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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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문예지 󰡔인간과 문학󰡕 2016 봄(제13호) 기고글

 

생존으로 사랑을 증명한 자의 이야기

-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The Revenant)」 평론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이하 「레버넌트」)는 글래스의 과거를 잠깐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런 다음, 화면은 곧 현재의 사냥 장면으로 넘어간다. 카메라가 뱀처럼 화면 위를 미끄러진다. 호흡이 길고, 시선의 곡선이 잘 끊어지지 않는다. 카메라가 호기심이 아주 많다. 사냥에 집중한 인물들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가죽을 모으던 백인들이 원주민 부족의 기습을 받아 도망가는 장면처럼 급박한 순간에도 그렇다. 카메라는 유유히 좌우와 앞뒤, 그리고 위까지 올려다본다. 조금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하다.

   인상적인 것은 인간들의 전투와 별개로 원거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자연이다. 인공 조명으로는 줄 수 없는 자연의 풍성한 햇빛이 영화를 가득 메운다. 장면에 인물만 있지 않고 산천초목이 어느 틈 사이에라도 자리한다. 만물이 적셔진 화폭은 풍성한데, 소리가 없다. 음악은 절제되어 있고, 대사도 마찬가지다. 풍경은 관조한다. 욕망, 증오, 살인, 복수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카메라는 화면을 집요하게 쳐다본다. 가끔 카메라가 인간을 보는지, 아니면 자연을 보는지 헷갈린다.

   곰이 글래스를 덮치는 장면은 기막히게 아름답다. 감독은 자연의 비정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자본의 힘은 사람들로 하여금 비릿한 현실에 달콤한 당을 입힌다. 우리를 지치게 하는 현실의 차가움이 곰의 압도적인 힘으로 대변된다. 인간이 왜곡한 곰의 여러 상(狀)을 뒤로 하고, 새끼들을 거느린 어미 곰은 본성대로 움직인다. 곰의 공격성은 당연하다. 글래스는 곰의 영역을 침입했다.

  글래스는 여러 번 내쳐진다.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단칼에 죽이는 것은 인간들의 낭만이다. 곰은 인간의 감각에 관심이 없다. 냄새 맡고, 건드리고, 물 뿐이다. 글래스에게는 한 가지 선택밖에 없다. 곰을 죽이는 것이다. 곰의 사정을 봐주는 것은 선택지에 있지 않다. 새끼 곰들을 향한 동정 역시 인간의 환상이다. 그곳에는 삶과 죽음만이 존재하며, 양 갈래의 길은 인간과 비인간을 차별하지 않는다. 자연은 공평히 무관심하다. 카메라는 글래스가 받는 고통의 일격들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공격당하는 그의 난관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대체 언제 끝나는지 모를 곰의 공격이 무섭고 끔찍해 신음소리를 내는 관객을 뒤로 하고, 글래스는 단도를 꺼내 있는 힘껏 곰을 찌른다. 결국 그는 산다. 카메라는 인간의 승리를 보지 않는다. 카메라 렌즈가 지켜본 것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다른 운명을 향하게 된 두 존재다.

   글래스와 혼혈아인 글래스의 아들에게 계속 시비 거는 피츠제럴드는 아주 평범한 인물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원주민을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다. 원주민들에게 머리가죽이 벗겨진 적도 있다. 그에게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목숨이다. 그는 브리저에게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말해준다. 목숨이 위험할 때, 피츠제럴드의 부친은 언덕에서 다람쥐와 마주쳤고, 굶주린 그에게 다람쥐는 신으로 보였다. 이처럼 피츠제럴드에게 신은 혹독한 세계에서 인간의 삶을 위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다. 그는 이기적이다. 그에게 다른 존재들은 자신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는 자기가 잘 사는 것만 중요하다. 그의 신은 그에게만 자비롭다. 글래스의 죽음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된 것도, 글래스의 아들인 호크를 죽인 것도 그에게는 그저 그의 부친이 언덕 위에서 만난 다람쥐를 잡아 배를 불린 것과 같은 이치다.

   글래스의 아들이 목숨을 잃은 그곳은 을씨년스럽다. 하지만 동시에 매우 아름답고 고즈넉하다. 곰과의 사투 끝에도 죽지 않은 글래스의 끈질긴 삶이 피츠제럴드에게는 성가셨다. 하루 이틀 기다리던 피츠제럴드는 글래스에게 제안한다. 죽여주길 바란다면 눈을 깜박이라고. 눈을 움직이지 않는 글래스. 피츠제럴드는 말을 잇는다. 아들이 죽기를 바라는가? 어차피 곧 죽게 될텐데 모두 죽기를 바라는가? 글래스는 눈을 감는다. 신체적 한계 때문인지, 아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인지는 불확실하다. 분명한 것은 글래스가 아들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목을 조르는 피츠제럴드를 보고 놀란 호크가 소리를 질러대자, 피츠제럴드는 호크의 배에 기다렸다는 듯이 칼을 박는다. 이때 누가 자신을 보기라도 했을까봐 눈을 굴리는 피츠제럴드의 얼굴이 인상적이다. 브리저는 멀리 있고, 글래스는 누워 있다.

   피츠제럴드의 연기에 넘어간 브리저도 글래스를 남기고 떠나게 된다. 비참하게 남겨진 글래스는 네 발로 긴다. 아들의 죽음을 확인한 그는 아들에게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런데 카메라가 갑자기 그들에게서 관심을 거둔다. 글래스의 거친 숨소리를 배경음으로 흐릿한 먼 설산의 봉우리가 비친다. 이 3초 이상의 응시가 인간사를 아득하게 만든다. 아들의 죽음과 글래스의 슬픔은 범사다. 눈 내린 산과 희뿌연 안개는 한 인간의 비극에 어떠한 응답도 해주지 않는다.

