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색 글쓰기 - 김정란 小說 평론집
김정란 지음 / 새움 / 2001년 8월
평점 :
절판


-우리는 未知를 향해 나아감으로써만 잘 쓸 수 있다. 未知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크리스티앙 보뱅

 

 

의식적 자아의 씩씩한 결정과는 달리, 내면은 한없이 체제를 두려워하고, 한 번 이겨냈다고 생각되는 억압의 트라우마 안에 다시 자기모멸의 외투를 뒤집어쓰고 들어가 수동적으로 드러누워 있고 싶어했다. 그리고 열등감의 악마는 끊임없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텍스트로 하여금 스스로 안에 갖추고 있는 기계 장치를 작동시키는 능력을 발견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비평행위를 하려고 애써왔다.

 

-나는 텍스트의 현재보다도 텍스트의 미래에 관여한다.

 

-철학과는 달리, 문학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존재 형태를 예시하는 초월성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철학이 있었던 것들과 있는 것들 안에서 상수를 추출하여 세계상을 확립한다면, 문학은 있었던 것들과 있는 것들과 있을 것들을 참조하여 세계상을 만들어낸다.

(중략)

문학은 비체계적으로, 직관적으로, 그리고 디테일을 사상시키지 않은(철학자들에게는 매우 불편하고 열등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파롤의 방식으로 한다. 파롤은 늘 시끄럽고 제멋대로이며 변덕스럽고 주책스럽고, 자신의 안에 완벽하게 통일되어 있지 못하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언어 안에 완전히 통일되어 있으되 납작하게 짓눌려 있는 <숫자>와 달리 미래의 인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늘 틀릴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다. 그는 늘 어느 정도 무지하다. 그러나 그 무지가 사실은 문학이라는 기계를 작동시킨다.

 

-이제 고독은 추문이다.

 

-신화적 인식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타자의 존재를 기꺼이 인정한다는 것이다. 신화적 인식에게 홀로 따로 떨어져 있는 사물은 아무것도 없다.

 

-신화적 인식에게 모든 것은 <in>이라는 전치사를 붙여서 인지된다.

 

-<차라리>라는 단어는 존재와 무 사이에서 두번쯤은 왕복운동을 하는 기묘한 단어이다. 그것은 한번 존재를 빠져나가 무가 되었다가 다시 존재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이미 존재의 맥락이 바뀌어버린 뒤이다. 돌아왔을 때, 무가 존재로 완전히 치환될 자리는 없다. 돌아온 무는 존재의 문지방에 어정쩡한 엉덩이만 걸치고 있다.

 

-인간은 그렇게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본질적으로 무의 엔트로피 덩어리인 운명과 싸우는 것이다.

 

-그렇다. 누군가는 생 안에 머물고 누군가는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서툰, 순결한 글쓰기, 삶을 처음으로 배우던 자의 휘둥그레함을 간직한 글쓰기.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실현하는 것보다 <차라리>, 아니, <오히려>(이 말 역시 존재와 무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존재 쪽에서 멈춘다) 실현에 대한 열망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외적으로 발생하는 가벼운 포스트모더니즘적 징후들을 디지털 방식으로 끊임없이 포착하면서 근대적 명민성을 확보해나가야 한다. 그래야 외적 가벼움이 의미있는 진정한 표정이 된다.

 

-존재하는 나와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같은 자가 아니다. 자아의 명민성은 자아의 분열이라는 불행을 대가로 얻어진다.

 

-존재의 한 복판에 생겨나는 존재론적 허공

 

-<죄>란 존재의 부조리함 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예수가 인류의 죄를 구원했다고 하는 것도, 인류가 스스로 존재의 조건의 끝까지 갈 때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 구원의 희망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빼어난 텍스느는 언제나 해석학적 환원을 거부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어떤 분석 용액을 가져다 부어도 완전한 용해에 저항하는 미학적 결석(結石)이 남는 것이다. 문학의 역사는 언제나 그 결석들의 존재로 이어져 왔다.

 

-재능은, 어떤 의미에서는, 열망의 크기이다.

 

-죽는 날까지 작가는 문학은 온 몸으로 사는 것

-황석영

 

글쓰는 사람의 사람됨의 품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문장

 

-전시대의 역사가 개인의 사유 안에서 어떤 결과물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지기 때문이며, 한 개인은 역사의 폭압에 희생당한 의미없는 단자로 추락해버리기 때문이다.

 

-싸락눈은 함박눈과 다르다. 그것은 대지에 순하게 스며들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존재의 물질성을 수줍게 고집한다.

 

-역사 안에서 움직이되, 이데올로기의 전체성에 함몰되지 않는 생생한 주체의 심오한 개인성을 지켜내기.

