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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들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0년 7월
평점 :
일본만큼이나 한국도 여러 모로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사회라고 생각해요. 두 나라는 어떤 부분에서는 무서우리만치 닮았고, 어떤 점에서는 소름 끼칠 정도로 다른데, 적어도 남의 외모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면서 말을 얹는 건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탈코르셋'이나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Kutoo' 같은 운동은, 현실에서 얼마나 여성이 심각하게 외모에 대해 실질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는지 증명하죠. 여자가 직장에서 구두를 신어도 짤리지 않는, 짧은 숏컷을 하고 화장을 하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그런 사회였다면 이런 건 운동조차 되지 못했을 테니까요.
미나토 가나에는 그런 사회 한가운데서 '도넛에 둘러싸여 자살한 소녀'를 소환합니다. 뚱뚱했다고도 하고, 날씬했다고도 하고, 수천개의 도넛에 둘러 싸여 죽었다고도 하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고도 하고, 그런 문제는 없었다고도 하는.. 늘 그렇듯 사건 뒤에 남겨져 소문만 무성한 상태죠. 사건이 벌어진 해당 소도시 출신의 스타 성형외과 여의사를 등장시켜 2인칭으로 소설을 이끌어가는 게 상당히 흥미롭더라고요. 왜냐면 독자들은 소녀의 죽음에 얽힌 미스테리를 파헤치는 '다치바나 히사노'라는 여성에 대해서도, 자살한 소녀 '기라 유우'와 마찬가지로 인터뷰이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과 본질을 보게 되거든요. 단순히 사건의 당사자뿐만 아니라 화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사람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다치바나 히사노'가 아주 무례하고 사실은 모두를 내려다보는 여왕님이었으며, 예쁜 외모를 무기로 사람들을 마구 휘두르고 다녔다고 기억하는 인터뷰이들이 있습니다. 뚱뚱한 아이를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새끼 돼지'라고 불렀다거나, 조금만 자기한테 불리해지면 눈물을 그렁거려서 화낸 쪽을 가해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거나, 옆에서 시녀처럼 굴던 아이가 눈앞에서 왕따를 저질러도 무표정하게 보고 있었다거나.. 반대로 그때도 지금도 '스마트하고 아름다우며 상식적이고 예의바른' 엘리트 미인을 말하는 인터뷰이도 있고요. 저는 이 간극이 참 재밌었어요. 이건 모순되지 않아요. 그렇다고 다치바나 히사노가 강강약약인 것 같지도 않고요. 이건 그냥 어른이 된 지금은 완벽해보이는 사람이 사실은 어린 시절부터 완벽했던 건 아니라는, 너무 당연한 얘기에 가깝다고 느껴졌어요. 다들 자기는 차별 같은 거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마 타임머신을 타고 되돌아가본다면 누구나 다 실수나 잘못을 한 순간이 있을 거예요. 어른이 된 지금 '너 사실 어릴 때 그런 짓 하는 사람이었잖아' 하고 듣는 건 민망하기도 하고 변명하고 싶기도 한 일일 테지만요. 그 변명을 할 수 없게 상대방 입장에서 말하게 둔 게 좋았어요. 어쩐지 통쾌한 기분?ㅋㅋ 야, 너도 방송에서 보이듯이 완벽한 그런 사람은 아니잖아. 내가 너 때문에 상처받은 그건 아직 사과도 제대로 안 받았다고~ 하면서 상처받은 피해자가 직접 말할 판을 깔아준 거죠.
떠오르는 게 없다고? <마왕>도 안 흐르고. 그렇겠지. 사노 언니는 살면서 심술궂은 일을 당하거나 그런 말을 듣는 일이 별로 없었겠지. 있어도 그 자리에서 똑소리 나게 대꾸하고. 그러다 상황이 나빠지면 눈썹을 파르르 떨며 재주 좋게 눈물이라도 흘리면서 나는 참 불쌍해요 하는 얼굴을 하면 주위 사람들이 전부 편을 들어줄 테니까.
근거? 나한테 새끼 돼지라고 했다가 주위에서 뭐라고 하면 늘 그랬잖아.
