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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이청준」 - 눈길, 서편제, 벌레 이야기 ㅣ 사피엔스 한국문학 중.단편소설 4
이청준 지음, 김준우 엮음 / 사피엔스21 / 2012년 2월
평점 :
학교과제 //
너무나 커서 숨기지 않으면 흘러넘치는 어머니와 자식의 빚에 대하여 - 이청준의 「눈길」을 소설의 구성요소 중 주제를 중심으로 분석
이청준의 「눈길」이 이야기하는 주제는 매우 분명하다. 소설의 끝에서 독자는 주인공 '나'와 노모 사이에 자리한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 연민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의 백미는 그러한 주제를 한 번에 다 보이는 데 있지 않다. 부끄럼 타는 여인처럼 속살을 조금씩 드러내는 데 있다. 모친을 향한 사랑과 연민이라는 주제는 흔하고 대중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이 소설이 그 주제를 어떻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루는지 그 접근법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이 소설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면, 드러내 놓고 환하게 빛나는 모자의 사랑 때문이 아니다. 그토록 선명한 것을 어둠 속에 꼭꼭 숨기고 안 보려고 한 아들의 심정과 그런 못난 아들을 탓하지 않는 어머니의 강인함이 엮여져, 그들의 사랑이 역설적으로 얼마나 뜨겁고 강한 것인지, 오히려 얼마나 외면하기 힘든 것인지 드러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주제가 노골적으로 노출되었다면 눈물이 흐를 만큼의 감정을 자극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이 소설은 자신의 주제를 열심히 숨기려고 한다. 주인공이자 노인의 아들인 '나'라는 서술자의 상당히 건조한 진술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한다.
'나'는 이 소설의 맨 처음 1장만 보면 무척 무정한 사람으로 보인다. 아내에게 말하여 먼저 어머니를 찾아뵙자고 말한 것이 본인이면서, 막상 오고 나서는 노모의 곁을 최대한 빨리 떠나려고 기를 쓴다. 하지만 막상 간다고 하니 딱히 잡지도 않는 노모를 보며 '나'는 불현듯 짜증이 올라와 자리를 피해버린다. 이 단편 소설은 1장에서부터 많은 것을 암시한다. '나'는 어머니를 최대한 떠나려고 한다. 그러면서 또 어머니의 반응을 신경 쓴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다는 고백이나 자세한 심경을 '나'의 서술에서 발견할 수는 없다. '나'는 감정을 토로하거나 있었던 일을 전부 밝히지 않는다. 시골집의 풍경을 묘사하는 어휘는 풍부하지만, 막상 인물 간의 이야기에서는 인색하다. 이러한 서술 방법이 오히려 무뚝뚝한 아들을 잘 형상화한다. 그렇다고 그저 무뚝뚝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이 군다. '나'는 어머니와 자신 사이에는 서로 빚진 것이 없다는 말을 계속 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매정함을 정당화하지만 그러한 반복적 진술은 그의 억압된 심리를 언뜻 보여준다.