 

-민중은 꼼짝없이 역사의 아픔을 다 떠안고 자기 몫의 작은 역사를 일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근대는 어떤 의미에서 형태에 대한 오만한 믿음이었다.

 

-가장 헐벗은 자로서 가장 풍요로운 내면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직관은 이성의 적이 아니다. 그것은 더욱 깊은 지성이다.

 

-우리는 타자의 어깨 너머로 역사를 내다본다. 너는 내가 그 너머로 역사를 내다보는 나의 기준점이다.

 

-그렇다면 메마른 시대를 적셔줄 비는 하늘에서 저절로 은총처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적극적으로 호명함으로써 내리게 만드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존재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 그래서 자아의 자명성을 유보시킨다는 것, 자아를 부순다는 것, <스스로에게 무릎 끓는다는 것>, <내>가 <나>로서 유의미해지기 위해서는 <너>에 대한 나의 기다림을 완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따라서, 나 스스로의 손으로 자아라는 존재의 안정의 근거를 지워 뭉갠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자에게 존재는 텅 빈, 불안한, 쓸쓸한 집이다.

 

-그들은 반성적 인식으로 팽팽하게 긴장하고, 평범함으로 평범함과 싸운다. 그들에게는 어떤 감동적인 불균형함이 느껴진다.

 

-존재는 여전히 <...같은> 상태에 남아 있다.

 

-신비는 어떤 문화적 포즈나 제스처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실로 자신의 영혼을 응시하려는 강력한 존재론적 열망에 의해서만 얻어진다.

 

-하지만 깊고 서늘한 영혼의 영역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피투성이가 되도록 지옥을 헤매야 하는 것일까? 오 잔인한 생이여.

 

-환멸 안에 칩거하다

 

-일체의 의미화에 저항하는 신성한 현실. 그것에 관해서는 아무런 판단도 내릴 수 없다. 그것은 다만 <있는> 것으로 족한 자족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진실한 말에 대한 믿음의 힘으로. 자신의 내면을 끝까지 붙잡고 보편의 자리로 움직이려는 열망의 힘으로.

 

-말의 맘에 들기 위해 허영으로 치장하는 시대. 우리의 영혼이 병마처럼 너풀댄다. 공허. 이 시대의 양식. 난 일회의 삶이라고 불리는 벽을 향해 서서 울었다. 눈물의 범상함에 조차 겁을 집어먹으면서.

 

-환유는 은유와는 달리 의미론적인 <이탈>과 <차이>를 담아내기 때문이다.

 

-<자전소설> 또는 <성장소설>은, 적극적으로 쓰여진 경우, 단순한 유년시절의 회고담이 아니라, 작가가 자신의 자아를 구성하게 된 존재론적 연습의 기록이 되는 셈이다.

 

-내면의 깊은 곳까지 여행한 후, 그 여행의 결과를 가지고 현실로 귀환하고 있다.

 

-시적인 것은, 지성과 인식의 결핍이 만들어내는 <모호함>, 즉 구축적 결핍이 아니다. 시적인 것은, 오히려 특별한 형태의 지성이, 지성과 인식을 겸손하게 포기함으로써 얻어지는 구축을 넘어선 존재의 과잉이다. 지성적 무지(無知)는 지(知)가 아니다. 그러나 시적 무지는 일종의 지이다. 그것은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무지이다. 즉 그것은 미지(未知)에 대한 일종의 지라는 말이다.

 

-자아는 자아의 자아됨의 의미를 맥락 안에서 파악하지 못하고 <외딴 방>에서 썩어간다.

 

-비평은 맥락을 파악하는 미학적 기다림이다.

 

-이 작가의 유턴이 전세계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어떤 탈근대적 태도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속도>와 <표면>과 <물질>과 <가치 상실>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파시스트적 질주 아래에서 <느림>과 <깊이>와 <영혼>과 <가치의 복원> 쪽으로 몸을 돌리는 현상이 발견되고 있다. 손종일의 <문학적 회심>은 이 경향의 한 실천인 셈이다. 따라서 이 <회심>은, 탈근대의 속도와 가벼움이 불러올 수밖에 없는 자기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존재론적 치유의 방향을 따라간다.

 

-존재의 보편성에 대한 감각을 간직한 채, 도시를 향해 움직이는 것이다. <나>는 비합리적이며 원시적인 혈인인 <우리>로부터 분리되지만, 존재 보편을 떠나 이기적 단독자로 분리되는 것이라, 본질적 수준에서 재조정된<우리>의 수평선 위에 이타적 단독자로 자리잡는다는 말이다. 이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여전히 인간에 대한 <비빌 언덕>이다.

