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철학사론 - 세계상실과 자유의 이념
이규성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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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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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성실하고 세계에 충실했던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을 삶의 방향과 연관하여 고찰 - [한국현대철학사론] 2장을 읽고 박지원, 홍대용과 연결 지어서

 


 

  필자는 [한국현대철학사론] 2장에 나오는 대종교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박지원, 홍대용의 사상과 연결 지어 평가하기 전에, 우선 스스로가 지녔던 고민을 서론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 고민은 다음과 같다. 필자는 왜 철학을 공부하는가? 이유는 하나다. 신체기관을 멀쩡히 가지고서도 자신의 참된 의지로 그것을 움직이지 못하는 종속에서 탈출하고자 함이다. 삶은 언제든 감옥이 될 수 있다. 정신을 놓치고 살다보면 현대화의 급류에 휩쓸려 갈 곳 없이 길을 잃어버린 채, 발이 묶여서는 곧 자신의 향방마저 잃게 된다. 그 지점에서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 지 고민을 멈춘다면 우리는 주변의 거시적인 흐름을 아무 생각 없이 쫓아간다. 그것들을 쫓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가고 있는 이 길이 어디를 향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이 자신의 길인가? 이때까지 스스로 발걸음을 멈추어 생각하고, 판단하고, 따져보고, 마음먹어서 행동한 적은 있었던가? 생각조차 하지 않고, 고민조차 하지 않고 무작정 걸어온 것은 아닌가?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스스로에게 자율과 독립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 삶의 주인은 정녕 스스로가 맞는 것인가?

  철학은 사람으로 하여금 잠시 멈추어서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힘을 갖는다. 철학 공부의 의의가 바로 그곳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만약 철학 공부를 통해서도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 공부에 의미가 있는 것일까? 철학이라는 이름에 도취해 버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철학 속에서도 공허한 타인의 말들만을 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철학 공부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건설하려 했던 초심을 잃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러한 고민을 하고 있던 것이 바로 최근의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필자는 ‘한국철학’ 수업을 들으며 홍대용을 만났고, 박지원을 만났으며, [한국현대철학사론]을 읽으면서는 독립 운동의 최전선에 서있었던 대종교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고고히 비주류의 길을 택한 홍대용과 박지원, 일본의 압제 속에서도 자신들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대종교인들의 정신이야말로 철학 공부를 그저 허황된 남의 이야기로 만들지 않고, 현실의 행위로 변환시킨 진정한 선비의 그것이라 평할 수 있었다.

  대종교의 인물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혼란스럽고 격변이 심했던 시대인 1800년대 말과 1900년대 초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시기의 사람들은 몰려오는 국내외의 여러 문제들과 직면하였다. 기성 사대부의 부패한 세도 정치와 외부에서 밀려오는 국가적, 민족적 억압은 한반도의 사람들에게 심각한 위기이었다. 그처럼 경황없는 세태가 그들로 하여금 치열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고민을 멈추었다면 남은 선택지는 외부의 억압과 부조리한 권력에 굴복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많은 행동하는 지식인들은 굴복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미 그 시기에 한반도 내부에서는 신분제에 대한 회의와 저항의식, 개개의 개체를 그 자체로 정당하다고 옹호하는 정신 등이 동학 농민 운동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동학 농민 운동은 안타까운 실패에 봉착하였다. 이러한 실패를 딛고 민중적 지성들은 점차적으로 자신들을 짓누르기 시작한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으로 그 의지를 이어나간다. 대종교에 참가한 인물들은 외부적 측면에서는 나라와 민족 모두가 공존하며 상생하는 원리를 지향하였고, 내부적 측면에서는 한민족의 근원적 뿌리를 단군사관으로 삼는 문화적 기초 작업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실제로 당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지식인들 중 많은 수가 대종교에 사상적 근간을 두고 활동하였다.

  중요한 것은 그 때 당시 대종교인들과, 대종교에 관여한 독립 운동가들의 정신에 유가적 전통이 잠재한다는 점이다. 내외합일을 이룩하여 자신의 기초를 잡고 그를 바탕으로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유가의 살신성인하는 정신이 당시의 독립 운동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투쟁을 지속하도록 이끌었다. 그들의 이러한 자세는 홍대용, 박지원 같은 조선 후기의 실학파들이 지향한 선비가 가져야 하는 자세와 유사성을 갖는다.