소설이 전개되면서 모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윤곽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러기까지 몇 가지 징검다리가 있다. 여느 방문처럼 왔다 빨리 갈 수 있었는데, 노인이 생전 안 하던 말을 꺼낸다. 바로 노인이 넌지시 바라는 소망, 지붕을 고치고 싶다는 바람이다. '나'는 노인이 자신에게 무엇을 행여 해달라고 할까봐 매사 초조해했다. 서로에게 빚이 없다는 '나'의 강한 인식은 그 자신의 무결함을 강조한다. 소설 안에서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주벽으로 패가망신한 형의 뒤처리를 자신이 해야 했다는 억울함, 그리고 자신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많은 것을 상실해야 했다는 아픔 때문일 것이다. 소설에서는 그저 그런 일들이 있었다고만 언급되지만, 집을 잃어버리고 난 후 찾아간 골목에서 황망히 헤매던 소년의 발걸음에서 상실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역경들을 디디고 지금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자신이 장남의 책임을 건실하게 해냈다는 그 사실 하나야말로 그가 내세우는 정당성이자 동시에 생색내기다. 그는 혼자만의 계산속으로, 이때껏 자신이 당한 것, 억울한 것이 많음을 어머니도 알아서 자신에게 함부로 무엇이든 요구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어머니가 당신의 집도 지붕 개량 사업에 참여하면 어떻겠냐고 말하니 그는 입을 다물어버린다. 그는 꿋꿋이 자신이 빚이 없으니 아무래도 상관없고, 바로 올라가 버리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한 명의 인물이 더 있는데, 바로 아내다. 이 외부 인물이야말로 그 둘 사이를 매개하여 정확히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감정이 묻혀 있었는지 알려주는 일등 공신이다. 그녀는 끝없이 어머니에게 말을 거는데 그것이 다 남편으로 하여금 자신의 숨겨진 마음을 살펴보게 하려는 배려다. 자신의 마음을 꿍쳐둔 아들이나 모친이나 아내가 꾹꾹 찔러대니 그제야 진심이 흘러내린다. 노인은 귀여운 며느리가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에 대답하다 보니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게 된다. 반대로 아들은 관심도 없는 척 하지만 그 둘의 이야기에 귀를 한껏 쫑긋 기울이며 듣고 있다. 그리고 제발 아내가 그만 두었으면, 어머니가 그만 말을 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내의 대화를 통해 그도 기억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간다. 예전, 망해버린 집 앞의 골목으로 찾아와 서성대는 그를 거두어서 밥을 먹이고 재워 보낸 어머니와의 기억이 바로 그 과거다. 망한 집에서 아들을 위해 해준 일을 살펴보면 어머니의 상당한 정성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지금 그렇게 차갑다는 게 못 믿길 정도다. 하지만 아들의 입장에서는 그 이후로 본인이 겪은 고초가 여러 가지 있어서 어머니와 자기 사이에 빚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무엇이 더 있다. 바로 어머니의 심경이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숨기려 드는 못난 남편을 위해 아내가 그것을 파내려는 순간, 어머니도 망설이고, '나'도 헛기침으로 끊어낸다. 어머니에게 숨겼던 마지막 사랑의 빚을 아는 순간, 이때까지 의지해 온, 서로에게는 빚이 없다는 계산식을 뒤흔들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대화가 결국 터지고 만다. '나'가 졸음기에 빠져 그만 잠이 들었는데, 그 아들을 내버려두고 아내랑 어머니가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소설 안에서 어떻게 며느리와 어머니가 그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는지는 생략되어 있다. 필자는 그 부분이 참 인상 깊었다. 깜빡 잠에 들어버린 아들을 내쳐두고 둘이서만 이야기하게 된 것이 참 재미지면서도, 왜 그러한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깊은 속내로 들어가기까지 아들이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불가능해서 그러지 않았나 싶다. 아들도 그렇고 노모도 그렇고 그 정도로 깊은 사랑의 이야기, 숨겨 왔던 깊은 아픔과 슬픔을 서로를 두고 마주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며느리도 필요한 존재였다. 그들이 의식을 갖고서, 둘만 있을 때는 항상 할 수 없었던 이야기가 이제야 진심의 차원으로 진입한다. 어린 아들을 보내놓고 같이 걸었던 길을 혼자 돌아가던 어머니는 눈길에 난 발자국들을 보면서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앞으로 갈 데 없는 것을 걱정했던 것이 아니라, 잠시 부끄러움을 가라앉히고 갈 생각했다는 어머니의 황당할 정도로 강인한 모습은 아들의 얄팍한 계산으로도 숨기지 못할, 아들이 어머니에게 받은 엄청난 빚의 무게를 가리킨다.
감수성 좋은 독자라면 소설을 다 읽고 나서 흘린 눈물을 닦으며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모친에게 받은 빚이 너무나 커서 아들은 그걸 볼 수조차 없었다고. 그리고 독자는 각자의 어머니를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참 영리한 소설이다. 주제는 참 보편적인 것인데 기필코 그걸 숨기려는 아들의 이야기로 우리 안에 숨겨져 있던 어머니에 대한 부채의식을 긁어내니 말이다. 갚을 것 없다고 말하는 못난 아들과, 한사코 사양하고 숨기는 어머니의 답답할 정도로 강인한 체념이 동시에 호흡하는 이 무덤덤한 소설이야말로 어머니와 자식의 사랑 혹은 빚이라는 주제를 잘 형상화해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