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파랑, 어쨌든 찬란
케이시 맥퀴스턴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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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충 시놉시스를 보면 감이 딱 오는 이야기입니다. 로맨스라는 장르가 원래 그렇잖아요. 아무리 고난과 시련이 닥쳐와도, 주인공은 사랑에 빠지게 되어 있고 결말은 해피엔딩이 약속되어 있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맨스가 싫어지지는 않아요. 뭐, 로맨스는 사실 그 맛에 보는 거잖아요? 약속된 해피엔딩, 안정감을 주는 판타지를 누리고 싶은 마음. 내가 응원하는 누군가가 결국은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으면 하는 마음. 거기에 진실한 사랑과 거대한 풍파를 살짝 얹어주고요!


미국 대통령의 아들, 영국 왕자와 사랑에 빠지다

 2019년에 영미권에서 굉장히 핫했던 소설이라는데, 그럴 만 합니다. 로맨스는 '역경과 고난'을 뚫는 과정에서 이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지 증명하는데, 그런 점에서 이성애 로맨스보다야 퀴어 로맨스가 훨씬 더 직관적으로 현실의 문턱이 잘 보이죠. 사실 평범한 이성애 로맨스였어도 딱히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 정치적인 이해관계잖아요. 심지어 작품 속에서 둘은 동성이기까지 하니, 훨씬 더 두렵고 막막할 수밖에 없어요. 단지 나만이 문제되는 게 아니라 내 가족까지도 진창 속에 구르게 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들이니까요.


 영국이 자랑하는 동화에서 튀어나온 듯 완벽한 막내 왕자와, 미국이 사랑하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의 섹시한 히스패닉 골든보이. 일단 그림이 죽여줘요. 소설 속에서 둘이 아직 사귀기 전일 때, 그러니까 서로 투닥투닥할 때부터 붙어 있는 모습만으로 SNS에서 '잤네 잤어' 같은 농담(?)이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정말 웃겼습니다. 저도 인터넷 상에서 그런 분들을 종종 본 적이 있거든요. 잘생긴 남자 둘만 보면 그렇게 커플로 소비하시는 분들ㅋㅋㅋ 아마 그런 말 하는 본인들도 진심으로 두 사람의 섹스를 믿지는 않았으리라는 점까지도 완벽해요. 나중에 아마 둘이 찍힌 사진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두 사람을 응원하는 대중 속에 분명히 있었겠죠ㅋㅋㅋㅋ


열광이냐 비난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한국은 워낙 호모포비아가 심각한 나라여서 영국이나 미국에서 받아들여지는 퀴어를 보면 '아이고 선녀 같다'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열려 있는 듯 보이는 나라에서도 사실 내심 퀴어는 정상이 아니고,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고, 누군가는 그런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평생을 옷장 안에 숨어서 살아갑니다. 게다가 일거수 일투족이 전부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온갖 드러운 루머가 판치는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음.. 나는 당신들 중 누군가가 싫어하고 미워하고 심지어는 증오하는 그런 부분이 있다고 내놓고 싶지는 않을 것 같아요. 상상해봤는데, 저라면 솔직히 소설 속 같은 상황에서 커밍아웃할 자신이 없거든요. 물론 헨리와 알렉스 둘도 아웃팅 당한 거긴 하지만, 어찌됐든 그 뒤에 그렇게 용감하게 대처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부분이 바로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판타지입니다.


 중간에 둘의 사이가 들킬 뻔 했을 때, 알렉스의 누나인 준이 알렉스 대신 헨리와 로맨스를 암시하는 듯한 사진을 올리고 대신 언론에 물어뜯기는 부분이 있어요. 거기서 알렉스의 심정을 묘사하는 문장이 퍽 좋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열광하느냐 아니면 미친듯이 물어뜯느냐 그 차이는 결국 젠더에 있다고요. 그건 상처가 된다고요. 맞아요. 퀴어들이 차별받지 않고 모든 권리를 다 누리는 것 같아 보여도, 이런 식으로 '헤테로 커플이었으면 문제되지 않았을' 부분이 보일 때마다 아직 한참 멀었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듭니다. 영국이나 미국이 이런데 한국은 어떨까? 생각하면 그저 한숨만 나오네요...




