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이 글에서 다루는 주요 결론을 미리 요약 제시

(ㄱ) 리버럴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누칼협을 들이댈 정도로 인간은 자유롭지만은 않다

(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젠더차별과 갈등, 낮은 출산율, 자살을 둘러싼 모든 현상이 바로 생명정치와 연관되어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캐치프레이즈를 써본다.

"성공적이지 않은 인간은 낳을 필요가 없고, 생산적이지 못한 인간은 살릴 필요가 없고, 기존 보통 여성은 발이 묶일 때 기존 보통 남성은 고립되는 사회"

아래는 푸코의 원문에 대한 해석에서 나아가 우리 사회에 대한 나의 단순 비판을 섞은 좀 더 나아간 요약

=> 인간 자본화된 생산의 문제에서 성공하지 못한 경제적 인간이 성공적인 인간 자본을 낳을 수는 없다는 계산 > 낮은 출산율

=> 비생산적, 고립되고 단절된 인간들에 대한 안전 방편 없음 > 노인 자살율

=> 기존 보통 여성은 이때까지의 전통사회에서 부여된 가정을 돌보는 주체라는 이데올로기 덕분에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불리한 입장. 신자유주의 사회 안에서 자신의 독립성을 추구하는 것에 목표 지점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가정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할 것을 주문받고 있음. 그래서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적 남성에 비해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약자이면서 동시에 전통사회적 끈도 덜 약화되어 있음 (특히 자식-아기로서 남성보다 더 선호받는다는 현상에 주목) > 제약이 많음

=> 기존 보통 남성은 이때까지의 전통사회에서 부여된 경제적 가장이라는 이데올로기 덕분에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 편입되어 가장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변모, 그에 따라 고립 의식도 강화되며, 그에 따라 제2차 인간 생산의 안정성이 옛날만큼 따라와주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차별의식 주장 > 고립이 쉽게 됨

이 중 보통 남성과 여성은 서로 제약과 고립이 따로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둘이 같이 일어나기도 함. 제약이나 고립이라는 단어는 일반적 경향성에 대한 나의 짐작임.


1. 이 글을 쓰게 된 배경

2022년 막바지, 나는 이번 년도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쓰인 화제의 단어 중 하나가 바로 "누칼협 (누가 너보고 네가 하는 일을 하라고 칼 들고 협박했냐?)"이었다는 말을 듣고 소름이 쫙 돋았다. 이미 한 두 해전인가-신자유주의가 승리하여 이 땅에 도래한지 이미 오래라는 글을 쓴 당사자임에도, 아니 어쩌면 이렇게나 신자유주의적인 단어가 사람들 사이에 대유행이 될 지경이 온 것인가-놀랍기도 하고 우려스럽기도 하고.

이러한 리버럴적 정신이 만연한 사회를 살아가며, 이미 70년대에 2022년의 대한민국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한 푸코의 "생명정치의 탄생"을 일독하는 것만큼 값어치 있는 일이 또 있을까?

라는 생각에 이 책을 읽게 된 것이다.


2. 내가 읽은 텍스트

생명정치의 탄생 The Birth of Biopolitics Lectures at the College de France 1978-79

© Editions du SeuiVGallimard 2004, Edition estabLished under the direction of Franl;ois EwaLd and ALessandro Fontana, by Michel SeneLlart. TransLation © Graham Burchell, 2008.

이라는 영어 판본으로 읽었다.

언젠가는 불어를 꼭 구사하리-라는 굳은 결심을 혼자서 스리슬쩍 해본다.


3. 글의 구성에 대한 미리 알림

글의 구성은 푸코의 글들에서 내가 밑줄 쳐놓은 것들부터 하나하나씩 가볍게(?) 둘러보도록 한다. 영어는 모두 인용이다.


4. 정치경제학, 정치-경제 간의 관계

16쪽에서 푸코는 "political economy" 정치경제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Finally, the last point explaining how and why political economy was able to appear as the first form of this new self-limiting governmental ratio is that if there is a nature specific to the objects and operations of governmentality, ... In other words, there will be either success or failure; success or failure, rather than legitimacy or illegitimacy, now become the criteria of governmental action. So, success replaces [legitimacy].*

정치경제학이 중요한 이유는 통치성의 문제에서 이전까지는 정치적인 정당성, 소위 무협이나 중국역사에서나 많이 볼 법한 '명분'과 같은 문제보다는 정치 공동체를 경영하는 데 있어서 일련의 일들이 성공을 거두었느냐 실패를 하였느냐는 문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효율성의 극한을 추구한다는 경제적인 문장이 현재 정치와 사회 전반에서 그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사회의 양태를 미리 예견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20쪽에서 푸코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Politics and the economy are not things that exist, or errors, or illusions, or ideologies. They are things that do not exist and yet which are inscribed in reality and fall under a regime of truth dividing the true and the false.

