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몸과 소통하라 - 30년 젊게 사는 비법
최창수 지음 / 바른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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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관이다. 남자는 20대 얼굴이 기초설계고 60대 얼굴이 완성인데 여자는 20대 얼굴이 완성이고 60대는 폐허라고 했나? 몸과의 소통도 전부 쓸모없고 당연한 이야기였다. 나는 저자에게 시대와 소통하라는 충고를 하고 싶다. 돈을 안 썼으면 이런 말의 업도 남기지 않을 텐데 돈을 썼으니 차마 아까워 말을 안 남길 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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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가 빛나는 순간, 마이 테이블 레시피
박수지 지음 / 그린쿡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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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요리계의 명작 에세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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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 시장 상품 인간을 거부하고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
이반 일리치 지음, 허택 옮김 / 느린걸음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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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말이 계속 무한재반복 된다. 같은 뜻을 가진 문장이 계속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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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와 처벌 - 감옥의 탄생, 번역 개정판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 나남출판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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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부제 : 감옥의 역사)”을 읽고

나야 푸코 좋아한 계기는 어렸을 때부터였다. 우리 집 책장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했던 작가 중 하나였다. 제목은 말할 것도 없고(성의 역사, 감시와 처벌, 비정상인들..) 벗겨진 머리에 딱딱한 안경을 쓰고 매섭게 쳐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 강렬했다.
그뿐 아니라, 아주 어릴 때 책을 딱 펼쳤는데, 푸코가 남성 간 목욕탕에서의 집단 성행위가 인상적이었다고 기술하는 부분이 나왔다. 정말 좀처럼 잊을 수 없는, 도발적인 사람이었다.

나중에 머리가 크고 푸코의 글을 읽은 이후로, 나는 그가 나와 시공간을 뛰어넘어 공명한다고 진지하게 믿어왔다. 다른 사람이 쓴 모든 글이 내 사고와 “똑같다”고 느끼는 순간은 정말 많지 않다. 그는 20세기 중반을 살다가 에이즈로 죽은 프랑스인이고, 나는 21세기 초반을 살아가는 한국인인데, 그가 나와 같은 생각을 몇 십 년 전에 먼저 다 말해놓았다.

학교 철학과 와보니 푸코 사랑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푸코를 아주 좋아했다. 개인적으로 푸코에 대한 이해를 높인 가장 중요한 계기는 김애령 교수님의 수업이었다. 선생님 밑에서 니체 다음으로 푸코 수업을 들었다.

니체나 푸코나 작업의 본질은 비슷하다. 우리가 현재 너무나 당연하다고, 자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추적해 올라가며 그것이 다 만들어진 구성물들임을 밝힌다. 하나의 가치가 견고해지기 전까지의 은폐된 전략과 투쟁의 역사를 까발린다. 니체가 서양 기독교의 위치의 절대성을 도발했다면, 푸코는 현대사회의 개인들이 탄생한 그 과정을 집요하게 바라본다. 내가 해석하기에, 그의 질문은, “나”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한다.

“감시와 처벌”은 공권력과 같은 집단권력(사회권력, 혹은 기득권을 잡은 권력)들이 자신에게 저항하거나 반하는 존재들을 어떻게 다스리고, 통제하는지 관찰한다. 과시하는 신체형을 가졌던 옛날의 처벌구조는 이제 보이지 않는 구속과정과 감옥이라는 공간적 격리, 형벌 시간을 채우게 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회를 박탈하는 형벌 체제로 넘어간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지식인들은 권력에 종사하는 담론들을 통해 ‘문제자’들을 진단하고, 치료하고, 규정한다. 애초에 많은 지식들 자체가 이 사회의 유지를 위해 태어났으므로 그들의 권력을 향한 종사가 놀랄 일은 아니다.

