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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저주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6
제럴드 머네인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25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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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았던 머네인의 <평원>을 읽으면서 내내 루이 페르디낭 셀린느의 책 <밤 끝으로의 여행>이 머리속을 배회했었던 것처럼, 작품집 《소중한 저주》를 읽는 중에는 의식이 흐르는 쪽으로 사유를 멈추지 않았던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곤혹스러웠던 <율리시즈>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꺼내 읽는 듯한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피네간의 경야>와 더 비슷한데 끝까지 읽지 못해서 모르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제럴드 머네인을 읽겠다고 마음먹으면 먼저 《소중한 저주》를 읽은 후에 <평원>을 펼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면 작가의 작품 스타일과 어떤 방식으로 픽션을 전개하는지 작지 않은 힌트를 얻을 수 있고, 그 만큼 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단편 열두 편을 실은 작품집. 머네인은 자신의 책을 “산문 픽션집”이라 해야 만족할 듯하다. 그는 소설이라는 말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대신 ‘픽션’이라고만 했다. 기존의 소설이라는 스토리 위주의 양식을 지양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산문 예술형식을 기존에 쓰는 단어인 픽션이라고 칭한다. 그의 세계관은 그리하여 정치와 경제, 사회적 인간들 간의 유기적 움직임에 있지 않고, 자신과 주위의 자연 그리고 사색 속에서 자연스럽게 변용하는 뇌활동에 국한한다. 지리적으로 보면 실제로는 오스트레일리아(이하 “호주”)의 빅토리아 주, 멜버른 시에 속하지는 않지만 영향권에 있는 멜버른과 위성 도시,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사색의 경계인 깁슬랜드와 ‘헬베티아’라고 하는 자신의 세계.
등장인물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굳이 ‘아무렇게나 이름을 붙여도 상관없는 누구’로 지칭한다. 특히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서양인과 다르다. 새벽이 오기 전에 내 이름을 알아내면 목을 내 놓겠소. 공주 투란도트에게 이렇게 약속하고, 근사한 아리아 <아무도 잠 못 이루리>를 뽑는 테너 칼라프 왕자처럼. 나머지는 전부 그와 그녀로 표기하는데, 그와 그녀가 숱한 빈도로 등장해도 독자가 질리지 않는 이유는 “그가, 즉 주인공이” 또는 “그가, 즉 그녀의 남자친구가” 이런 식으로 보충해 설명을 해주어 독자가 도대체 ‘그’가 누구를 지칭하는 지 조금도 헛갈리지 않게 읽을 수 있으며, 심지어 우리말이지만 읽으면서 약간의 리듬감을 갖게 해주기도 한다.
작품 속에서 1인칭 화자로 등장하건, 3인칭 ‘그’로 나오건 간에 1인칭 화자와 작가 시점의 그는 전부 작가인 것이 틀림없고, 소설이라기보다 산문으로 쓴 픽션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만큼 작품 속 스토리 역시 작가가 기억하는 한에서 머네인의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가 영국에서 배를 타고 호주로 이주한 시절부터 현재까지 직접 보거나 누구한테 들었거나, 확실한 기억이라고 주장하지는 못하지만 어렴풋한 어린시절의 음각화처럼 새겨져 있는 희미한 필름에 국한한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반응을 한다거나, 어떻게 생각을 했을 거라는 표현 역시 없다. 그건 화자 또는 작가가 알 수 없는 영역의 것이니까.
정리해보면, 물리적 지리는 최대 빅토리아 주, 중간 정도로 멜버른 시를 둘러싼 몇 개의 위성도시, 작게는 책이 잔뜩 쌓여 있는 제럴드 머네인의 집 서재. 시간은 듣거나 보거나 유년 시절의 어렴풋한 기억에 의거한 할아버지 시절부터 현재까지. 사색의 공간은 자신이 만든 (아마도 빅토리아 주보다는 조금 작을) 깁슬랜드 숲과 크기를 알 수 없는 자신만의 영토인 헬베티아.
작가가 그림에는 별로 소질도 없고 관심도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특정 세부 모습 하나를 평생 가슴에 담게 되는데, B.W. 리더가 그린 <2월> 속 ‘길 옆에 물이 찬 특정한 바퀴자국의 이미지’이다. 부언을 하면 비가 오고 얼마 되지 않은 시골길에 마차가 지나가 땅이 팬 바퀴자국에 물이 고인 장면이다. 실제로 바퀴자국에 다가가 내려다보면 고인 물에 비친 맑은 하늘도, 우연히 동네 여자 아이와 함께 있었다면 아이의 콧잔등에 조밀하게 박인 깨소금 같은 주근깨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작가가 주인공으로 삼은 그의 가슴에 평생 남아 있었다. 이 바퀴자국은 그를 따라다니며 어떨 때는 치마와 양말, 신발을 가방에 넣은 채 어둑한 길을 따라 맨발로 댄스파티에 가는 소녀의 발에 밟혀 생각지도 못한 거머리가 소녀의 발등에 달라붙기도 한다. 주인공인 그는 B.W.리더의 그림을 감명 깊게 보았지만 미술평론 잡지에서는 “칭찬할 만한 요소가 거의 없는 풍경화”라고 혹평을 해 놓았던 것을 기억한다. 세월이 흘러 50대 초반이 된 주인공인 그는 <그 깁슬랜드 숲에서>라는 그림을 보게 되고, 이 그림에 나오는 길이 바퀴자국의 이미지와 연결이 되는데, 길과 바퀴자국과 깁슬랜드라는 지명이 또 40여 년 전 보고 여태 보지 못했던 특정 이미지와 연결이 된다.
