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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ㅣ 청목 스테디북스 64
이상 지음 / 청목(청목사)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학교 과제로 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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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함으로 날개를 부르짖은 청년의 이야기 - 이상의 「날개」를 소설의 구성요소 중 작중인물의 이해와 서술자의 종류를 바탕으로 분석
이상의 대표작인「날개」의 주인공 '나'는 언뜻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의 행동은 전반적으로 괴이하다. 멀쩡한 젊은 청년이라고 보기 힘들다.「날개」의 독자들에게는 작중인물인 '나'를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대체로 초점은 ‘나’에게 맞추어져 있고, 그가 풀어놓는 이야기만이 독자가 가진 실마리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꼼꼼히 살펴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파악이 쉽지 않다. 작가 이상의 성격이 독특하고 개성적이었던 만큼 그의 작품 속 인물 역시 한 편의 수수께끼 같다.
이상은 소설「날개」의 ‘나’라는 인물을 구현하는 데 있어 크게 두 가지 접근법을 취한다. 하나는 보여주기 방식이다. 이상이 인물의 행동을 보여줄 때는 주로 ‘나’가 위주이며, 다른 인물들의 행동 묘사가 보이는 경우는 ‘나’가 등장하는 장면과 관련할 때뿐이다. 인물들의 특정한 행동이 이루어지는 데 있어 그 이유를 부연설명 하는 법은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나’를 둘러싼 여러 상황들을 간접적으로 추측하게 된다. 어느 것도 명확한 형태를 가지고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접근법은 의식의 흐름을 통한 내면 묘사다. ‘나’의 의식이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을 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날개」를 읽으면서 ‘나’의 적나라한 의식과 마주한다.
이 두 가지의 접근법은 단순하게 이등분으로 구별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기보다는 서로 엮여져 있는 상태로 ‘나’라는 인물을 형상화한다. 인물의 행동과 내면 묘사가 한데 섞여 펼쳐지는 쪽에 가깝다. 그러한 작가의 묘사방법을 통해 독자가 그려낼 수 있는 '나'라는 인물은 기본적으로 소리 내어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생각만 한다. 생각도 단편적이다. 외부의 자극에 순간적으로만 반응한다. 어느 소설에서도, 어느 이야기에서도 이처럼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젊은 남성을 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무기력한 인물이 많다 치더라도, 자신의 무기력함에 아무런 감정조차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은 드물다. 그는 자기의 행동을 변명하지 않는다.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한 지점이「날개」의 주인공 ‘나’를 독자로 하여금 비정상적이고 인상적인 인물로 기억되게 한다.
‘나’에게는 자존심도, 이해력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속없다는 점에서 마냥 어린아이 같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얼마나 예민한 존재인지 안다면 그러한 비유도 적절하지는 않다. 그는 아내가 키우는 한 마리의 개 같다. 자아가 없는 것 같다. 아내가 반찬을 부실하게 챙겨주면 군소리 없이 그대로 받아먹는다. 그래서 쪽쪽 말라간다. 아내가 옷을 챙겨주지 않으면 또 그대로 옷 한 벌을 입고 다닌다. 코르덴 양복 한 벌로 잠도 자고 밖으로 외출도 한다. 그는 어쩌다가 한 번씩 아내를 찾아오는 내객들의 정체를 궁금해 한다. 내객들이 아내에게 돈을 지불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하지만 질문은 일회성에 불과하다. 그 이상 더 나아가지 않는다. 물음은 연장되거나 심화되지 않는다. 회피해버린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노라면 으레히 내 머리는 그냥 혼란하여 버리고 하였다. 잠들기 전에 획득했다는 결론이 오직 불쾌하다는 것뿐이었으면서도 나는 그런 것을 아내에게 물어보거나 한 일이 참 한 번도 없다. 그것은 대체 귀찮기도 하려니와 한잠 자고 일어나는 나는 사뭇 딴사람처럼 이것도 저것도 다 깨끗이 잊어버리고 그만두는 까닭이다.(17)”