   세계의 무응답은 아름다운 배경이지만 서사는 아니다. 인간의 추상적인 말이 행위로 실현되듯, 글래스의 복수는 생존이라는 능동적 행위들을 전제로 삼고 그것이 이 영화의 이야기다. 영화는 글래스가 어떻게 자연의 역경과 원주민의 공격 속에서 살아남는지를 비중의 반 이상으로 둔다. 타당한 전개다. 글래스는 우선 살아남아야 한다. 관객들이 그 지난한 과정에 피곤할 수도 있지만 생존 자체가 그의 복수다. 그는 자연을 견디고, 온갖 위협을 거치면서도 자연물들을 활용한다. 세계의 무관심과 별개로 그는 스스로를 일으키는 자다. 그는 신이 남긴 사체의 복부를 가르고 그 안에 들어가 추위를 견뎌낸다. 그는 신을 먹고, 신의 냉기에 시달린다. 그러나 그가 하루하루 사는 것에 급급해서 그 고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길을 기어서라도 가고 있을 뿐이다.

   글래스는 끊임없이 피츠제럴드가 자기 아들을 죽였다는 기억을 되뇐다. 험준한 눈보라를 피해 동굴에 몸을 의탁하는 순간에도, 아무것도 없는 눈밭 위에서도, 피츠제럴드가 자기 아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쓴다. 묵묵히 살아남는 것에만 집중하니 말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 찰나에, 그가 언어를 전혀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는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 자신의 과거와 감정과 서사를 잊지 않았다. 험로에서도 계속 마주하는 스스로의 무의식에서도 그는 끝없이 꿈과 환영으로 사랑과 과거를 정초시킨다.

   현실적이고 긴 카메라의 호흡 속에서 드문 빈도로 짧게 드러나는 장면들은 플래시백이다. 그 플래시백들을 통해서 우리는 글래스의 일면을 엿본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언어화하지 않는 유형의 사람이다. 그는 행동하는 사람에 가깝다. 그의 사랑과 기억은 꿈속의 짧은 접촉 장면과 여자의 음성으로만 드러난다. 코와 코를 맞대고 가깝게 있는 여인과 그, 아들과 셋이서 웅크리고 자는 모습은 그가 준거점으로 삼은 마음의 고향이 어디인지를 보여준다. 또한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여자의 속삭임은 그의 내면에 그의 사랑이 얼마나 깊히 박혀있는지 말해준다. 그러나 그 고향은 파괴되었고, 여자는 죽었다.

   글래스가 옛날에 미군장교를 죽인 이유는 단순하다. 그에게 국가의식 같은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관념들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사랑한 여자와의 결실이요 상징인 아들의 목숨이었다. 미군장교를 살해하는 것이 앞으로 그의 삶에 어떤 장애가 될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장교를 죽이고 아들을 보호했다. 그는 현실에 굴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아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 정도로 소중히 여겼던 아들도 죽었다. 하지만 아들은 죽어서도 그의 마음에 머문다. 아들의 시선이 남아있는 한 글래스는 숨을 멈추고 포기할 수 없다. 아들의 곁에 남겠다는 맹세는 아내의 곁에 남아있겠다는 맹세이기도 하다. 그들이 그의 무의식을 장악하고 있다. 인간이 긴장을 풀 수밖에 없는 꿈속에서 그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녀는 죽었지만 그를 아직도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글래스는 숨을 멈추고 포기할 수 없다. 그에게 피츠제럴드를 죽이는 것은 그들을 잊지 않았음을 보이는 유일한 입증 방법이다.

   가끔 복수를 하려는 자들이 복수 행위 자체에 매몰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를 잘 보여주는 예시가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이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약혼녀를 죽인 살인마의 심연을 바라보다가 자기가 그 심연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자신이 결코 가질 수 없는 폭력성을 흉내 낸다. 그러나 그는 그 폭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한 복수는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하지만 동정심이 들 뿐, 공감은 할 수 없다. 비이성과 광기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레버넌트」의 복수극은 이성적이고 차분하다. 무절제하지 않고 단계적으로 정합적이다. 그의 보복 행위는 스스로 살아온 삶의 환경과 맥락에서 파생한다. 그는 과거를 방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선택하고 서술해낸 삶의 서사를 끝까지 지키고자 노력한다. 만약 한 사람이 자신을 이룬 모든 것들을 부정해버린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무자아(無自我)다. 기억이 없는 자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이고, 기억을 버리는 자는 자기 자신을 생매장 하는 자이다. 글래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의무를 반복적으로 글과 꿈에 새겼다.

   글래스가 전초 기지에 귀환하자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이 두려움과 경이로 가득 찬다. 그의 생존은 모두에게 기적이다. 유령의 귀환에 겁에 질린 토끼가 잔뜩 내달린다.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발을 묶어놓았던 돈을 훔쳐 달아난다. 글래스는 사냥을 시작한다. 차분하게 총을 들고,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숲 속을 응시한다. 원정을 함께 떠났던 대장 헨리가 동행하는데, 오히려 그가 피츠제럴드를 마주하고는 정의를 들먹인다. 피츠제럴드는 헨리를 비웃는다. 정작 아내의 얼굴은 까맣게 잊은 채 무의미한 말만 읊조리는 부잣집 도련님은 생존에 다급한 승냥이의 손쉬운 먹잇감이 된다. 하지만 글래스는 다르다. 그는 복수의 정당성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피츠제럴드를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다른 사람의 모든 것을 빼앗는 것임을 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다.

   마침내 도망가던 피츠제럴드가 막다른 곳에 몰린다. 이제는 이판사판, 살기 아니면 죽기다. 글래스는 영화 초반에 곰과 사투를 벌였지만 결말에서는 피츠제럴드와 혈투를 벌인다. 이 싸움도 마찬가지로 살아남는 것은 둘 중에 하나뿐이다. 힘겨운 싸움 끝에 피츠제럴드가 무너진다. 피츠제럴드가 끝까지 약 올리려고 묻는다. 고작 나를 죽이러 이 먼 곳까지 왔느냐. 고작 나 하나를 없애러 온갖 고초를 거쳐 온 것이냐. 복수의 허무함을 상기시키는 것이야말로 죽어가는 피츠제럴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다. 그러나 글래스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다. 이 복수는 신의 손으로 행해졌다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실린 피츠제럴드는 저 너머에서 이 광경을 구경하던 원주민들의 손에 잡혀 목숨이 끊어진다. 원주민들의 영역을 침입한 피츠제럴드는 범죄자다. 피츠제럴드로 대변되는 그 땅의 모든 침입자들 역시 범죄자다. 그러나 누가 불법이고, 누가 합법인지의 문제는 룰렛 위를 돌아가는 구슬이 어디에 멈출 것인지의 문제처럼 무작위적이다. 세계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지만 기막힐 정도로 무심하다.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곰이 죽은 것처럼, 호크가 죽은 것처럼, 원주민들이 터전을 빼앗긴 것처럼, 글래스를 도운 원주민이 잔인하게 목매달려 죽은 것처럼. 만사는 원래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면 무의미하고 허무하다.