그보다도 가장 효과적이고 두려운 현대사회의 권력 효과는 집행자들의 행위에서 오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한 번 쉽게 표현해본다면, 최순실이나 박근혜가 무서운 것이 아니다. 최순실이나 박근혜를 가능하게 한 우리 자신의 기계적이고 무비판적이었던 정치 인식과 그에 따른 일상적 행위들이 무서운 것이다. 권력 효과의 대상들은 자기 자신을 검열하고(정치 이야기는 자유롭게 해서는 안 된다는 둥의 이야기들) 심지어 그 권력이 미시적으로 수행되는 통로를 자처하며, 그 힘을 대신 발휘해주는 재생산의 수단으로 전락한다.(돌아가신 할머니는 틈만 나면 나에게 말했다, 여자는 부자한테 시집가면 제일이라고. 가부장적 사회의 남성 위주의 사고방식을 할머니는 정말 충실히 수행해냈고, 본인부터 일평생 그에 기대어 생존했다.) 즉 스스로가 스스로를 사회의 특정 권력에 맞춰 부위별로 생산하고, 제작해내는 것이야말로 권력이 하는 통제의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화이다. (나는 “한국 남성/여성”이기 때문에 ~~해야 하며, 어느 집의 “무슨” 씨로서 ~을 해야 한다 등등...) 이에 따르면, “나”의 신체는 외부에서 오는 수많은 관념적 권력 혹은 지향성들의 힘겨루기 장으로 전락한다. 성찰이 없다면 타인/타 권력의 꼭두각시나 거수기 되기 딱 좋은 것이다.

푸코가 예를 든 군대, 학교, 감옥은 그러한 꼭두각시/인간 거수기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철저한 정신 세뇌를 육체로 수행시키지 못하는 존재는 쓸모없다. 이 세 군데는 인간의 영혼을 철저히 습관적이고 만성적인 것으로 길들여 그들의 육체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꿔낸다. 군대의 숨 막힐 듯 개인을 억압하는 체계(한 명의 예외도 용납하려 하지 않으며, 옆에 있는 동료를 웃겨서도 안 되는), 학교 교실의 자리 배치, 시간표의 엄격한 준수, 그리고 감옥에서의 하루 일과표는 인간 개별로 하여금 여러 규칙들을 던져준 다음 그 규칙에 인간 스스로가 알아서 맞춰가도록 ‘배려’한다. 그것에 실패하는 사람들은 낙오자, 관심병사, 구제불능의 범죄자가 된다.

하지만 감시와 처벌은 학교나 군대, 감옥 같은 곳에서만 기능하지 않는다. 오늘 날, 우리가 표방하는 민주사회가 어쩌면 푸코가 설명하는 그러한 억압된 권력기관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가장 은밀한 개인의 공간을 만들어 낸 현대인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모든 행위는 추적되고, 기록되고, 관리된다.

더 큰 문제는, 이 시대의 모든 것이 파편화되고 개인화되어, 이제 우리에게는 공격할 대상도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거대한 불의는 자취를 감추었다. 운동권의 추억에 살고 있는 세대에게는 젊은 우리의 무력함을 무능으로 받아들이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모든 것이 허용된 자유의 시대로, 이 자유가 가능한 전제조건은 오로지 자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본을 향한 끝없는 마라톤에 참가하게 된지 오래며, 우리 대한민국의 부모들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가르쳤기에 사교육에 아낌없는 돈을 투자했다.

자본을 앞세운 권력의 가장 효과적이고 치명적인 지점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와 접하여 모든 자유를 허용하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렇기에 모든 사람들이 돈에 종속되었다.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는 가끔 매우 흥미롭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돈의 증식과 사용에 관한 권리를 개인의 자율영역에 해당하는 것처럼 주장한다. 생존의 필수가 된 돈, 자본은 새로운 절대적 가치가 되었지만 이것조차 환상이다. 그 부의 축적 과정과 돈이 정당화된 과정 자체가 완벽한 자유를 바탕으로 생겨나지도 않았으며, 불평등함을 전제로 하며, 수많은 권력들의 셀 수 없는 전략과 투쟁으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어야 한다. 돈의 부재를 상상할 수 없는 우리는 그 기원을 추적하여 돈의 부재를 이야기하는 새로운 사회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사실 본능적으로 여기까지 도달한다. 논리적일 뿐 아니라 사회에 대한 관찰력이 있는 사람들은 푸코가 한 이야기를 그렇게 새롭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든 것이 권력의 강약과 그 줄다리기로 탄생했다는 이야기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그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권력을 이해한 다음, 권력 안에 자기 자신을 순응시킨다.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물론 나도 어느 정도 그러한다. 예를 들어서, 감옥이 그렇게 인간을 길들인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학교가 그렇게 학생들을 대량생산해낸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그것의 전면적인 폐지를 쉽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만큼 대안을 쉽게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반역은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misinterpellation, ‘잘못된 호명’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본다. 최근에 접해서 읽고 있는 또 다른 책의 개념인데 알튀세르의 호명이론에서 영향 받았다.

