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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 - 우리가 사랑하는 이상한 사람들
김별아 지음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책 속에 김별아 씨가 쓴 글과 제 글을 조합했습니다. 어느 부분이 김별아씨 글이고 어느 부분이 제 글인지는는 책을 읽어본 사람만이 알겠죠.. ㅋㅋ
출산 2개월 정도 후에 봤던 책이라 상당히 공감히 크게 되었답니다..
아이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먹는 것 하나 걸음걸이 하나 마음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아무거나 잘 먹던 내 입맛이 본능적으로 까다롭게 변하면서 내 몸 속의 아이를 보호하고자 하는 걸 참으로 신기롭게 바라보면서 ‘입맛이 예민하다는 것이 이러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발을 삐끗해 넘어져도 본능적으로 배부터 보호하는 내 자신을 보면서 ‘내 몸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님으로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기분을 몰랐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모유수유가 다른 그 어떤 노동보다 대단한 24시간 노동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의 나와 이후의 내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일단 미친 듯이 바빠졌고 손목은 편할 날이 없었다. 그와 더불어 팔뚝은 점점 굵어져 갔다. 오직 나만을 위해 살았던 이전의 삶은 지나치게 한가한 것이었다. 시도때도 없이 젖을 찾는 아이를 보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을 동경하기도 했다. 심심하면 어떨까? 아이가 크고 내 손이 조금 덜 필요하게 瑛?때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안본, 아니 못본 공연이 하나 둘 늘어갈 수록 기운이 꺽이기도 했지만 아직은 공연보다는 아이가 먼저여야 겠지...
하지만 내가 객쩍은 공상에 빠져 몸을 떼는 찰나가 어린 것에겐 곧 생존의 위험이었다. 내 품안에서 땀을 흘리면 젖을 빨고, 내 팔에 안기지 않으면 잠들지도 못하고, 내 눈길, 손짓. 표정, 몸짓에 울고 웃는 내 아가. 나로 인해 존재하는 내 사랑스럽고도 무시무시한 불멸의 징표! 그를 배반할 수는 없었다. 내가 스스로 나를 배반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에게 더욱 몸을 바씩 붙였다. 말랑말랑한 복숭아 같은 그의 살갗이 새근 새근 고른 숨결에 오르락내리락 했다. 우린 함께 살아있어야만 했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청각이 그토록 예민해질 수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것도 어머니가 되기 전엔 한밤중에 세상 모르게 자던 사람도 아이의 작은 울음소리, 뒤적거리는 소리에 감긴 눈을 다 뜨지도 못한 상황에서 아이 앞으로 다가가 아이의 상황을 체크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이 듣기엔 다 똑같은 울음소리일지라도 아주 미묘한 차이가 있는 아이의 울음소리만으로 배가 고픈지, 기저귀가 젖은 건지, 놀아달라는 건지 알아챌 수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잠든 잠깐의 시간도 마음 편할 수 없다는 것을 몰랐다. 아이가 정말 잘 자고 있는가 두 번째로 체크하지 않으면, 아이는 작은 몸이 안쓰러울 정도로 딸꾹질을 하면서 울지도 못한 채 힘들어 하고 있었다. 딸꾹질과 울음은 동시에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엄마가 알아서 체크하는 수 밖에...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누군가를 먹이고 어르기 위해 한밤중에 꿀 같은 잠을 억지로 밀쳐내며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스스로 잠들지 못해 부대끼는 아이를 안고 밤새도록 좁은 집 안을 뱅뱅 도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펄펄 끊는 불덩이를 안고 새벽에 응급실로 뛰어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새벽의 종합병원 응급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사고 환자들 사이에서 염치없게 의사의 가운을 움켜잡고 제발 눈길을 건네달라고 애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우리 주변에 그토록 많은 턱과 계단이 존재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유모차를 밀고 장애물을 헤쳐가는 일이 얼마나 버거운지, 그런 장애물들 앞에서 언제나 무력했을 장애인과 약한 자들의 분노와 슬픔을 몰랐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빙그레 머금는 웃음에 온 세상이 환해지는 경험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를 까맣게 잊고 누군가에게 맹목적으로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을, 그토록 회의를 품어옴 ‘사랑’이라는 말의 실체가 이토록 엄연함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말 한마디를 처음 내뱉을때까지 얼마나 긴 기다림과 설렘이 있고, 그 어눌하게 터져 나온 불분명한 발음의 외마디 소리가 얼마나 신비롭게 들리는지 몰랐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무심코 터지는 아이의 투정과 비난에 부모도 상처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나 때문에 가족들이 얼마나 조심하며 발끝으로 걸어야 했는지도 끝내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아이를 잃은 엄마들의 모습을 보면서 함께 통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상실감과 절망감을 쉽게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몸 어느 한구석이 뭉텅 끊겨 나가는, 그 생생한 실제감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내 기억 속에 까마득히 묻힌 어린 날들을 다시 한 번 살아보는 경이로운 체험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여린 추억들이 지금의 나를 키웠음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의 행동 하나 하나가 내 어린 날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를 생각나게 한다. 엄마도 이렇게 늦은 밤에 나를 안고, 업고 잠을 못잔 채 다를 달랬겠지. 나의 베넷 웃음에 같이 웃었겠지. 쉴 새 없이 싸고 먹는 날 보기 위해 한시도 눈길을 뗄 수 없었겠지. 날 목욕 시키기 위해 물 앞에 겁 먹은 자식의 손을 꽉 잡아준채 조심 조심 물을 끼얹어 주셨겠지. 그런데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 자식도 혼자 자신이 큰 것처럼 엄마의 고마움을 쉽사리 잊어버리겠지......
아이가 아니었다면, 부모님과 형제, 햇살과 바람과 바다와 공기... 나를 키운 그 모든 것들에 감사할 줄 몰랐을 것이다. 모든 생명이 무릇 자연에 귀속되어 있음을. 스스로 살고 누군가를 살리고자 끊임없이 역동하는 순환과 질서의 신비를 몰랐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내 안에 도사리고 있던 이기심과 욕망, 아집과 편견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을 것이다. 나라는 인간이 대단히 특별하지도 않고 선인은 더더구나 아니라는 사실을 쉽사리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길들여진 방식으로 결코 제압되지 않는 아이 앞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내 숱한 단점들 때문에 스스로 당황하며 쩔쩔매는 일 따윈 없었을 것이다.
-간혹 아이가 엄마가 모르는 이유로 몇시간 째 칭얼대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엔 내 인내력의 한계가 어디까지 인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때이기도 하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더 많은 시간의 여유와 자유를 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 불편한 양육과 번거로움이 내게 가르쳐 주는 숭고한 희생의 진실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의 한 생애에서 가장 영예로운 일은 부와 명예와 지위와 업적을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한 잎으로 떨어져 썩어 거름이 되고 한 알의 밀알로 고요히 묻혀 새싹을 틔우는 것이라는 진리를..
그는 앞으로 더 많이 나를 가르칠 것이다. 나를 부정하고 내게 반항하며 마침내 나를 뛰어넘는 그 순간까지, 한 사람의 성숙한 인간으로 새로이 만날 그때까지 나는 기꺼이 그에게 배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