 

-바로 이 노선을 따라 초현실주의자들의 <영혼 탐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국면의 돌파는, 심화된 대자의식과 동시에 생 자체의 두께에 대한 인지를 요구한다.

 

-세계와의 접점에서 얄팍한 처세술만 배운 한국적 근대화가 내팽개친 그 무엇, 몸뚱이만 크고 정신은 어린아이인 우리가 심화시키지 못한 언어.

 

-깊이 사유하는 자만이 내면적 순결에게 형식을 준다.

 

-존재에 대한 질문은 무엇보다도 공간에 대한 질문이다.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자는 무엇보다도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나>라는 공간적 주체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질문이 인간의 물적 토대에 대한 질문에 기울어져 있었던 근대 이래로 오랫동안 인간은 우주와의 관계에 관해 별반 질문을 던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가 그 막강한 영향력을 잃어가면서, 이제 다시 창공이, 우주가 되돌아오고 있다. 존재는 다시 터진 공간으로 나선다. 확고하게 구축되었다고 믿었던 존재가 다시 불안의 수렁에 던져진 것이다. 의문이 존재의 대문을 흔든다.

 

-돌아가 숨을 수도원이 없는 시대.

 

-사랑은, 그것이 아무리 진부한 형태를 취하고 있을 때에라도, 결국은 존재의 완성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는 인간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절대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나간 시간을 수수께끼 안에 버려두지 말고, 낮 속으로, 인식 안으로 끌고 나왔어야 했다.

 

-지나간 시간은, 과거로 가버리지도 못하고, 현실이 되지도 못한 채, 유령처럼 그의 곁에서 출몰을 반복한다.

 

-고통의 의미를 리얼리티로 만들 것.

 

-근대적 구축을 익히기도 전에 탈구축의 포즈부터 배워버린 것이다.

 

-진정한 갈망은 길을 찾아낸다.

 

-우주를 향한 열림의 비전은 현실의 시간을 관통하면서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획득한다. 역사를 이야기하면, 반드시 우주를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얼마든지 우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우주는 역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열림은 닫힘의 길항을 겪어야만 진실로 인간적 열림의 역할을 한다.

 

-그는 이 휙휙 나는 세계 안에서 일부러 <느림>을 선택한 셈이다. 그것은, 인간이 잃어버린 대지를 다시 자신의 삶 속에 통합하기 위한 적극적인 선택이다.

 

-누구보다 무겁게 무게를 버리기. 누구보다 무겁게 가벼워지기.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주인으로 남아있는 것.

 

-진정한 정신을 잃어버리고 시간 때우기로 전락한 모든 문화에 대한 항의. 신성한 전율을 전달하기 위해서 태어났던 문화의 본래적 의미를 상실한 문화. 알렉상드르는 바로 그러한 자본주의 문화를 극복했던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를 매개로 발현되는, 만물에 편재하는 본래 비인격체인 힘이라는 것. 따라서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알게 된다는 것은, 사랑하는 자의 육체를 통해 내가 내 안으로부터 끌어낸 내 안의 에너지로써 그 힘의 흐름에 통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 우주에 흘러넘치는 신성한 소마(soma)의 한 정거장인 내 육체를 알게 된다는 것. 사랑은 사랑하는 자가 나에게 부여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내가 스스로 내 안에서 발견해내는 것이라는 것.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깊은 나의 발현이라는 것.

 

-알렉상드르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천겹으로 존재한다.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는 바위처럼 시커먼 물질적 실존, 내재성만으로 이루어진 꼼짝달싹할 수 없는 삶이라는 무명(無明)의 터에 뭐라고 뭐라고 열심히 긁적거려 왔던 것이다.

 

-인간은 물적 존재인 자신의 역사적 조잡함을 받아들이며 글쓰기를 하는 것이다. 여럿이 함께, 베껴 쓰고, 겹쳐 쓰고, 그러나 여전히 빛을 꿈꾸며, 진정한 글쓰기는 여전히 있다.

존재도 수첩 겹으로 겹쳐져 있다. 글쓰기 또한 그렇다.  우리는 쓴 위에 또 쓰고 또 쓰는 것이다. 그것이 글쓰기의 역사이다. (중략)

내 말은, 글쓰기란 삶의 터에 몸으로 흔적을 남기는 일이라는 뜻이다. 글쓰기는 추상이 아니다. 나는 내 전에 죽은 자들의 글쓰기라는 살덩이 위에 내 글쓰기라는 살덩이를 조심스럽게 얹어놓아 본다. 생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사회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자아의 영역을 확고하게 지켜내는 역량을 확보한 사람들.