...

At this moment he has laid down clearly the principle of the self-limitation of governmental reason. But what does "the self-limitation of governmental reason" mean? What is this new type of rationality -in the art of government, this new type of calculation that consists in saying and telling government: I accept, wish, plan, and calculate that all this shquld be left alone? I think that this is broadly what is called "liberalism."*

정치와 경제라는 것은, 푸코가 이 책 3쪽에서 언급한 광기의 문제처럼, 처음부터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 참과 거짓을 가르는 진실의 영역에 속하는 무엇이다. 나는 이 부분이 시사하는 것은 정치와 경제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해진 팩트, 바꿀 수 없는 사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그것을 통치하는 기반 방식인 통치성에 끊임없이 개입하고, 동시에 그 개입하는 정치와 경제의 내용을 다시 인간들이 변용하고 간섭하는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푸코가 이야기하고자 했다고 본다.

그러한 점에서 소위 리버럴리즘, 자유주의가 이야기하는 국가는 국가의 작동에 자기 제어를 가하는 국가이다. 그리고 이것이 푸코가 생각하는 자유주의 버전의 국가가 작동하는 통치성이기도 하다.

31쪽에서 푸코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In the middle of the eighteenth century the i market no longer appeared as, or rather no longer had to be a site of jurisdiction. On the one hand, the market appeared as something that obeyed and had to obey "natural,"*

... they permit the formation of a certain price that Boisguilbert3 will call the "natural" price, the physiocrats will call the "good price,"4 and that williater be called the "normal price,"

가격에 대해서도 “natural, good, normal”이라는 형용사가 붙으면서 마치 어떤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 어느 정도에 다다라야만 기준치를 충족하고 정상이 된다는 인식, 즉, 시장의 자연성에 대한 인식이 생겼고, 이에 따라 마켓이 진실을 다루는 장소가 된 것이다.


5. 자유주의-리버럴-는 정말 자유를 담보하는가. 누칼협은 과연 온전히 맞는 말인가.

63쪽과 64쪽에서 각각 푸코는 다음과 같이 아주 중요한 구절을 남긴다.

If I employ the world "liberal,"...

it is a consumer of freedom. It is a consumer of freedom inasmuch as it can only function insofar as a number of freedoms actually exist: freedom ofthe market, freedom to buy and sell, the free exercise of property rights, freedom of discussion, possible freedom of expression, and so on. The new governmental reason needs freedom.

Therefore, new art of government consumes freedom. It consumes freedom, which means that it must produce it. It must produce it, it must organize it. The new art of government therefore appears as the management of freedom, not in the sense of the imperative: "be free," with the immediate contradiction that this imperative may contain. The formula of liberalism is not "be free." Liberalism formulates simply the following: I am going to produce what you need to be free. I am going to see to it that you are free to be free.

64

Liberalism must produce freedom, but this very act entails the establisllment· of limitations, controls, forms of coercion, and obligations relying on threats, etcetera.

푸코는 자유주의, 리버럴에 대한 환상을 까발린다. 나는 위의 부분이 "누칼협"이라는 요새의 단어와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칼협"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뉘앙스를 상정한다.

너가 무슨 일을 하든 너의 자유였고, 지금도 그 일을 하든 말든 너의 자유인데, 왜 너는 이걸 마치 네가 어쩔 수 없이 행한 것처럼 억울해하는 거니?

만약 푸코의 비판을 "누칼협"에 적용한다면, 우리가 지금 자유라고 생각하는 이 사회는 단순히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소비자이다. 푸코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자유 그 자체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조건들을 리버럴 사회에서 누리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푸코가 언급한 것처럼 시장의 자유, 사고 팔 자유, 개인 사유권의 자유로운 행위, 토론의 자유, 가능한 표현의 자유 등의 여러 가지의 자유가 실질적으로 얼마냐 이 사회에 존재하냐에 따라 우리는 그만큼 자유로운 소비자인 것이다.

