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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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만큼이나 한국도 여러 모로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사회라고 생각해요. 두 나라는 어떤 부분에서는 무서우리만치 닮았고, 어떤 점에서는 소름 끼칠 정도로 다른데, 적어도 남의 외모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면서 말을 얹는 건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탈코르셋'이나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Kutoo' 같은 운동은, 현실에서 얼마나 여성이 심각하게 외모에 대해 실질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는지 증명하죠. 여자가 직장에서 구두를 신어도 짤리지 않는, 짧은 숏컷을 하고 화장을 하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그런 사회였다면 이런 건 운동조차 되지 못했을 테니까요.


 미나토 가나에는 그런 사회 한가운데서 '도넛에 둘러싸여 자살한 소녀'를 소환합니다. 뚱뚱했다고도 하고, 날씬했다고도 하고, 수천개의 도넛에 둘러 싸여 죽었다고도 하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고도 하고, 그런 문제는 없었다고도 하는.. 늘 그렇듯 사건 뒤에 남겨져 소문만 무성한 상태죠. 사건이 벌어진 해당 소도시 출신의 스타 성형외과 여의사를 등장시켜 2인칭으로 소설을 이끌어가는 게 상당히 흥미롭더라고요. 왜냐면 독자들은 소녀의 죽음에 얽힌 미스테리를 파헤치는 '다치바나 히사노'라는 여성에 대해서도, 자살한 소녀 '기라 유우'와 마찬가지로 인터뷰이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과 본질을 보게 되거든요. 단순히 사건의 당사자뿐만 아니라 화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사람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다치바나 히사노'가 아주 무례하고 사실은 모두를 내려다보는 여왕님이었으며, 예쁜 외모를 무기로 사람들을 마구 휘두르고 다녔다고 기억하는 인터뷰이들이 있습니다. 뚱뚱한 아이를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새끼 돼지'라고 불렀다거나, 조금만 자기한테 불리해지면 눈물을 그렁거려서 화낸 쪽을 가해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거나, 옆에서 시녀처럼 굴던 아이가 눈앞에서 왕따를 저질러도 무표정하게 보고 있었다거나.. 반대로 그때도 지금도 '스마트하고 아름다우며 상식적이고 예의바른' 엘리트 미인을 말하는 인터뷰이도 있고요. 저는 이 간극이 참 재밌었어요. 이건 모순되지 않아요. 그렇다고 다치바나 히사노가 강강약약인 것 같지도 않고요. 이건 그냥 어른이 된 지금은 완벽해보이는 사람이 사실은 어린 시절부터 완벽했던 건 아니라는, 너무 당연한 얘기에 가깝다고 느껴졌어요. 다들 자기는 차별 같은 거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마 타임머신을 타고 되돌아가본다면 누구나 다 실수나 잘못을 한 순간이 있을 거예요. 어른이 된 지금 '너 사실 어릴 때 그런 짓 하는 사람이었잖아' 하고 듣는 건 민망하기도 하고 변명하고 싶기도 한 일일 테지만요. 그 변명을 할 수 없게 상대방 입장에서 말하게 둔 게 좋았어요. 어쩐지 통쾌한 기분?ㅋㅋ 야, 너도 방송에서 보이듯이 완벽한 그런 사람은 아니잖아. 내가 너 때문에 상처받은 그건 아직 사과도 제대로 안 받았다고~ 하면서 상처받은 피해자가 직접 말할 판을 깔아준 거죠.


 떠오르는 게 없다고? <마왕>도 안 흐르고. 그렇겠지. 사노 언니는 살면서 심술궂은 일을 당하거나 그런 말을 듣는 일이 별로 없었겠지. 있어도 그 자리에서 똑소리 나게 대꾸하고. 그러다 상황이 나빠지면 눈썹을 파르르 떨며 재주 좋게 눈물이라도 흘리면서 나는 참 불쌍해요 하는 얼굴을 하면 주위 사람들이 전부 편을 들어줄 테니까.

 근거? 나한테 새끼 돼지라고 했다가 주위에서 뭐라고 하면 늘 그랬잖아.

 그때는 미안했다? 필요 없어. 그런 시공을 초월한 사과. 그때 미안하게 생각했던 마음이 어느 별을 경유해서 지금 도착한 게 아니라, 지금 내가 비난하니까 그리고 자기가 용건이 있으니까 그냥 사과한 것일 뿐이잖아.