   그러나 복수에 성공한 글래스는 먼 빈 자연의 틈새에서 빛처럼 새어나오는 그녀를 만난다. 그녀는 그에게 너무나 장하다는 듯, 당신이 정말 자랑스럽다는 듯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 그의 곁을 떠난다. 그제야 비로소 카메라가 글래스를 바라보고, 글래스도 카메라를 바라본다. 쉴 틈 없었던 글래스의 삶에 드디어 공백이 생긴다. 그의 시선이 대미를 장식한다. 이제야 카메라가 인정한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바로 죽음에서 돌아온 글래스, 그 사람의 이야기였음을.

   영화 「레버넌트」는 이처럼 인간의 삶이 증명 과정 자체라는 것을 보인다. 증명은 생존을 전제로 하며, 생존방식으로 그 내용이 구체화된다. 휴 글래스의 경우, 자신의 사랑을 잊지 않았고, 그 사랑을 삶의 목적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그것들을 빼앗은 자에게 똑같이 보복함으로써 분노가 아닌 사랑을 증명하였다. 그의 강인함은 자연의 무심함을 배경으로 삼았으며 비록 자연이 그를 보호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두 발로 그곳에 직립하였다. 이 영화에서 글래스가 피츠제럴드를 죽였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의 대결 구도는 글래스와 피츠제럴드가 아니다. 글래스 본인이 세계와 대결하는 구도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무의미한 세상에서 유의미를 창출한 의지의 인간이었으며 굳건한 사랑의 서사를 생존으로 증명해냈다는 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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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철학사론 - 세계상실과 자유의 이념
이규성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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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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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성실하고 세계에 충실했던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을 삶의 방향과 연관하여 고찰 - [한국현대철학사론] 2장을 읽고 박지원, 홍대용과 연결 지어서

 


 

  필자는 [한국현대철학사론] 2장에 나오는 대종교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박지원, 홍대용의 사상과 연결 지어 평가하기 전에, 우선 스스로가 지녔던 고민을 서론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 고민은 다음과 같다. 필자는 왜 철학을 공부하는가? 이유는 하나다. 신체기관을 멀쩡히 가지고서도 자신의 참된 의지로 그것을 움직이지 못하는 종속에서 탈출하고자 함이다. 삶은 언제든 감옥이 될 수 있다. 정신을 놓치고 살다보면 현대화의 급류에 휩쓸려 갈 곳 없이 길을 잃어버린 채, 발이 묶여서는 곧 자신의 향방마저 잃게 된다. 그 지점에서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 지 고민을 멈춘다면 우리는 주변의 거시적인 흐름을 아무 생각 없이 쫓아간다. 그것들을 쫓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가고 있는 이 길이 어디를 향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이 자신의 길인가? 이때까지 스스로 발걸음을 멈추어 생각하고, 판단하고, 따져보고, 마음먹어서 행동한 적은 있었던가? 생각조차 하지 않고, 고민조차 하지 않고 무작정 걸어온 것은 아닌가?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스스로에게 자율과 독립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 삶의 주인은 정녕 스스로가 맞는 것인가?

  철학은 사람으로 하여금 잠시 멈추어서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힘을 갖는다. 철학 공부의 의의가 바로 그곳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만약 철학 공부를 통해서도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 공부에 의미가 있는 것일까? 철학이라는 이름에 도취해 버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철학 속에서도 공허한 타인의 말들만을 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철학 공부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건설하려 했던 초심을 잃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러한 고민을 하고 있던 것이 바로 최근의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필자는 ‘한국철학’ 수업을 들으며 홍대용을 만났고, 박지원을 만났으며, [한국현대철학사론]을 읽으면서는 독립 운동의 최전선에 서있었던 대종교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고고히 비주류의 길을 택한 홍대용과 박지원, 일본의 압제 속에서도 자신들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대종교인들의 정신이야말로 철학 공부를 그저 허황된 남의 이야기로 만들지 않고, 현실의 행위로 변환시킨 진정한 선비의 그것이라 평할 수 있었다.

  대종교의 인물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혼란스럽고 격변이 심했던 시대인 1800년대 말과 1900년대 초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시기의 사람들은 몰려오는 국내외의 여러 문제들과 직면하였다. 기성 사대부의 부패한 세도 정치와 외부에서 밀려오는 국가적, 민족적 억압은 한반도의 사람들에게 심각한 위기이었다. 그처럼 경황없는 세태가 그들로 하여금 치열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고민을 멈추었다면 남은 선택지는 외부의 억압과 부조리한 권력에 굴복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많은 행동하는 지식인들은 굴복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미 그 시기에 한반도 내부에서는 신분제에 대한 회의와 저항의식, 개개의 개체를 그 자체로 정당하다고 옹호하는 정신 등이 동학 농민 운동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동학 농민 운동은 안타까운 실패에 봉착하였다. 이러한 실패를 딛고 민중적 지성들은 점차적으로 자신들을 짓누르기 시작한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으로 그 의지를 이어나간다. 대종교에 참가한 인물들은 외부적 측면에서는 나라와 민족 모두가 공존하며 상생하는 원리를 지향하였고, 내부적 측면에서는 한민족의 근원적 뿌리를 단군사관으로 삼는 문화적 기초 작업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실제로 당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지식인들 중 많은 수가 대종교에 사상적 근간을 두고 활동하였다.