나는 이 개념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는데, 감시와 처벌을 읽으며 이 이야기가 어디로 가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권력의 한계, 권력이 모든 완벽한 디자인을 고안해 자신의 효과적 전략을 짜냄에도 불구하고 절대 피할 수 없는 하나의 틈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시야에서도 잡히지 않는 한 시점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심지어 권력의 체계가 순수하게 완전하다 치더라도, 새로운 상황과 맥락을 만나면, 탈출구가 없도록 만들어진 그곳에 그제야 탈출구가 생길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푸코는 거기까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이 모든 권력의 웅성거림들을 기록하였다. 그에게는 그 웅성거림을 입증하고 고발하는 것이 중요했으며, "감시와 처벌"은 그 증거록이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비판과 성찰을 몸소 행위한 위대한 활동가이다.

[책의 발췌]

<역자 서문>

p7 - 계보학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전통적인 역사서술 방법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역사에 있어 고정된 본질이나 심층적 법칙, 형이상학적 결말 혹은 도달할 수 없는 진리의 의미가 있다는 논리를 부정한다. 그것은 의미, 가치, 진리, 도덕, 선 등의 개념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들 속에 감추어진 권력의 전략, 지배와 복종, 억압과 전투의 관계를 파헤친다.

p8 - 그것은 궁극적 진리나 절대적 앎을 전제로 한 헤겔적 이성의 계보학이 아니라 해석의 가능성이 끊임없이 열릴 수 있는 니체적인 계보학이다.

p12 - “규율은 개인을 ‘제조한다’”

p13 - 권력이 인간 속에 침투해 들어가고 인간관계 속에서 행사되는 것이라면, 인간을 대상으로 한 지식은 그러한 권력관계 속에서 생성된다. 그런 점에서 중성적이거나 순수한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p14 - 개인은 원자처럼 분리되었고, 타자와의 연결은 파괴되었으며, 공동체의 연대의식이 분열되어 온 역사적 과정은 바로 권력에 의한 주체의 개체화 과정이었다. 근대국가는 개인을 무시하지 않고, 그런 점에서 오히려 끊임없이 개인을 생산해 온 셈이다. 국가는 그런 점에서 가장 개체주의적이며 동시에 가장 전체주의적인 권력형태를 표현하고 있다. ... 주체적 자유를 박탈당한 이 비극적 상황에서 인간은 어떻게 존엄성을 회복하고 진정한 주체로서의 힘을 되찾을 수 있을까?

<본문>

p32~33 형벌의 집행은 자율적인 영역이 되어가고 행정기구는 사직당국이 감당하던 영역을 면제해 주게 되어, 사직 쪽은 형벌의 관료정치적 은폐의 도움으로 그 막연한 불쾌감에서 벗어날 수가 있게 되었다.

p45 사람이란 공격적 행위에 대해 재판하지만, 그것을 통해 공격적 성향을 재판하는 것이다. 강간을 재판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성도덕의 타락을 재판하는 것이고, 살인행위를 재판하면서 충동이나 욕망의 행위를 재판하는 것이다. ... 참으로 재판받고, 처벌받는 것은 소송 요인의 구성요소들 배후에 있는 그러한 그림자(욕망이나 충동들)이기 때문이다.