 로맨스 자체도 재밌었지만 미국 대선 운동을 함께 뛰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정치권 관련 얘기도 재밌었어요. 로맨스보다 이쪽이 더 판타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실제로 이렇게 돌아가면 얼마나 좋아' 싶은 미국 유권자의 열망이 생생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당연한 얘기겠지만, 작가가 민주당 지지자라 그런지 역대 대통령 얘기 다 갖다 넣어놨으면서 트럼프만 쏙 빼놓고 오바마 뒤에 알렉스 엄마를 당선시킨 것도 넘ㅋㅋㅋ 과몰입판타지였습니다.


 어찌됐든 주인공들은 행복할 겁니다. 이들은 새로운 세대이고, 지금 당장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중이고, 무언가를 대표하는 아이콘적인 존재가 되었으니까요. 언젠가 실제로 소설과 비슷한 이벤트가 일어나도 좋을 것 같아요. 자기가 느끼는 게 아닌 척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테니까요. 아닌 척 없는 척 은폐하고 표백하는 그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누군가가, 언젠가는 자유롭게 자기를 드러내면서 살 수 있는 그런 날이 오면.. 멋지지 않겠어요?! 그리고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지금보다, 아니 소설 속보다, 훨씬 더 너그럽고 포용력 있는 그런 세계가 되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부디,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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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로스쿨 -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로스쿨 라이브
박재훈 지음 / 들녘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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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의 로스쿨>은 굳이 따지자면 에세이지만, 그밖에 다른 분류도 조금씩 섞여 있는 책입니다. 수험서도 아니고 입시 정보를 담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거나 관련된 정보를 주는 책인 건 맞습니다. 저자 본인이 로스쿨을 다니면서 겪었던 온갖 인간 군상과 생각을 적은 것도 맞긴 한데 (제가 보기엔) 각색도 꽤 들어가서 어느 정도 소설적인 면도 있었고요. 설마 이 책에서 실명을 일일이 거론하면서 주변인들을 모두까기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ㅋㅋㅋ 한 두명 정도 섞어서, 몇몇 사건을 좀 섞어서, 그렇게 얘기를 했겠죠. 사회비판이 메인은 아니지만 살짝 조미료처럼 첨가되어 있기도 합니다.


 제가 볼 때 이 책을 가장 재밌게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는 타깃은 '국가고시를 몇 년 정도 공부해본' 인간이 아닐까 싶어요. 꼭 국가고시가 아니어도 1년에 1번밖에 기회가 없어서, 한방에 합격하지 못하면 아예 쌩으로 세월을 통째로 날려야 하는 시험이면 해당될 것 같습니다. 전국민이 다 치르는 수능보다는 그보다 몇 년 더 깊게 공부해서 뭔가 전문적인 느낌이 나는 공부를 하고, 통과하기만 하면 일단 커리어가 달라지는 그런 시험이면 해당될 것 같아요. 그런 시험을 준비해보신 분들이라면 이 책에서 말하는 지옥이 바로 그려지실 겁니다. 다들 거기서 허우적대며 괴로워한 순간이 있을 테니까요.


 저 역시 예전에 그런 시기를 거쳐왔던 적이 있던지라, 옛 생각이 새록새록 나더라고요. '와 어딜 가나 다 비슷하구나 정말 하나도 안 변하는구나' 싶었어요ㅋㅋㅋ 누구보다 입으로 공정이니 정의니 인권이니 공동체니 외치는 사람들이 사실은 자기 이익만 쫓는 약삭빠른 존재란 점에도 공감합니다. 누구나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내 이익이 침해당하기 전까지는, 입바른 말 하기가 참 쉽단 말이죠. 실제로 뭔가 손해를 보게 되었을 때도 그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은 몇 없어요. 인권을 위해 헌신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정작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불의한 뒷담화나 따돌림에는 눈을 감는다? 정말 수도 없이 많이 봤어요. 물론 나중에는 그런 자신을 어물쩍 잊어버리겠죠.


