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과거시제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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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속 주인공들의 이름과 배경이 낯익다는 건 아직도 좀 신기하면서도 재밌게 느껴집니다. 워낙에 외국 작품들을 더 오래, 더 많이 봐온터라 아직도 주인공 이름이 '오세희'나 '서소희' 같이 익숙한 한국식 세 글자가 되면 저도 모르게 앗! 하는 마음이 들어버려요ㅋㅋㅋ 최근 몇 년간 한국 배경으로 쓰인 SF 작품을 꽤 많이 읽었는데도 말이죠.


게다가 <미래과거시제>처럼 더 나아가 언어, 특히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해 상상하고 고민한 글을 읽고 있으면 피부로 와 닿는 현실감이 2배, 3배 정도 더 되어서 재밌습니다. 예를 들어 <인류의 대변자> 같은 경우는 한국 사회에서 수능이라는 이벤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거든요. 소설 배경이 정확히 몇 년도인지 모르니 아마 수능이 없어진 후일 수도 있겠지만, 학력고사나 수능이나 그 외 또 다른 이름이 붙더라도 아마 대학입시능력시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여전히 같지 않을까요? 그 아래 깔린 문화적 맥락이 웃긴데 또 공감되서 저도 모르게 계속 웃게 돼요. 정말 그럴 것 같단 말이죠.


또 재밌었던 작품이 파열음이 사라진 미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차카타파의 열망으로>라는 단편이었어요. 대역병의 시대를 지나 바깥으로 침이 튀는 파열음이 야만스럽다고 점차 사라진 시대가 배경인데, 근대사 아카이브에서 과거의 영상 자료를 찾아보는 대학원생이 주인공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오타를 발견한 줄 알고 '출판사에 정정하라고 알려줘야겠다' 싶었는데 몇 문장 읽다보니까 모든 문장, 모든 단어에서 일부러 파열음을 삭제했더라고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첫번째 문단이 파열음이 들어가지 않은 단어만으로 구성되어서 그걸 눈치채는 시점이 조금 늦어진 거예요. 예를 들어 '근대사 아카이브'라는 단어를 '근대사 아가이브'라고 써 놓은 식입니다. 그러니까 읽다보면 약간 속도가 덜컹거리며 늦춰지는데, 또 알아먹기 어렵지는 않아요.


저는 이 단편을 읽는 내내 제가 예전에 봤던 배우 김혜수 님의 데뷔 시절 영상 인터뷰를 떠올렸어요. 당연히 30년도 안 된 자료인데도, 지금의 서울말과 그때의 서울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더라고요. 사용하는 억양이나 단어나 말투 같은 게 미묘하게 다 달라요. 그래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현대에도 말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하는 중이구나, 실감했었거든요. 이 소설은 미래에서 보면 현대의 언어가 또 얼마나 낯설게 느껴질까? 하는 관점에서 쓰인 느낌이라 재미있었어요.


배명훈 작가의 주인공은 다정해서 좋아요. 사람에게 다정하고, 사람을 상처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악의와 선의 어느 쪽으로도 손을 뻗을 수 있다면 그냥 선의를 선택하는 사람들이거든요. <홈, 어웨이>에서 자신을 라이벌이라 생각하고 미워하는 친구의 슬럼프를 걱정해주는 마음이라든가(아, 그렇지만 앞으로 그 라이벌 친구가 영영 주인공을 미워한다고 해도 인정입니다) <절반의 존재>에서 가족에게 거부당한 동료의 필사적인 자기증명을 지켜봐주고 함께 깔깔 웃는 순간 같은 것들은 괜히 사람을 기분 좋아지게 하는 면이 있잖아요. 세상이 어찌되든 누군가는 따뜻할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이 지속되는 한, 앞으로도 배명훈 작가의 작품은 꼭꼭 챙겨보게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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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론테 자매, 폭풍의 언덕에서 쓴 편지 - 뜨겁게 사랑하고 단단하게 쓰는 삶 일러스트 레터 3
줄리엣 가드너 지음, 최지원 옮김 / 허밍버드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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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처음 브론테 자매를 인지하게 된 건 초등학교 때 <제인 에어>를 읽으면서였어요. 소설 속에서 묘사되었던 끔찍한 가정 환경이나 기숙 학교에 치를 떨면서, 주인공인 제인이 행복해지기를 얼마나 바랐던지! 마침내 제인이 평온한 행복을 얻게 되었을 때는 너무 설레고 기뻐서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제인 에어>의 작가의 동생이 <폭풍의 언덕> 작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당장 <폭풍의 언덕>도 사다 읽었죠. 근데 이 작가들의 또다른 자매도 책을 썼다지 뭐예요? 아니 이 사람들 뭐지? 싶었던 게 브론테 자매와의 첫 순간이었습니다.


