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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파랑, 어쨌든 찬란
케이시 맥퀴스턴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21년 7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충 시놉시스를 보면 감이 딱 오는 이야기입니다. 로맨스라는 장르가 원래 그렇잖아요. 아무리 고난과 시련이 닥쳐와도, 주인공은 사랑에 빠지게 되어 있고 결말은 해피엔딩이 약속되어 있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맨스가 싫어지지는 않아요. 뭐, 로맨스는 사실 그 맛에 보는 거잖아요? 약속된 해피엔딩, 안정감을 주는 판타지를 누리고 싶은 마음. 내가 응원하는 누군가가 결국은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으면 하는 마음. 거기에 진실한 사랑과 거대한 풍파를 살짝 얹어주고요!
미국 대통령의 아들, 영국 왕자와 사랑에 빠지다
2019년에 영미권에서 굉장히 핫했던 소설이라는데, 그럴 만 합니다. 로맨스는 '역경과 고난'을 뚫는 과정에서 이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지 증명하는데, 그런 점에서 이성애 로맨스보다야 퀴어 로맨스가 훨씬 더 직관적으로 현실의 문턱이 잘 보이죠. 사실 평범한 이성애 로맨스였어도 딱히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 정치적인 이해관계잖아요. 심지어 작품 속에서 둘은 동성이기까지 하니, 훨씬 더 두렵고 막막할 수밖에 없어요. 단지 나만이 문제되는 게 아니라 내 가족까지도 진창 속에 구르게 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들이니까요.
영국이 자랑하는 동화에서 튀어나온 듯 완벽한 막내 왕자와, 미국이 사랑하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의 섹시한 히스패닉 골든보이. 일단 그림이 죽여줘요. 소설 속에서 둘이 아직 사귀기 전일 때, 그러니까 서로 투닥투닥할 때부터 붙어 있는 모습만으로 SNS에서 '잤네 잤어' 같은 농담(?)이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정말 웃겼습니다. 저도 인터넷 상에서 그런 분들을 종종 본 적이 있거든요. 잘생긴 남자 둘만 보면 그렇게 커플로 소비하시는 분들ㅋㅋㅋ 아마 그런 말 하는 본인들도 진심으로 두 사람의 섹스를 믿지는 않았으리라는 점까지도 완벽해요. 나중에 아마 둘이 찍힌 사진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두 사람을 응원하는 대중 속에 분명히 있었겠죠ㅋㅋㅋㅋ
열광이냐 비난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한국은 워낙 호모포비아가 심각한 나라여서 영국이나 미국에서 받아들여지는 퀴어를 보면 '아이고 선녀 같다'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열려 있는 듯 보이는 나라에서도 사실 내심 퀴어는 정상이 아니고,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고, 누군가는 그런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평생을 옷장 안에 숨어서 살아갑니다. 게다가 일거수 일투족이 전부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온갖 드러운 루머가 판치는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음.. 나는 당신들 중 누군가가 싫어하고 미워하고 심지어는 증오하는 그런 부분이 있다고 내놓고 싶지는 않을 것 같아요. 상상해봤는데, 저라면 솔직히 소설 속 같은 상황에서 커밍아웃할 자신이 없거든요. 물론 헨리와 알렉스 둘도 아웃팅 당한 거긴 하지만, 어찌됐든 그 뒤에 그렇게 용감하게 대처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부분이 바로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판타지입니다.
중간에 둘의 사이가 들킬 뻔 했을 때, 알렉스의 누나인 준이 알렉스 대신 헨리와 로맨스를 암시하는 듯한 사진을 올리고 대신 언론에 물어뜯기는 부분이 있어요. 거기서 알렉스의 심정을 묘사하는 문장이 퍽 좋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열광하느냐 아니면 미친듯이 물어뜯느냐 그 차이는 결국 젠더에 있다고요. 그건 상처가 된다고요. 맞아요. 퀴어들이 차별받지 않고 모든 권리를 다 누리는 것 같아 보여도, 이런 식으로 '헤테로 커플이었으면 문제되지 않았을' 부분이 보일 때마다 아직 한참 멀었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듭니다. 영국이나 미국이 이런데 한국은 어떨까? 생각하면 그저 한숨만 나오네요...
로맨스 자체도 재밌었지만 미국 대선 운동을 함께 뛰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정치권 관련 얘기도 재밌었어요. 로맨스보다 이쪽이 더 판타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실제로 이렇게 돌아가면 얼마나 좋아' 싶은 미국 유권자의 열망이 생생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당연한 얘기겠지만, 작가가 민주당 지지자라 그런지 역대 대통령 얘기 다 갖다 넣어놨으면서 트럼프만 쏙 빼놓고 오바마 뒤에 알렉스 엄마를 당선시킨 것도 넘ㅋㅋㅋ 과몰입판타지였습니다.
어찌됐든 주인공들은 행복할 겁니다. 이들은 새로운 세대이고, 지금 당장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중이고, 무언가를 대표하는 아이콘적인 존재가 되었으니까요. 언젠가 실제로 소설과 비슷한 이벤트가 일어나도 좋을 것 같아요. 자기가 느끼는 게 아닌 척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테니까요. 아닌 척 없는 척 은폐하고 표백하는 그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누군가가, 언젠가는 자유롭게 자기를 드러내면서 살 수 있는 그런 날이 오면.. 멋지지 않겠어요?! 그리고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지금보다, 아니 소설 속보다, 훨씬 더 너그럽고 포용력 있는 그런 세계가 되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부디,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