푸코는 이 시점에서 이미 마르크스의 시대 분석을 뛰어넘었다.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그곳에서 촉발된 많은 담론들은 이미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촌스러운 빨갱이 사상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 사실 빨갱이 자체보다 문제적인 것이 "촌스럽다"는 인식이다. 계급 투쟁과 계급 의식의 공격성과 고루함, 올드하고 반시대적인 이미지가 이번 화물연대의 시위를 무너뜨린 한 가지 중요한 토대이지 않았을가.

아무튼, 푸코는 명시적으로 눈에 보이는 계급상의 투쟁이 더 이상의 우리 사회를 설명해주지 못한다고 본 듯 하다. 오히려 권력은 그가 말한 것처럼 미시적으로, 더욱 촘촘하고, 더욱 개별적으로 들어간다. 어찌 보면 이 시대의 권력과 담론들, 통치성은 "포스트모던"적으로 행위한다. 미시권력적 차원으로 우리 삶의 차원에 들어간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유행 단어를 빌어보자면, 이제 우리 모두는 어떠한 “장”에 속하여 있다. 푸코는 이 시대의 개별자들이 그 장의 원리원칙을 삶의 근거로 삼아야만 우리는 자유를 가질 수 있는 개별 주체자로서 자유를 추구하게 될 것임을 예견해냈다.

푸코의 말처럼, 리버럴리즘의 체제 아래에서 자유란 것은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것이지, 자유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면 "누칼협"도 사실상 딱 들어맞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정말 순수한 자유의 개별의지로 내가 지금 무엇을 행하고 있는 것이냐, 라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때의 이 자유란 것도 “리버럴리스트들의 자유”에 불과한 것이다.


(반론)

그러나 여기서 그럼 우리에게 자유란 없는 것인가? 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없다. 푸코는 자신에게 구조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일 것을 완강히 거부하다 죽은 듯 하지만, 그의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장이든, 그 장이 여러 가지이든 하나이든, 어쨌든 그 장에 속하는 순간, 우리 인간의 개별 의지와 개별 자유라는 것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필연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리버럴리즘의 체제든, 인간 운명에 우리가 종속되는 것이든, 인간에게 자유란 없다면, 그렇다면 우리에게 대체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그런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이 질문이 윤리적 차원으로 나아간다면, 우리의 선악조차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면 인간의 윤리적 선택들에서 우리 자신은 그저 자유롭지 못한 노예에 불과한 것이란 말인가?

법적 차원으로 나아간다면, 자유롭지 못한 노예 인간을 대체 무슨 명목으로 처벌/교화할 것이란 말인가?

존재론적 차원으로 나아간다면, 근본적으로 애초에 자유든 어떤 것이든 어떤 개념(이데아)에 대응하는 완벽한 실물적 존재가 존재는 하는 것이냐? 아니면 단순히 인간 사회가 만들어내는 경험적이고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만 존재하는 것이냐?

아마 맨 마지막 질문에 푸코는 이데아는 없고 이 사회의 모든 관념들은 역사적인 것이라고 대답하면서, 자신은 정확한 구조들의 이해가 아닌 불명확성을 기반으로 한 이해를 끝까지 상정하겠다면서 후기 구조주의자로서 자신의 대답을 내놓을 듯 하다.

그러나 또 한 번 생각할 것은, 푸코는 자기 자신을 구조주의자나 심지어는 후기 구조주의자라고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던 듯 싶다. 외려 자신을 역사적인 분석을 사용한 역사학자/계보학이라는 니체의 방법을 사용한 계보학자 정도로 생각한 듯 한데, 후기 구조주의가 암시하는 불분명성은 다른 학계에 속한 사람들로 하여금 수많은 반감을 사기도 했다.

아무튼, 이러한 모호함, 우리에게 자유가 얼마나 있느냐의 문제를 푸코가 계속 후기 철학에서 알아내고 발견하려 하였으며 그 뒤에 나오는 자기배려나 파레시아, 주체에 대한 문제가 자기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하는데, 본인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뚝 끊겨버린 듯한... 그런 지점이 있다는 것을 지금 이 글에서 밝혀두고 싶다.

읽으면서 참고한 위키피디아 두 항목.

https://en.wikipedia.org/wiki/Post-structuralism


6. 경제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이 사회의 주문-

성공적이지 않은 인간은 낳을 필요가 없고, 생산적이지 못한 인간은 살릴 필요가 없고, 기존 보통 여성은 발이 묶일 때 기존 보통 남성은 고립된다

푸코는 66쪽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First, we can say that the motto of liberalism is: "Live dangerously." "Live dangerously,"

...they are conditioned to experience their situation, their life, their present, and their future as containing danger. I think this kind of stimulus of danger will be one of the major implications of liberalism.