  조선 후기 실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인 홍대용과 박지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이 속한 시대상을 알 필요가 있다. 당대에는 노론에 해당하는 주자학자들이 정파의 위치를 주장하며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그들의 편협한 습성은 당시 사회경제학적으로 불합리한 수취제제로 고통 받던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주자의 말을 숭상하고 예와 도에 천착하는 것 말고는 당시 급변하는 시대 정세에 그다지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옆의 청나라로 들어오는 새로운 문물들에 대해서도 명에 대한 절개를 지켜야 한다며, 청나라를 오랑캐로 쉽게 낙인찍고 경계했다.

  이러한 폐쇄적이고 답답한 시대 속에서 홍대용과 박지원은 사회 주도층이 무시한 백성의 실질적, 현실적 괴로움에 귀를 기울였다. 노론 명망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당대의 기준으로는 좋은 신분에 해당한 그들이 당시의 주류를 부정하였다. 그들은 기 철학을 바탕으로 주자학자들이 중시하는 초월적 이(理)가 아닌, 세상의 만물을 창조하는 무한한 기(氣)의 발현에 집중하여 현실의 세태를 중요시 하였다. 그들이 그러한 생각을 쫓아 그것들을 글로 남기고, 사회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이유는 그들이 선비들이 가져야 할 자세인 내적인 성실함과 외적인 충실함을 다하였기 때문이다.

  홍대용과 박지원, 이 두 학자가 속한 실학파와 대종교를 위시한 독립 운동가들의 공통점이 바로 유학에서 말하는 선비의 자세라고 볼 수 있다. 실학파와 독립 운동가들은 세상의 민초들이 내는 고통의 신음소리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소급해보면 유가의 근원이자 선현인 공자와 맹자의 정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무릇 선비라면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는 긴장된 의식을 지녀야 한다고 말했고, 맹자는 군주가 무엇을 즐기고자 한다면 백성과 함께 즐겨야 참된 가치가 있다는 ‘중락衆樂’,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정신을 이야기했다. 이 두 명의 이야기를 조합하면 선비는 백성과 민중의 즐거움을 위하여 정진하고, 노력하는, 그리하여 끝없이 긴장하는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긴장하는 사람으로서는 매사 경계를 놓지 말아야 하니 벅차고 고된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공자는 단호히 죽은 뒤에나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야 진정한 선비라고 말한다. 이러한 점을 보면, 막중한 책임의식과 사명의식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면 감히 스스로를 선비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가의 선비정신은 결연히 실학파와 독립 운동가들로 이어져 당대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발현되었다.

  하지만 처한 위치가 다른 만큼 실학파와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이 취한 구체적인 행동 양상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홍대용과 박지원은 당대의 사회경제적 측면에서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여러 이론을 제시했다. 그들이 이야기한 한전제와 같은 토지개혁제도가 그러하다. 그들이 대안을 내놓으려고 노력했다는 점은 높이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신분을 초월하여 더 넓은 차원의 평등을 이야기하지는 못했다. 박지원은 한전제를 이야기하며 토지 소유에 상한선을 두었다. 이는 그가 사대부의 권익을 인정하는 측면이 있었음을 보인다. 반면 대종교의 해학 이기는 토지 공개념을 주장하여 사적인 매매를 전면 금하고, 국가의 공적 매매만을 허용하는 급진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독립 운동가들이 실제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일제에 투쟁했다면, 홍대용과 박지원이 당대 사회 문제의 개혁을 위해 그 정도 차원의 실천을 보여주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독립 운동에 힘썼던 홍암 나철이 자신의 죄가 막중하다며 자살한 것과 비교해 홍대용, 박지원은 자신들의 사회 개혁적 사상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비교적 완만하고 애매한 식으로 글을 쓰는 경향이 있었음을 감안하면 특히 그렇다. 물론 시대상의 위급함이 어느 쪽이 더 중하고 급했나를 고려한다면, 홍대용과 박지원의 선비 정신이 독립 운동가들에 비해 부족하다고 쉽게 평가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들의 선비 정신이 1900년대의 대종교 독립 운동가들에 비하면 아직 신분적 질서에서 훨씬 덜 자유로웠다는 것을 파악할 수는 있다.

