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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슈베이크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김기선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4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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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고른 건 딱 하나. 야로슬라프 하셰크의 미완성 블랙 코미디 <훌륭한 병사 슈베이크>를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이었다. 브레히트의 슈베이크 역시 하셰크의 슈베이크를 무대만 바꾼 작품이다. 하셰크는 1차세계대전 당시 프라하에서 개장사를 하며 부족하지 않게 생계를 이어가던 파렴치, 우리말로 하면 뻔뻔한, 그리고 귀여운 악당 슈베이크를 등장시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전쟁을 가차 없이 희화해버렸다. 말이 “훌륭한 병사”이지 멀쩡한 다리에 깁스를 하고 휠체어에 탄 채 징병검사장에 갔지만 결국 최전선에 배치된 슈베이크는 단 한 발의 총도 쏘지 않는다. 이때 벌써 마흔이 넘은 나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면 브레히트의 슈베이크는 못해도 일흔 살 정도의 노인 아닐까, 이렇게 궁리하며 책을 열었다. 오, 슈베이크는 나이도 먹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막간극에서 원래보다 과장된 몸집으로 등장하는 히틀러가 득세를 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폭망을 하건만 슈베이크는 여전히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모습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장면마다 장면마다 하셰크가 그린 슈베이크와 브레히트의 슈베이크를 비교하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하셰크의 슈베이크는 전쟁에 관한 블랙 코미디 모델로 서양 문학에서 종종 인용하고 있을 정도의 유명세를 누리고 있으니 뭐 이상한 건 아닐 터이지.
막이 열리면 본막 이전 서막. 빵빵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히틀러, 비행부 장관이자 국가 원수 괴링, 계몽선전부 장관 괴벨스, 친위대장 힘러.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체코 등 독일이 강점한 나라의 국민이 자신을 사랑해주기 바라마지 않는다. 아랫것들은 당연히 총통을 하느님처럼 숭배한다고 아부한다. 서막은 이렇게 시대를 잠깐 보여주는 형식.
이어서 본막.
무대는 술집 ‘술잔.’ 술집 옥호 한 번 끝내준다. 술잔. 하셰크의 <…슈베이크>에서도 첫 무대가 술집이다. 공통점은 술집에 스파이 한 명이 앉아 있는 것. 하셰크의 경우엔 체코 국민인 경찰 프락치가 꼬투리를 잡을 것이 없자 요제프 황제 초상화에 파리가 똥을 싸 까만 점이 촘촘하게 박힌 것을 까탈 삼아 술집 주인을 불경죄, 슈베이크를 반역죄로 몰아 체포한다.
브레히트 판에서는 독일 친위대원이 술집 ‘술잔’에 앉아 있다. 술집 주인은 코페카라는 이름의 여성. 과부로 보인다. 청년 프로하스카가 짝사랑하고 있다. 후에 청년과 결혼에 성공 잘 먹고 잘 산다. 슈베이크와 친구 발룬이 술을 마시고 있다. 발룬. 풍선? 뭐 비슷하게 뚱뚱하다. 먹을 걸 얼마나 밝히는지 앉으나 서나 고기 타령이다. 친위대원하고 말을 트자마자 독일군은 잘 먹는다면서요? 묻고 독일군이 먹는, 그러니까 나치의 급식 수준으로 체코군에게도 보급을 해준다면 자기도 지원할 수 있을 거라 말했다가 취소할 정도. 극이 코미디라는 걸 한시도 잊지 마시라. 술이 거나해지니 친위대원이 발룬을 껴안으며 의용군 모집소로 데려가려 한다. 이를 본 술집주인 코페카. 노래 한 곡을 불러 의용군의 불을 끈다. 좀 길다. 가사 전부를 소개할 수 없어 요점만 써보자.
나치 병사의 아낙네는 옛 수도 프라하에서 무슨 선물을 받았나?
프라하에서 뾰족구두를 받았네. 잘 있다는 편지와 함께 뾰족구두를 프라하에서 보내왔네.
(이하 축약)
바르샤바에서 리넨 블라우스를 받았네. 이국적인 블라우스를 바익셀 강가에서 보내왔네.
오슬로에서 모피 깃을 받았네. 그녀 마음에 들기를 바라며 해협 건너 오슬로에서 보내왔네.
로테르담에서 모자를 받았네. 그녀에게 잘 어울려! 네덜란드산을 로테르담에서 보내왔지.
브뤼셀에서는 진귀한 레이스를 받았네. 아 그런 걸 받다니! 벨기에에서 보내왔지.
파리에서는 실크 드레스를 받았네. 이웃이 샘내는 실크 드레스를 파리에서 보내왔네.
트리폴리스에서 목걸이를 받았네. 부적이 달린 목걸이를 트리폴리스에서 보내왔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과부가 쓰는 베일을 보내왔네. 장례식에 쓸 미망인의 베일을 러시아에서 보내왔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패전을 은유 또는 희망하는 노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잔의 주인 코페카는 끌려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친위대원이 이미 술이 취해 떡이 되었기 때문에.