 필요 없어, 필요 없어. 그런 미안은. 절대 안 받아들일 거야. - P.143


 소녀에 대해 얘기하는 건 스포가 되겠지만, 중요 부분은 빼고 말해보자면.. 저는 소녀가 '뚱뚱하지만 그래도 자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아이라는 점이 좋았습니다. 이게 판타지일 수밖에 없다고 해도요. 여러분도, 저도, 이 팍팍한 사회에 살면서 외모를 신경쓰지 않는다는 건 너무 어렵습니다. 특히 화장이나 몸매는 물론이고 온몸의 털을 제모해야 하고, 하다못해 손톱이나 발톱까지도 세세하게 나눠서 예쁘게 꾸며야 하는 압박을 받는 여자아이가 뚱뚱한데도 행복하려면, 정말 많은 것들이 필요해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는 거죠. 그런데 '기라 유우'는 그게 되는 소녀였습니다! 정말, 정말, 정말, 대단하죠! 그래서 인터뷰이가 점점 더 기라 유우 주변인에 가까워질수록 의문은 더 커져요. 얘는 정말로 외모 때문에 자살할 아이가 아니었다는 확신이 들거든요. 억지로 고개 빳빳이 들고 '괜찮아 상처 안 받았어' 이렇게 억지로 자기를 달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자기가 뚱뚱해도 괜찮다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이러는 아이요. 세상에, 이런 아이가 자살하다니. 말도 안 돼.


 처음부터 막 술술 잘 읽히는 책은 아닙니다. 특히 초반 2장까지는 좀 괴로웠어요. 왜냐하면 다치바나 히사노 성형 클리닉으로 찾아온 지인들의 상담내용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두 사람이 상담이라기엔 너무 쓸데없이 내용까지 세세하게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거든요. TMI를 너무 많이 뿌려요. 이게 진짜 성형 상담이라면 여기까지 말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싶은 내용으로 꽉꽉 차있어서 '계속 이런 식이면 읽기 좀 힘들겠는데' 싶었다니까요. 그 이후에는 다행히 개인적인 면담이나 목적이 있는 인터뷰로 넘어가서 그런 위화감은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첫 2장은 좀 힘드네요;; 그것 외에는 전체적으로 구성도 깔끔하고, 2인칭 시점도 신선하고 좋았어요!


 '기라 유우'도 '다치바나 히사노'도 한번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주는 구성도 좋았습니다. 최종장까지 다 읽고 나면, 앞부분의 인터뷰들이 새삼 다르게 읽혀요. 특히 '기라 유우'의 고등학교 선생님 인터뷰요. 저는 개인적으로 다 읽고 나니까 처음에 그 부분을 읽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 수치스럽기까지 하더라고요. 아무리 남의 시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참.. 나도 기라 유우한테 못할 짓 했구나 싶고.. 에효.. 무엇보다 이렇게 빛나는 재능과 매력을 가진 사람들이 단순히 외모라는 기준 하나에 매몰되서 거기에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저항해야 했다는 게 너무 서글퍼요. 뭐든 거스르는 데는 에너지가 들잖아요. 이 두 사람 다 사회에서 끊임없이 밀어붙이지 않았으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거라는 확신이 드니까 그게 씁쓸하더라고요. 특히 기라 유우는.. 아 모르겠어요 저는 정말 이 아이를 안아주고 싶은데 이 아이는 이미 세상에 없고..ㅠ


 <조각들>이라는 제목은 아마 에필로그에 담긴 의미 때문이겠지만, 인터뷰라는 형식 때문에 우리가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의 조각들이 조금씩 들어있다는 느낌도 듭니다. 그 조각들을 모아서 맞춰보면 남들이 바라보는 내가 되는 거죠. 물론, 그건 내 진짜 모습이 아닐 수도 있고, 과거의 나여서 지금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지만, 어쨌든 조각은 조각이니까요. 남들에게 나눠주는 조각들이 (외적인 측면이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 좀 더 멋진 모습이 될 수 있길.. 그리고 나에게 박히는 타인의 조각들도 그럴 수 있길.. 진심으로 바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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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오페라의 유령 - 1911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가스통 르루 지음, 베스트트랜스 옮김 / 더스토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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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페라의 유령>은 뮤지컬로 엄청나게 유명한 작품이죠! 저도 뮤지컬로 처음 접했는데, 샹들리에가 번쩍거리는 오프닝 장면이 음악과 합쳐지면서 만들어내는 웅장함은 다시 생각해도 감탄이 나와요. 워낙 인기있는 작품이라 몇 년 전에는 <오페라의 유령> 속 주인공의 사연을 뚝 떼서 아예 <팬텀>이라는 외전 격의 뮤지컬도 나왔었는데, 팬텀이 왜 오페라 극장에서 살게 되었는지, 어떻게 사랑에 빠졌고 그래서 얼마나 괴로웠는지 등등 주로 오페라의 유령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는 작품이었어요. 주인공 버프를 받아서 팬텀도 꽤나 동정을 많이 받았답니다. 추한 외모 때문에 부모에게조차 버려져 평생 숨어 살다니, 이렇게 가엾을 수가!


