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연출가 이윤택의 이름을 들어 봤을 것이다. 아니 2003년에 문예진흥원 대극장에서 올려진 연극 <옥단어>를 연출한 사람이 이윤택이라고 설명한다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연희단 거리패를 이끌고 있으며, 시인이자 극작가 겸 연출가 이윤택에게 따라 붙는 별명은 '문화 게릴라'다. 부산에서 가마골 소극장을 운영하며 부산의 관객들과 만나온 그는 어느 순간 서울로 들어와 공연을 하게 됐다. 이윤택의 이런 모습이 변방의 게릴라가 서울을 침공해 들어온 모습으로 비춰졌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게 됐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그의 진짜 별명은 부산에 가마골이란 산체가 있는 '산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의 말을 따르면 산적은 도성 안에 살지 못하는 제도권 외 인간이며, 타인들에게 위화감을 주는 인물이다. 자유로운 그의 외모와 말투에 너무도 딱 맞아 떨어지는 별명이다. 시인 기형도는 그를 두고 야수 같은 정열과 탐욕으로 뭉쳐진 인간이라는 의미로 '악마같은 마야코프스키'라고 했다. 기형도가 죽은 후 발간된 산문집에서 기형도는 이윤택을 두고 '거리에서 꿈꾸는 춤꾼'이라고 명하기도 하였다.
에세이 형식을 취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이윤택의 <살아있는 동안은 날마다 축제>는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시인 황지우는 이 책의 발문에 제목에 대한 풀이를 해 놓았다.
날마다 축제라면 삶이 얼마나 피곤할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다. 하지만 축제도 없이 피곤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고대의 제사장 같은 목소리로 이윤택이 "이 노예의 넋들아, 축제란 네 멋대로 한번 사는 거야"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단박에 축제를 즐기면서 신나게 놀 수 있지 않을까.
이윤택은 서울연극학교(지금의 서울예술대학) 면접 고사장에서 "왜 연극을 하려고 하냐"는 물음에 "내 멋대로 살고 싶어서 연극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그의 자유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스스로 제도적 삶에 길들여지지 못한 사회 부적응자이며 평생 객원일 수밖에 없다는 말로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풀어내고 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봉분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인생의 슬픔을 다 알아 버린 표정으로 서있던 꼬마 남자 아이(이윤택의 초등 학생 시절) 사진이다.
엄마는 옷 팔러 나가셔서 들어오지 않고, 아버지는 깜깜 무소식인 상황에서 꼬마 아이는 세상과 만나는 멋진 나들이인 소풍을 혼자 가야만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도 소풍 가서 먹기 위한 카스텔라와 선생님에게 드릴 담배를 사기 위해 동네 구멍가게 아저씨에게 외상까지 하면서 말이다. 이 시절에 대한 기억을 이윤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이 사십이 되어서야 이 모습이 내 본 모습이란 생각이 들고 있다. 아버지의 부권 상실, 어머니의 인내, 소외되고 싶지 않은 초등학교 삼학년짜리의 세계 인식, 그리고 지금까지 내 삶의 유일한 기준처럼 세워져 있는, 수치스럽게 살지 않겠다는 고집 같은 것 말이다. - <소풍에 대한 기억, 수치에 대하여> 28쪽
연출가로서의 고뇌 역시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연출가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튼튼한 심장, 뻔뻔스러움, 세상에 대한 칼날 같은 회의 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연출가 이윤택을 너덜나게 만들 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연극을 그만두지 못한다. 다음의 말은 왜 그가 연극을 계속하고 있는지에 대한 답변이 될 듯하다.
가장 치명적인 충격은 세상이 자신의 기대와 무관하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때 심한 무력증이 엄습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을 멈출 수가 없다. 내가 작업을 멈추었을 때 세상은 더욱 악화될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71쪽
이윤택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참으로 맛깔스럽다. 어머니가 처녀시절 연애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은 요즘의 젊은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신기하게 다가올 것이다.