  중요한 것은 그 때 당시 대종교인들과, 대종교에 관여한 독립 운동가들의 정신에 유가적 전통이 잠재한다는 점이다. 내외합일을 이룩하여 자신의 기초를 잡고 그를 바탕으로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유가의 살신성인하는 정신이 당시의 독립 운동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투쟁을 지속하도록 이끌었다. 그들의 이러한 자세는 홍대용, 박지원 같은 조선 후기의 실학파들이 지향한 선비가 가져야 하는 자세와 유사성을 갖는다.

  조선 후기 실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인 홍대용과 박지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이 속한 시대상을 알 필요가 있다. 당대에는 노론에 해당하는 주자학자들이 정파의 위치를 주장하며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그들의 편협한 습성은 당시 사회경제학적으로 불합리한 수취제제로 고통 받던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주자의 말을 숭상하고 예와 도에 천착하는 것 말고는 당시 급변하는 시대 정세에 그다지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옆의 청나라로 들어오는 새로운 문물들에 대해서도 명에 대한 절개를 지켜야 한다며, 청나라를 오랑캐로 쉽게 낙인찍고 경계했다.

  이러한 폐쇄적이고 답답한 시대 속에서 홍대용과 박지원은 사회 주도층이 무시한 백성의 실질적, 현실적 괴로움에 귀를 기울였다. 노론 명망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당대의 기준으로는 좋은 신분에 해당한 그들이 당시의 주류를 부정하였다. 그들은 기 철학을 바탕으로 주자학자들이 중시하는 초월적 이(理)가 아닌, 세상의 만물을 창조하는 무한한 기(氣)의 발현에 집중하여 현실의 세태를 중요시 하였다. 그들이 그러한 생각을 쫓아 그것들을 글로 남기고, 사회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이유는 그들이 선비들이 가져야 할 자세인 내적인 성실함과 외적인 충실함을 다하였기 때문이다.

  홍대용과 박지원, 이 두 학자가 속한 실학파와 대종교를 위시한 독립 운동가들의 공통점이 바로 유학에서 말하는 선비의 자세라고 볼 수 있다. 실학파와 독립 운동가들은 세상의 민초들이 내는 고통의 신음소리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소급해보면 유가의 근원이자 선현인 공자와 맹자의 정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무릇 선비라면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는 긴장된 의식을 지녀야 한다고 말했고, 맹자는 군주가 무엇을 즐기고자 한다면 백성과 함께 즐겨야 참된 가치가 있다는 ‘중락衆樂’,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정신을 이야기했다. 이 두 명의 이야기를 조합하면 선비는 백성과 민중의 즐거움을 위하여 정진하고, 노력하는, 그리하여 끝없이 긴장하는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긴장하는 사람으로서는 매사 경계를 놓지 말아야 하니 벅차고 고된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공자는 단호히 죽은 뒤에나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야 진정한 선비라고 말한다. 이러한 점을 보면, 막중한 책임의식과 사명의식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면 감히 스스로를 선비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가의 선비정신은 결연히 실학파와 독립 운동가들로 이어져 당대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발현되었다.

  하지만 처한 위치가 다른 만큼 실학파와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이 취한 구체적인 행동 양상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홍대용과 박지원은 당대의 사회경제적 측면에서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여러 이론을 제시했다. 그들이 이야기한 한전제와 같은 토지개혁제도가 그러하다. 그들이 대안을 내놓으려고 노력했다는 점은 높이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신분을 초월하여 더 넓은 차원의 평등을 이야기하지는 못했다. 박지원은 한전제를 이야기하며 토지 소유에 상한선을 두었다. 이는 그가 사대부의 권익을 인정하는 측면이 있었음을 보인다. 반면 대종교의 해학 이기는 토지 공개념을 주장하여 사적인 매매를 전면 금하고, 국가의 공적 매매만을 허용하는 급진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독립 운동가들이 실제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일제에 투쟁했다면, 홍대용과 박지원이 당대 사회 문제의 개혁을 위해 그 정도 차원의 실천을 보여주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독립 운동에 힘썼던 홍암 나철이 자신의 죄가 막중하다며 자살한 것과 비교해 홍대용, 박지원은 자신들의 사회 개혁적 사상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비교적 완만하고 애매한 식으로 글을 쓰는 경향이 있었음을 감안하면 특히 그렇다. 물론 시대상의 위급함이 어느 쪽이 더 중하고 급했나를 고려한다면, 홍대용과 박지원의 선비 정신이 독립 운동가들에 비해 부족하다고 쉽게 평가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들의 선비 정신이 1900년대의 대종교 독립 운동가들에 비하면 아직 신분적 질서에서 훨씬 덜 자유로웠다는 것을 파악할 수는 있다.

  박지원, 홍대용과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 사이에서 사상적 유사성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 될 수 있다. 그들은 기(氣)를 중심으로 하는 철학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현 세계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데 노력했다. 이(理)를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자들이 종종 이의 절대성을 강조하여 기(氣)의 측면을 위계상 아래의 것으로 보고 경시한 경향이 있는 것과 다르게 기 철학은 인간 개별을 옹호하고, 현실적인 측면에 중점을 두는 데 활용되었다. 또한 실학자들이나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이나 유가적 전통에 가장 충실하였다고 볼 수는 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적 근거를 불교, 도교, 양명학 등 유가 밖에서 찾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들은 유, 불, 도의 주요 개념을 가지고 고유한 내외합일의 관계를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의 맥을 나눈다.

  대종교의 인물 중 하나인 서우 전병훈의 경우, 그는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도교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가 해석한 [천부경]에서는 장자가 이야기한 내성외왕의 정신과 유사한 ‘겸성(兼聖)’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한다. 이는 초월적 수련과 정치적 실천을 종합하려는 방향을 의미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그는 신체를 다스리는 수련법을 익혀서 몸 안에 흐르는 생명 에너지를, 정신의 자유를 위한 형식으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다. 이처럼 대종교에서 인간의 몸 안에 내재한 생명원리를 그 자체에서는 완전한 것으로 긍정하고, 그를 바탕으로 외부를 향한 실천을 강조한 부분은 도가적이면서도 기 철학 중심적인 사고를 드러낸다.