 읽는 내내 참 웃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법고시의 병폐를 없애겠다고 새로 도입한 제도가 바로 그 사법고시의 병폐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고,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지켜야 할 예비 법조인들이 누구보다 열심히 법을 어기고 있다는 사실이요. 예를 들면 법대 수업만으로는 사시 패스가 점점 어려워져서 다들 학원으로 몰려드는 현상이 있죠. 수천만원에서 1억 가까운 돈을 투자하면서 로스쿨에 갔는데, 그것만으로는 변호사 시험에 통과할 수가 없어서 학원 강의를 들어야 하는 현실 자체가 엉망진창 아닌가요? 이건 그냥 다른 버전의 수능 같아요. 다들 사교육에 매달리면서 눈 가리고 아웅 한다는 측면에서는 더더욱이요. 예비 변호사들이 대놓고 저작권법을 위반하며 법률 강의를 듣는 장면은 무슨 블랙 코미디 같다니까요! 어휴.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법조인에 대해 로망을 품고 있고, 앞으로도 품으실 분들은 그냥 이 책은 고이 접어두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정말로 현실에서 법조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로스쿨 학생들의 현실은 어떤지, 어떤 직업에나 있는 '가까이서 보면 싫은 점'이 무엇인지, 이런 걸 알고 싶으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작가가 술자리에서 '썰'을 풀듯이 이야기를 늘어놓는지라 굉장히 술술 잘 읽혀요! 


 ...시험이 있는 곳에 부조리가 있나니. 이 지옥을 벗어나는 자 모두 죄인이라!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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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무삭제 완역본) - 현대판 프로메테우스 현대지성 클래식 37
메리 셸리 지음, 오수원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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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켄슈타인>이나 <몬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작품을 보면 너무 신기합니다. 수없이 많은 이야기 갈래 중에 어떤 한 장르를 창조해냈는데, 심지어 그걸 시작하면서 완성해 버렸잖아요. 그 이후로 갈라지는 모든 작품들은 죄다 여기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요. 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 아닐까 싶어요! 인간이 신을 꿈꾸다 어떤 선을 넘어버리고, 그리하여 결국 예상치 못한 파멸을 맞닥뜨리는 이야기는 아주 다양한 버전으로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거기에 과학이라는 구체성을 입혀서 SF라는 장르로 빠지면 이제 <프랑켄슈타인>의 갈래가 되는 거죠.


내가 탄생시킨, 그러나 내가 아닌 생명

 우리나라에서는 프랑켄슈타인이 시체를 덕지덕지 기워 만든 괴물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도 영화나 애니메이션의 영향 같아요) 사실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자의 이름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괴물은 '크리처(Creater)'로서 이름도 없이 존재해요. 굳이 번역하자면 '그 생명체' 같은 호칭이 되겠네요. 이름이라는 건 누군가의 아이덴티티 자체이기도 합니다. 이름도 없이 그저 타자화된 존재가 된다는 건, 심지어 이성도 있고 언어도 통하는 존재가 그런 취급을 당한다는 건, 비극을 잉태할 수밖에 없는 없어요. 


 작가인 메리 셸리가 여성이라는 점, 그리고 실제로 임신과 유산으로 고통받았다는 점 때문에 1970년대 경부터 페미니즘 비평으로 많이 읽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탄생시켰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생명체, 나에게 고통만을 안겨주고 나를 노예로 만드는 생명체에 대한 두려움이 임신한 여성이 느끼는 공포와 닮아있다는 해석입니다. 듣다보면 고개가 끄덕여져요. 그저 생명의 탄생, 그에 대한 윤리의식 같은 주제만 생각하다 이쪽으로 눈을 돌리면 정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새삼 작가인 메리 셸리가 대단하게 느껴져요. 여성은 당연히 자기 아이를 사랑해야 하고, 모성애는 DNA 속에 새겨져 있어서 타고난 것이라고들 생각하던 시대에 이런 작품을 써내다니요! 


