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 김규항 아포리즘
김규항 지음, 변정수 엮음 / 알마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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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납치하다' 다음으로 누군가에게 사줘야 책이다.

(나는 더는 책장을 채우지 않고 누군가의 책장을 채우고 살고 싶어졌다.

지적 허영심과 물욕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자본주의 세계에 인텔리로 접어들어

많지는 않으나 월급을 받으며 그럭저럭 안주하고

쇼핑으로 취미를 삼고(물론 아이쇼핑이 대부분이고 그나마도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하고 있지만) 있는 내게 쉬운 일은 아니다.


(아래부터 책 내용 인용문이다.)

 

2018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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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위협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외치는 저항하는 누를 있어도 끊임없이 꼼지락거리는 놈을 누를 방법은 없다.

 

아무것도 위협하지 않는 현자보다는 시시한 하나라도 위협하는 활동가가 백배 낫다.

 

제아무리 급진적인 언어라도 체제와 정치적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급진적인 아니다. 그것은 대게 불필요하게 많이 배운 사람들의 '세계적인' 급진적 술자리 안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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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변화는 없다. 느린 변화가 있을 .

현실은 우리가 만든 것이고 우리가 변화시킬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어릴 인권을 보장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아이들의 인권에 대해 생각하게 보면 인류가 진보하는 사실이다.

 

6 항쟁이 군사 파시즘을 무너트린 아니라 사람들의 변화가 6 항쟁으로 표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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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지 않은 진실이 있다면, 아마 그것은 진실이 아니거나 진실의 전모를 덮기 위해 일부만 드러내려는 술수일 것이다. 모든 진실은 언제나 불편하다.

 

낙관주의는 비관적인 현실을

비관적으로 보는 데서 출발한다.

비관적인 현실을 낙관적으로 보는 것처럼

극단적인 비관주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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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정 어떤 것들을 놓니는 감정의 경로는

적대감이나 반감이 아니라 꺼려짐이나 찝찜함 같은 것이다.

 

대안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경험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마냥 밝고 진취적일 있겠는가. 대안 앞에서 우리는 오히려 두렵고 불안하다. 그러나 더는 이렇게 살아서는 되겠기에, 극단적 비현실성 너머로 발걸음을 떼는 것이다.

 

밝은 얼굴로 아직 희망이 있다, 말하는 사람을 보면 사람은 희망에 대해선 관심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확신에 얼굴로 신은 있다, 말하는 사람을 보면 사람은 신에 대해선 관심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상주의자는 이상 때문에 단순해지는 속성이 있다. 단순함은 다시 이상주의를 단순하게 만들고 혁명을 단순하게 만든다. 그럴 필요한 인간과 세상에 대한 혐오다. "이렇게 가망 없는 인간들을 상대로 대체 내가 하겠다는 거지?" 이렇게 중얼거릴 모르는 이상주의자는 경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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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력이 있는 사람은 포용력이, 포용력이 있는 사람은

비판력이 모자라기 쉽다.

 

일흔의 몸에 스물의 정신을 가진 청년이 있고

스물의 몸에 일흔의 정신을 가진 노인이 있다.

 

몸이 늙는 숙명이지만 정신이 늙는 (온갖 요사스런 핑계와 그럴싸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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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비현실적인 것을 상상하지 않고

더는 누구도 마음깊이 사랑하지 않을

영혼의 죽음을 맞는다.

상상과 사랑에 가차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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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이 없는 분노는 거대한 카타르시스일 뿐이다.

 

제아무리 비극적인 사건이라 해도 시간은 어김없이 분노의 열기를 식힌다. 삭혀진 분노는 오로지 성찰로만 지속된다. 성찰이 사라지면 분노도 사라지며 분노가 사라지면 진실은 묻힌다.

뜨겁기만 분노는 결국 식기 마련이다. 그러나 부러 차갑게 식힌 분노는 뜨거움을 이성과 사유에 새긴 차가운 분노는 독하게 지속된다.