‘나’는 천치처럼 군다. 그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아내가 자신에게 아달린을 먹여 온 것을 알고 물어보러 집에 들어온 그는 "내 눈으로는 절대 보아서 안 될 것을 그만 딱 보아 버리고 만 것이다.(34)"와 같은 상황에 부딪친다. 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이 소설 안에서 아내가 내객과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는 결국 자세히 언어화되지 않는다. '나'의 사소한 일거수일투족, 그가 아내의 화장품에 비치는 빛들을 갖고 놀고, 불장난 치는 것 따위는 상세하게 다루어진다. 그가 이불 안에 들어가서 사색하고, 게으른 동물로 사는 이야기도 친절히 다 나온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흐릿한 한 문장으로만 넘어 간다. 아내는 내객과 함께 있을 뿐, 정확히 어떻게 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나’의 말에 의하면 아내는 내객과 자신이 같이 있는 모습을 '나'가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생기면 아내는 꼭 화를 낸다. 그래서 '나'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래서 나는 보면 아내가 좀 덜 좋아할 것을 그만 보았다.(30)"고 하는 식으로 표현한다. 그 장면은 ‘보지 말아야’ 하는 것이고, ‘아내가 안 좋아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묘사에서 짐작할 수 있는 점은 ‘나’ 자신의 가치판단이 미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나’가 그러한 장면을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가 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제시된 금기나 선을 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뉘앙스가 된다. 무력하고 나약한 ‘나’는 자신의 물질적인 생존을 아내에게 완전히 맡겨버린 것처럼, 남성으로서의 자존심도 아내에게 미뤄버린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자는 ‘나’라는 서술자의 진술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 사회를 스스러워 하고, 인간의 삶을 스스러워 하는 그가 마치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과연 진심인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그러한 지점에서 필자의 생각에 ‘나’는 신빙성 없는 서술자이다. '나'는 선택적으로 상황을 본다. 이야기를 할 때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위에 쓴 것처럼 아내와 관련해서 자기가 보고 싶지 않은 점은 최후까지 보려 하지 않는다. “뒤이어 남자가 나오는 것 같더니 아내를 한아름에 덥석 안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35)” 정도의 상황이 되어서야 ‘나’는 아내가 “밉다”(35)고 말한다. 그제야 그의 속내가 간신히 드러난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미움도 잠시, 아내가 억수 같이 퍼붓는 독한 말들에 그는 망연자실하여 도망쳐버린다. 어디를 돌아다니는지도 모르게, 어떻게 갔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얼이 빠진 상태로 돌아다니다가 스스로의 자아에 질문을 던진다. “너는 인생에 무슨 욕심이 있느냐고.(36)” 하지만 그는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조차도 어려웠다.”는 말로 자신의 질문에서 또 한 번 도망친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한다. 직시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날개」의 결말은 비극적이다. 그는 자신과 아내를 ‘절름발이’로 묘사한다. 그와 아내 둘 다 사지가 멀쩡하다는 점에서 그러한 비유는 일종의 자기합리화이다. 어디 딱히 문제가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나’가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딱지 붙이지 않는 한 스스로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점을 변명할 길이 없다.
이 글을 최종적으로 정리하자면, 이 소설은 겉보기에는 한 사람의 철저한 미약함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미약함이 아닌 욕망에 방점이 찍혀져 있다는 게 필자의 결론이다.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삶에 갖는 욕심이나 욕망은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는 항상 아내에게 지고, 아내 위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자기 자신은 거세시키고, 지워나간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이 한 편의 총체적 역설처럼 느껴진다. 무능과 무력, 나약함과 미약함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오히려 한 청년이 자신의 생에 갖는 괴로움과 아내에 대한 애착이 엿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에게 사실 욕망이 죽지 않고 살아있음이 소리 없이 드러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자신에게 사라진 인공의 날개가 다시 돋아나서 한 번 더 날아보길 바란다. 날개 없는 그가 취할 수 있는 선택권은 그 어디로도 날아가지 않는 것, 무력하게 제자리에 쓰러져 있어야만 했던 것뿐이었다. 날개 꺾인 새는 언제나 날고 싶어 하기 때문에 날고 싶다는 소리조차 차마 낼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짐작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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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날개(이상 단편집)』, 청목, 200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