리버럴 자유주의는 흥미롭게도 삶을 더 위험하게, 더 리스크를 걸도록 주문한다.

174쪽에서 나오는 부분과 연관지어 보도록 하겠다.

Concretely, in this liberal society in which the true economic subject is not the man of exchange, the consumer or producer, but the enterprise, in this economic and·social regime in which the enterprise is not just an institution

but a way of behaving in the economie field in the form of competition in terms of plans and projects, and with objectives, tactics, and so forth-you can see that the more the law in this enterprise society allows individuals the possibility of behaving as they wish in the form offree enterprise, and the greater the development of multiple and dynamic forms typical ofthis "enterprise" unit, then at the same time so the number and size of the surfaces of friction between these different units will increase and occasions of conflict and litigation multiply.

나는 우리가 리스크를 걸어야 하는 것-하면 최근에 수많은 사람들이 투기에 빠져들었던 사회적 순간이 기억난다. 사람들은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으로 자신들의 돈을 걸었고, 일확천금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게 비트코인 광풍이 벌기도 했었다. 리버럴 자유주의 안에서 우리는 푸코가 말하는 것처럼 이제 단순한 소비자나 생산자가 아니다. 우리는 enterprise 하나의 사업체이다. 마침 자영업 비율이 높은 대한민국 사회와 그럴 듯하게 어울리는 표현 아닌가? 우리는 경쟁이라는 비자연적 (경쟁이 비자연적이라고 푸코가 120쪽에서 말한 부분이 있다) 요소 안에서 충실하게 자유주의적 사업체가 되어 이 모든 "비즈니스 관계"를 훌륭하게, 그러면서 self-limited 자기제한적인 요소로 관리해주는 "법칙 rule of law"에 의존하는 게임 플레이어들이 되었다.

그리고 이 Enterprise에 대한 개념이야말로 이제 더 이상 소위 옛 맑시즘이 완벽하게 설명해내주지 못하는, 인간들이 단순히 계급 투쟁을 할 정도로 계급화하거나 사회화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기업체 수준으로 바라보며 리버럴 사회 안에서의 정치 경제학적 질서를 재생산해내고 활동하는 주역이 된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

푸코의 글 226쪽에서 그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 분석 중 하나를 소개해보고 싶다.

In neo-liberalism-and it does not hide this; it proclaims it-there is also a theory of homo oeconomicus, but he is not at all a partner of exchange. Homo oeconomicus is an entrepreneur, an entrepreneur of himself. This is true to the extent that, in practice, the stake in all liberal_analyses is the replacement every time of homo reconomicus as partner of exchange with a homo oeconomicus as entrepreneur of himself, being for himself his own capital, being for himself his own producer, being for himselfthe squrce of [his] earnings.

Homo oeconomicus, 즉 경제적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는 푸코가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존 스튜어트 밀이 정치경제학 이야기하면서 나왔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은 잠깐 차치하고, 푸코가 경제적 인간을 일컫는 것은 바로 위에서 말한 인간 개별들이 enterprise가 되는 현상과 동급이라고 보면 된다.

이제 우리는 리버럴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모두 경제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biopolitics 생명정치의 문제에서 바로 젠더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실제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젠더 갈등이 심화된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경제적 인간은 바로 생명을 낳고 관리한다는 그 지점과 연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푸코도 228쪽에서 바로 유전자 공학으로 인간 조작하는 것 따위의 상상을 언급은 한다. 자신도 SF적 상상이라고 겸연쩍어 하는 듯 하지만, (글의 맥락은 70년대다!!) 특히 대한민국의 낮은 출산율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 입장에서는 전혀 웃을 이야기가 아니다.

228쪽 원문을 공유해보겠다.

a child whose human capital,

understood simply-in terms of innate and hereditary elements, is high, you can see that you will have to make an investment, that is to say,

you will have to have worked enough, to have sufficient income, and to have a social status such that it will enable you to take for a spouse or coproducer of this future human capital, someone who has significant human capital themselves.

우리가 경제적 인간이라 함은, 바로 우리가 낳는 또 하나의 인간, 우리가 생산해내는 또 하나의 인간이 바로 인간 자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당연히 아이는 투자해야 할 무엇이 된다.