 

-절데된 정열, 안쪽으로만 발화하는, 무서운 자기 집중, (중략) 절대로 울부짖지 않는, 얼음처럼 차가운 글쓰기 사이사이에 들려오는 숨죽인 비명,

 

-이해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곧장 내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문장.

 

-침묵은 결핍의 표지가 아니라 잉여의 표지이다.

 

-타자성은 자아동일성의 승리를 위해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아 동일성의 제구축을 위해 환영받는다.

 

-모든 <있는 것>은 <있었던 것(Ce qui fut)>이다. 모든 글은 존재로부터 은퇴한 자가 쓰는 <회상록>이다. 1분 전의 일에 대해 쓴다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나는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가 너무나 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엇인가 새로운 것에 참여하고 싶었어요. 난 전철 안에 낑겨 있는 내 고뇌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다고 믿어요.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부르주아적 시간 감각인 <권태>

 

-두 사람은 <도덕>의 바깥에 있는 자연스러움과 당당함을, 세속적 기준이 아닌 다른 기준의 귀족성을 획득한다.

 

-환멸을 거쳐서 세련된 정신의 귀족들이 오고 있다. 세계가 인준하지 않은, 그러나 자신들의 원칙 안에서 이미 당당한, 딱딱한 근대와 어지러운 탈근대의 사이에서 어떤 오솔길을 찾아낸, 약하고 동시에 강인한 종족이...... .침묵 가까이에 있는, 무의 속살거림을 알아듣는 예민한 귀를 가진, 추위를 잘 견디는 부드러운 영혼의 세속 수도사들이...... .

 

-사물에 너무나 가까이 다가가 아예 몸을 섞어버리는 인식.

 

-일상을 영혼의 살림살이로 만들어버리는 기술.

 

-미묘한 균형감각, 무겁지 않은 무거움, 가볍지 않은 가벼움. 세속성과 신성함 사이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존재의 기술.

 

-존재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자들이 알고 있는 그 위험한, 아찔한 현기증.

 

-디테일의 쾌락이 존재의 최상급의 승진을 위해 있다는 것. 그러나 그렇게 한 번 존재의 꼭대기에 있어 본 다음에는 이제 굴러떨어지는 일만이 남아 있다는 것. 그러므로 어떻게 죽음 직전에 멈추어설 것인가. 어떻게 죽음, 또는 절정을 미묘하게 유보시킬 것인가.

 

-어떻게 환멸 속으로 굴러떨어지지 않으면서 죽음 또는 절대성에 가까운 순결한 삶을 기억하고 유지할 것인가. 매순간, 세계가 손대지 못하는 서정적 진실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삶은 가장 덧없으면서도 가장 실체적이지 않은가. 삶은 부재 쪽으로 미끄러지는 실재가 아닌가.

 

-일상의 명료함 또는 진부함이라는 납작한 봉투에 미지(未知)라는 리본을 매어놓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패러디하는 인식은 현재를 위하여 과거를 변형시킨 뒤, 미래로 가는 열차에 태우는 것이다. 그 열차는, 물론, 역사라는 열차이다. 적극적으로 패러디하는 인식의 시간은 과거 쪽으로 절반쯤 열려 있고, 미래 쪽으로는 활짝 열려 있다. 이 패러디는 과거의 정전을 소환하지만, 그러나 무엇인가를 발생시키기 위해서만 소환한다. 소극적 패러디는 과거를 무참하게 부관참시하지만, 적극적 패러디는 과거를 곱게 이장하는 것이다.

 

-패러디가 단순한 기법의 모방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문학적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그것이 작가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내적 고백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삶의 근원적 모순은 이처럼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진실한 발언인지도 모른다.

 

-다만 자기 별로 귀환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그냥 열심히 살기로 결정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아하지 않은 슬픔은 훨씬 더 삶의 진실에 가까운 슬픔이다. 삶은 별로 우아하지 않으니까.

 

 

처음으로 평론집을 읽었다. 가끔 계간지에서 평론을 읽고 그 평론이 작품이 담아내고 있는 세계보다 더 넓게 작품을 확장시킨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손이 잘 가지 않는 장르의 책이었다.

빵의 소개로 보게 된 김정란의 소설 평론집

이 책은 머리 속의 등을 밝혀준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다하더라도, 제대로 된 언어로 만들어내지 못한 어떤 생각들을, 명료한 언어로 꼬집어내고 힘을 실어준다. 인지가 언어가 되는 순간의 명쾌함.이 책을 읽는 내내 계속된다.

그리고 끊임없이 언어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글쓰기라는 것이 어마어마한 치열함과 진지함을 담보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고통을 리얼리티로 만들고 형식을 주기 위한

사유를 끊임없이 해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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