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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ㅣ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4월
평점 :
역시 필립 로스. 이런 책을 읽으면 저절로 다음과 같은 말이 떠오른다. “명불허전.”
번역서를 읽다가 순서가 로스로 오면 뭔가가 확 달라진다. 역자의 노고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글 읽기가 매우 쉬워지는 것. 쉬운 글로 매우 복잡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데 조금도 불편이 없는 거장의 솜씨다.
이이의 책을 읽은 순서대로 보면, <미국의 목가>, <휴먼 스테인>, <포트노이의 불평>, <죽어가는 짐승>에 이어 다섯 번째. 이 가운데 <나는 공산주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작품이 <미국의 목가>다. 유대 미국인과 공산주의를 언급하는 작품. 그래, 곧바로 스토리 이야기로 넘어가자.
1인칭 소설. 화자의 이름은 ‘네이선 주커먼’이며 60대 중반의 남자로 버크셔 산악지대의 호숫가 자그마한 집에서 평화롭고 외롭게, 오직 소설을 쓰며 지내는 작가. 어디서 본 듯하다. 호숫가 외딴 집에서 전립선을 제거해 비닐로 만든 오줌주머니를 허벅지에 찬 채 집필생활에만 몰두하고 있는 60대 중반. 그렇다. <미국의 목가>와 <휴먼 스테인>의 화자와 같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테나 대학’이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휴먼 스테인>에선 심지어 주인공이 그 대학 교수이기도 하다. <나는 공산주의자....>에서 화자에게 한 문제적 인간 ‘아이라 린골드’의 생애를 이야기해주는 고등학교 시절의 첫 번째 영어교사 머리 선생님이, 아흔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애리조나에서부터 먼 길을 와서 일주일간 개설하는 여름 특강을 들으러 온 곳이 바로 아테나 대학이다. 뭔가 내 머리 속에서 번쩍, 했다. 그래서 검색을 해보니 책의 제목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바로 옆에 작은 글씨로 ‘주커먼 시리즈’라고 있다. 네이선 주커먼이 화자로 등장하는 소설 시리즈가 있는 모양이다. 클릭해보니 내가 읽은 세 작품 말고 <유령 퇴장>이란 또 다른 소설이 나온다. 조만간에 그것도 읽어봐야겠다.
<미국의 목가>에서는 베트남 전쟁 시기에 공산주의자이자 반전주의자 딸을 둔 전형적인 성공한 유대 미국인 스위드 레보브 씨의 좌절을 썼으며, 이 책을 쓴 바로 다음 해에 발표한 <나는 공산주의자....>는 1940년대 말에서 한국전쟁 시기 미국의 한 유대인 공산주의자 아이라 린골드의 몰락에 대해 서술한다. 두 작품 속에서 1990년대, 60대 중반 나이의 작가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공통적으로 얘기/비판하고자 하는 건 미국의 현대사에서 벌어졌던 우스꽝스러운 사상검열이다. 급기야 아무 죄도 없는 부부를 “소련에 미국의 원자폭탄에 관한 정보를 건네기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하기로 불법으로 공모한 혐의”로 전기의자에 앉혔던 야만스런 “로젠버그 사건”도 있어서 E.L.닥터로는 이를 토대로 <다니엘 서>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로스는 여기다가 자신의 정체성인 유대인, 그러니까 인종문제까지 섞어 다소 복잡하지만 명품이라고 할 만한 작품을 생산해냈다.
화자 네이선 주커먼이 2차 세계대전 중 벌지 전투에도 참전했던 영어교사이자 평생 은사로 여기고 살 머리 린골드 선생님을 만나고, 우연히 기회가 닿아 머리 선생님의 6피트 6인치의 키에 마른 몸집을 가진 친동생 아이라 린골드와 알게 되어 그를 숭배하는 것으로, 네이선의 청소년 시대는 본격적으로 막을 올리게 된다. 6피트 6인치가 얼마만큼 큰 키일까? 계산해보자. 6 * 30.43 + 6 * 2.54 = (30.43 + 2.54) * 6 = 197.82, 즉 2미터의 키. 시절이 1940년대 말. 이 정도면 중국소설에서나 나오는 구척장신 대열에 설 만하다. 링컨을 닮은 외모를 하고 있는데다가 정말로 프록코트를 입고 실크해트를 쓴 채 직업이 라디오 성우인 그가 링컨 역할을 하고 당시에 차별주의자, 노예제도 지지자였던 스티븐 A. 더글러스와의 토론을 하거나 두 번째 대통령 취임 연설이나 게티스버그 연설을 하는 장면은 당시 뉴욕 지역에서 대단한 인기가 있었는데, 아이라는 그걸 각급 학교, 노동조합에서 무료로 공연해주고는 했다.
