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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마일리스 드 케랑갈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6월
평점 :
저는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를 연극으로 먼저 접한 케이스입니다. 한 명의 배우가 열명도 넘는 인물을 각 상황에 맞게 연기하는 걸 보면서, 그리고 모든 과정이 일어나는 24시간을 보면서, 도대체 원작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 궁금해졌어요. 읽어보니 소설은 확실히 연극보다 더 세세한 반면에 거리를 두고 묘사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의 심장을 둘러싼 십수 명의 인물들의 삶이 어떤 때는 굉장히 예외적인 상황에 놓인 것 같다가도, 또 다음 순간에는 아주 흔한 일처럼 느껴졌어요.
The Heart
주인공이 누구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작품입니다. 굳이 말한다면 (시몽이 아니라) 시몽의 심장이 아닐까요? 시몽은 등장한 그 바로 다음 순간에 사고를 당합니다. 독자가 시몽의 죽음에 충격을 받거나 비통에 잠기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에요. 시몽은 죽고 없지만 '죽음'에 관한 정의가 바뀌면서 여전히 뛰고 있는 그의 심장, 다른 누군가에게 이식되어 생명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그 심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장기이식에 대해 고민하거나 생각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빨려들어갈 수밖에 없는 소설이에요.
저는 현재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육체의 부활 같은 건 믿지 않아요. 영혼이라는 게 정말로 있다고 해도, 썩어서 사라질 이 육체에 다시 돌아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정말 말 그대로 다시 살아돌아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생각하기엔 장기기증이나 부검 같은 건 이미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을 종교적으로 한 번 더 죽이는 일이겠지요. 유가족들의 장기기증 의사를 타진하면서 종교에 관해서 묻는 장면을 보면서 새삼 '누군가의 육체에서 장기를 꺼내는 일'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층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설령 육신의 부활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고인의 시신을 훼손한다는 거부감이 들 수도 있고요.
시스템 vs 윤리의식
프랑스에서는 장기기증을 거부하겠다는 명시적인 의사가 없으면 무조건 장기기증에 동의하는 걸로 간주하는 법이 있대요. 모든 사람이 장기기증 수술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면, 반대로 장기기증 수술의 제공자가 되는 것이 타탕하지 않겠는가- 하는 논리인 듯 합니다. 사실 제3자 입장에서 보면 맞는 말이죠.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다면, 그런 시스템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겠어요? 한국에서도 도입되면 좋지 않을까 생각을 했는데.. 막상 그런 법과 시스템 안에 속해있는 장기 코디네이터는 다른 생각을 하는 듯 해서 그 지점도 흥미로웠습니다.
이미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고통 앞에 놓인 사람들에게 법이 그렇다고 윽박질러서 사인을 받아내는 건 너무 폭력적이라는 거예요. 해당 법은 오로지 유가족이 장기기증 의사가 있고 장기기증을 선택하고 싶지만 왠지 모를 죄책감에 시달릴 때에만 사용하겠다는 장기 코디네이터의 직업윤리가 정말 인상깊었어요. 법도 당신의 편이라고, 법이 당신을 지지한다고, 당신은 잘못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유가족을 안심시킬 때만 법을 입에 올리겠다는 게.. 말이야 쉽지 정말 어려운 일일 거잖아요? 일초일초 지날수록 장기는 점점 더 건강을 잃어갈텐데도, 유가족이 뒤돌아서서 후회하고 번복할 결정을 내리게 하지 않겠다는 그 태도가 굉장히 울림이 있었습니다. 저는 시스템이 먼저 정비되면 의식이 뒤따라온다고 생각하는 입장인데, 또 한편으로는 이 정도의 직업적 윤리의식이 법이 생긴다고 곧장 따라올 것 같지는 않아서 신기하고도 부러웠어요.
물론 법이 생기면 전체적인 대중의 인식이 확 올라갈 거라고는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도 '확실히 거부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장기기증에 동의한 것으로 일단은 받아들이는' 법이 만들어지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유가족 혹은 당사자가 된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막상 현장에서는 반발이 많으려나요? 책을 읽고 궁금해져서 찾아봤더니 한국의 뇌사자 장기기증 비율은 8%대더라고요. 너무 낮죠. 이 소설에서 그려지는 프랑스의 장기기증 시스템이 아니라, 한국의 장기기증 시스템과 문화도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더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면 좋겠어요!
삶과 죽음에 대해, 우리를 사랑하고 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오늘 내 심장이 뛴다는 것에 대해 새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만약 소설로 이 작품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다음에 연극 버전도 꼭 한 번 보셨으면 좋겠어요. 훨씬 더 즉각적이고 가까운 시선에서 사건을 바라보거든요. 거기서 오는 울림이 또 조금 달라요. 각자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