p47 - 즉 범죄자의 ‘정신’을 재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p51 - 그렇다면 형사사건에서의 정신과 의사의 역할은 어떤 것일까? 그는 ‘책임능력’에 관한 감정인이 아니라, 처벌에 관한 조언자이다.

p58 - 그 권력은 소유되기보다는 오히려 행사되는 것이며, 지배계급이 획득하거나 보존하는 ‘특권’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전략적 입장의 총체적인 효과이며, 피지배자의 입장을 표명하고, 때로는 연장시켜 주기도 하는 효과라는 것이다. 한편, 이 권력은 ‘그것을 갖지 못한 자’들에게 다만 단순하게 일종의 의무 내지 금지로서 강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 권력은 그들을 포위공격하고, 그들을 거쳐가고, 그들을 통해서 관철된다. 더구나 그 권력은 그들을 거점으로 삼는 것이다. ... 바꿔 말하면, 이 권력의 여러 가지 관련은 사회의 심층 속으로 내려가 있어서, 시민에 대한 국가의 모든 관계의 내부와 계급 간의 경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니다.

p61 - 정신은 실재하며, 그것은 하나의 실재성을 갖고 있고, 정신은 신체의 주위에서, 그 표면에서, 그 내부에서, 권력의 작용에 의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권력이야말로 - 보다 일반적으로는, 감시받고 훈련받고 교정받는 사람들, 광인, 유아, 초등학생, 피식민자, 어떤 생산기구에 묶여 살아 있는 동안 계속 감시당하는 사람들, 그러한 모든 사람들에게 행사되는 것이라고. 정신의 역사적 실재성이라고 할 때, 그 정신은 기독교 신학에 의해서 표상되는 의미에서의 정신과는 달리, 태어나면서 죄를 범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처벌, 감시, 징벌, 속박 등의 소송절차를 거쳐 생겨나는 것이다. 

p62 -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그 인간, 그리고 사람들이 해방시키도록 노력하고 있는 그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이미 그 자체에서 그 인간보다도 훨씬 깊은 곳에서 행해지는 복종화의 성과인 것이다. 한 영혼이 인간 속에 들어가 살면서 인간을 생존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것은 권력이 신체에 대해 행사하는 지배력 안의 한 부품인 것이다. 영혼은 정치적 해부술의 성과이자 도구이며, 또한 신체의 감옥이다.

p86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범죄의 진실과 재판관의 잘못을, 범죄자의 선량성과 악랄성을, 인간의 심판과 신의 심판 사이의 일치 또는 차이를 의미할 수 있는 고통의 양면성인 것이다. 그 점에서 처형대와 구경거리로 만든 고통을 주위에서 가까이 보고 싶게끔 관객을 부추기는 저 끔찍한 호기심이란 것의 근거가 있다. 사람들은 거기서 범죄와 무죄를, 과거와 미래를, 이 세상과 영원한 세상을 판독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 순간은 모든 관객은 궁금해하는 진실을 알 기회인 것이다.

p197 독방은 수형자가 나쁜 영향을 받지 않고 자기 반성을 하여 자기의 양심 속에서 선의 목소리를 재발견할 수 있는 ‘무서운 충격’의 효과를 자아낸다는 것이다.

p209 신체형을 당하는 육체, 자신에 관한 표상이 조작되는 영혼, 훈육을 받는 신체, 이러한 구성 요소들로 이루어진 세 가지 계열이야말로 18세기 후반에 상호 충돌하는 세 가지 형벌 구조의 특색을 이루는 것이다. ... 그것들은 처벌의 권력이 의존해서 행사되는 방식들로서의 세 가지 권력 기술론이다.

p214 이러한 구속은 습관이라는 무의식적인 동작을 통하여 암암리에 그 작용을 계속하게 된다.

p215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분석 가능한 신체에 조작 가능한 신체를 결부시키는, ‘순종’이라는 개념이다. 복종시킬 수 있고, 쓰임새가 있으며, 변화시킬 수 있고, 나아가서는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신체가 바로 순종하는 신체이다.

