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이 글에서 다루는 주요 결론을 미리 요약 제시
(ㄱ) 리버럴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누칼협을 들이댈 정도로 인간은 자유롭지만은 않다
(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젠더차별과 갈등, 낮은 출산율, 자살을 둘러싼 모든 현상이 바로 생명정치와 연관되어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캐치프레이즈를 써본다.
"성공적이지 않은 인간은 낳을 필요가 없고, 생산적이지 못한 인간은 살릴 필요가 없고, 기존 보통 여성은 발이 묶일 때 기존 보통 남성은 고립되는 사회"
아래는 푸코의 원문에 대한 해석에서 나아가 우리 사회에 대한 나의 단순 비판을 섞은 좀 더 나아간 요약
=> 인간 자본화된 생산의 문제에서 성공하지 못한 경제적 인간이 성공적인 인간 자본을 낳을 수는 없다는 계산 > 낮은 출산율
=> 비생산적, 고립되고 단절된 인간들에 대한 안전 방편 없음 > 노인 자살율
=> 기존 보통 여성은 이때까지의 전통사회에서 부여된 가정을 돌보는 주체라는 이데올로기 덕분에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불리한 입장. 신자유주의 사회 안에서 자신의 독립성을 추구하는 것에 목표 지점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가정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할 것을 주문받고 있음. 그래서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적 남성에 비해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약자이면서 동시에 전통사회적 끈도 덜 약화되어 있음 (특히 자식-아기로서 남성보다 더 선호받는다는 현상에 주목) > 제약이 많음
=> 기존 보통 남성은 이때까지의 전통사회에서 부여된 경제적 가장이라는 이데올로기 덕분에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 편입되어 가장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변모, 그에 따라 고립 의식도 강화되며, 그에 따라 제2차 인간 생산의 안정성이 옛날만큼 따라와주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차별의식 주장 > 고립이 쉽게 됨
이 중 보통 남성과 여성은 서로 제약과 고립이 따로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둘이 같이 일어나기도 함. 제약이나 고립이라는 단어는 일반적 경향성에 대한 나의 짐작임.
1. 이 글을 쓰게 된 배경
2022년 막바지, 나는 이번 년도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쓰인 화제의 단어 중 하나가 바로 "누칼협 (누가 너보고 네가 하는 일을 하라고 칼 들고 협박했냐?)"이었다는 말을 듣고 소름이 쫙 돋았다. 이미 한 두 해전인가-신자유주의가 승리하여 이 땅에 도래한지 이미 오래라는 글을 쓴 당사자임에도, 아니 어쩌면 이렇게나 신자유주의적인 단어가 사람들 사이에 대유행이 될 지경이 온 것인가-놀랍기도 하고 우려스럽기도 하고.
이러한 리버럴적 정신이 만연한 사회를 살아가며, 이미 70년대에 2022년의 대한민국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한 푸코의 "생명정치의 탄생"을 일독하는 것만큼 값어치 있는 일이 또 있을까?
라는 생각에 이 책을 읽게 된 것이다.
2. 내가 읽은 텍스트
생명정치의 탄생 The Birth of Biopolitics Lectures at the College de France 1978-79
© Editions du SeuiVGallimard 2004, Edition estabLished under the direction of Franl;ois EwaLd and ALessandro Fontana, by Michel SeneLlart. TransLation © Graham Burchell, 2008.
이라는 영어 판본으로 읽었다.
언젠가는 불어를 꼭 구사하리-라는 굳은 결심을 혼자서 스리슬쩍 해본다.
3. 글의 구성에 대한 미리 알림
글의 구성은 푸코의 글들에서 내가 밑줄 쳐놓은 것들부터 하나하나씩 가볍게(?) 둘러보도록 한다. 영어는 모두 인용이다.
4. 정치경제학, 정치-경제 간의 관계
16쪽에서 푸코는 "political economy" 정치경제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Finally, the last point explaining how and why political economy was able to appear as the first form of this new self-limiting governmental ratio is that if there is a nature specific to the objects and operations of governmentality, ... In other words, there will be either success or failure; success or failure, rather than legitimacy or illegitimacy, now become the criteria of governmental action. So, success replaces [legitimacy].*
정치경제학이 중요한 이유는 통치성의 문제에서 이전까지는 정치적인 정당성, 소위 무협이나 중국역사에서나 많이 볼 법한 '명분'과 같은 문제보다는 정치 공동체를 경영하는 데 있어서 일련의 일들이 성공을 거두었느냐 실패를 하였느냐는 문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효율성의 극한을 추구한다는 경제적인 문장이 현재 정치와 사회 전반에서 그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사회의 양태를 미리 예견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20쪽에서 푸코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Politics and the economy are not things that exist, or errors, or illusions, or ideologies. They are things that do not exist and yet which are inscribed in reality and fall under a regime of truth dividing the true and the false.