 

지성이란, 분노의 열기와 집단적 감성에 젖어 단순해져만 가는 사람들 앞에서 '오해와 불편을 무릅쓰고' 문제의 본질을 환기하는 것이다. 지성은 분노에 질문함으로써 분노가 소모되어 버리지 않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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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종종 냉정하게 자신을 되돌아봐야할 순간을

회피하기 위해 용이한 열정에 빠져들곤 한다.

이성을 생략한 분노는 비극을 재생산한다.

 

운동이란 운동에 이미 동의하는 사람들끼리의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운동에 아직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세를 늘림으로써 세상을 바꿔나가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대열에 서서 일사분란하게만 움직인다면 이미 죽은 운동이다. 운동에 수반하는 문제와 이면들을 질문하고 토론하는 일은 전선을 명료하게 만들고 운동의 생명력을 만들어낸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평소보다 경박해지고 평소보다 거칠어지는 경향에서, 인터넷 공간은 예비군 훈련장과 비슷하다. 예비군복 입고도 평소와 다름없는 사람이 달리 보이듯 인터넷에서도 평소와 다름없는 사람을 보면 그의 인격을 되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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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이 수반되지 않는 분노는 짜증이다.

 

분노는 나를 이웃의 지평으로 끌어올리는 사회적 행위지만 사회적 짜증은 나를 거슬리게 하는 것에 대한 사적 반응이다.

 

우리는 흔히 부정적 태도를 부정이라 착각한다. 부정적 태도는 부정의 일환이 아니라 부정의 시늉으로 기존 체제에 기생하는 것이다.

복종은 존경의 태도로만 만들어지는 아니라 경멸의 태도로도, 오히려 공고하게 만들어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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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번은 넘어야 산도 언제 넘을지는 신중하게.

 

가던 가는 것보다 멈춰서는 어렵다.

그러나 멈춰 모른다면 제대로 없다.

 

세상을 바꾸는 싸움은 절대선인 사람들과 절대악인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아니라 자기성찰이 가능한 사람들과 자기성찰이 불가능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성찰보다 강한 무기도 없다. 성찰은 적이 파고들 틈새를 없앤다. 우린 싸움을 머뭇거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힘차게 싸우기 위해 성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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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성찰한다는 자기만 생각하지 않는 .

생각도 하는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결국 나와 남이라는 구분을 해체하는 것이다.

 

사회의식이란, 단지 사회적 억압을 사회에 호소하는 아니라 사회적 억압을 통해 다른 이의 사회적 억압을 깨닫고, 억압을 모든 사회적 억압의 지평에서 조망하고 연대하는 상태를 말한다.

 

모든 운동엔 가지 필수적인 덕목이 있다. 첫째는 자기가 하는 운동에 대한 분명한 '자부'이고,  둘째는 자기가 하는 운동이 운동의 일부라는 '겸손'이다. 자부가 없는 운동은 비루해지고, 겸손이 없는 운동은 빗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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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하는 사람들이 행동하 않을 있다.

그러나 말로도 안하는 사람이 행동하는 법은 없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의 위선을 비판하면서 스스로는 '위선에조차 이르지 못한' 위선적 상태에 머물곤 한다.

 

욕이 필요한 공간과 시간에 욕을 하는 지성의 결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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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사람은 '그의 행동이 어떻다' 말할

'그는 어떤 사람이다' 말하지 않는다.

 

사람의 능력은 달라도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은  다르지 않다는 잊어선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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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어떤 삶의 방식을 좇는

삶이 옳아서만은 아니다.

그런 삶이 멋지게 느껴질 비로소

삶을 좇게 된다.

 

우리는 삶에 몹시 공감한다. 그러나 중요한 공감하는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이다. 그게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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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란 기회를 가진 사람들이 기회에서 차단된 사람들과 함께 기회의 속도를 제어하며 기회의 정의를 구현해가는 행진 아닐까?

 

오늘 인민이 사회적 분노에 공감하지 않는 이유는 사회의 진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자신이 사회 안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 밖에 있다. 그러나 인민이 부재한 사회는 존재할 없다는 점에서, 사라진 실은 그들이 아니라 사회 자체다.

 

현명한 사람 중에, 단단하게 살아가는 사람 중에

매사에 남탓만 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가?