  그러나 기 철학을 중심으로 하였다고 해서 대종교의 사상이 개별자들 각각에게만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다. 기 철학을 통해 행동해야 할 윤리적 실천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 전제가 되는 것은 인간이 만물의 모든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실천적 원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만유와 인간은 본원이 같고, 그렇기에 우주적 연대성이 윤리적 실천의 근본 원리로 작용해야 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더 나아가면 대종교에서 주장한 만민평등권과 인민주권론에 대한 지향, 공동의 연대 의식이라는 개혁적 성격도 엿볼 수 있다. 해학 이기가 민권의 보편적 원리를 심화해서 이야기한 것이 비슷한 맥락이다. 또한 실제로 대종교의 이러한 홍익인간정신,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그 생각이 대종교의 사람들로 하여금 단순히 민족적 차원에서 생각이 머물지 않고,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로 나아가게끔 하는 사상적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홍대용, 박지원의 경우에도 유가를 중심으로 하고는 있지만 불교, 도교, 양명학, 묵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홍대용은 철저한 주기론자, 그것도 기일원론자로서 궁극적인 생명원리는 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노장의 사상에 특히 영향 받았다. 노장 사상에 따르면 사람과 사물이 생겨나는 것이 천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천지는 광대한 공허이고, 시간과 공간 역시 그 시작과 끝이 없다. 그 텅 빈 곳을 가득 채운 것이 바로 무한량의 기(氣)다. 홍대용은 그 기(氣)가 내포하고 있는 생명력에 중점을 두었고, 만물과 인간이 동등하게 같은 기(氣)를 나누어 가진 것이므로 모든 것들의 기본은 같다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세계관에서 안과 밖의 구분은 무의미하며, 누가 더하고 누가 덜하다는 식의 차별과 위계의 원리는 통하지 않는다.

  박지원의 경우도 비슷하다. 노장사상과 불교의 영향을 받아 우주적 차원의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였다. 그러한 시야를 통해서 만물의 평등성을 이야기하는 개방적인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였고, 그를 바탕으로 당대 사회의 좁은 인습을 비판하였다. 신분 안에 존재하는 낡은 구분과 구별에 따른 폐단을 지적하고, 고통에 시름하는 백성들의 처지에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 과정에서 기(氣)의 발현인 우주 그 자체를 긍정하고, 맹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들의 식(食)과 색(色)이라는 본성 그 자체를 존중하여, 그것을 충족시켜주고 같이 즐길 줄 아는 것의 중요성에 눈 떴다.

  이처럼 실학파들과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이 기 철학을 중심으로 하려고 했던 이유는 그들이 처해있던 사회적 맥락이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대안 제시를 요구할 정도로 급박한 시국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理)를 인정하는 상태로 주기론적 입장을 견지하는지, 아니면 기일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는지와 상관없이 그들이 기(氣)라는 실체적 존재에 방점을 찍은 것은 부정적인 현실 세계를 빨리 바꾸어야 할 긴요한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당시의 세상이 도탄에 빠진 상황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주리론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성리학자들에게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기의 긍정과 그를 통한 자유와 평등성에 대한 이야기를 바깥에서 찾고, 검토함으로써 자신들의 사상을 주체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려 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실학파들과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은 크게 유교에서 지향하는, 세상의 일에 근심하며 백성과 사회를 위해 열과 성을 다해 항상 긴장하는 선비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 또한 그 사상적 바탕을 기(氣)에 방점을 둔 철학으로 삼고, 동시에 다른 사상이나 학파에서 이야기하는 평등성과 겸애 같은 중요한 정신을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자기들의 것으로 삼은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크게 본다면, 당시 사회에서 개방적이고 개혁적이었던 실학파 홍대용과 박지원의 주체적인 기 철학자로서의 면모가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에게 계승되어 독립 운동이라는 자립적이고 굳건한 활동과 한민족의 시조로 단군을 삼은 종교적인 색채로 발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를 통해 우리가 삶의 방향성으로 취할 수 있는 지점은 무엇인가? 홍대용, 박지원이 당시의 시대 맥락에서 실학을 주장한 것과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이 압제 속에서 자신들의 철학을 지켜낸 것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다시 우리의 현실 문제와의 연결고리로 나아갈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그들처럼 사는 것은 매우 지난하고 힘겨운 일일 수 있다. 특히 대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식의 노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사회적 활동을 멈추고 ‘무상’의 본원으로 수렴하는 자기변형의 노력을 요구한다. 그렇게 생명의 본원에 접한 자는 차별성이 없는 본원의 덕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다시 현실적 상황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친 내적 수렴과 외적 활동의 종합적 구조는 언뜻 들어서도 고차원적이고 부단한 수행을 전제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을 과연 소수의 지식인이 아닌 만민이 해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기 위한 굉장한 주체성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러한 정도로 힘든 수행을 담보하여야 얻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떠받들고 존경하는 독립 운동가들이 그러한 주체적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과연 그렇게 자신의 몸을 던져 주권을 수호하고 자유를 쟁취하려는 행동을 취할 수 있었을까? 홍대용과 박지원이 세상의 불의와 불합리함, 부조리함이 버겁다는 이유로 그 답답한 시세에 지성과 주체성을 팔고 노론 대작으로 살았다면 지금과 같은 의미로 우리에게 남아 있었을까? 그들이 쉽게 포기했다면, 우리가 그들의 삶에서 배울 점이 남아 있었을까?

