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MBC 다큐멘터리 가족 제작팀 엮음 / 북하우스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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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밀한 가족 이야기 엿보기
문화방송 다큐멘터리 '가족' 제작팀의 <가족>

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쏟아지는 잠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었다. 2003년 9월과 10월에 방영된 4부작 다큐멘터리 <가족>은 방영시간이 밤 11시 30분이었다. 초저녁 잠이 많은 사람은 보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눈에 힘을 주고 그 프로가 시작되기만 기다렸지만 선전이 계속 나오는 사이에 잠이 들어버렸다.

그러나 <어머니와 딸>,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중 <남편과 아내> 부분은 프로그램 시작 전 잠이 들지 않고 잘 감상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차츰 차츰 내 기억 속에 <가족>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잊혀져 가고 있을 때쯤 그 프로그램에서 못다 한 이야기까지 다 모아놓은 <가족>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선, 책 초반에 보여주는 어머니와 딸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대화식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다른 어떤 미사여구들보다 가슴을 시큰하게 만든다. 많은 딸들이 엄마와 대립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들 모두 엄마 없이는 못산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역시 엄마와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온 딸들이라면, 더욱 이 이야기들이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것이다.

'딸이 그래 많아도 한 개도 밉지는 안 해'라는 이야기에는 비오는 날만 되면, 교문 앞에서 기다리는 엄마, 서울에 있는 딸들에게 보내기 위해 택배비가 더 들어도 상추, 옥수수를 보내 택배 아줌마로 통하는 엄마가 나온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 상이다.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웃기면서도 찡하다. 막내가 시집가고 나서 “내가 우리집에 도둑년들 싹 다 나갔다 캤더니 동네 사람들이 얼매나 웃었다고”(34쪽) 어머니의 속시원함과 함께 자식을 떠나보낸 서운함이 가득 배인 말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엄마만 제일 좋은 거 먹고' 이야기를 읽고는 내 눈을 의심하였다. 이러한 이야기가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이야기라는 것이 참 신기하게 다가왔다. 딸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도 흰 장갑에 모자 쓰고, 백구두 신고는 꽃다발을 안겨주는 엄마, 즉, 막내 이모 같은 엄마다. ‘인내’하는 어머니 상을 모범답안으로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변덕이 심한 엄마의 모습은 놀랍게 다가온다.

엄마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딸이 늦게 집에 들어간다고 전화하면, 자는데 왜 깨우느냐고 화를 낸다. 물론 그 이면에는 깊은 뜻이 들어있다.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딸을 믿기 때문에 엄마에게 알릴 필요가 없고, 알아서 행동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참 '쿨'한 엄마라고 해야 할까? 이야기 속에 빠져 들어가면서 속으로 박수를 치고 있는 날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나온 '쿨'한 엄마의 다른 에피소드는 더욱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결혼 전날 결혼하기 싫다는 딸에게, 다른 어머니들처럼, 집안 망신 어쩌구 이런 얘기를 하기보다는 “결혼하기 싫으면 하지마. 엄마가 다 해결할테니”라는 말과 함께 딸과 드라이브를 한 다음, 딸을 좋은 찻집으로 데려간다.

책에 나온 엄마의 모습은 새로움 자체였다. 문제를 뭐든지 쉽게 생각하는 엄마, 큰일일수록 단순하게 생각하는 엄마로 인해 딸은 무사히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엄마의 현명한 대책으로 일이 의외로 쉽게 풀린 셈이다.

엄마의 다음 말 역시 초보 엄마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당신의 인생을 중요시 해라. 아이들은 앞으로 자기네 앞날이 창창한데 애들한테 너무 얽매이지 마라. 우리 인생 짧은데 아이들 뒷바라지 하다보면 어느 날 아이들은 훌륭해지고 나는 뒤에서 매미처럼 빈 껍질만 남아가지고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멍하게 있게 된다.(39쪽)

<한 지붕 세 여자>이야기는 엄마와 딸이 이혼을 한 후 엄마·딸·손녀 3대가 함께 사는 집안 이야기다.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김씨, 이씨, 지씨 이렇게 성이 다 다르지만 그들에겐, 성이 같은 남자들간의 관계와는 다른 뭔가가 있다. 그들의 말을 빌리지만, 훨씬 질기고 끈끈하고 그리고 진짜 가슴으로 서로 통하는, 모녀지 간만이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단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마음을 울린 에피소드는 다음 내용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자기 부모님을 존경하는 사람?’
‘자기 부모님처럼 살고 싶은 사람? 부모님 인생과 똑같이 살고 싶은 사람?’
이와 같은 질문에 너무도 당당하게 두 손을 번쩍 든 딸의 모습에서 나는 과연 부모님을 존경하고 있고, 부모님 인생과 똑같이 살고 싶어했는지? 라는 물음을 던져보게 된다.