그때는 미안했다? 필요 없어. 그런 시공을 초월한 사과. 그때 미안하게 생각했던 마음이 어느 별을 경유해서 지금 도착한 게 아니라, 지금 내가 비난하니까 그리고 자기가 용건이 있으니까 그냥 사과한 것일 뿐이잖아.
필요 없어, 필요 없어. 그런 미안은. 절대 안 받아들일 거야. - P.143
소녀에 대해 얘기하는 건 스포가 되겠지만, 중요 부분은 빼고 말해보자면.. 저는 소녀가 '뚱뚱하지만 그래도 자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아이라는 점이 좋았습니다. 이게 판타지일 수밖에 없다고 해도요. 여러분도, 저도, 이 팍팍한 사회에 살면서 외모를 신경쓰지 않는다는 건 너무 어렵습니다. 특히 화장이나 몸매는 물론이고 온몸의 털을 제모해야 하고, 하다못해 손톱이나 발톱까지도 세세하게 나눠서 예쁘게 꾸며야 하는 압박을 받는 여자아이가 뚱뚱한데도 행복하려면, 정말 많은 것들이 필요해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는 거죠. 그런데 '기라 유우'는 그게 되는 소녀였습니다! 정말, 정말, 정말, 대단하죠! 그래서 인터뷰이가 점점 더 기라 유우 주변인에 가까워질수록 의문은 더 커져요. 얘는 정말로 외모 때문에 자살할 아이가 아니었다는 확신이 들거든요. 억지로 고개 빳빳이 들고 '괜찮아 상처 안 받았어' 이렇게 억지로 자기를 달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자기가 뚱뚱해도 괜찮다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이러는 아이요. 세상에, 이런 아이가 자살하다니. 말도 안 돼.
처음부터 막 술술 잘 읽히는 책은 아닙니다. 특히 초반 2장까지는 좀 괴로웠어요. 왜냐하면 다치바나 히사노 성형 클리닉으로 찾아온 지인들의 상담내용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두 사람이 상담이라기엔 너무 쓸데없이 내용까지 세세하게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거든요. TMI를 너무 많이 뿌려요. 이게 진짜 성형 상담이라면 여기까지 말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싶은 내용으로 꽉꽉 차있어서 '계속 이런 식이면 읽기 좀 힘들겠는데' 싶었다니까요. 그 이후에는 다행히 개인적인 면담이나 목적이 있는 인터뷰로 넘어가서 그런 위화감은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첫 2장은 좀 힘드네요;; 그것 외에는 전체적으로 구성도 깔끔하고, 2인칭 시점도 신선하고 좋았어요!
'기라 유우'도 '다치바나 히사노'도 한번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주는 구성도 좋았습니다. 최종장까지 다 읽고 나면, 앞부분의 인터뷰들이 새삼 다르게 읽혀요. 특히 '기라 유우'의 고등학교 선생님 인터뷰요. 저는 개인적으로 다 읽고 나니까 처음에 그 부분을 읽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 수치스럽기까지 하더라고요. 아무리 남의 시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참.. 나도 기라 유우한테 못할 짓 했구나 싶고.. 에효.. 무엇보다 이렇게 빛나는 재능과 매력을 가진 사람들이 단순히 외모라는 기준 하나에 매몰되서 거기에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저항해야 했다는 게 너무 서글퍼요. 뭐든 거스르는 데는 에너지가 들잖아요. 이 두 사람 다 사회에서 끊임없이 밀어붙이지 않았으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거라는 확신이 드니까 그게 씁쓸하더라고요. 특히 기라 유우는.. 아 모르겠어요 저는 정말 이 아이를 안아주고 싶은데 이 아이는 이미 세상에 없고..ㅠ
<조각들>이라는 제목은 아마 에필로그에 담긴 의미 때문이겠지만, 인터뷰라는 형식 때문에 우리가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의 조각들이 조금씩 들어있다는 느낌도 듭니다. 그 조각들을 모아서 맞춰보면 남들이 바라보는 내가 되는 거죠. 물론, 그건 내 진짜 모습이 아닐 수도 있고, 과거의 나여서 지금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지만, 어쨌든 조각은 조각이니까요. 남들에게 나눠주는 조각들이 (외적인 측면이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 좀 더 멋진 모습이 될 수 있길.. 그리고 나에게 박히는 타인의 조각들도 그럴 수 있길.. 진심으로 바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