 즐길 수 없게 됐으니 칠십이 넘은 마누라가 그만 덜컥 위에 암종이 생겨 도청 소재지 병원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애초부터 박여사가 황영감 같은 종자한테 돈을 빌려줄 리가 없었건만 그래도 한 동네서 낳고 자라 어렸을 적부터 언니, 언니 하며 같이 놀던 동무라 홍여사 병원비를 칭하는데야 그것이 새빨간 거짓말인줄 뻔히 알고서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였다. 제까짓 것이 병원비는 무슨 병원비. 술 주사 있는 서방한테 날이면 날마다 매타작을 당하면서도 자식 농사 하나 잘 지어 대처에서 큰 회사 높은 자리에 있다는 아들들이 병원비를 댈 것이라는 것쯤은 여사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바이었거늘.
 오늘 새벽 댓바람부터 황당하기도 하고 더할 나위 없이 창피하기도 한 국면에서 갑자기 황영감한테 초점이 과장되게 집중된 것 때문에 박여사를 탓할 수는 없으리라. 여사는 겉옷을 대충 입고 가게 미닫이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은 뒤 야물딱지게 자물쇠를 걸었다. 오른 팔 하나 만을 휘척휘척 거리면서 장군 같은 발걸음으로 황영감 집 문을 넘어선 박여사.

 

 “계슈? 계세요?”
 하지만 마당 저편에선 아무 소리가 없다. 이 집 숟가락이 몇 개인가 마저 꿰고 있는 박여사가 방문 앞까지 왔을 때 방 안에선 이상 야릇한 소리가 들리다 다시 잦아졌다. 그 때 스스르 열리는 미닫이 창호지 문. 황영감이었다.
 “왠일이슈?”
 “몰라서 물어본데? 돈 받으러 왔수.”
 “일단 들어오슈.”
 “이 영감이 미쳤나, 영감 혼자 냄새나는 방에 쳐박혀 있는데 들어오라니 어디서 배워먹은 본새야, 본새는.”
 “글세 들어와 보라니까.”
 황영감이 창호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순간, 왼쪽 바람벽에 바짝 달라붙은 텔레비전 화면엔 망측하게도 소위 쌕쌕이였다. 히쭉 입꼬리를 올리는 황영감.
 “그려, 들어와. 왜이래 나도 남자야. 그 긴 세월, 오죽하면 이런 걸 다 보고 그랬을까? 에휴 짠하기도 하지.”

 

 박여사는 순식간에 상황정리를 해내버렸다. 그러니까 밤도둑이 들어와 포르노 비디오테이프를 훔쳐간 것이 아니라 어제 밤 고스톱 판에서 개평이나 뜯어 막걸리나 마실까 하던 황영감이 가져간 거였다. 갑작스럽게 여사의 뒷목이 뻑뻑해졌다.
 “에이 드럽게 늙은 놈아, 내가 그딴 걸 보던 말던 니가 뭔 상관이야. 막말로 네가 나한테 각좆 하나를 깍아줘봤어, 뭘했어? 남이 쌕쌕이를 보던 말던 당신이 왜 참견이냐고? 마누란 오늘 낼 하는데 집구석에서 그딴 거나 보고 있는 천하의 망종이 어디서 발광이야 발광이.”
 침을 튀며 일갈하는 여사 앞에서 황영감은 바지춤에 손을 슬쩍 질러 넣으며 은근하게 말했다.
 “왜? 더 크게 떠들지 않고. 동네방네 다 알게 말야. 수절 청상과부가 이날 이때까지 저런 거 보면서 달래온 거라고.”
 여사의 말문이 탁, 하고 막혀버렸다.
 “에이 드런 영감같으니라고. 그래, 내 돈 잘 먹고 잘 살아라.”
 우리의 박여사, 찬 바람이 쌩하게 돌게끔 치마꼬리를 획 잡아돌리며 그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날 이후 황영감이 아주 가끔 지청구를 무지하게 받으면서도 천하의 박여사에게 용돈 깨나 받아 썼다는데 확인된 바는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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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3-16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드물게 올라온 주말 글이군요! ㅎㅎ 게다가 콩트! 대기발령 그 암울한(?) 현실을 웃음으로 승화하셨군요. ㅋㅋㅋㅋㅋ
한 편의 구성진 판소리를 보는 듯했습니다. ㅎㅎㅎ
그나저나 ‘주정면 토하리에서 토상리‘는 폴스타프 님이 사시는 동네 아닙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19-03-16 10:49   좋아요 1 | URL
ㅋㅋㅋ 읽기 재미 있으셨습니까. 회사 작것들이 몰랐지요, 혼자서는 더 잘 노는 사람들도 개중엔 있다는 걸요.
동네 이름이야 그냥 아무렇게나 지은 겁니다만, 내용이 너무 구태스러워서요. ㅎㅎ

쎄인트saint 2019-03-16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밋게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19-03-16 13:54   좋아요 1 | URL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붕붕툐툐 2019-03-16 2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재미있어요~ 포르노를 쌕쌕이라고 하나봐요~

Falstaff 2019-03-16 22:07   좋아요 0 | URL
ㅎㅎㅎ 20세기 군 부대 주변 마을을 배경으로 했습니다. 한때는 그걸 썍쌕이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저도 기쁩니다. ㅋㅋ

2019-03-16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17 1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