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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 ㅣ 우리시대의 논리 2
하종강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5월
평점 :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 책 제목을 보고서 순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노동운동이라는 하나의 단어를 이루고 있는 두 명사, 노동과 운동 이 둘은 한국사회에서 희망이라는 단어와 결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동춘이 『전쟁과 사회』라는 책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한국이라는 나라의 성격을 규정짓는 가장 큰 바탕은 바로 반공이데올로기에 기초한 48년 체제이다. 이런 한국사회에서 신성한 ‘근로’라는 말 대신 ‘노동’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녀석들은 친북좌파세력이며, 감히 ‘운동’을 하는 녀석들은 혁명이라는 이상을 추구하는 급진주의자였다. 그런 나쁜 것들을 모두 모은 ‘노동운동’은 한국사회에서 악의 원천으로 취급 받고 있다. 그런 한국사회에서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이라고 하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2003년,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시절 나는 뉴스를 핑계 삼아 공부를 하지 않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화물연대의 파업 그리고 어느 은행인지는 모르지만 한 은행의 파업을 보며 마치 애국자라도 된 듯 국가손실액을 들먹거리며 그들을 비난했었다. 그랬던 내가 그 다음 해 4월 30일과 5월 1일을 거리에서 보냈다. 무슨 투철한 의식이 있어서 430Mayday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는 이 사회에 분노해 있었다. 2003년 화물연대가 파업을 해서, 은행이 파업을 해서 입게 된 손해들을 상세히 보도했던 언론은 한진중공업의 김주익, 두산중공업의 배달호 등 6명의 열사들이 왜 그 길을 가야만 했는지 이야기해주지 않았었다. 그 6명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내가 언론에, 사회에 속고 있었다는 분노, 그 분노가 나를 430Mayday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런 나의 모습에 고등학교 친구들은 걱정이 되었는지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나에게 했었다. 나를 걱정해주는 친구들이 고마웠지만 나는 이렇게 답했다. 이제야 편향되었던 내 사고가 중간으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라고 말이다.
한국사회의 노동에 대한 인식은 너무나도 비정상적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특히 언론에 비추어진 세상은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면이 많이 있다. 언론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공정성은 자본과 노동의 관계 앞에서는 언제나 심하게 기울어진다. 그러나 그 기울어짐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경험함으로써 그것이 심하게 기울어졌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이 사회의 대부분이 노동자이거나 앞으로 노동자가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있을 경우,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 생각하지도 않고 언제나 노동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학생들에게 11.4%라는(연대 다음) 엄청난 등록금 인상률을 선보였던 총장이 부장급 직원들이 노조를 탈퇴하지 않는다면 단체협상을 할 수 없다고 하였고, 우리 학교(이문)에서는 교직원들의 파업이 벌어졌다. 당연히 그 파업으로 인해 도서관과 취업 관련 센터의 운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등 학생들에게 많은 불편이 돌아왔다. 이에 도서관과 취업 관련 센터 등 학생들과 긴밀하게 관련된 부서에 대한 업무재개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불편을 겪는 학생들이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의 요구가 노조의 파업중지로 바뀌게 된 것이었다. 총학생회가 한 파업반대 행사 중 백지대자보가 있었는데 누군가는 ‘노조 X새끼’라고 적은 사람도 있었고, 인터넷 사이트에는 노조위원장을 불태워 죽여야 한다는 등 정말 살벌하기 그지없는 말들이 오갔다. 이런 학생들의 모습은 분명 한국사회의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어떤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인해 불편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모습은 우리 학교 학생들이 보여준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맞는 모습일까? 한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셨다... 너희는 아무 생각 없이 살지? 노조가 파업하면 그냥 별 관심 안 갖고, 그러다나 너희가 파업할 때 대봐, 아무도 너희한테 관심 안 가져... 이게 답이 아닐까?
최장집 교수는 『위기의 노동』서문에서 현재와 같이 사회경제적 기반이 취약해 노동이 배제되는 민주주의의 실패를 이야기한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노동자들의 비중과는 다르게 노동자들의 사회적, 정치적 위상은 너무나도 낮다.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을 보여줄 수 있는 노동조합 조직률은 10%를 약간 상회할 뿐이고, 노동자들의 정당을 자임하는 민주노동당은 전체 299석의 중 9석의 의석만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언론, 자본 등 다양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자들은 노조의 힘이 너무 강하다고 하며,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을 귀족노동자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몇 천 만원의 연봉을 받는 노동자들이 귀족이라면 수십억의 연봉을 받는 임원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노조의 힘이 너무 강하다 하지만 단체행동을 위해 생계를 걸어야만 하는 노동자들이, 부당해고를 당해도 지노위-중노위-···-대법원, 3년의 시간을 허비해야만 하는 노동자들이 사용자들에 힘보다 강하단 말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자본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하는 언론의 입장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저자는 노동운동이 희망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그 의견에 일견 동의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광풍 속에서 삶의 터전을 잃고 거리로 내쫓기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반면에 투기꾼들은 앉아서 불로소득을 챙겨가고 있는 지금의 시대에 노동운동은 한국사회에 희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 가지의 조건이 붙어야만 할 것이다. 노동운동이 자신들만의 임금을 올리기 위한 경제투쟁으로 변질된다면 그것은 결코 우리 사회의 희망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노동운동이 희망이 되기 위해서는 80년대 노동운동이 곧 민주화운동이었듯이 지금 시대에서는 공익을 위한 실천이 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최근에 한겨레신문에서 우리 학교 86학번 임명배 선배님이 노조 위원장으로 계신 캠코에 관련해서 기사가 나왔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노조의 통합을 이루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규직 노조가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경제투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내의 비정규직을 위해 행동할 수 있을 때, 노동조합의 투쟁이 사회적 공익을 요구할 수 있을 때여야만 노동운동은 한국사회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