  그들의 삶에 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그들이 남의 삶을 살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시대를 초월한 어떤 종류의 정신성을 쫓지 않았고, 시대 속에서 호흡하면서 그 시대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만 하는 실천을 쫓았다. 그것이 그들이 바탕으로 삼은 기 철학에서 비롯되었다. 세계와 자신들의 위치가 서로 어긋나 있다 하더라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변형시키고, 그를 통해 세계를 변형시키려는 최선을 다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내적인 곳에서는 성실성을, 외적인 곳에서는 충실함을 다하려 한 자세와 관련이 있다. 홍대용과 박지원은 자신들의 시대적 맥락 안에서 끊임없는 저술 활동과 대안 제시를 위한 공부를 통해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였으며,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 목숨을 위협받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정신을 통해 습득할 수 있는 깨달음을 대종교 윤리 교훈집 [참전계경]의 한 구절과 연관 지어 이야기하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안주하는 생각은 크게는 인간의 본성을 멸하고, 작게는 의지를 멸할 수 있다. 본성과 의지를 다 멸하면, 존망을 분별하지 못한다.(安念者, 大可滅性, 小能滅志, 性與志俱滅, 存亡難辨.)”

  무너지지 않는 의지로 본성을 실현시키는 데 있어서 독약인 것은 안주하는 생각이며, 안주하는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남들의 말에 휩쓸려 자신의 목소리를 잃는다는 것과 같다. 그러한 처지에 놓인 사람은 자신이 죽고 사는 존망의 문제조차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길을 잃어버린 처지와 같다. 우리 역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안주하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비록 고난의 여정일지라도,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어느 날 죽어버리는 인간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끝없이 현실의 문제들을 살피며 자신과 세계에 성실함과 충실함을 다하여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라면 충분히 유의미할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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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mocratic Schools, Second Edition: Lessons in Powerful Education (Paperback, 2)
James A. Beane / Heinemann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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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은 추상적이고 구체적 예시는 와닿지 않는다. 누구 잘못이 아니다. 교육은 실천하는 자의 것이라서 그런 거라 생각한다. 이들의 방향성에 동의한다 해도 그 자세한 이야기는 내가 맞닿아 있지 않는 맥락이하서 그런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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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이청준」 - 눈길, 서편제, 벌레 이야기 사피엔스 한국문학 중.단편소설 4
이청준 지음, 김준우 엮음 / 사피엔스21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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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과제 //


너무나 커서 숨기지 않으면 흘러넘치는 어머니와 자식의 빚에 대하여 - 이청준의 「눈길」을 소설의 구성요소 중 주제를 중심으로 분석


  이청준의 「눈길」이 이야기하는 주제는 매우 분명하다. 소설의 끝에서 독자는 주인공 '나'와 노모 사이에 자리한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 연민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의 백미는 그러한 주제를 한 번에 다 보이는 데 있지 않다. 부끄럼 타는 여인처럼 속살을 조금씩 드러내는 데 있다. 모친을 향한 사랑과 연민이라는 주제는 흔하고 대중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이 소설이 그 주제를 어떻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루는지 그 접근법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이 소설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면, 드러내 놓고 환하게 빛나는 모자의 사랑 때문이 아니다. 그토록 선명한 것을 어둠 속에 꼭꼭 숨기고 안 보려고 한 아들의 심정과 그런 못난 아들을 탓하지 않는 어머니의 강인함이 엮여져, 그들의 사랑이 역설적으로 얼마나 뜨겁고 강한 것인지, 오히려 얼마나 외면하기 힘든 것인지 드러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주제가 노골적으로 노출되었다면 눈물이 흐를 만큼의 감정을 자극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이 소설은 자신의 주제를 열심히 숨기려고 한다. 주인공이자 노인의 아들인 '나'라는 서술자의 상당히 건조한 진술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한다. 

  '나'는 이 소설의 맨 처음 1장만 보면 무척 무정한 사람으로 보인다. 아내에게 말하여 먼저 어머니를 찾아뵙자고 말한 것이 본인이면서, 막상 오고 나서는 노모의 곁을 최대한 빨리 떠나려고 기를 쓴다. 하지만 막상 간다고 하니 딱히 잡지도 않는 노모를 보며 '나'는 불현듯 짜증이 올라와 자리를 피해버린다. 이 단편 소설은 1장에서부터 많은 것을 암시한다. '나'는 어머니를 최대한 떠나려고 한다. 그러면서 또 어머니의 반응을 신경 쓴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다는 고백이나 자세한 심경을 '나'의 서술에서 발견할 수는 없다. '나'는 감정을 토로하거나 있었던 일을 전부 밝히지 않는다. 시골집의 풍경을 묘사하는 어휘는 풍부하지만, 막상 인물 간의 이야기에서는 인색하다. 이러한 서술 방법이 오히려 무뚝뚝한 아들을 잘 형상화한다. 그렇다고 그저 무뚝뚝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이 군다. '나'는 어머니와 자신 사이에는 서로 빚진 것이 없다는 말을 계속 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매정함을 정당화하지만 그러한 반복적 진술은 그의 억압된 심리를 언뜻 보여준다. 