일곱 살 때 누군가 소박한 외국우표 수집 앨범을 물려준 적이 있다. 많지는 않지만 세계각국에서 만든 우표가 망라되어 주인공인 그를 우표를 만든 나라가 어디 있는지 지도책을 찾게 만들었는데, 이 나라들 가운데 헬베티아Helvetia라는 나라 이름이 있었다. 각주를 보면 “로마 제국에 정복되기 전 현 스위스 지역…(중략)…스위스 연방국을 의인화한 여성의 이름이기도 하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아직 어린 주인공인 그는 헬베티아가 어느 나라를 말하는지, 이미 망해버린 나라인지, 아니면 “높은 깃이 달린 옷을 입고 풍성하고 색이 짙은 머리칼을 가지고 표정에 슬픔이 살짝 깃들어 있는 남자”가 사는 숨겨진 나라인지 알 도리가 없다. 그리하여 헬베티아는 점점, 40년이 지나도록 (물론 나중에 헬베티아가 스위스 연방의 다른 이름인 줄 알게 되어도) 자신이 속한 자신만의 나라로 기능한다.
중∙단편이 열두 편 실렸다고 했는데, 사실 작품을 중∙단편으로 구분하는 것도 머네인이 바라는 건 아닐 것이다. 그저 산문 픽션 열두 편. 이렇게 써야 마땅할 듯. 열두 편 모두 독립적이지만 서로 연동되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모두 ‘픽션’이니까 어떤 픽션에서는 슬하에 1남1녀, 어떤 픽션에서는 슬하에 2남을 두기도 한다. 그러나 영국에서 호주로 이민 온 가족. 처음엔 농지로 개간한다는 조건으로 평야에 넓은 땅을 불하 받고 대출도 얻어 집도 지었지만 가혹한 호주의 자연에 굴복하여 개간을 포기하고 빅토리아 주 변두리의 작은 도시로 옮겼다가 세대가 바뀌면서 맬버른의 동서남북 위성도시로 또다시 옮겨 사는 가족의 일원인 것은 공통점이다. 주인공인 그는 모든 작품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시간만 나면 책을 읽었는데 집에 책을 읽는 사람이 없어서 늘 몇 권의 책을 헤지도록 읽고 또 읽었다는 것.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진학시험에도 합격했으나 진학 대신 취업을 선택해 책을 사서 읽기 시작하고, 초등학교 교사도 하고, 글도 쓰고, 결혼도 하고, 대학 과정을 밟고, 단과대학에서 픽션창작을 십수년 강의하다 전업작가의 길을 선택해 집안살림을 도맡아 하고 등등 제럴드 머네인의 개인사와 별로 다르지 않은 환경을 유지한다. 그러니 그의 픽션은 모두 자신의 서재에서 오로지 기억과 상상에 의존해 펼친 의식의 확장 과정이라고 단언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말한다. “자신이 글을 쓸 수 있는 유일한 주제는 자신의 마음이며, 그의 글이 출판으로 적합하다고 판단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헬타비아인 방식으로만 쓸 수 있다는 걸 인식하게 되었다.”고.(p.362~3) 다만, 내가 기껏해봐야 딜레탕트라는 점만 잊지 마시라.
이 책의 테마는 몇 가지로 축약할 수 있다. 축약하기는 하지만 자체로는 한 인간이 평생 추구한 거대한 사고. 그건 가족사와 책, 그리고 호주의 자연으로의 평야와 산. 가족사는 빼자. 가족사 없는 사람은 있기는 있지만 거의 없으니. 그럼 책, 책으로 대표하는 소위 문학과 주인공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이 개간하려고 했으나 결국 포기하고 만 호주의 평야. 이 거칠고 광활한 평야는 주인공인 그 또는 주인공인 제럴드 머네인이 평생을 건 문학과 다르지 않다. 독자는 이 점을 오래지 않아 알게 된다. 책 또는 글쓰기와 읽기에 대한 사색. 자연과 평야에 대한 태생적 숙고. 이것들이 서로 연결이 되어, 틀림없이 책이 가득한 서재 책상에 앉아 손에 턱을 괴고 생각에 빠진 상태에서 서로 흘렀을 것이라서, 독자는,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하여간 나는 고생스럽게 읽었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한번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딱 그 책을 다시 편 듯한 느낌. 그러나 놀랍기도 하지. 그새 세월이 흘렀나 보다. 제럴드 머네인이 결코 프루스트보다 읽기 쉽지 않건만 이제는 진도가 나간다. 적어도 읽히는데, 그것도 흥미롭게 읽힌다. 다만 읽는 속도가 문제. 그러나 이제 남아도는 것이 돈하고 시간밖에 없는 시절이라 그까짓 것, 천천히 읽어 여유로워 오히려 좋다. 하루 일곱 시간 읽어서 겨우 백 쪽을 넘기는 찬찬한 독서. 나도 머네인의 사색을 따라 급하지 않게 몇 십 년을 훌쩍 넘어다니며 순한 시간 여행도 하고, 시간 속 작은 장치들이 서로 졸졸 흘러가는 것을 내려다보는 것이 이렇게 즐거워질 지 몰랐다. 이게 다 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드디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읽을 때가 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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