 그런 의미에서 서문이 한 가지 버전인 건 아쉽습니다. 제가 알기로 초판본 서문은 메리 셸리가 아니라 남편 퍼시 셸리가 썼거든요. 책이 처음에 출간될 당시에 여성 작가라는 편견과 벽에 부딪혀 살짝 꼼수(?)를 쓴 것인데, 그러다보니 나중에 메리 셸리가 작가인 게 밝혀진 후에도 한동안 꽤 시끄러웠대요. 여자가 이런 작품을 썼을 리가 없다, 퍼시 셸리가 쓴 거다..!! 자꾸 이런 소문이 돌자 메리 셸리가 두 번째 서문에서 직접 밝힙니다. <한 글자도 남편이 쓰지 않았다. 단, 서문만 빼고>ㅋㅋㅋㅋ 전 이 서문이 너무 좋아요. 서문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퍼시 셸리가 정말로 자기가 쓴 책인 것처럼 써놨거든요. 메리 셸리가 쓴 서문을 읽고 퍼시 셸리가 쓴 서문을 읽으면 그 되도 않은 겸양이 박살나는 재미가 있는데, 이 책은 서문이 한 가지 버전만 실려 있어서 그 부분이 좀 아쉬웠어요. 물론 초판은 또 초판만의 매력이 있긴 하지만요!


저자는 1831년에 개정판을 내면서 빅토리아 초기의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에 따라 당시 독자층 비위에 맞추어 등장인물의 성격을 온건하고 보수적인 쪽으로 바꾸었다. 그에 비해 초판은 메리 셸리의 원래 의도가 더 자유롭고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다른 결말이 될 수 있을까

 프랑켄슈타인의 공포만큼이나 크리처의 불행에 공감하는 데도 힘을 쏟고 있어서, 크리처의 호소와 논리에 설득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물론 크리처가 복수심에 불타 살인을 한 건 잘못이죠. 심지어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을 살인자로 몰아 죽이기까지 했잖아요. 하지만 그가 인류 전체를 비난할 때, 바로 그 인류에 속해 있는 사람으로서 마음 한 구석에서 '맞아 사람들이 먼저 폭력과 배척을 시작하긴 했지.. 인류가 먼저 너를 공격하긴 했지..' 하고 찔리지 않을 수가 없더라고요. 누군가를 죽도록 린치하던 도중에 갑자기 맞던 자가 벌떡 일어서서 폭력으로 대항한다고 쳐요. 이제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만 비난하기는 좀 그렇잖아요?


 다양한 버전의 <프랑켄슈타인>을 봐 왔지만, 하나같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어떤 버전에서는 영원히 북극에서 서로 쫓고 쫓기며 영원한 지옥에 빠지기도 하고, 어떤 버전에서는 크리처가 (프랑켄슈타인이 그랬듯) 생명을 탄생시키는 비밀을 알아내 자살한 프랑켄슈타인을 살려내 죽을 수도 없게 만들기도 하고, 어떤 버전에서는 크리처가 프랑켄슈타인의 손에 죽음으로써 영원히 그를 혼자 남겨두는 복수를 하기도 하고.. 정말 다양한 비극이 많았습니다. 원작의 결말은 결국 괴물을 쫓다 쇠약해진 프랑켄슈타인이 죽어버리자, 크리처가 자신을 지탱하던 복수심이라는 삶의 동력을 잃고 사람들 앞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는 것이죠.


 혹시 프랑켄슈타인-크리처 이 둘이 혹시 지옥에 빠지지 않는, 삶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결말은 존재하지 않을까 궁금해졌어요.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1) 프랑켄슈타인이 부모(?)로서의 의무를 다 한다 2) 이 사회가 크리처의 외모만 가지고 그를 차별하지 않고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준다 3) 크리처가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이 세 가지 조건이 만족되지 않는 한 비극을 피할 길이 없더라고요. 다른 건 몰라도 2번이 개개인의 선의로는 해결되지 않는 거대한 문제라.. 1800년대가 아니라 지금 2021년 이 시대에 크리처가 태어났다고 해도 비극을 피하기란 어려워 보입니다. 한 백년이 지나면 그때는 가능할까요? 확신할 수가 없네요..