이 책은 브론테 자매가 살았던 공간, 어린 시절부터 험난하고 실패로 가득 찼던 사회생활 초년기, 연애사(...)라고 말하기도 뭣한 이뤄지지 않은 인연들, 각자의 성격, 작품이 발표된 이후 달라진 인생 같은 것들을 브론테 자매 본인과 가족과 친구들의 편지 및 당대 생활상을 엮어서 자세하게 풀어냅니다. 개인적으로 특히 흥미로웠던 건 브렌웰에 대한 가족들의 사랑과 기대였어요. 이미 브렌웰이 어떻게 됐는지 아는 입장에서는 그저 브론테 가문의 망나니라는 인식이 엄청나게 강했거든요. 모두에게 민폐만 끼친 한심한 놈팽이었다는 식으로 말이죠.


물론 그건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매우 자명한 사실이긴 합니다. 다만 그런 망나니에게도 브론테 자매와 마찬가지로 재능 넘치던 어린 시절이 있었고, 누나들과 동생에게 든든하고 자랑스러운 형제인 순간이 있었다는 게 참 서글펐어요. 브렌웰이 죽고 나서 샬롯이 쓴 편지를 읽는데, 그 모든 사랑과 기대와 배신감과 고통과 슬픔과 미움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정말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다 큰 성인이 지 인생 망치겠다는데 가족이 뭐 어떻게 말리겠어요. '잘못된 길을 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동생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버린 샬롯과 그 가족들만 안타깝죠ㅠ


브론테 집안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볼수록 너무 신기한 게, 외부 사람들과 교류도 많이 하지 않았는데도 (에밀리나 앤은 사실상 거의 하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죠) 자신이 경험한 것보다 더 크고 생생하고 풍부한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거예요. 왜 보통 다양한 경험을 해본 사람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들 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아주 좁은 현실 안에서도 인간의 본성을 들여답는 작품을 써낸 걸 보면, 결국 책이라는 간접 경험치도 우리 내부에 차곡차곡 쌓여 어떤 지혜나 통찰력 같은 걸 주는 게 맞나봐요. 물론 문학적 재능이 충분히 뒷받침해 주기도 했겠지만요.


온갖 삽화와 그림이 잔뜩 수록되어 있는데, 개중 상당수가 브론테 집안 사람들이 직접 그리거나 만들거나 소장하고 있던 것들이라 보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문학적 재능뿐만 아니라 회화적 재능까지 두루 갖추고 있었다니, 너무 신기해요! 현재 남아있는 작품만 해도 이러니, 소실되거나 사라진 시, 편지, 소설, 회화 등등을 모으면 얼마나 대단했을까 싶어서 괜히 제가 다 아까워집니다. 그래도 이들 자매는 살아서부터 조금씩 유명세를 얻었던지라 남아있는 게 많아서 다행이에요.