  박지원, 홍대용과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 사이에서 사상적 유사성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 될 수 있다. 그들은 기(氣)를 중심으로 하는 철학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현 세계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데 노력했다. 이(理)를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자들이 종종 이의 절대성을 강조하여 기(氣)의 측면을 위계상 아래의 것으로 보고 경시한 경향이 있는 것과 다르게 기 철학은 인간 개별을 옹호하고, 현실적인 측면에 중점을 두는 데 활용되었다. 또한 실학자들이나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이나 유가적 전통에 가장 충실하였다고 볼 수는 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적 근거를 불교, 도교, 양명학 등 유가 밖에서 찾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들은 유, 불, 도의 주요 개념을 가지고 고유한 내외합일의 관계를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의 맥을 나눈다.

  대종교의 인물 중 하나인 서우 전병훈의 경우, 그는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도교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가 해석한 [천부경]에서는 장자가 이야기한 내성외왕의 정신과 유사한 ‘겸성(兼聖)’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한다. 이는 초월적 수련과 정치적 실천을 종합하려는 방향을 의미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그는 신체를 다스리는 수련법을 익혀서 몸 안에 흐르는 생명 에너지를, 정신의 자유를 위한 형식으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다. 이처럼 대종교에서 인간의 몸 안에 내재한 생명원리를 그 자체에서는 완전한 것으로 긍정하고, 그를 바탕으로 외부를 향한 실천을 강조한 부분은 도가적이면서도 기 철학 중심적인 사고를 드러낸다.

  그러나 기 철학을 중심으로 하였다고 해서 대종교의 사상이 개별자들 각각에게만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다. 기 철학을 통해 행동해야 할 윤리적 실천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 전제가 되는 것은 인간이 만물의 모든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실천적 원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만유와 인간은 본원이 같고, 그렇기에 우주적 연대성이 윤리적 실천의 근본 원리로 작용해야 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더 나아가면 대종교에서 주장한 만민평등권과 인민주권론에 대한 지향, 공동의 연대 의식이라는 개혁적 성격도 엿볼 수 있다. 해학 이기가 민권의 보편적 원리를 심화해서 이야기한 것이 비슷한 맥락이다. 또한 실제로 대종교의 이러한 홍익인간정신,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그 생각이 대종교의 사람들로 하여금 단순히 민족적 차원에서 생각이 머물지 않고,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로 나아가게끔 하는 사상적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홍대용, 박지원의 경우에도 유가를 중심으로 하고는 있지만 불교, 도교, 양명학, 묵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홍대용은 철저한 주기론자, 그것도 기일원론자로서 궁극적인 생명원리는 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노장의 사상에 특히 영향 받았다. 노장 사상에 따르면 사람과 사물이 생겨나는 것이 천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천지는 광대한 공허이고, 시간과 공간 역시 그 시작과 끝이 없다. 그 텅 빈 곳을 가득 채운 것이 바로 무한량의 기(氣)다. 홍대용은 그 기(氣)가 내포하고 있는 생명력에 중점을 두었고, 만물과 인간이 동등하게 같은 기(氣)를 나누어 가진 것이므로 모든 것들의 기본은 같다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세계관에서 안과 밖의 구분은 무의미하며, 누가 더하고 누가 덜하다는 식의 차별과 위계의 원리는 통하지 않는다.

  박지원의 경우도 비슷하다. 노장사상과 불교의 영향을 받아 우주적 차원의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였다. 그러한 시야를 통해서 만물의 평등성을 이야기하는 개방적인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였고, 그를 바탕으로 당대 사회의 좁은 인습을 비판하였다. 신분 안에 존재하는 낡은 구분과 구별에 따른 폐단을 지적하고, 고통에 시름하는 백성들의 처지에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 과정에서 기(氣)의 발현인 우주 그 자체를 긍정하고, 맹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들의 식(食)과 색(色)이라는 본성 그 자체를 존중하여, 그것을 충족시켜주고 같이 즐길 줄 아는 것의 중요성에 눈 떴다.