여성 리더십 연구회에 다니는 엄마의 이야기인 <니 욕망대로 살아라> 역시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모성에 대해서 너무 부풀려서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하고 생각하게 할 것이다.

저는 사실은 모성의 완전함에 대해서는 별로 믿지 않아요. 그러니까 어머니든 아버지든 부모라도 일단 자기 이기성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있고 그러고 나서 자식도 있는 거 같아요. 자기가 불안하고 고통에 빠져 있거나 불안전하면, 그런 모습을 자식한테 보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해서 위로를 받는 거죠.(130쪽)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보면, 엄마의 이해 못할 태도들이 다소나마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엄마하고 딸들은 인간적인 경계선이 별로 없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다. 즉, 딸이 엄마고, 엄마가 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엄마가 엄마 스스로 학대하고 싶을 때 딸을 학대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엄마들에게도 일침을 놓는다.

애들을 위해 자기의 꿈을 접는 거는 인생의 보복이 정확하게 온다고 생각해요. 그것 때문에 언젠가는 남편을 원망하든지, 자식을 원망하든지, 인생의 황혼기에 심각한 고통이든지, 그렇게 보복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나이 들어서 내 자식한테 “너희들한테 미안해”라고 얘기는 하겠지만. “너희 때문에 내가 불행해졌다”라고는 하지 않을 자신은 있으니까.(150쪽)

그렇다고 모든 엄마들이 다들 바깥으로 나가서 일을 찾으라고 조언하지는 않는다. 애들하고 놀고, 함께 하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 엄마들이 있는데 그런 엄마들은 전업으로 애들을 키우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엄마들은 이웃집 애들도 다 불러다 같이 놀게 하는데, 그러면 이웃집 애들도 다 좋아한다는 것이다. 엄마 노릇이 적성에 맞는 사람은 적성을 잘 살리라는 말로도 들린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역시 가슴을 콕콕 파고드는 내용들이 많다. <아빠, 내가 안아드릴게요>라는 제목에 나오는 아빠와 아들의 이야기 역시 재미있으면서, 근엄한 아버지의 모습만을 상상해온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정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펑크 스타일 가발을 사달라고 하는 아들과 그걸 못 마땅해야 하는 아빠가 있다. 그러자 아들이 한마디 던진다.
“왜 아빠는 가발 쓰는 걸 자꾸 나쁘게 생각하냐? 이걸 모자라 생각해라. 모자라고 생각하고 멋으로 쓰면 된다. ”

아들의 이 말은 아빠에게 발상의 전환을 가져오게 한다. 발상을 전환한 아빠의 호응에 부응하듯, 아들은 정말 가발을 한 두 번 쓰고 벗게 된다. 아들과 아버지의 대화가 참 앙증맞으면서도, 아빠의 유연한 사고방식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그의 아들 역시 사랑스럽다. 아버지 학교에서 자녀가 아빠를 사랑하는 15가지 이유를 받아오라는 숙제를 해야 하는 아빠는 아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아들은 너무도 명쾌하고 마음 찡하게 답을 해준다.

“당신이 나의 아빠라는 그 이유가 사랑스럽고, 둘째로 당신의 그 사랑을 내가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스럽다.”

<예순에 얻은 사대독자>에 나온 아버지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려울 때 집에 가서 두 아들이랑 딸이 각자 방에서 자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든든해요. 내가 이렇게 고생은 하고 있지만, 그래도 저놈들이 자라면 아버지를 못 본 체는 하지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면 웃음이 나오죠. 내가 술 마시고 들어갔을 때 아버지 술 조금만 드세요. 그러면 임마 참견하지 마, 그럴 때 아버지 제가 참견을 안 할 수가 있어요? 그냥 뜻하지 않게 이런 말 딱 들었을 때 마음이 흐뭇해요. 그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인 것 같다.(185쪽)

<아버지의 뒷모습>은 우리가 무의식 중에 부모님에게 내 뱉은 말이 부모님 가슴에 상처가 되지는 않았는지 되짚어 보게 한다.