이 희곡은 실제로 공연을 한 것으로, 브레히트의 많은 희곡은 이런 노래 장면이 있고, 노래의 대부분을 크루트 바일이 작곡을 했는데, 이 작품에서도 음악은 바일Weil이 맡았다고 한다. 공연은 잘 하지 않는 거 같다. 나도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슈베이크> 노츠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 이후 작품 속에 이렇게 노래 가사가 많이 등장하지만 소개하지 않겠다.
노래가 끝나도 발룬의 먹는 타령은 그칠 줄 모른다. 다시 한번 마음 좋은 ‘술잔’의 주인 코페카. 자기를 짝사랑하는 청년 프로하스카가 푸줏간집 아들이라서 프로하스카한테 고기 두 근을 몰래 가져다 달란다. 고기 두 근을 몰래? 그렇다. 어떤 책이든가, 나치 치하 프랑스에서 햄 한 덩이를 품에 숨기고 가다가 적발되어 총살당할 위기에 처하는 장면을 읽은 거 같다. 당시엔 그랬다. 이게 말은 쉬워도 목숨을 걸라는 얘기인데 프로하스카의 마음이 어떻겠어? 그래도 사랑하는 코페카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청년을 과감하게 가져다 주겠다고 약속한다.
후에 슈베이크는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끌려가고, 블랙 코미디의 주인공답게 기지 넘치는 재담 끝에 귀에 점 있는 순종 스피츠 한 마리를 구해야 하는 처지를 맞는다. 이것도 사실 코믹 장면이다. 순종 스피츠는 코와 눈, 그리고 발바닥을 제외하고 전부 흰 털로 몸을 가려야 하는 개. 슈베이크의 직업이 개장사라고 말했지? 우리나라 개장사처럼 유기견 잡아 도살해서 고기를 근으로 달아 파는 개장사가 아니고 남이 애지중지 키우는 개를 훔쳐 다른 사람한테 입양해 돈 벌어먹고 사는 사기꾼이자 절도범이다. 그래서 날 잡아 블타바 강변을 거닐고 있는 두 하녀 카티와 아나, 그리고 그들이 끌고 다니는 개 한 마리를 발견한다. 딱 눈 여겨보던 바로 그 개다. 슈베이크와 발룬은 카티와 아나하고 즐거이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개를 훔쳐, 게슈타포 대장에게 넘겨준다.
전쟁은 점점 막바지 국면으로 치닫고 프라하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굶주림에 지친다. 이중에서 제일 곤경에 처한 인물은 역시 발룬. 이를 지켜보던 슈베이크가 말없이 길을 나서 결국 프로하스카도 가져오지 못한 고기를 크게 한 덩이 들고 술집 ‘술잔’으로 들어온다. 이게 웬일? 침착하고 노련한 코페카. 이거 무슨 고기야? 알고 물어보는 거다.
개. 게슈타포 대장 마누라 거.
베르톨트 브레히트. 험한 작품 여럿 썼어도 프라하 시민한테 개고기를 먹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대신 고기 덩어리를 가지고 있는 슈베이크를 본 사람이 있으니 친위대 대장 블링거. 그는 현행범으로 잡혀 총살을 당하는 대신 체코 의용군으로 들어가 스탈린그라드 전투 현장으로 간다.
정말 가느냐고? 슈베이크는 간다. 엄동설한에 모자도 술집 ‘술잔’에 두고 왔는데 그는 망설이지 않고 간다. 탈영병을 만나도 그들과 관계없이 전선으로 간다.
이 대목에서 브레히트가 아닌 하셰크의 생애를 떠올렸다. 마흔 살도 되기 전에 알코올 의존증으로 생을 접은 하셰크. 젊은 시절 그는 1차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군으로 징집당해 동부전선에 투입되었으나 동료 체코 청년들과 탈영해서 러시아군으로 편입한다. 브레히트의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슈베이크>를 초연한 것이 1955년. 미국과 서유럽에서 브레히트는 슈베이크가 소련군에 들어가기 위하여 전선으로 향했다는 것을 말할 수 없었는 지 모른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면 귀여운 악당이자 사기꾼인 슈베이크가 가는 도중에 연극상 히틀러를 만나면서도 그렇게 동쪽으로 갈 이유는 없을 테니까.
독후감을 재미없게 썼다. 하셰크의 원작과 브레히트의 희곡 모두 무척 재미나고 익살스럽고 해학이 넘치는 골계미가 돋보인다. 그렇다고 그걸 그대로 옮길 수도 없고, 비슷하게 쓸 재간도 없어서 그렇게 됐다. 하셰크의 슈베이크이건 브레히트의 슈베이크이건 한 번 읽어보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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