...
At this moment he has laid down clearly the principle of the self-limitation of governmental reason. But what does "the self-limitation of governmental reason" mean? What is this new type of rationality -in the art of government, this new type of calculation that consists in saying and telling government: I accept, wish, plan, and calculate that all this shquld be left alone? I think that this is broadly what is called "liberalism."*
정치와 경제라는 것은, 푸코가 이 책 3쪽에서 언급한 광기의 문제처럼, 처음부터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 참과 거짓을 가르는 진실의 영역에 속하는 무엇이다. 나는 이 부분이 시사하는 것은 정치와 경제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해진 팩트, 바꿀 수 없는 사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그것을 통치하는 기반 방식인 통치성에 끊임없이 개입하고, 동시에 그 개입하는 정치와 경제의 내용을 다시 인간들이 변용하고 간섭하는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푸코가 이야기하고자 했다고 본다.
그러한 점에서 소위 리버럴리즘, 자유주의가 이야기하는 국가는 국가의 작동에 자기 제어를 가하는 국가이다. 그리고 이것이 푸코가 생각하는 자유주의 버전의 국가가 작동하는 통치성이기도 하다.
31쪽에서 푸코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In the middle of the eighteenth century the i market no longer appeared as, or rather no longer had to be a site of jurisdiction. On the one hand, the market appeared as something that obeyed and had to obey "natural,"*
... they permit the formation of a certain price that Boisguilbert3 will call the "natural" price, the physiocrats will call the "good price,"4 and that williater be called the "normal price,"
가격에 대해서도 “natural, good, normal”이라는 형용사가 붙으면서 마치 어떤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 어느 정도에 다다라야만 기준치를 충족하고 정상이 된다는 인식, 즉, 시장의 자연성에 대한 인식이 생겼고, 이에 따라 마켓이 진실을 다루는 장소가 된 것이다.
5. 자유주의-리버럴-는 정말 자유를 담보하는가. 누칼협은 과연 온전히 맞는 말인가.
63쪽과 64쪽에서 각각 푸코는 다음과 같이 아주 중요한 구절을 남긴다.
If I employ the world "liberal,"...
it is a consumer of freedom. It is a consumer of freedom inasmuch as it can only function insofar as a number of freedoms actually exist: freedom ofthe market, freedom to buy and sell, the free exercise of property rights, freedom of discussion, possible freedom of expression, and so on. The new governmental reason needs freedom.
Therefore, new art of government consumes freedom. It consumes freedom, which means that it must produce it. It must produce it, it must organize it. The new art of government therefore appears as the management of freedom, not in the sense of the imperative: "be free," with the immediate contradiction that this imperative may contain. The formula of liberalism is not "be free." Liberalism formulates simply the following: I am going to produce what you need to be free. I am going to see to it that you are free to be free.
64
Liberalism must produce freedom, but this very act entails the establisllment· of limitations, controls, forms of coercion, and obligations relying on threats, etcetera.
푸코는 자유주의, 리버럴에 대한 환상을 까발린다. 나는 위의 부분이 "누칼협"이라는 요새의 단어와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칼협"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뉘앙스를 상정한다.
너가 무슨 일을 하든 너의 자유였고, 지금도 그 일을 하든 말든 너의 자유인데, 왜 너는 이걸 마치 네가 어쩔 수 없이 행한 것처럼 억울해하는 거니?
만약 푸코의 비판을 "누칼협"에 적용한다면, 우리가 지금 자유라고 생각하는 이 사회는 단순히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소비자이다. 푸코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자유 그 자체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조건들을 리버럴 사회에서 누리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푸코가 언급한 것처럼 시장의 자유, 사고 팔 자유, 개인 사유권의 자유로운 행위, 토론의 자유, 가능한 표현의 자유 등의 여러 가지의 자유가 실질적으로 얼마냐 이 사회에 존재하냐에 따라 우리는 그만큼 자유로운 소비자인 것이다.
