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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말들 - 후지이 다케시 칼럼집
후지이 다케시 지음 / 포도밭출판사 / 2018년 12월
평점 :
친구를 데려다 주러 도서관에 갔다가 빌려온 책이다. 펼쳐보지도 못하고 가져다 주려다 병원에 갔다가 대기 중에 책을 펴들었다. 병원에 갔다가 책을 반납해야지 했는데 대기 중 읽은 아래 문장으로 인해 끝까지 책을 읽기로 했다.
아무리 사소한법규 위반이라도 자신의 판단으로 의식적으로 저지르게될 때, 사람은 긴장감 속에서 많은 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게 된다. 그때 이미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순간 속에 있다. 이 순간 정치는 시작된다.
정치란 원래 법 바깥에 있다. 대의제민주주의의 핵심기관인 의회에서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법의 제정 또는 그 개폐인 것은,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이 늘 유동적이어서 그것을 그때그때 정하는 것이 바로 정치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항상 이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며 그런 토대 위에서 작동한다. -
P39
해방의 순간이란 움직일 수 없는 자연법칙처럼 보였던 사회질서가 사실은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것임을드러내는 순간이다. 다시 말해, 그 순간부터 사물 같았던 질서가 사람들의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 P47
"그리고 드디어 한 가해자가 가해자의 위치에서 스스로 탈락한다. 그때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비인간적인 대치 속에서 비로소 한 인간이 생겨난다. ‘인간‘은 항상 가해자 속에서 생겨난다. 피해자 속에서는 생겨나지 않는다. 인간이 스스로를 최종적으로 가해자로 승인하는 장소는 인간이 스스로를 인간으로서, 하나의 위기로서 인식하기 시작하는 장소이다." -
P59
관계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피해자성을 내세우곤 한다. 연인 관계조차도 그 관계가 내게 미치는 피해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대부분은 결국 관계는 얽혀있어서 피해와 가해의 상황을 나누기 어렵다. 피해자에 대한 동정심을 이용한 그런 관계에 대한 언어에 지쳤다. 왜 저 사람은 피해상황만을 이야기할까? 본인이 그 관계를 만들어낸 역학관계는 왜 말하지 않을까? 답은 아직 인간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위기는 감추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살고 싶다면 내 위기를 직면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을 또렷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사회적 약자들이 어찌할 수 없이 가질 수밖에 없는 피해자성, 그것이 유효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파고든다.
한국으로 유학 와 역사학을 전공한 일본인 후지이 다케시라는 사람의 글이다. 위안부 문제, 베트남전, 뉴라이트 등에 대해 날카롭게 이야기한다. 피해자일 때 편해지는 마음, 이슈화된 것들에 대해서만 날서고 그런 채로 접합되며 여전히 남은 문제들이 교묘하게 작동하고 있는 곳들의 심부를 찌른다. '국제시장', '아이캔스피크' 등 영화 비평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지점을 날카롭게 들여다본다.
한국 정치사회, 촛불집회가 있던 시절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때의 혼란을 들여다보던 다른 시선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 이 정부(윤석열 정부)로 들어선 것도 그처럼 날선 시선으로 사회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도취된 축제 분위기로 받아들이던 탄핵이며 승리가 지금을 낳았을 것이다.
내 삶 역시 이 말들 속에서 돌아보았다. 두고 온 것들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게 해주었다. 나의 도피는 무엇이었을까에 대해 답을 얻었다. 새로운 이름을 짓고 싶어서였다. 눈을 감아야 새로운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낭만에 젖어 한 선택이었던가,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너무 무책임했던가 스스로를 질책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이미 한 선택이라고 아무리 되뇌어도 여전히 그런 생각의 자욱이 남아있었는데 깨끗이 씻겨나갔다.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고 살아가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