... 어떤 사회에서나 신체는 매우 치밀한 권력의 그물 안에 포착되는 것이고, 그 권력에 신체의 구속이나 금기, 혹은 의무를 부과해 왔다.

p231 그러한 공간 편성에 의해 각자의 자리가 정해지면서,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통제와 학생 전체의 동시학습이 가능해졌다. 또한 학습시간에 대한 새로운 경제적 방안이 마련되었다. 학교의 공간이 교육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감시하고 위계질서를 세우고, 상벌을 부과하는 하나의 기관으로서 기능하게 된 것이다.

p233~234 규율은 ‘독방’, ‘자리’, ‘서열’을 조직화함으로써 복합적인 공간을, 즉 건축적이면서 동시에 기능적이고 위계질서를 갖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자리를 고정시키면서, 또한 자리이동을 허용하는 공간이다.

p300 봉건제도가 바로 그러한 예가 될 수 있는 사회에서, 개인화는 군주권이 행사되는 편에서거나 권력의 상층부에서 최상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그런데 규율 중심의 체제 안에서는 개인화가 오히려 ‘하강 지향적’으로 된다. 즉, 권력이 더 익명적이고 기능적으로 됨에 따라 권력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되는 사람들은 한층 더 분명히 개인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p351 감옥 형태는 형법에서 체계적으로 활용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 개인들을 분류하고, 그들을 공간 안에 고정시키고 배분하며, 그들의 등급을 매기고, 그들로부터 최대한의 시간과 최대한의 신체적 힘을 끌어내고, 그들의 육체를 훈련하고, 그들의 연속적인 행동에 규칙을 부과하고, 그들을 빈틈없는 가시성의 테두리 안에 가두고, 그들 주위에 온통 관찰·등록·평가의 장치를 조직하고, 그들을 집중적인 조사의 대상으로 삼아, 축적된 지식을 형성하기 위한 여러 소송 절차가 사회 전체를 가로질러 치밀하게 구상되었을 때, 사법 기관의 외부에서 감옥 형태가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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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트러블 -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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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책 후기를 빙자한 나의 페미니즘 이야기 -

학부 때 철학 책을 보며 이 사람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다고 느낀 사람이 딱 두 명 있다. 하나가 미셸 푸코, 다른 하나가 주디스 버틀러다. 여성 없는 페미니즘, 그 사상을 주디스 버틀러와 내가 공유한다.

(1) 최근 누군가가 트랜스젠더는 여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성 염색체 XX만이 여자라는 요지였다. 우리나라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트랜스젠더로 거의 유일한 하리수씨가 글을 썼다. 논리적 반박은 아니었고, 감정적 대응에 가까웠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신이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다는 말이었다. 트렌스젠더로 유명한 그녀의 그런 이야기가 내게는 정말 흥미로웠다.
아무튼, 이 사태에서 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바로 ‘여성’이 누구냐의 문제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여성이라는 카테고리 자체가 매우 헐거운 것이며 그 단어가 묶는 개체들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차이를 지워버린다고 말한다. 부자인 여자, 못 사는 여자, 공부 잘 한 여자, 운동 좋아하는 여자 등등, 이 모든 차이점들에도 우리는 어떤 존재들이 여자라는 것을 단 번에 파악해서 분류하는 데 성공한다.
나는 그에 대해 항상 의문을 가져왔다. 내가 사회에 의해 여성이라고 규정되어 온 것은 맞다. 나도 꽤나 사회의 젠더 체계에 순응적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나는 항상 의아했다. 예를 들어, 왜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한 성별만을 ‘당연히’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같은 질문들 말이다. 불확정적인 세상을 살며 다들 자기 자신의 취향을 그렇게 무비판적으로 긍정하며 산다는 게 꽤나 신기했다. 나 스스로는 솔직히 말해서, 내 운명의 짝이 여자라고 해도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한 가지 더 붙여, 나는 콤플렉스도 가지고 살고 있다. 내가 ‘여성’이라고 하던데, 별로 여자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여성성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이중적인 감정을 갖는다. 어렸을 때부터 장군감이라느니 같은 소위 ‘남성적 기질’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불려왔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탈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여자 같은’ 행동들과 여러 취향들을 스스로가 연습했다. 그게 주디스 버틀러가 말하는 반복적 행동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여자’라는 어떤 이상점(이데아)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노력해봤자 나는 결코 그것이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여자’조차 만들어진 관념물이기 때문에. 내가 생각한 ‘여자’란 개념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여자’일 것이기 때문에. 그걸 주디스 버틀러의 책을 읽으며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나의 기질과 사회가 규정하는 여자라는 기질, 그 두 가지를 섞어 ‘내’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보면, 일단 나는 나의 어떤 부분에서 여자를 ‘선택’한 것 같다.