전체적으로 고퀄리티라는 느낌이 팍팍 드는 책이었어요. 찾아보니까 <일러스트 레터>라는 시리즈로 제인 오스틴과 반 고흐의 편지도 있던데, 나머지 두 사람도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예술가들인지라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브론테 자매를 좋아한다면, 추천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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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 정상 영업합니다 - 끝내기 실책 같은 상황이어도
쌍딸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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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야구를 좋아하는 편이 아닙니다만, 야구팬들이 엄청난 사람들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이런 이미지를 심어준 사람은 단연 쌍딸 작가님입니다. SNS를 보다보면 '야구팬들은 다들 이렇게 화가 많은데 말 잘하면서 웃긴가?'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사람이었어요. 전작인 <죽어야 끝나는 야구 환장 라이프>도 재밌게 봤는데 이번 <우리 인생 정상영업 합니다> 역시 그런 작가님의 필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책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재밌었다는 얘기~


전 사실 스포츠에 별 관심이 없어서 축구든 야구든 그냥 완전 깡통은 아닌 정도만 알아요. 야구에서 세세한 규칙 같은 건 모르고 3개 아웃되면 한 텀이 끝나고, 1루-2루-3루-홈 밟아야 점수 따고, 한 경기는 9회이고... 뭐 그 정도 아는 거죠. 반면에 작가님은 인생 자체가 야구에 푹 절여지다시피 하신 분이라(ㅋㅋ) 책 곳곳에서 온갖 야구 얘기들이 다 튀어나옵니다. 비유를 해도 야구에 해요. 예를 들면 작가님이 오랜 삼성의 팬인데, 삼성 선수로 오래 활약하던 선수가 팀을 떠난 일을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꺼내신다고요!


근데 신기한 건 저는 야구를 좋아한 적이 없는데도 이런 심정을 알 것 같다는 거죠. 왜냐면 전 야구는 아니지만 다른 장르에, 다른 뭔가에 이런 애정을 느끼고 있으니까요. 누구나 이런 '잘 먹고 잘 사는 데 하나도 도움 안 되지만 나에게는 너무 소중한' 것을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걸 두고 책에서는 '마냥 좋아하는 것이 낭만'이며 '식으면 뭐든 맛없어지니 식기 전까지 마음껏 좋아하자'고 하더라고요. 공감 100%!!!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라, 나중에는 아무리 다시 좋아하려고 애써도 안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경험적 진리입니다..


의외로 굉장히 무겁고 눈물이 계속 줄줄 났던 장도 있었는데, 입에 담기 조심스러운 얘기라 서평으로 옮기기는 좀 그렇고 다들 한 번 읽어봐주시면 좋겠네요. 거기 적힌 마음이 너무 절절해서 책을 덮고 몇 분 동안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군가를 잃고 다시 그를 말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저는 아직 가늠이 잘 되지 않아요. 이건 준비를 한다고 쉬워지는 문제도 아닌 것 같아요. 알고 맞아도 모르고 맞아도 내내 계속 아픈 일이라 세상에는 그토록 많은 예술작품이 존재하는 거겠죠ㅠ


전체적으로 유쾌하고 솔직하지만, 중간중간 깨알같이 진지함과 다정함을 섞어놓아서 글이 정말 술술 읽힙니다. 앉은 자리에서 한 30분만에 다 읽은 것 같아요. 저랑은 정말 많이 다른 성향의 사람 같은데, 그런데도 이렇게 공감 가게 글을 쓰실 수 있다니 정말 그 글솜씨가 부럽습니다! 뭐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또 뭐든 다 잘하는 분 같아서 넘 대단해보여요. 트위터 가서 구독 누르고 싶은 심정~!~~!!! 앞으로도 계속 글 쓰실 것 같은데, 후속작도 꾸준히 나와줬으면 좋겠습니다. 기대하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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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 찬란 실패담 - 만사에 고장이 잦은 뚝딱이의 정신 수양록
정지음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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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음 작가님을 처음 알게 된 건, 한 SNS였습니다. 그때 작가님이 보여주신 언행이 너무나 비범했던 나머지, 그게 이제는 밈으로 변해 인터넷 세상을 떠돌게 할 정도였죠. 작가님께서 본인 고양이 역시 세탁기가 돌아가는 것을 멍때리면서 지켜보곤 한다는 사진과 글을 올리셨는데, 거기에 답글이 달립니다. 드럼식 세탁기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고요. 그러자 작가님께서 거기에 다시 답글을 남기셨는데 그게 바로 이 책의 표지에도 적혀 있는 그 문구입니다. "그래 보이나요?심각한 건 아닙니다."


