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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자줄기 독서법
조희봉 북칼럼니스트  | 2004-11-01

얼마 전 이윤기 선생님 댁에 갔다가 낡은 영어 사전 한 권을 보았다. 보통의 작은 페이퍼백 사전이 아니라 국어대사전처럼 굵고 큼지막한 사전이었는데, 하드커버 표지는 이미 어디론가 달아난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길을 잡아끄는 건 얼마나 들춰 봤는지 온통 손때를 까맣게 탄 얇은 종이들이 귀퉁이가 모두 떨어져 나간 채 동그랗게 말려서 나달나달하게 닳아 있는 모습이었다. 그 낡은 사전 한 권만으로도 번역가로 살아 온 지난 세월이 얼마나 치열하고 열심이었는가를 충분히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 사전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문득 선생 책의 한 구절이 선명하게 떠올라왔다.

"나는 지금도 사전에서 내가 바라는 항목을 찾을 때마다 항목의 미로를 헤매고는 합니다. 정작 찾아야 할 항목을 잊어버린 채 몇 분 동안이나 사전을 뒤적거리고는 하는 것입니다. 가령, 감자 덩어리가 줄기인지 뿌리인지 알아보려고 '감자'를 찾다가는 김동인의 「감자」 항목도 읽어 보고, 사탕수수를 뜻하는 '감자'(甘蔗), 경제용어임에 분명한 '감자'(減資), 자화(磁化)의 반대 개념일 터인 '감자'(減磁) 항목도 읽어 보고는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버릇 때문에 시간을 많이 씁니다. 그러나 내게 이 버릇을 버릴 생각은 없습니다."(이윤기, 『하늘의 문』(열린책들) 중에서)
생각은 여기서 다시 줄기를 탄다. 감자 캐기는 영어 단어를 찾는 영어 공부법에만 쓰일 수 있을까. 혹시 책을 읽는 데도 '감자줄기 독서법'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한 독자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웅진닷컴)를 읽기 시작한다. 정신을 홀딱 빼 놓는 신화의 재미에 빠진 독자는 이제 한 발 더 앞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신화의 세계로 좀더 깊이 들어간 그는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민음사)와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창해)를 거쳐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오딧세이아』라는 다른 줄기로 건너간다.
또는 아직 이윤기라는 감자줄기를 놓지 않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 그의 본격적인 신화 이야기 『뮈토스』(고려원)를 읽고 나서 그가 번역한 조셉 켐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민음사), 『신화의 힘』(이끌리오)을 거쳐 미르치아 엘리아데나 프로이드까지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이쯤 되면 줄기를 따라 흙 속에서 감자가 후드득후드득 마구 딸려오기 시작한다.


 

 

 

또 다른 독자는 정민의 『미쳐야 미친다』(푸른역사)를 읽기 시작한다. 벽(癖)에 들린 조선 지식인들의 이야기에 정신을 홀딱 빼앗긴 독자라면 역시 이 책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굵은 감자줄기를 당기기 시작한다. 이덕무에 반한 독자라면 이미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열림원)을 펼쳐들었을 테고, 박제가에 끌렸다면 산문집 『궁핍한 날의 벗』(태학사)이나 『북학의』(서해문집)를 캐기 시작했을 터이다.

 

 

 


박지원이라는 줄기로 넘어갔다면 감자줄기는 점점 굵어지기 시작해서 그의 아들 박종채의 『나의 아버지 박지원(過庭錄)』(돌베개)이나 정민의 『비슷한 것은 가짜다』(태학사)를 잡았을 것이다. 아니면 바로 『열하일기(熱河日記)』(민족문화추진회)를 찾아 나섰거나, 아쉬운 대로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그린비)부터 읽기 시작했을지 모른다. 아직 정민이라는 감자줄기를 놓치지 않은 사람이라면 『한시미학산책』(솔)을 지나 김원중의 『당시』, 『송시』(을유문화사)나 임창순의 『당시정해』(소나무)에서 이백과 두보를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이미 감자가 너무 무거워서 쉽게 일어설 수도 없다.

모든 책이 다 줄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책이라면 모두 길고 굵은 감자줄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주렁주렁 감자를 한 아름씩 달고 있다. 줄기는 흙 속에 묻혀 있지만 여러 가지 모습으로 슬쩍슬쩍 모습을 드러낸다. 책 속에서 인용으로 나타나고, 주(註)나 해설 혹은 참고 문헌에 나타나기도 한다. 책날개에 붙어 있는 저자 소개만 유심히 읽어 봐도 그 책 혹은 작가와 관련이 있는 감자줄기와 감자들을 능히 알 수 있다.