(2) 페미니즘에 관해서 최근의 격렬한 논쟁들은, 아마 그것에 관해 갖는 상(image)가 모두 다 다른 것 같아 그럴 것이다. 내게 페미니즘 관련해서 그 지향점은, 주디스 버틀러가 말한 것처럼, 성별의 구분법조차 만들어 내어 우리를 관통하는 만들어진 위계질서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 위계질서 안에서 남자와 여자 둘 다 내게는 다 같은 권력의 적용대상들이다. 그 위계질서가 남자와 여자의 행동양식을 결정하고, 어떤 성별을 좋아할 것인지 정해주고, 어떻게 행동할지조차 규정하는 이 사회(남자는 부엌에 들어가서 음식하면 남성성이 저하된다, 여자는 정치적 의견을 말하면 안 된다)에 다 적용된다. 우리는 모든 성별을 얽어매는 이 구분양상에 저항해야 하는 것, 어떤 한 가지 성별만이 아니라 섹스와 젠더를 규정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욱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여자는 여자를 사랑하면 안 되고 남자는 남자를 사랑하면 안 되고, 여자가 남자가 되면 안 되며, 남자가 여자가 되면 안 되는) 그 상황의 탈피가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다.

(3) 현재 우리 사회에서 발생되는 문제는 ‘김치녀’와 ‘한남’이 같냐의 문제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한남’을 ‘김치녀’와 같은 남성의 여성혐오 단어에 대항해서 나온 무기라고 인식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 두 단어가 똑같이 다른 성별을 혐오하는 폭력적인 단어라고 인식한다. 이 두 지점의 위치가 극명해 균열의 소리도 크다.
일단 밝히고 싶은 지점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 내가 미러링 전략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주디스 버틀러가 이야기하는 패러디의 개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쪽이 하는 차별과 혐오를 다른 맥락으로 전시하며, 자기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자성하는 힘을 준다면, 그것이 미러링 전략의 좋은 효과일 것이다. 두 번째 인정하는 지점은, 우리 사회의 기본 성별 위계질서가 특정 사회적 성별/젠더(여성, LGBT 등)에 가혹하다는 것이다. 이성애 남성이 사회에서 주도적으로 차지해온 위치는 분명 역사적인 것이며, 그것이 이성애 남성을 제외한 다른 젠더들에게 미쳐온 억압이 꽤나 크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젠더가 항상 ‘정상/적격’의 위치를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신분차별이 있던 옛날에 높은 신분에서 남성이 정치참여권을 가졌던 것 등)
그러나 현재 개인적으로 ‘김치녀’, ‘한남’, 이런 표현이 나에게는 다 똑같이 들린다. 어떤 맥락에서 그것이 효과적인 무기가 되었던 적도 있고, 그럴 수도 있지만 지금은 무차별적으로 서로 단어 남용 밖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래 기사의 일본 교수가 한 말을 인용해보고 싶다.