밤바다를 턱 바라보면서 설을 푼다. "흠흠흠 북편에 백두산 동편에 울릉도 서편에 인천 앞바다 남편에 제주도 우리 조선 정말 좋지요"이라거든." "그게 무슨 소리요" "니 만나 참 좋다 이 말이다. 고걸 직설로 풀지 않고 일 없는 바다 들먹이는 거다. - 117쪽
'연극의 메카'여야 할 대학로의 소극장 연극에 대한 탄식 역시 읽을 수 있다. 지금의 대학로 소극장 연극은 작품의 성격과 수준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관객들에게는 일종의 미로 찾기 같다는 말을 던지며 대학로 연극에 대한 우려를 보였다.
처음에 괜찮은 수준의 대학로 연극을 본 관객이라면 대학로의 연극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조악한 소극장 연극을 본 관객은 연극과 대학로에 등을 돌리기 십상이다. 그 점에서 이윤택은 대학로 소극장 연극은 관객의 저변 확대와 물량 공세에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상대적으로 관객이 연극을 멀리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소극장 운영주들은 연극에 대한 소신을 가져야 한다는 지적 역시 빠뜨리지 않고 있다.
이윤택은 연극 비평이 사라지고 있는 것에 대한 우려를 보이기도 했다. 90년대 초 연극과 비평, 대중매체의 만남은 긴장감을 수반하는 생산적인 관계였음을 언급했다. 즉 연극인은 평론가의 전문성과 객관성을 인정하며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현장의 연극인들이 평론가를 외면하고, 평론가들은 신작을 찾아 다니는 '새것 콤플렉스'에 빠져 불신을 받게 되면서 이러한 생산적 관계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전문 비평이 활성화되길 바라는 그의 마음은 다음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연극은 어느 정도 교양을 갖춘 관객이라면 상식적인 선에서 가치 판단이 용이한 예술 장르다. 음악이나 미술처럼 사전 전문지식이 없어도 짧은 관극평을 쓸 수 있는게 연극 장르인 것이다. 비평가들의 본연의 임무는 한 연극 작가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분석, 총체적 관점의 작품론, 미래 연극 현상에 대한 진단과 전망등 일 것이다. 이런 전문 비평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다. - 145쪽
배우들에 대한 조언 역시 새겨들을 만하다. 배우를 지망하는 젊은 '끼'들에게 이윤택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꿈을 꿀 수 있는 것처럼 연기할 능력은 잠재되어 있다는 말을 건네며 나는 과연 재능이 있는가에 대한 궁금증은 일치감치 접어두라고 하고 있다.
또한 배우들에게 꼭 필요한 자질인 자신의 이기주의를 극복하라고 지시한다. 자신의 이기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많은 배우 지망생들이 탈락한다는 것이다. 배우는 저 혼자 존재하지 않고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 더 나아가 자신과 세계와의 관계를 맺는 것이 바로 연극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기심을 버려야 하는 또 다른 이유로 배우들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정신적 여백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는 말을 하고 있다. 배우는 항상 변화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이는 관객들이 새로운 인간형을 찾아 극장 문을 들어서는 것과도 부합하기 때문이란다.
이윤택 스스로 '가벼운 읽을 거리가 되기 바란다'고 독자에게 소망한 이 책의 후반부에는 그가 만난 우리 시대의 연극인들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다.
"눈을 뜨고 울어라"라는 말을 남긴 영화배우 최민수의 외할머니 전옥, 이윤택으로 인해 연기 변신을 이루게 된 김갑수, 당대 최고의 메피스토펠레스 신구, <오구>를 통해 매일 극락왕생하는 강부자, 악한 연기의 대가 김학철, 한국의 리처드 버튼 유인촌, 자존심으로 뭉친 배우 이혜영 등 이 책속에서 배우들의 숨겨진 진면목 역시 확인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