머리와 아이라 형제는 어려서부터 지극히 무책임하고 폭력적인 아버지 아래서 살다가 나름대로 삶의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형 머리는 자신의 길을 책과 학교와 대학에서 발견해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평생을 살았고, 문제는 아이라, 어려서부터 큰 키와 힘을 갖춘 것에다 인내심 없고 폭발적인 성격, 화를 잘 내고 무엇이든 생각나는 대로 저질러놓고 보는 천성이었는데 2차 세계대전에 참가해 이란에서 (배에서 군수물자를 하역하는)하역병으로 복무하는 동안 만난 군대 동료 오데이로부터 교육받은 공산주의를 삶의 목표로 삼았다. 오데이는 천생 공산주의자로 파업과 자본주의 미국의 종말을 이끌 혁명을 꿈꾸는 골수 볼셰비키로 1940~50년대 공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코민테른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른 강철 혁명가였다. 그런 오데이로부터 전수받은 공산주의를, 아이라 린골드는 15세에 불과한 화자 네이선에게, 꾸밀 줄 모르는 직접화법으로 혁명을 이야기하고, 미국 내 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한 진보인사들의 모임에 초대하고, 덤으로 당시 브로드웨이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는 이브 프레임의 네 번째 남편의 자격으로 이브 프레임의 집에서 벌어지는 뉴욕 상류층들의 파티에도 초대하는 반면, 당시에도 완전히 우범지역이었던 흑인 밀집지역에서 편하게 앉아 흑인들과 인종차별 철폐와 자본가들의 착취 같은 주제로 토론을 벌이는 자리에 동행함으로서, 네이선으로 하여금 자신을 제2의 아버지,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돋움을 하며 닮고자 하는 모델 또는 멘토로 숭배하게 만들어버린다. 물론 의도하지 않았겠지. 그러나 바람직한 청년이라면 앞으로 30년 후 자신이 되고 싶은 모델이 한 명 이상 있는 법. 네이선에게 그 모델은 가난한 자를 위하여 세상을 엎어버리고, 세상의 모든 차별을 철폐하는데 자신을 전력투구하는(것처럼 보이는) 아이라 린골드인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었다.
개인의 정치적 선택으로 인하여 어떠한 불이익도 받지 않는다는 헌법에도 불구하고,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공산주의자들은 미국 땅에서 할 수 있는 어떠한 일도 없었다. 모든 사업장에서 소외되었으며, 거의 모든 선량한 국민들은 색이 잔뜩 들어있는 유리창을 통해서만 그들을 바라봤으며, 감방에 갇히거나 심지어 전기의자에 앉기도 했던 거다. 그러나 아이라는 공산주의자이기엔 너무나 낭만적이랄까. 하여간 어울리지 않는 성격. 링컨과 똑 같이 큰 키와 말단비대증을 앓고 있는 아이라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갖고 있어 라디오 방송의 인기 성우로 발탁이 되고,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이브 프레임의 네 번째 남편이 되고, 그래서 최상류 계급에 휩쓸리면서 차별의 반대와 미국혁명을 부르짖었으니 그게 될 법한 일인가. 거기다가 이 유대미국인의 유대미국인 아내 이브 프레임(프레임은 동성애자였던 두 번째 남편의 성姓)은 잔뜩 흥분하기라도 하면 자기도 모르게 눈앞에 유대인만 나타났다하면, “이 더러운 유대인. 더럽고 가증스러운 유대인!”이라 침을 튀는 버릇이 있다. 반면에 우유부단해서 끊임없이 아이라를 곤경에 빠뜨리고, 아이라의 아이를 중절해버리는 박식한 멍청이이기도 하다. 아이라의 몰락은 처음부터 운명지워져 있던 것.
필립 로스가 천착했던 주제들 가운데 두 가지. ① 자칫하면 전체주의나 독재로 빠질 것 같았던 미국현대사와 ② 유대인의 정체성 문제를 아주 효과적으로 쓴 매력적인 소설이다. 로스 표 베드 씬을 기대했다가는 아무 것도 건질 것이 없어 서운할 수도 있겠지만, 묵직한 주제를 참으로 읽기 편하고 능숙하게 써내려가는 거장의 솜씨를 구경하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이 책을 위해 지갑을 열 이유는 충분히 있다.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 이래서 필립 로스, 필립 로스 하는 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