그런데 만약 자기 자신이 투자할 만한 훌륭한 인간이 아니라면? 내가 훌륭한 경제적 기업체가 아니라면? 내가 또 다른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그러한 "자격"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제 인간 생산은 단순한 경제적 생산만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살아나갈 경제적 인간으로서의 가치까지 허락받아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우리 양심에 손을 얹고 보면, 가난한 사람은 아이를 낳아서도 안 된다는 수많은 이 시대의 사람들이 도처에 있지 않는가. 가난해도 덮어놓고 애를 낳았던 옛날 시대와는 천지차이의 사고방식인 것이다.

245, 246쪽에서 푸코는 결혼 생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야기한다.

Well, it is that this contract between spouses enables them to avoid constantly renegotiating at every moment the innumerable contracts which would have to be made in order for domestic life to function." Pass me the salt; I will give you the pepper." This type of negotiation is resolved, as it were, by a long-term contract, which is the marriage contract itself, which enables what the neo-liberals call-and I think they are not the only ones to call it this moreover-an economy to be made at the level of transaction costs.

결혼생활은 불필요한 합의의 과정들을 다 생략해줌으로써 경제적 비용을 최소화하고 이윤을 막대하게 하는 사업체 간의 합의가 된다. 물론 이 이야기들도 옛날의 결혼 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일 수 있긴 하지만, 특히 개개인이 경제적 인간이 된 요즘 시대에 빗대어 보면, 결혼은 손해다 그래서 할 필요가 없다, 혹은 결혼을 하려면 아예 동등한 합의체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때 동등하다는 것은 서로 간의 소득 수준, 공평한 반대반의 소비 구조, 같은 속칭 계급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이러한 결혼의 난이도 상승이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신자유주의 주체화에 가장 열심인 젊은 남성들에게 동거 등 여러 대안을 제시해주지 못한 채 그들의 독립/고독을 심화시킨다.

우리는 모두 경제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주문 안에서 기존 보통 남성들은 이때까지 남자는 밖에서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사회 안에서 자기 몫을 해야 한다 (바깥 양반)라는 굉장히 전통적인 가치에 따라 신자유주의 시스템으로 어정어정 기어들어가 가장 먼저 신자유주의적 주체가 되었다. 그러나 큰 문제는 신자유주의 안에서 경제성의 극단적 추구와 그들이 이야기하는 rationality 이성은 인간 하나하나에게 기업체 수준의 자율성을 강요하고, 그에 따라 자기 자신에게 더 큰 책임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때까지의 남성들에게 독립, 주체성, 자율성을 문화적으로 중요시 여겼던 점들은 한편 독이 되어 돌아와 그들이 가장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변모되었음에도 그에 따라 전통사회의 기존 가치들-가족이나 사회적 측면-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고립에서 취약해진다. 그들은 소외되지는 않는다. 돈이 있고 돈을 벌 수 있는 젊은 몸뚱이가 있는 한 아직은 소외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고립될 뿐이다. 연대의 필요성을 딱히 느낄 필요도 없지만 기회도 많지 않다. 그리하여, 여러 이점에도 불구하고, 결혼, 짝을 만나지 못한다는 불평등함이 강하게 제기된다.

신자유주의의 상징인 마가렛 대처가 한 그 유명한 말을 생각해보라. 그녀는 사회도 없고 국가도 없고 단지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들이 결혼해 사는 가정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아래는 그녀가 한 말

There is no such thing! There are individual men and women and there are families and no government can do anything except through people and people look to themselves first.

그런데 지금 보라, 결혼을 안 하니 가정도 없다! 신자유주의적 주체에게는 사실 나라는 경제적 인간과 그 성공한 경제적 인간이 낳을 수 있는 제2세의 홈그라운드인 가정까지는 필요한데, 그것까지 못 가고 있는 것이다. 사회도 국가도 없는 신자유주의적 주체라고 인간의 사회성이 아예 말살된 것은 아니다. 그것을 충족시켜 줄 가장 최소의 사회기준인 가정이 없으니 그들은 독립/고립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거 문화가 발달한 것도 아니니 신자유주의적 주체라 할지라도 혼자인 상태로 남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한다고 해서 안전한 가정이 존속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OECD 자살률 1위라는 우리나라의 기록을 살펴보면 연세 드신 노인들이 가장 많이 죽는다. 이들은 신자유주의적 체제에 적응을 못하거나 패배한 것이지, 어렸을 때부터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지 않는가. 그들도 대부분 전통 사회 질서에 순응을 하고 타협을 하여서 결혼 정도는 했을 텐데, 여전히 단절되었음을 호소한다. 즉, 우리에게 이제 가정/전통문화 질서란 옛날만큼 강한 울타리의 작용을 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기사를 한 줄 요약. 왜 노인들이 자살을 생각하느냐. 딱 세 가지 문제이다. 돈 없어서, 아파서, 가족과 단절되어서.)