앞선 글에서 이윤기 선생은 이렇게 잇고 있다.
"나는 소년 시절부터 '말'을 공부하되 감자 캐는 기분으로 했습니다. 감자를 캐 본 사람은 잘 압니다. 감자 잎줄기를 잡고 그냥 뽑으면 감자가 딸려 나오기는 해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딸려 나오지는 않지요. 이럴 때 조심스럽게 호미를 흙 속에 박고, 무겁게 긁는 기분으로 당기면서 잎줄기를 뽑아 올리면 감자가 주렁주렁 딸려 나옵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나는 되도록 감자가 많이 딸려 나오는 것을 좋아합니다. 따라서 작업 능률의 극대화 같은 건, 적어도 내게는 쥐뿔도 아닌 것이지요."

시간을 많이 들일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역시 작업 능률의 극대화 같은 건 쥐뿔도 아니라고 믿는다면 책을 읽는 것도 감자를 캐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굵은 감자줄기 한 권부터 움켜잡고 시작해서 무겁게 긁는 기분으로 샅샅이 훑어 나가면 그리 오래지 않아 하나인 줄로만 알았던 감자가 줄줄이 엮여서 달려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오래도록 주저앉아서 감자를 캐다 보면 우리도 언젠가 손때가 까맣게 묻고 책장이 하나같이 나달나달해진 굵은 영어 사전 한 권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나도 말만 캘 것이 아니라 컴퓨터 전원을 끄고 책장으로 가서 알 굵은 감자책이나 한 권 캐야겠다.

 
글쓴이 소개

조희봉 북칼럼니스트 - 북칼럼니스트, 『전작주의자의 꿈』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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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Fithele > 이런 것이야말로 10년전의 '엽기'라는 단어의 정의였다
외딴섬 악마 동서 미스터리 북스 145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문운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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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간되는 동서 미스터리에서 가장 값진 요소들이 바로 란포, 세이초, 세이이치 같은 일본 작가들의 집중적인 소개일 것이다. 일어 중역이라는 더께를 벗어던진 국어 번역본들은 격조가 높다고는 할 수 없어도 보다 적나라하고 폐부를 파고드는 듯한 이웃나라 스타일을 거진 여과없이 보여주는 편인데, 그런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 바로 에도가와 란포의 저작들이다. 그의 작품을 만일 영어나 중국어로 옮겼다가 국어로 번역했다면 절대로 필이 오지 않을 것이니까.

한마디로, 대단하다. 독자의 취향에 따라 단어의 뜻이 좋다/나쁘다로 심각하게 갈리겠지만.

[음울한 짐승] 감상에서 잠시 언급했던 스타일, 즉 수수께끼의 명탐정, 암호, 밀실 살인과 같은 제대로 된 본격물을 추구하면서도 엽기적인 상태나 심리적 아이디어를 도입하여 찝찝한 느낌을 주는 스타일이 이 장편에서는 거의 절정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엽기라는 표현을 아무 데나 쓰지만, 이런 것이 10년 전의 '엽기'라는 단어의 정의였다. 그런 점에서 교고쿠도와 같은 류로 분류할 수도 있겠지만, 호러의 범주에 넣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적어도 본인은 읽어가면서 무슨 한편의 지옥도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도입부부터가 심상치 않다. 하루 사이에 머리칼이 모두 하얗게 센 남자가 자기의 기막힌 사연을 풀어놓는 형식이다. 애인이 밀실에서 칼에 찔리고, 조사를 부탁한 명탐정도 백주 대낮에 쥐도새도 모르게 찔려 죽는다. 이 모든 것들이 아리송하다기보다는 한여름에 듣는 기담처럼 그려진다. 특히 중간에 나오는 쌍동이의 수기(手記)에 이르면, 대체 이 막나가는 얘기가 어떻게 맺어질 것인지 정말로 궁금해지게 된다. 이 부분은 너무나 잔인하고 끔찍해서 리뷰를 쓰기 위해 떠올린 이미지만으로도 몸에 한기가 듣는다. 트릭을 제시하고 설명한다든가 하는 전통적인 스토리텔링 자체는 좀 고풍스럽고 빈약한 듯한, 그리고 마지막에 서로가 연관지어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깨지 못한 지나친 우연성이 있지만, 중간중간에 끼어드는 엽기적 소재랑 이미지를 적절하게 깔아 전개를 흥미롭게 한 기술은 정말 훌륭하다.