 그러니 제가 원작 소설을 읽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어요.. 저는 정말 팬텀이, 아니 에릭이, 그렇게까지 나쁘고 비열하고 잔혹한 악한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원작에서 그려진 팬텀은 그냥 범죄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일단 크리스틴에게 반해서 몰래 재운 뒤에 납치 및 감금하는 것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일단 그건 주인공의 사랑 어쩌구저쩌구로 넘어간다 치더라도 (물론 현실에서는 이렇게 심각한 문제를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면 안됩니다) 자기만의 공간에 들어왔다고 사람을 죽여서 자살로 위장하질 않나, 오페라 극장에 살기 이전에 이미 고문실을 만들곤 그 안에서 고문과 살인을 자행하질 않나, 자기 사랑 안 받아주면 오페라 극장 폭파시키고 파리 전체랑 죽을 거라고 협박하질 않나.. 아무리 고운 눈으로 봐줘도 미친 싸이코패스 스토커라구요ㅠ


 그런데 삼각관계의 한 축인 에릭이 그렇게 무너졌다면 다른 한 축인 라울이라도 매력적이어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라울 역시 완전 별로라서.. 둘 사이에 껴서 온갖 고생 다 하는 크리스틴이 너무 안쓰러워지는 거 있죠? 라울은 크리스틴과 어릴 적 친구지만 둘 사이 신분 차이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일부러 크리스틴에게 거리를 두면서 냉랭하게 굴거든요. 그래놓고 크리스틴 노랫소리를 듣고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지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와서 자기가 크리스틴에게 뭐라도 되는 것처럼 굽니다. 그런데 정작 크리스틴이 자기를 받아주는 것 같지 않으니까 바로 속으로 온갖 모욕을 다 퍼부어요. 제가 경악하고 라울이라는 놈팽이는 못 써먹을 놈이다 싶었던 장면이 있는데, 바로 다음 묘사입니다.


 음악의 정령이라고! 지금에서야 그 정령의 정체를 제대로 알게 되다니! 그 모습이 눈에 선했다. 분명 곱상한 외모를 가진 테너 가수로, 노래 하나로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놈이 분명했다. 아, 샤니 자작은 보잘것없고 초라한 젊은이에 불과했다. 라울의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뻗어 나가, 크리스틴이 너무나 괘씸하고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계집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 p.165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계집'이라뇨?! 저게 사랑하는 여자를 묘사하는 워딩이라니까요? 너무, 너무 치졸하고 성급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잖아요. 자기 마음에 조금만 안 차면 바로 뒤돌아서서 없는 루머도 만들어낼 인간 아닙니까? 순결 정숙 운운하는 것도 꼴보기 싫은데,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계급의식도 있고 심지어 숭배를 가장한 멸시까지 하잖아요! 이런 사람이 '오해였군요 미안합니다 당신은 순결한 천사고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같은 소리를 해봤자 그걸 얼마나 믿을 수 있겠어요? 차라리 다이아몬드를 믿는 편이 훨씬 낫겠다 싶어요. 크리스틴의 경우 빛나는 재능이 있으니 그 목소리로 평생 디바나 하면서 라울을 뻥 찼으면 좋겠습니다...만! 왜인지 모르지만 크리스틴은 라울을 사랑한답니다. 참.. 속이 터지는 일이죠..