이때 웃긴 건, 나는 다른 하나의 이상한 현상을 스스로 관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기존 보통 여성들의 위치이다. 기존 보통 여성은 이때까지의 전통사회에서 부여된 가정을 돌보는 주체라는 이데올로기 덕분에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불리한 입장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애 낳을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취직하기가 힘들거나 회사 들어가도 버티기가 힘들다는 그 이야기, 모두가 알고 들어본 그 이야기가 바로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경제적 인간으로서 경쟁에서 불리한 여성의 위치와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하여 요새 많은 여성들은 신자유주의 사회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독립성을 추구하는 것에 목표 지점을 둔다. 즉, 결혼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여기까지는 평이한 이야기인데, 나는 이번에 임신이라는 개인적 경험을 통해 아주 이상한 가설을 세우게 되었다. 한때는 남성 선호 사상이었다지만, 요새는 아이를 낳을 때 부모가 딸을 낳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저 그냥 딸이 귀여워서 그런가보다 정도였는데, 이번에 나도 딸을 임신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주변이나 사회적 인식에 대해 챙기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요새는 딸을 더 마음 속으로 선호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아들이나 딸이나 크게 상관은 없을 텐데, 왜 그런 걸까? 보통 사람들은 딸이 더 귀여워서, 키우기 쉬워서, 나중에 엄마인 나랑 더 친하게 지낼 수 있어서, 아들보다는 나를 더 챙겨줄 것 같아서-라는 대답으로 귀결되는데, 이를 찬찬히 살펴보니...

결국 딸한테 이때까지의 전통 사상에서 아들들에게 요구되었던, 가정을 지키고 부모에게 효를 다하는 (?) 그러한 전통 사상적 측면들이 계속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딸을 낳는다 해도 그 딸이 아이를 낳을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 지금 나의 가정이 더욱 '원활하게 혹은 오순도순하게, 즉, 조금 옛날 전통문화적 가족 같이' 유지될 확률이 딸을 통해 더 보장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본다면 설령 여자가 아이를 낳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자식 노릇을 한다는, 계속 가정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할 것을 주문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가설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지점에서 살펴보면,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적 남성에 비해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약자이면서 동시에 전통사회적 끈도 덜 약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꼭 좋은 것이냐, 그것은 아무도 쉽게 대답을 할 수 없는 문제인 것 같다.

20대 자살을 살펴보면 남자가 여자보다 2배 이상 많이 죽지만 여자들의 자살 시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보다 높다는 기사를 확인했다.

이 기사와 내 개인적 생각을 말미암아 생각해보면, 젊은 여성들은 발이 이곳저곳 묶이고 제약이 많아서 우울감을 많이 느끼는 것이고, 젊은 남성들의 경우 혹시라도 신자유주의 사회에 적응이 실패하면 고립된 상태에서 바로 자신의 실패를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은 아닌가... 이런 마음 아픈 추측이 든다.

즉, 다시 똑같은 말을 반복해야겠다.

성공적이지 않은 인간은 낳을 필요가 없고, 생산적이지 못한 인간은 살릴 필요가 없고, 기존 보통 여성은 발이 묶일 때 기존 보통 남성은 고립되는 지금 우리의 사회. 그게 지금 우리 사회 아닐까나.


7. 남아 있는 논의-시민 사회의 역할

푸코는 296쪽에서 이 신자유주의 체제를 굴러가게 하는 두 가지 요소가 하나 경제적 인간, 다른 하나가 바로 시민 사회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시민 사회를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미시권력이 미칠 수 있는 장의 범위라고 보는 것 같은데, 내가 사실 이 후반부는 조금 힘이 딸려서 이해가 부족한 듯 하다.

그리하여 이 책의 정리를 끝내고 다음에는 바로 이 책의 논의들과 관련된 다른 2차 논문들, 글들을 찾아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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