  소설이 전개되면서 모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윤곽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러기까지 몇 가지 징검다리가 있다. 여느 방문처럼 왔다 빨리 갈 수 있었는데, 노인이 생전 안 하던 말을 꺼낸다. 바로 노인이 넌지시 바라는 소망, 지붕을 고치고 싶다는 바람이다. '나'는 노인이 자신에게 무엇을 행여 해달라고 할까봐 매사 초조해했다. 서로에게 빚이 없다는 '나'의 강한 인식은 그 자신의 무결함을 강조한다. 소설 안에서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주벽으로 패가망신한 형의 뒤처리를 자신이 해야 했다는 억울함, 그리고 자신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많은 것을 상실해야 했다는 아픔 때문일 것이다. 소설에서는 그저 그런 일들이 있었다고만 언급되지만, 집을 잃어버리고 난 후 찾아간 골목에서 황망히 헤매던 소년의 발걸음에서 상실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역경들을 디디고 지금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자신이 장남의 책임을 건실하게 해냈다는 그 사실 하나야말로 그가 내세우는 정당성이자 동시에 생색내기다. 그는 혼자만의 계산속으로, 이때껏 자신이 당한 것, 억울한 것이 많음을 어머니도 알아서 자신에게 함부로 무엇이든 요구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어머니가 당신의 집도 지붕 개량 사업에 참여하면 어떻겠냐고 말하니 그는 입을 다물어버린다. 그는 꿋꿋이 자신이 빚이 없으니 아무래도 상관없고, 바로 올라가 버리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한 명의 인물이 더 있는데, 바로 아내다. 이 외부 인물이야말로 그 둘 사이를 매개하여 정확히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감정이 묻혀 있었는지 알려주는 일등 공신이다. 그녀는 끝없이 어머니에게 말을 거는데 그것이 다 남편으로 하여금 자신의 숨겨진 마음을 살펴보게 하려는 배려다. 자신의 마음을 꿍쳐둔 아들이나 모친이나 아내가 꾹꾹 찔러대니 그제야 진심이 흘러내린다. 노인은 귀여운 며느리가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에 대답하다 보니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게 된다. 반대로 아들은 관심도 없는 척 하지만 그 둘의 이야기에 귀를 한껏 쫑긋 기울이며 듣고 있다. 그리고 제발 아내가 그만 두었으면, 어머니가 그만 말을 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내의 대화를 통해 그도 기억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간다. 예전, 망해버린 집 앞의 골목으로 찾아와 서성대는 그를 거두어서 밥을 먹이고 재워 보낸 어머니와의 기억이 바로 그 과거다. 망한 집에서 아들을 위해 해준 일을 살펴보면 어머니의 상당한 정성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지금 그렇게 차갑다는 게 못 믿길 정도다. 하지만 아들의 입장에서는 그 이후로 본인이 겪은 고초가 여러 가지 있어서 어머니와 자기 사이에 빚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무엇이 더 있다. 바로 어머니의 심경이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숨기려 드는 못난 남편을 위해 아내가 그것을 파내려는 순간, 어머니도 망설이고, '나'도 헛기침으로 끊어낸다. 어머니에게 숨겼던 마지막 사랑의 빚을 아는 순간, 이때까지 의지해 온, 서로에게는 빚이 없다는 계산식을 뒤흔들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대화가 결국 터지고 만다. '나'가 졸음기에 빠져 그만 잠이 들었는데, 그 아들을 내버려두고 아내랑 어머니가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소설 안에서 어떻게 며느리와 어머니가 그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는지는 생략되어 있다. 필자는 그 부분이 참 인상 깊었다. 깜빡 잠에 들어버린 아들을 내쳐두고 둘이서만 이야기하게 된 것이 참 재미지면서도, 왜 그러한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깊은 속내로 들어가기까지 아들이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불가능해서 그러지 않았나 싶다. 아들도 그렇고 노모도 그렇고 그 정도로 깊은 사랑의 이야기, 숨겨 왔던 깊은 아픔과 슬픔을 서로를 두고 마주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며느리도 필요한 존재였다. 그들이 의식을 갖고서, 둘만 있을 때는 항상 할 수 없었던 이야기가 이제야 진심의 차원으로 진입한다. 어린 아들을 보내놓고 같이 걸었던 길을 혼자 돌아가던 어머니는 눈길에 난 발자국들을 보면서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앞으로 갈 데 없는 것을 걱정했던 것이 아니라, 잠시 부끄러움을 가라앉히고 갈 생각했다는 어머니의 황당할 정도로 강인한 모습은 아들의 얄팍한 계산으로도 숨기지 못할, 아들이 어머니에게 받은 엄청난 빚의 무게를 가리킨다. 

  감수성 좋은 독자라면 소설을 다 읽고 나서 흘린 눈물을 닦으며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모친에게 받은 빚이 너무나 커서 아들은 그걸 볼 수조차 없었다고. 그리고 독자는 각자의 어머니를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참 영리한 소설이다. 주제는 참 보편적인 것인데 기필코 그걸 숨기려는 아들의 이야기로 우리 안에 숨겨져 있던 어머니에 대한 부채의식을 긁어내니 말이다. 갚을 것 없다고 말하는 못난 아들과, 한사코 사양하고 숨기는 어머니의 답답할 정도로 강인한 체념이 동시에 호흡하는 이 무덤덤한 소설이야말로 어머니와 자식의 사랑 혹은 빚이라는 주제를 잘 형상화해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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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청목 스테디북스 64
이상 지음 / 청목(청목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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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학교 과제로 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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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함으로 날개를 부르짖은 청년의 이야기 - 이상의 「날개」를 소설의 구성요소 중 작중인물의 이해와 서술자의 종류를 바탕으로 분석


   이상의 대표작인「날개」의 주인공 '나'는 언뜻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의 행동은 전반적으로 괴이하다. 멀쩡한 젊은 청년이라고 보기 힘들다.「날개」의 독자들에게는 작중인물인 '나'를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대체로 초점은 ‘나’에게 맞추어져 있고, 그가 풀어놓는 이야기만이 독자가 가진 실마리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꼼꼼히 살펴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파악이 쉽지 않다. 작가 이상의 성격이 독특하고 개성적이었던 만큼 그의 작품 속 인물 역시 한 편의 수수께끼 같다.

   이상은 소설「날개」의 ‘나’라는 인물을 구현하는 데 있어 크게 두 가지 접근법을 취한다. 하나는 보여주기 방식이다. 이상이 인물의 행동을 보여줄 때는 주로 ‘나’가 위주이며, 다른 인물들의 행동 묘사가 보이는 경우는 ‘나’가 등장하는 장면과 관련할 때뿐이다. 인물들의 특정한 행동이 이루어지는 데 있어 그 이유를 부연설명 하는 법은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나’를 둘러싼 여러 상황들을 간접적으로 추측하게 된다. 어느 것도 명확한 형태를 가지고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접근법은 의식의 흐름을 통한 내면 묘사다. ‘나’의 의식이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을 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날개」를 읽으면서 ‘나’의 적나라한 의식과 마주한다.

   이 두 가지의 접근법은 단순하게 이등분으로 구별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기보다는 서로 엮여져 있는 상태로 ‘나’라는 인물을 형상화한다. 인물의 행동과 내면 묘사가 한데 섞여 펼쳐지는 쪽에 가깝다. 그러한 작가의 묘사방법을 통해 독자가 그려낼 수 있는 '나'라는 인물은 기본적으로 소리 내어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생각만 한다. 생각도 단편적이다. 외부의 자극에 순간적으로만 반응한다. 어느 소설에서도, 어느 이야기에서도 이처럼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젊은 남성을 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무기력한 인물이 많다 치더라도, 자신의 무기력함에 아무런 감정조차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은 드물다. 그는 자기의 행동을 변명하지 않는다.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한 지점이「날개」의 주인공 ‘나’를 독자로 하여금 비정상적이고 인상적인 인물로 기억되게 한다.