  이처럼 실학파들과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이 기 철학을 중심으로 하려고 했던 이유는 그들이 처해있던 사회적 맥락이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대안 제시를 요구할 정도로 급박한 시국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理)를 인정하는 상태로 주기론적 입장을 견지하는지, 아니면 기일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는지와 상관없이 그들이 기(氣)라는 실체적 존재에 방점을 찍은 것은 부정적인 현실 세계를 빨리 바꾸어야 할 긴요한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당시의 세상이 도탄에 빠진 상황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주리론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성리학자들에게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기의 긍정과 그를 통한 자유와 평등성에 대한 이야기를 바깥에서 찾고, 검토함으로써 자신들의 사상을 주체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려 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실학파들과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은 크게 유교에서 지향하는, 세상의 일에 근심하며 백성과 사회를 위해 열과 성을 다해 항상 긴장하는 선비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 또한 그 사상적 바탕을 기(氣)에 방점을 둔 철학으로 삼고, 동시에 다른 사상이나 학파에서 이야기하는 평등성과 겸애 같은 중요한 정신을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자기들의 것으로 삼은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크게 본다면, 당시 사회에서 개방적이고 개혁적이었던 실학파 홍대용과 박지원의 주체적인 기 철학자로서의 면모가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에게 계승되어 독립 운동이라는 자립적이고 굳건한 활동과 한민족의 시조로 단군을 삼은 종교적인 색채로 발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를 통해 우리가 삶의 방향성으로 취할 수 있는 지점은 무엇인가? 홍대용, 박지원이 당시의 시대 맥락에서 실학을 주장한 것과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이 압제 속에서 자신들의 철학을 지켜낸 것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다시 우리의 현실 문제와의 연결고리로 나아갈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그들처럼 사는 것은 매우 지난하고 힘겨운 일일 수 있다. 특히 대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식의 노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사회적 활동을 멈추고 ‘무상’의 본원으로 수렴하는 자기변형의 노력을 요구한다. 그렇게 생명의 본원에 접한 자는 차별성이 없는 본원의 덕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다시 현실적 상황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친 내적 수렴과 외적 활동의 종합적 구조는 언뜻 들어서도 고차원적이고 부단한 수행을 전제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을 과연 소수의 지식인이 아닌 만민이 해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기 위한 굉장한 주체성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러한 정도로 힘든 수행을 담보하여야 얻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떠받들고 존경하는 독립 운동가들이 그러한 주체적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과연 그렇게 자신의 몸을 던져 주권을 수호하고 자유를 쟁취하려는 행동을 취할 수 있었을까? 홍대용과 박지원이 세상의 불의와 불합리함, 부조리함이 버겁다는 이유로 그 답답한 시세에 지성과 주체성을 팔고 노론 대작으로 살았다면 지금과 같은 의미로 우리에게 남아 있었을까? 그들이 쉽게 포기했다면, 우리가 그들의 삶에서 배울 점이 남아 있었을까?

  그들의 삶에 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그들이 남의 삶을 살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시대를 초월한 어떤 종류의 정신성을 쫓지 않았고, 시대 속에서 호흡하면서 그 시대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만 하는 실천을 쫓았다. 그것이 그들이 바탕으로 삼은 기 철학에서 비롯되었다. 세계와 자신들의 위치가 서로 어긋나 있다 하더라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변형시키고, 그를 통해 세계를 변형시키려는 최선을 다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내적인 곳에서는 성실성을, 외적인 곳에서는 충실함을 다하려 한 자세와 관련이 있다. 홍대용과 박지원은 자신들의 시대적 맥락 안에서 끊임없는 저술 활동과 대안 제시를 위한 공부를 통해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였으며,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 목숨을 위협받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정신을 통해 습득할 수 있는 깨달음을 대종교 윤리 교훈집 [참전계경]의 한 구절과 연관 지어 이야기하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안주하는 생각은 크게는 인간의 본성을 멸하고, 작게는 의지를 멸할 수 있다. 본성과 의지를 다 멸하면, 존망을 분별하지 못한다.(安念者, 大可滅性, 小能滅志, 性與志俱滅, 存亡難辨.)”

  무너지지 않는 의지로 본성을 실현시키는 데 있어서 독약인 것은 안주하는 생각이며, 안주하는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남들의 말에 휩쓸려 자신의 목소리를 잃는다는 것과 같다. 그러한 처지에 놓인 사람은 자신이 죽고 사는 존망의 문제조차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길을 잃어버린 처지와 같다. 우리 역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안주하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비록 고난의 여정일지라도,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어느 날 죽어버리는 인간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끝없이 현실의 문제들을 살피며 자신과 세계에 성실함과 충실함을 다하여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라면 충분히 유의미할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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