또한 보기 드물게도 동성을 사랑하는 탐정이 등장한다. 탐정과 그의 동반자(sidekick) 사이에 기묘한 우정이 존재하도록 그리는 작가는 많지만, 성 관념이 좀더 엄격하던 시대의 소설임을 감안할 때 이렇게 대놓고 로맨티시즘을 부여한 것은 파격적. 전반부의 두 남녀의 처절한 애정에 대한 묘사도 대단했지만, 후반의 절망적 상황에서 인물들의 관계가 이런 식으로 다시 조명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안타까움을 더해 주었다. 이런 전통(?)이 있으니, 일본 야오이 만화 중에 왜 그렇게 추리물이 많은 건지 이해가 갈 것 같기도.

소위 '기묘한 맛'을 추구하는 추리소설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주 재미있게 단숨에 읽을 수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는 파란 하늘을 쳐다보고 한숨을 쉬며 도리질을 칠 정도의 끔찍한 얘기였다. 아마도 [음울한 짐승]을 읽었거나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권말의 자세하고도 애정 담긴 해설을 비교해 가면서 더욱 재미있는 인상을 머리에 남길 수 있을 것 같다. (한가지 옥의 티가 있다면 해설에서는 같은 단편 제목을 [음수(陰獸)]로 표기한 것. 같은 출판산데 이정도의 일관성은 지켜줘야 더 많이 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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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매지 > 음울한 소설
음울한 짐승 동서 미스터리 북스 85
에도가와 란포 지음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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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본의 최고 추리작가라 할 수 있는 에드가와 란포의 단편집이다. 내가 가입한 클럽에서 가장 기초적인 추리소설중에 하나라 하여서 읽어봤는데, 정말 읽기도 쉽고 재미도 있었다. 클럽에서도 말이 많았던, 책 뒤에 적혀있는 소개서는 정말 출판사의 지나친 친절이었지만..-_-;;(이 책을 읽을 사람들은 필히 뒷장의 내용을 읽지 말아야 된다! 뒷장을 보면 범인이 누군지 알 수 있다..절대 보지 말자!)

이 책의 제목이자, 첫번째 등장하는 단편인 음울한 짐승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작품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범인임이 밝혀진다. 범인은 완전 초 싸이코다..-_-;; 하마터면 묻혀졌을 사건을 다행스럽게 밝혀내고 범인은 자살해버린다. 주인공의 논리적인 설명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두 번째 작품인 2전 동화 또한 굉장히 반전적이었다. 도둑이 숨긴 돈을 찾기위해 이래저래 머리를 굴리고, 그렇게 돈을 찾는데 알고보니 친구의 계략이었다는 다소 황당한.-_-;;

세번째인 작품인 심리실험에서는 고고로라는 탐정이 등장하여 완전범죄에 가까웠던 사건을 심리실험을 통해서 밝혀낸다. 고고로라는 이름을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정확히 기억이 안난다는..-_-;; 명탐정 코난에 나왔던가..-_-a

네번째 작품인 천장위의 살인자는 사건을 해결하는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저지르는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라서 범인의 심리상태를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흥미로웠다.

그리고 인간 의자라는 작품은 굉장히 섬뜻하면서 기분 나쁜 내용이라서 (인간이 자신이 만든 의자속에 들어가서 도둑질을 하고 그 의자에 앉은 사람의 감촉을 사랑하게 된다는..-_-;;) 약간 기분이 거식했다.

전체적으로 에도가와 란포(그의 이름은 애드가 앨런 포를 기리는 뜻에서 지어진 것이다.)의 필체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굉장히 칙칙하기도 하고 신비주의적인 면도 있는데다가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다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라서 ( 관음증, 메조키스트, 새디스트 등등.) 좀 거식거식하기도 했다.

동양의 추리소설이라서 그런지 서양의 추리소설과는 다른 면모들을 발견해볼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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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열심히 하는데,

 

왜 안되는 거야.

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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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출시키지 않고는, 교정될 수 없다.


너무도 힘들었던 지난 달, 마지막 주.
집에 가서 바닥을 구르며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었던 시간을 보내면서,
이대로 포기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없어졌다 하기를 몇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약점은 내보여야 한다고.
내 자신도 모르고 있던 약점,
그것이 나의 내부에 있는 가장 치명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드러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고쳐지지 않고,
고쳐지지 않으면 반복될 뿐이다.


설령, 
자기 뼈를 깍는 듯한 아픔이 동반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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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싶다 2005-07-07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제 서재에는 정신적으로 힘든 분들이 상담하는 코너가 있는데 참여가 상당히 저조해서 폐쇄를 고려중입니다. 분명히 그 분들한테 도움을 드리는건 제 공부에도 도움이 되는데 말이죠. 정신적 고통이 자신때문에 생긴 약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것 같아요. 정신적 고통은 단순히 호르몬 등 생리적인 문제로 생기는것인데도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