   ‘나’에게는 자존심도, 이해력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속없다는 점에서 마냥 어린아이 같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얼마나 예민한 존재인지 안다면 그러한 비유도 적절하지는 않다. 그는 아내가 키우는 한 마리의 개 같다. 자아가 없는 것 같다. 아내가 반찬을 부실하게 챙겨주면 군소리 없이 그대로 받아먹는다. 그래서 쪽쪽 말라간다. 아내가 옷을 챙겨주지 않으면 또 그대로 옷 한 벌을 입고 다닌다. 코르덴 양복 한 벌로 잠도 자고 밖으로 외출도 한다. 그는 어쩌다가 한 번씩 아내를 찾아오는 내객들의 정체를 궁금해 한다. 내객들이 아내에게 돈을 지불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하지만 질문은 일회성에 불과하다. 그 이상 더 나아가지 않는다. 물음은 연장되거나 심화되지 않는다. 회피해버린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노라면 으레히 내 머리는 그냥 혼란하여 버리고 하였다. 잠들기 전에 획득했다는 결론이 오직 불쾌하다는 것뿐이었으면서도 나는 그런 것을 아내에게 물어보거나 한 일이 참 한 번도 없다. 그것은 대체 귀찮기도 하려니와 한잠 자고 일어나는 나는 사뭇 딴사람처럼 이것도 저것도 다 깨끗이 잊어버리고 그만두는 까닭이다.(17)”

   ‘나’는 천치처럼 군다. 그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아내가 자신에게 아달린을 먹여 온 것을 알고 물어보러 집에 들어온 그는 "내 눈으로는 절대 보아서 안 될 것을 그만 딱 보아 버리고 만 것이다.(34)"와 같은 상황에 부딪친다. 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이 소설 안에서 아내가 내객과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는 결국 자세히 언어화되지 않는다. '나'의 사소한 일거수일투족, 그가 아내의 화장품에 비치는 빛들을 갖고 놀고, 불장난 치는 것 따위는 상세하게 다루어진다. 그가 이불 안에 들어가서 사색하고, 게으른 동물로 사는 이야기도 친절히 다 나온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흐릿한 한 문장으로만 넘어 간다. 아내는 내객과 함께 있을 뿐, 정확히 어떻게 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나’의 말에 의하면 아내는 내객과 자신이 같이 있는 모습을 '나'가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생기면 아내는 꼭 화를 낸다. 그래서 '나'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래서 나는 보면 아내가 좀 덜 좋아할 것을 그만 보았다.(30)"고 하는 식으로 표현한다. 그 장면은 ‘보지 말아야’ 하는 것이고, ‘아내가 안 좋아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묘사에서 짐작할 수 있는 점은 ‘나’ 자신의 가치판단이 미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나’가 그러한 장면을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가 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제시된 금기나 선을 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뉘앙스가 된다. 무력하고 나약한 ‘나’는 자신의 물질적인 생존을 아내에게 완전히 맡겨버린 것처럼, 남성으로서의 자존심도 아내에게 미뤄버린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자는 ‘나’라는 서술자의 진술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 사회를 스스러워 하고, 인간의 삶을 스스러워 하는 그가 마치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과연 진심인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그러한 지점에서 필자의 생각에 ‘나’는 신빙성 없는 서술자이다. '나'는 선택적으로 상황을 본다. 이야기를 할 때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위에 쓴 것처럼 아내와 관련해서 자기가 보고 싶지 않은 점은 최후까지 보려 하지 않는다. “뒤이어 남자가 나오는 것 같더니 아내를 한아름에 덥석 안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35)” 정도의 상황이 되어서야 ‘나’는 아내가 “밉다”(35)고 말한다. 그제야 그의 속내가 간신히 드러난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미움도 잠시, 아내가 억수 같이 퍼붓는 독한 말들에 그는 망연자실하여 도망쳐버린다. 어디를 돌아다니는지도 모르게, 어떻게 갔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얼이 빠진 상태로 돌아다니다가 스스로의 자아에 질문을 던진다. “너는 인생에 무슨 욕심이 있느냐고.(36)” 하지만 그는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조차도 어려웠다.”는 말로 자신의 질문에서 또 한 번 도망친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한다. 직시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날개」의 결말은 비극적이다. 그는 자신과 아내를 ‘절름발이’로 묘사한다. 그와 아내 둘 다 사지가 멀쩡하다는 점에서 그러한 비유는 일종의 자기합리화이다. 어디 딱히 문제가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나’가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딱지 붙이지 않는 한 스스로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점을 변명할 길이 없다.

   이 글을 최종적으로 정리하자면, 이 소설은 겉보기에는 한 사람의 철저한 미약함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미약함이 아닌 욕망에 방점이 찍혀져 있다는 게 필자의 결론이다.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삶에 갖는 욕심이나 욕망은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는 항상 아내에게 지고, 아내 위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자기 자신은 거세시키고, 지워나간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이 한 편의 총체적 역설처럼 느껴진다. 무능과 무력, 나약함과 미약함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오히려 한 청년이 자신의 생에 갖는 괴로움과 아내에 대한 애착이 엿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에게 사실 욕망이 죽지 않고 살아있음이 소리 없이 드러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자신에게 사라진 인공의 날개가 다시 돋아나서 한 번 더 날아보길 바란다. 날개 없는 그가 취할 수 있는 선택권은 그 어디로도 날아가지 않는 것, 무력하게 제자리에 쓰러져 있어야만 했던 것뿐이었다. 날개 꺾인 새는 언제나 날고 싶어 하기 때문에 날고 싶다는 소리조차 차마 낼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짐작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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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날개(이상 단편집)』, 청목,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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