 

말은 더할 나위 없이 무성한데 세상은 꿈쩍도 않는다. 말수를 줄이고 좀더 현명해지려 노력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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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자유시장' 경계심이 없는 자유주의자만 아니라면

자유주의자들은 좌파와 활동의

없어서는 기반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을 회복하는 벽돌에서 인간이 되는 , 개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취향과 문화와 교육관과 인생관과 세계관과 연애의 기준을 가진 비로소 개인이 되는 것이다.

 

공동체적 이상을 좇기 위해 우리는 개인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개인이 되지 않고 도달할 있는 공동체는 없다. 이런저런 집단만이 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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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생각을 아는 , 그리고 생각을

실제 삶에 실천하는 , 그것을 지성이라고 부른다.

 

'다른 세상' 꿈꾸는 일의 출발은 '다른 가치관' 갖는 것이다. '혁명의 대상과 다르지 않은 가치관' 가진 상태에서 진행하는 혁명 운동은 그저 '혁명 게임' 뿐이다.

 

현실을 넘어설 힘은 문제가 어디에서부터 오는가를

꿰뚫어보는 식견과 삶이란 무엇인가를 사유하는

철학에서 나온다.

 

사람이 철학을 갖다는 뭘까. 인간과 세계에 대해, 삶의 본질에 대해 사유하길 멈추지 않으며 나름의 관점과 태도를 갖는 것일 게다. 그리고 현실이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더라도 관점과 태도에 기대어 사람 꼴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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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밝고 시사에 어두운 사람은 허화하다. 시사에 밝고 역사에 어두운 사람은 경박하다.

 

순간의 역사를 보려면 종종 시사를 끊는 노력이 필요하다. 시사에 연연하면 작은 차이를 크게 보게 되고 결국 역사적 맥락을 잃게 된다.

 

당대를 올바로 보기란 정말 어렵다.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제대로 보려면 세상의 중심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 우리는 조금씩 야인일 필요가 있다.

 

'역사의식' 없다면 '현실' 없다.

 

제대로 역사의식과 살아있는 현실의식이 없을 , 역사적 지식과 외국이론에 대한 지식은 양만큼 우리는 멸망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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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온한 상황에서만 작동하는 이론은 죽은 이론이며,

압도적 상황일수록 냉철해지지 않는 학자는 죽은 학자다.

 

지식인은 대중을 비판팔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대중을 비난할 없다. 대중이 비난받을 만한 상태에 있는 책임이 바로 지식인에게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지성과 실천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정치적 변혁에 몰두하던 인텔리는 시도가 실패한 좌절감 속에 제가 생명이나 인간 같은 '좀더 근본적인 문제들' 빠트렸음을 깨닫게 된다. 문제는 깨달음이 아니라 그런 깨달음 뒤에도 여전한 오만함이다. 빠트렸던 문제들은 원래의 문제를 보완하지 않고 전적으로 대체된다. 이젠 그들에게서 정치적 변혁이 빠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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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지식인에게 육체노동의 의무를 면해주고

존경과 명예를 것은 지식인이 원래 존귀해서가 아니라

당대를 파악하는 그들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가운데 원래 존귀한 것은 없다. 사회를 통해서만 존귀해진다.

파시즘의 요체는 억압이 아니라 ‘대열‘이다. 억압은 저항하는 극소수에게만 필요할 뿐 나머지는 대열이면 족하다. 파시즘이 물러간 후 그 습성은 대개 자본의 차지가 된다. 월드컵의 대열이 대게 삼성전자와 에스케이의 배를 불렸듯이.
- P83

보잘것없이 보이는 적은 사람들의 끈기 있는 노력에 의해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세상은 결국 변화하고 그 변화의 성취는 그들을 비웃고 조롱한 사람들에게까지 고루 나누어진다. 세상의 변화는 늘 그랬고 지금 이 순간 역시 그렇다. - P90

역사가 보여주듯, 올바른 사회적 선택이 다수를 점하는 건 단지 ‘최후의 결정적 순간‘뿐이다.
진정 현실적인 것은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들 가운데 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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