<오색찬란 실패담>은 작가님의 이런 태도를 총망라해서 한 권으로 엮어낸 것 같은 책입니다. 남들이 보기엔 저래도 괜찮을까? 싶은 얼렁뚱땅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상황에서 온갖 고민과 생각 끝에 해탈과 달관에 이르러 허허 웃으며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외치고 있다고나 할까요.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어쩜 이렇게 시트콤 같은 일상을 살고 계신지 모르겠어요. 물론 살고 계신 작가님 본인은 시트콤이 아니라 인생극장 다큐멘터리라고 느끼실 테지만요.


작가님의 호방함(?)에 감탄하며 저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으면서 봤던 꼭지는 '개미는 여행하지 않는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했더니 여행 자금을 모으려고 주식을 했다가 몽땅 다 잃으시는 바람에 여행을 못 가게 되셨다는 얘기였어요. 깜짝 놀란 게, 사실 (주식을 전혀 모르는) 제 생각에도 코로나가 끝나면 노래방 사정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작가님이 노래방 주식 사자마자 떡락하셨다고;; 아니 왜죠? 역시 주식은 무서운 것이에요.. 아무튼 작가님의 주식은 가성비 좋은 호캉스 비용에서 제주도 여행 경비로 발전해, 이윽고 일본 여행 경비 전체를 날려먹고 맙니다. 거기에 대한 작가님의 대응은? '까짓 일본, 다녀오진 않았지만 다녀온 걸로 치면 그만 아닌가?' 그런데 이 반응이 너무 익숙해 웃펐습니다. 만원 이만원에 벌벌 떨던 제가 한꺼번에 오백만원 정도 잃으니까 에라 모르겠다 잊어버리자 싶은 마음이 되던데, 그거랑 완전 똑같더라고요ㅋㅋㅋ


마음을 묵직하게 눌렀던 얘기로는, 영화나 연극 관람에서 조용히 쥐죽은 듯 앉아있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얘기였습니다. 저도 공연 관람을 자주 다니는 입장으로서 극장의 분위기가 얼마나 고요한지 잘 알거든요. ADHD 환자나 어린이, 노약자 등에게는 그런 식으로 조용하게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그래서 그들이 공연 문화로부터 배제된다는 게 안타까웠어요. 공연은 워낙 비싸고 일회적인 장르이다보니 타인의 관람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좀 더 자유로우면서도 각자 관람을 즐길 수 있는 시스템이 뭐가 있을까 고민해보게 됐어요. 코로나 이전에는 싱어롱 회차 같은 것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래도 거의 다 사라지긴 했거든요. 상영회 같은 거면 괜찮을까 싶기도 하고...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지네요.