"(여성혐오 문화에 대응하는 하나의 전략으로서 미러링 mirroring에 대해) 언어학적으로 보면 '패러디'라고 할 수 있다. 상대의 언어를 빼앗아, 그대로 되돌려준다는 뜻이다. 패러디는 물론 싸우는 도구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패러디를 하면 본인의 레벨을 상대의 레벨로 낮추게 되는 결과도 낳을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젠더간의 압도적인 권력 차이를 생각해 볼 때 '미러링'은 적절한 전략이라고 할 수 없다. 남성들이 남발하는 반동적인 전략에 똑같이 휩쓸릴 수 있다."
심연을 바라보니, 심연이 자기가 된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성애 남성이라는 젠더가 인터넷에 폭력성을 과시하는 그 문제적 방식이 그대로 성별만 바꾸어 진행되고 있다. 내가 (2)에서 쓴 것처럼, 나는 성별의 구분법이 전 인간을 규제하는 사태의 탈피를 원하기 때문에, 그런 미러링 전략이 나와 맞지 않아도, 서로의 젠더적 위치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기를 원했지만, 그 구분법의 벽만 높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내가 보았을 때 이것은 폭력적인 성차별/분별의 끝없는 재생산일 뿐이며, 일베/김치녀 등의 그 끔찍한 문화의 아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4) 유아인 사태에서도 나는 유아인이 처음에 달았던 댓글(애호박으로 때려준다는 농담)을 보며 그냥 왜 굳이 저런 표현을 썼지, 조금 부적절하지 않나 싶었다. 그런데 거기에다 대고 무차별적으로 ‘한남’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에 대해 놀랐다. 그 이후에 전개된 양상과는 별개로, 그 사건만 놓고 봤을 때, 그건 미러링이나 문제제기가 아니라, 폭력적이었다고 본다. 이게 조금만 진보적인 사람을 놓고 빨갱이라고 부르는 것/보수적인 사람 두고 태극기 부대라 부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5) 항상 이 문제에 대해 슬프게 생각한다. 결국 ‘여성’이라는 정치적 집단이 대항할 지점은 똑같은 폭력이었던 것일까. 폭력과 혐오를 폭력과 혐오로 받아야만 사람들이 ‘봐주는 것일까’. 얼마 전까지는, 사람들이 ‘봐준다’는 것 자체로 위안을 삼았으나, 이제는 현 양상이 과연 괜찮은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6)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본다. 필연적 균열이 발생시키는 잡음이라 믿는다. 아래는 젠더 트러블의 일부분이다. 나 개인적으로 페미니즘 뿐 아니라 정체성 담론에서 젠더 트러블은 필독이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라캉, 프로이트 비판도 시원했다. ㅎㅎ

「옮긴이 해제」
p20 따라서 선험적이거나 일반적인 ‘집합’이나 ‘범주’로서의 여성은 없다. 여성은 언제나 재의미화와 재각인에 열려 있는 경합의 장소이며, 그 열린 의미화의 가능성이 급진적 정치성을 가능하게 하는 초석인 것이다.