 정말 흥미로운 서사입니다. 200여년 전에 쓰여졌지만, 모든 고전이 그렇듯 아직도 생명력을 가지고 여전히 생생한 매력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에요! 과거를 배경으로 해도, 현대를 배경으로 해도, 심지어 미래를 배경으로 해도 여전히 핵심을 건드릴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생명과, 창조와, 탄생과, 이성과, 책임에 대한 그 모든 이야기! 메리 셸리의 천재적인 역작 정말 너무 좋아요~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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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마일리스 드 케랑갈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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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를 연극으로 먼저 접한 케이스입니다. 한 명의 배우가 열명도 넘는 인물을 각 상황에 맞게 연기하는 걸 보면서, 그리고 모든 과정이 일어나는 24시간을 보면서, 도대체 원작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 궁금해졌어요. 읽어보니 소설은 확실히 연극보다 더 세세한 반면에 거리를 두고 묘사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의 심장을 둘러싼 십수 명의 인물들의 삶이 어떤 때는 굉장히 예외적인 상황에 놓인 것 같다가도, 또 다음 순간에는 아주 흔한 일처럼 느껴졌어요. 


The Heart

 주인공이 누구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작품입니다. 굳이 말한다면 (시몽이 아니라) 시몽의 심장이 아닐까요? 시몽은 등장한 그 바로 다음 순간에 사고를 당합니다. 독자가 시몽의 죽음에 충격을 받거나 비통에 잠기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에요. 시몽은 죽고 없지만 '죽음'에 관한 정의가 바뀌면서 여전히 뛰고 있는 그의 심장, 다른 누군가에게 이식되어 생명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그 심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장기이식에 대해 고민하거나 생각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빨려들어갈 수밖에 없는 소설이에요. 


 저는 현재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육체의 부활 같은 건 믿지 않아요. 영혼이라는 게 정말로 있다고 해도, 썩어서 사라질 이 육체에 다시 돌아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정말 말 그대로 다시 살아돌아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생각하기엔 장기기증이나 부검 같은 건 이미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을 종교적으로 한 번 더 죽이는 일이겠지요. 유가족들의 장기기증 의사를 타진하면서 종교에 관해서 묻는 장면을 보면서 새삼 '누군가의 육체에서 장기를 꺼내는 일'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층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설령 육신의 부활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고인의 시신을 훼손한다는 거부감이 들 수도 있고요.


시스템 vs 윤리의식

 프랑스에서는 장기기증을 거부하겠다는 명시적인 의사가 없으면 무조건 장기기증에 동의하는 걸로 간주하는 법이 있대요. 모든 사람이 장기기증 수술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면, 반대로 장기기증 수술의 제공자가 되는 것이 타탕하지 않겠는가- 하는 논리인 듯 합니다. 사실 제3자 입장에서 보면 맞는 말이죠.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다면, 그런 시스템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겠어요? 한국에서도 도입되면 좋지 않을까 생각을 했는데.. 막상 그런 법과 시스템 안에 속해있는 장기 코디네이터는 다른 생각을 하는 듯 해서 그 지점도 흥미로웠습니다.


 이미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고통 앞에 놓인 사람들에게 법이 그렇다고 윽박질러서 사인을 받아내는 건 너무 폭력적이라는 거예요. 해당 법은 오로지 유가족이 장기기증 의사가 있고 장기기증을 선택하고 싶지만 왠지 모를 죄책감에 시달릴 때에만 사용하겠다는 장기 코디네이터의 직업윤리가 정말 인상깊었어요. 법도 당신의 편이라고, 법이 당신을 지지한다고, 당신은 잘못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유가족을 안심시킬 때만 법을 입에 올리겠다는 게.. 말이야 쉽지 정말 어려운 일일 거잖아요? 일초일초 지날수록 장기는 점점 더 건강을 잃어갈텐데도, 유가족이 뒤돌아서서 후회하고 번복할 결정을 내리게 하지 않겠다는 그 태도가 굉장히 울림이 있었습니다. 저는 시스템이 먼저 정비되면 의식이 뒤따라온다고 생각하는 입장인데, 또 한편으로는 이 정도의 직업적 윤리의식이 법이 생긴다고 곧장 따라올 것 같지는 않아서 신기하고도 부러웠어요.


 물론 법이 생기면 전체적인 대중의 인식이 확 올라갈 거라고는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도 '확실히 거부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장기기증에 동의한 것으로 일단은 받아들이는' 법이 만들어지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유가족 혹은 당사자가 된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막상 현장에서는 반발이 많으려나요? 책을 읽고 궁금해져서 찾아봤더니 한국의 뇌사자 장기기증 비율은 8%대더라고요. 너무 낮죠. 이 소설에서 그려지는 프랑스의 장기기증 시스템이 아니라, 한국의 장기기증 시스템과 문화도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더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면 좋겠어요!