이래도 괜찮나 싶을 정도로 대책없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삶의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어쩐지 공감이 가고 사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살아온 인생 여정도, 삶의 방식도, 성격도, 취향도 전부 다 다르지만 '나만 아는 정말 한심하고 못난 나'를 껴안고 산다는 점에서는 작가님과 제가 똑같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게다가 작가님은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그걸 해내신다고요! 어둠의 시간 뒤에 찾아온 평화의 시간 같은 느낌이라 읽으면서 괜히 위로가 되는 기분이었어요. 저도 얼른 거기까지 도달하고 싶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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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세 딸
엘리프 샤팍 지음, 오은경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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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세 딸>을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중동 땅에서 태어나 자란 한 여성이 살아가는 내내 겪어야만 했던 '신'과 '종교'에 대한 혼란을 그려낸 소설입니다. 사실 제목을 들었을 때는 세 명의 여성이 동등한 비중으로 다뤄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할머니-어머니-딸로 이어지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아님 비슷한 또래의 각기 다른 세 여성의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어찌됐건 셋을 비슷하게 다룰 거라고요. 하지만 막상 보다보니 그보다는 신실한 종교인과 단호한 무신론자 사이에서 신을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이 애매한 상태로 평생을 지내는 '페리'의 시선을 줄곧 따라가고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대다수의 독자들이 아마 페리와 비슷한 위치에 서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페리만큼 진지하게 신에 대해 고민하고 있지는 않겠지만요. 저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한국과 같이 종교가 크게 중요하지 않은 나라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사실 종교는 일종의 선택이라는 측면이 있잖아요? 그냥 개인을 설명하는 많은 요소 중 하나인 거죠. 그리고 제가 볼 때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설령 종교가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격신을 믿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왜냐면 정말로 신이 있고, 사후세계가 있고, 천국에 가기 위한 엄격한 규율이 있다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겠어요? 종교인들 중에서 성범죄자는 얼마나 많으며, 탈세 같은 범법을 저지르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작품 내에서 페리도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신이 있다면 사과를 받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세상에 존재하는 이 수많은 불의에 대해서 말이죠.


옥스퍼드에서 공부할 정도로 똑똑한 튀르키예 소녀가 느끼는 조국의 가부장제에 대한 환멸이 어찌나 공감이 되던지, 우리나라 얘기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더라고요. 여자에게 요구되는 온갖 모순적인 요구들 하며, 여성의 지성이나 인격보다 '처녀성'에 대해 집착하는 사회 하며, 평등한 척 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온갖 선을 그어 남녀를 나눠놓는 문화 하며... 페리가 고국의 그 뿌리 깊은 가부장제에 깊은 환멸을 느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영국의 그 자유로운 개방적 분위기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게 안쓰러우면서도 공감이 갔습니다. 본인은 스스로를 우유부단하고 소심하다고 아주 가차없이 비판했지만, 쉬란과 모나처럼 자신의 입장에 대해 완벽하게 확고한 사람이 더 대단한 거죠. 완전히 다른 문화에 노출되다보면 사람이 항상 중간 어디쯤에 서게 되잖아요.


계속해서 페리가 '뭔가 나쁜 짓을 저질렀고,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라는 암시가 나옵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페리는 나쁜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여지지 않거든요?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이렇게까지 죄책감을 느끼나 계속해서 궁금하게 만드는 작가의 솜씨가 일품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비밀이 밝혀졌을 때, 페리의 캐릭터를 망치지 않는 선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일이었다는 납득이 되어서 좋았습니다. '간혹 사람들은 미친 짓을 한다'는 식으로 완전 악의에 찬 짓을 했다고 나오지 않아서 좋았어요. 작가가 일부러 중간에 살짝 그런 의심을 심어주기도 했거든요.


페리는 삶에서 여러 번 '자유를 향해 한 발을 내딛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매번 발을 내딛었지만, 비록 지금까지는 자신이 바랐던 만큼 완벽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았어요. 마지막 순간 페리는 또 한 번 내딛습니다. 아니 여러 발을 내딛은 것 같아요. 그 결말은 부디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지만, 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고 사람은 단숨에 변하지 않는다는 걸 500페이지 넘게 페리가 보여주었기 떄문에... 제가 바라는 완벽한 해피엔딩은 아닐 것 같아요. 그래도 뭐, 지금보다는 행복해지지 않을까 합니다. 적어도 자기 자신과 주변에 조금 더 솔직해질 수는 있겠죠?! 삶은 그런 아주 사소한 용기의 순간들로 조금 더 행복에 가까워지는 것 같아요. 페리가 부디 제가 읽었던 그 모든 페이지보다는 더 행복해지길, 그리고 편안해지길. 여기 한국의 한 독자가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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