푸코는 이 시점에서 이미 마르크스의 시대 분석을 뛰어넘었다.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그곳에서 촉발된 많은 담론들은 이미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촌스러운 빨갱이 사상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 사실 빨갱이 자체보다 문제적인 것이 "촌스럽다"는 인식이다. 계급 투쟁과 계급 의식의 공격성과 고루함, 올드하고 반시대적인 이미지가 이번 화물연대의 시위를 무너뜨린 한 가지 중요한 토대이지 않았을가.
아무튼, 푸코는 명시적으로 눈에 보이는 계급상의 투쟁이 더 이상의 우리 사회를 설명해주지 못한다고 본 듯 하다. 오히려 권력은 그가 말한 것처럼 미시적으로, 더욱 촘촘하고, 더욱 개별적으로 들어간다. 어찌 보면 이 시대의 권력과 담론들, 통치성은 "포스트모던"적으로 행위한다. 미시권력적 차원으로 우리 삶의 차원에 들어간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유행 단어를 빌어보자면, 이제 우리 모두는 어떠한 “장”에 속하여 있다. 푸코는 이 시대의 개별자들이 그 장의 원리원칙을 삶의 근거로 삼아야만 우리는 자유를 가질 수 있는 개별 주체자로서 자유를 추구하게 될 것임을 예견해냈다.
푸코의 말처럼, 리버럴리즘의 체제 아래에서 자유란 것은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것이지, 자유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면 "누칼협"도 사실상 딱 들어맞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정말 순수한 자유의 개별의지로 내가 지금 무엇을 행하고 있는 것이냐, 라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때의 이 자유란 것도 “리버럴리스트들의 자유”에 불과한 것이다.
(반론)
그러나 여기서 그럼 우리에게 자유란 없는 것인가? 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없다. 푸코는 자신에게 구조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일 것을 완강히 거부하다 죽은 듯 하지만, 그의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장이든, 그 장이 여러 가지이든 하나이든, 어쨌든 그 장에 속하는 순간, 우리 인간의 개별 의지와 개별 자유라는 것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필연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리버럴리즘의 체제든, 인간 운명에 우리가 종속되는 것이든, 인간에게 자유란 없다면, 그렇다면 우리에게 대체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그런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이 질문이 윤리적 차원으로 나아간다면, 우리의 선악조차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면 인간의 윤리적 선택들에서 우리 자신은 그저 자유롭지 못한 노예에 불과한 것이란 말인가?
법적 차원으로 나아간다면, 자유롭지 못한 노예 인간을 대체 무슨 명목으로 처벌/교화할 것이란 말인가?
존재론적 차원으로 나아간다면, 근본적으로 애초에 자유든 어떤 것이든 어떤 개념(이데아)에 대응하는 완벽한 실물적 존재가 존재는 하는 것이냐? 아니면 단순히 인간 사회가 만들어내는 경험적이고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만 존재하는 것이냐?
아마 맨 마지막 질문에 푸코는 이데아는 없고 이 사회의 모든 관념들은 역사적인 것이라고 대답하면서, 자신은 정확한 구조들의 이해가 아닌 불명확성을 기반으로 한 이해를 끝까지 상정하겠다면서 후기 구조주의자로서 자신의 대답을 내놓을 듯 하다.
그러나 또 한 번 생각할 것은, 푸코는 자기 자신을 구조주의자나 심지어는 후기 구조주의자라고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던 듯 싶다. 외려 자신을 역사적인 분석을 사용한 역사학자/계보학이라는 니체의 방법을 사용한 계보학자 정도로 생각한 듯 한데, 후기 구조주의가 암시하는 불분명성은 다른 학계에 속한 사람들로 하여금 수많은 반감을 사기도 했다.
아무튼, 이러한 모호함, 우리에게 자유가 얼마나 있느냐의 문제를 푸코가 계속 후기 철학에서 알아내고 발견하려 하였으며 그 뒤에 나오는 자기배려나 파레시아, 주체에 대한 문제가 자기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하는데, 본인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뚝 끊겨버린 듯한... 그런 지점이 있다는 것을 지금 이 글에서 밝혀두고 싶다.
읽으면서 참고한 위키피디아 두 항목.
https://en.wikipedia.org/wiki/Post-structural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