p21 그러나 보편 범주로서의 ‘여성’이 없다고 정치적 실천 주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본질적’ 의미의 보편성이 없다고 의미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 보편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각 특수성이 결합하는 ‘구성된 보편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 정체성의 해체는 정치성의 해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글쓴이」
p67 이 책의 요점은 젠더의 당연시된 지식이 실제에 대한 선제적이고 폭력적인 경계선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p97 아마도 ‘섹스(본인 추가 설명 : 생물학적 성별)’라 불리는 이 문화적인 구성물은 젠더만큼이나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 될 것이다. 어쩌면 섹스는 언제나 이미 젠더였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 섹스와 젠더는 전혀 구별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
p100 이 ‘몸’도 그 자체로 하나의 구성물이다.
p111 다시 말해 여성 범주의 일관성이나 통일성에 대한 주장은 수많은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다양성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그 다양성 안에 구체적 ‘여성들’의 배치가 구성되는데도 말이다.
p115 ‘사람’의 ‘일관성’과 ‘연속성’은 그 사람됨의 논리적이거나 분석적인 특질이 아니다. 그보다는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유지되는 인식 가능성의 규범들이다.
p130~131 우리는 이제 젠더의 본질적 효과가 젠더 일관성의 규제적 관행 때문에 수행적으로 생산되고 강제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본질의 형이상학이라는 물려받은 담론 안에서 젠더는 수행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여기서 수행적이라는 의미는 목적한 정체성을 스스로 구성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젠더는 언제나 행위이다.
(라캉 관련)
p179 “관찰에서 밝혀졌듯이 여성의 동성애 경향은 실망에서 오는 것이고, 그것이 사랑의 추구라는 측면을 강화시킨다”고 주장한다. 편의상 누가 관찰하고 무엇이 관찰되는가는 생략되어 있는데도, 라캉은 자신의 해석이 누구든 주의 깊게 본 사람에게는 명백히 나타난다고 간주한다. ‘관찰’을 통해서 바라보게 되는 것은 여성 동성애자의 근원적인 실망이고, 여기서 이 실망은 가면을 통해 지배/해결된 거부를 되살아나게 한다. 또한 여성 동성애자가 어떤 강화된 이상화, 즉 욕망을 대가로 이루어지는 사랑의 속구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도 다소 ‘관찰’하게 된다.
p194 상징계는 인간 주체가 그것에 접근할 수는 없어도,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신성으로 인간 주체에 작동하는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 라캉 이론은 일종의 ‘노예의 도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라캉 이론은 어떻게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보여준 통찰을 전유한 뒤 수정될 수 있었을까? 신, 즉 접근할 수 없는 상징계는 규칙적으로 자신의 무능함을 설정해주는 어떤 권력(권력에의 의지) 때문에 접근이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데 말이다. ... 실패를 보장하는 법의 구성은, ‘법’을 영원한 불가능성으로 구성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바로 그 생산적 권력을 부인하는, 노예의 도덕을 나타내는 징후이다.
(프로이드 관련)
p202 다시 말해, 아버지에 대한 욕망을 어떻게 여성적 기질의 증거로 읽어내는가 말이다.

(다시)
p207-208 따라서 ‘기질’이라는 언어는 거짓 근본주의로서, 금지의 결과를 통해 정서적으로 형성되거나 ‘고정’된다. 그 결과 기질은 심리의 근원적인 성적 사실이 아니라, 에고 이상의 공모와 가치 전환의 행위 및 문화가 부가한, 법으로부터 생산된 효과이다.
p231 이성애를 분명한 사회형식으로 온전히 보존하려면 인식 가능한 동성애 개념이 필요하고, 그것을 문화적으로 인식 불가능하게 만드는 동성애 개념의 금지 또한 필요하게 된다.
p265 푸코는 ‘섹스’를 기원보다는 하나의 결과로 간주하는 역담론을 끌어온다. 그는 육체적 쾌락의 기원적이고 연속적인 원인이자 의미였던 ‘섹스’ 대신에 담론과 권력이라는 열려 있는 복합적인 역사체계로서의 ‘섹슈얼리티’를 제안한다.
p307-308 성의 무한한 증식은 논리적으로 성의 부정 그 자체를 포함한다. 만약 성의 수가 존재하는 개체들의 수에 상응하는 것이라면, 더 이상 성은 하나의 용어로서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의 성은 근본적으로 특이한 자질이 될 것이며, 더 이상 유용하거나 기술 가능한 일반화로 작동될 수 없을 것이다.
p339 “영혼이 몸의 감옥이다.”(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인용)
p347 따라서 젠더는 규제를 통해 자신의 기원을 감추는 하나의 구성물이다.
p348 젠더의 행동은 반복된 연기를 필요로 한다.
p352 나의 주장은 ‘행위 뒤의 행위자’가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며, ‘행위자’는 행위 속에서 행위를 통해 다양하게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는 자아가 자아의 행위를 통해서 구성된다는 실존주의적 이론으로 회귀하려는 것이 아니다.
p363 따라서 존재론은 하나의 토대가 아니라 규범적 명령이며, 이 명령은 자신을 필연적인 토대로서의 정치 담론으로 설정함으로써 음흉하게 작동한다. 정체성의 해체는 정치성의 해체가 아니다. 그것은 정체성이 표명되는 관점 자체를 정치적인 것으로 확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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