아빠가 우리한테 해준 게 뭔데 내가 이거 한다는데 왜 그러냐고”, 그때, 아빠의 표정이 화가 나서가 아니라 배신당한 느낌, 그런 것들을 그때 봤었어요. 중심에 있는 생각이랑은 다르게 말이 나갈 때 그게 듣는 당사자에게는 얼만큼의 파장을 줄지 모르고 한마디 툭 던진 게, 아버지한테 크게 상처가 됐을 거라고 지금 생각이 돼요.(248쪽)

아들의 다음 바람 역시 마음 속에 새기게 만든다. 아버지를 존경하냐는 질문에 아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당연히 우리 아버지는 내가 존경해야죠. 내가 존경했을 때 우리 아버지가 크는 거고, 아버지가 아들을 존경해 줄 때 아들이 크는 거죠. 예전에 내가 아버지한테 기대기를 바랐다면, 이제는 아버지가 나에게 기댈 수 있도록 더 넓은 가슴을 만들어야겠고, 그런 모든 근본을 만들어주신 분이 아버지셨기 때문에 아버지는 존경스럽고, 존경받아야 되죠. 이제는 내가 챙겨드릴 수 있는 위치가 되는 게 바람이고 꿈이에요.(249쪽).

<남편과 아내>는 유일하게 텔레비전 프로로도 보고 책으로도 본 부분이다. <전쟁 같은 사랑>은 뮤지컬 배우 박혜미가 나온다고 해서 더욱 유심히 프로를 주시했다. 자기 주장이 확실한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말 그대로 전쟁같은 하루를 보내고 전쟁같은 사랑을 한다. 그러나 확실히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남편과 부인의 부부에 대한 정의 역시 특이했다. 부인은 가장 바람직한 부부는 개인으로서의 존재를 최대한 존중하면서 갈 수 있는 진정한 파트너십이라고 말했다. 남편은 부부라는 건 그냥 각자라고 말한다. 완전히 따로 따로 딴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 같이 산다고 해도 하나지만 하나이면서도 각자라는 것이다. 부인의 꿈, 남편의 꿈을 펼칠 수 있도록 각자 도와줄 수 있는 한 최대한 도와주고, 서로 정상에 있을 때 그때 진정 행복한 부부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그들의 파트너십 관계가 계속 유지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닮은 꼴 맞벌이 부부>에 나온 부부들은 결혼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결혼이라는 것은 서로 익숙해지기 때문에 좋고 익숙해지기 때문에 나쁘기도 하다. 그렇게 익숙해지는 과정에서 서로 권태기가 오기도 한다. 스스로가 굉장히 노력을 해야 한다. 혼자서 견뎌내야 할 부분도 많다. 그러면서도 서로 동화되어 가는 게 부부다.

이 책은 열 아홉 가정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 페이지 분량은 무려 351페이지다. 중간에 그림도 끼어있긴 하지만, 방대한 분량의 내용들이 결코 지루하지 않다. 그들 가족들이 말하는 그대로 적어나간 글들은 지나치게 솔직했다. 그냥 책을 한 페이지 읽고 있다보면, 저절로 흐르는 눈물 한 번 훔치고, 가슴을 추스린 후 다시 책을 읽으면서 너무도 행복한 시간을 갖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싶다.

딸과 어머니, 아들과 아버지 그리고 아내와 남편, 이들은 서로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흐르는 끈끈한 정, 서로 상처내고, 다시 화해하는 묘한 기류에 대해서는 쉽게 말로 풀어내기가 힘든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인터뷰 형식을 취해 어떠한 부연설명을 하지 않은 채 독자들이 그들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다만 아쉬움은 남는다. 텔레비전에서 나온 대로, 인터뷰한 사람들의 실제 얼굴이 사진으로 제시되었다면 훨씬 더 감동을 주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책에서 다루지 못한, 자매들 이야기, 형제들 이야기, 시부모와 며느리 이야기, 아가씨와 새 언니 이야기 등도 나중에 한번 다루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이 책의 묘미는 자기 가족과 비슷한 유형을 발견할 수 있게도 하고, 전혀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발견할 수 있게도 한 점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을 접하면서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기본형태라고 하는 가족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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