 삶과 죽음에 대해, 우리를 사랑하고 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오늘 내 심장이 뛴다는 것에 대해 새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만약 소설로 이 작품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다음에 연극 버전도 꼭 한 번 보셨으면 좋겠어요. 훨씬 더 즉각적이고 가까운 시선에서 사건을 바라보거든요. 거기서 오는 울림이 또 조금 달라요. 각자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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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자 신데렐라
리베카 솔닛 지음, 아서 래컴 그림,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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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일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오래 된 고전이라는 게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상을 담아내기는 좀 부족하잖아요. 현대의 눈으로 보면 여기저기 불편한 구석이 많지요. 그러다보니 우리 시대에 새롭게 다시 써 보자! 하는 시도가 많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저는 사실 이런 시도를 꾸준히 찾아 보면서도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어요. 익숙한 소재와 서사이다 보니 몰입은 쉬운데, 반면에 뭘 봐도 2차 창작이나 아류작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해방자 신데렐라> 말미에 리베카 솔닛이 덧붙인 작가의 말이 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막 대단히 잘 꾸민 말은 아니었어요. 단지 신데렐라라는 이야기가 얼마나 널리 퍼져있는지, 얼마나 다양한 판본과 변형으로 내려오고 있는지를 말해준 것 뿐이었어요. 하지만 그 글을 읽다보니 새삼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의 버전이 모두 '원형'으로서 존재하고 있다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원형'이 나타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요. 예를 들면 디즈니 같이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제작사에서 새로운 버전을 제작한다면, 그건 우리 시대의 아이들에게는 '원형'으로 받아들여지겠다 하는 생각 말이에요. 그리고 그게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누군가가 쓴 동화책이 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 생각을 하고 보니 이 익숙하고도 새로운 동화를 좀 더 너그럽고 즐겁게 읽을 수 있게 되더라고요ㅎㅎ


 <해방자 신데렐라>에서 가장 좋았던 건 신데렐라의 이름에 얽힌 아이디어였습니다. 저에게는 마치 이 동화 전체가 신데렐라의 (무시와 경멸과 자각하지 못하는 차별이 섞인) 호칭을 바로잡는 이야기처럼 느껴졌어요. 신데렐라에게 진짜 이름을 돌려주는 여정이랄까요. 제가 영문권 독자가 아니라서 이렇게 뻔히 보이는 신데렐라의 이름에 담긴 의미를 놓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 완벽한 아이디어였어요! Cinder+Ella라니! 신데렐라라는 호칭에서 먼지를 털어내면 엘라가 된다니! 정말 너무 멋지지 않나요?! 수없이 다양한 신데렐라 버전을 봤지만 이건 또 처음이라 박수를 쳤답니다. 동화에서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니 동화가 아니더라도 모든 창작물에서 이름이 얼마나 요한지는 다들 아실 거라고 생각해요. 오 정말 리베카 솔닛, 당신 천재인가봐..


 삽화가 그림자로만 이루어져 있어 인종을 특정할 수 없어 좋았다는 말에도 적극 동감합니다. 이런 부분을 만날 때마다 제가 항상 '인종'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제대로 된 필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닫게 돼요. 아무래도 매일 눈 뜨면 여러 인종과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미국보다 덜 예민한 거겠죠. 전 그저 삽화가 미모를 드러내지 않아서 좋다는 생각만 했거든요. 아이들이 책을 읽으면서 신데렐라는 예쁘고, 왕자는 잘생겼고, 다른 사람들은 주인공 둘보다 덜 예쁘고 잘생기게 그려진.. 그런 식으로 미모에 따라 층위가 나뉘는 삽화를 보면서 학습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만 주목했어요. 그런데 확실히 그림자로만 표현하다보니 신데렐라나 왕자, 마구종이나 마녀가 특정 인종으로 드러나지 않더라고요. 이것도 정말 굿 아이디어!


 더 많은 아이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섬세하게 조형된 판본으로 옛 동화들을 만나는 세상이 되면 좋겠어요. 조카에게 선물해주고 싶네요:)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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