 물론 소설은 뮤지컬과 다르게 러브라인이 메인이 아니고 오히려 추리-스릴러에 가까운 작품이라 누구랑 누가 이어지느냐 하는 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요. <오페라의 유령>은 에릭이 오페라 극장에 살면서 원하는 장소에 드나들고, 유령의 짓이라고 믿게끔 만든 교묘한 트릭들 덕분에 추리 소설로도 읽히는 것 같아요. 앞에서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인물의 행동들이 뒤에서는 자기 딴에 합리적인 이유로 설명되는데, 그게 꽤 재밌었습니다. 예를 들어 극장장 둘이서 갑자기 뒤로 걷거나 안전핀을 달라고 소리치는 등, 직원들이 보기에는 정신이 나간 것 같은 모습을 보이는데 뒤에 가면 자기들끼리 테스트를 하는 중이어서 그게 무엇보다 중요했다는 식이에요. 페르시아인이 총을 못 쏴도 되니까 총을 쏠 것 같은 자세를 취하라고 하고 라울이 내심 어처구니없어 하는 것도, 뒤에 가면 에릭이 올가미를 사용한 트릭을 자주 썼기 때문에 그걸 방지하는 차원이라는 설명이 나오고요. 이런 식으로 미스터리-합리적 설명이 왔다갔다 하는 게 추리소설 같아 재밌었습니다.


 다만 완전히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에릭을 너무 전지전능하게 만들어놨어요. 아무리 복화술이 있다고 해도, 목소리가 기둥 뒤쪽에서 나오게 한다든가 상자 속에서 나오게 한다든가 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유령이 아니라 사람인 이상, 보고 듣고 감시하는 것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 한계가 마치 없는 것처럼 일이 진행되는 것도 의아했습니다. 고문실의 숲 묘사도 너무 과장됐다고 생각하고요. 여러모로 추리보다는 스릴러, 완전한 트릭 해설보다는 분위기와 캐릭터에 기댄 소설이라는 느낌입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나 <팬텀>과는 전혀 다른, 한 편의 스릴러 작품으로 읽으시면 좋을 것 같아요!


 +) 소설을 읽으면서 '아니 유령이 왜 돈이 필요해? 아니 왜 유령이 자리가 필요해?'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는 극장주와 극장 직원들이 좀 신기했습니다. 이미 에릭이 사람인 걸 아는 입장이니까 더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르지만요. 사람들은 설명하기 어려운 걸 맞닥뜨리면 바로 신비주의나 미신으로 넘어가는 속성이 있는 것 같아요. 저도 현실에서 저런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지 하고 괜히 뜨끔했답니다ㅋㅋㅋ 생각하는 게 어렵다고 생각을 멈추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아야겠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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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걸리버 여행기 (무삭제 완역본) - 1726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류경희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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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리버 여행기> 하면 대개 걸리버가 누워있고 소인국 사람들이 그를 묶어놓고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 것 같아요. 아주 많은 국가에서 이 소설은 정치적인 내용이 댕겅 잘려나가고 환상적인 면만을 크게 부각한 동화로 각색되어 유통되었다고 하네요. 특히 정치적으로 독재에 가까운 나라가 더 그렇대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여서, 정치소설보다는 동화로 더 유명하죠. 저 역시 어릴 적에 동화로 처음 접했었던 이야기입니다. 너무 오래 전에 읽었던지라 동화 결말이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 걸리버가 무사히 자기 고국으로 돌아가서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하는 식으로 끝났을 거예요. 원작과는 다르게 말이죠.


 실제 <걸리버 여행기>의 걸리버는 그렇게 행복한 결말을 약속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여러 국가를 여행하면서 얻은 인간 혐오증 덕분에 사실상 미쳐버리고 은둔 생활을 하면서 끝이 나요. 어린이를 위한 동화라면 절대 이런 식으로 끝맺음하면 안 되지만, 이건 정말 한 구절 한 구절 대놓고 당시 영국 정치를 빗대어 풍자하고 비꼬는 소설이라 결국 인간 환멸로 끝이 나도 그러려니 싶어요. 1장 소인국(릴리펏)은 그나마 괜찮은데 2장 거인국(브롭딩낵)부터 4장 휘넘국까지는 '혹시 이거..?' 하고 의심할 필요로 없이 그냥 대놓고 정치 비판밖에 안 하거든요ㅋㅋㅋ


 3장 천공의 섬 라퓨타에 대한 이야기 중간에 출간 당시에는 너무 노골적으로 영국 국왕의 심기를 거스르는 내용이라 편집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삭제되었다 뒤늦게 추가된 내용이 있는데, 읽어보니 그럴 만하다 싶더라고요. 누가 봐도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착취를 고발하고, 아일랜드가 혁명으로 그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킬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식으로 읽히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어요. 만약 당시 영국 국왕이나 귀족들이 이 내용을 봤다면, 반역죄로 작가를 사형시켰을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소설 속 그 혁명은 성공하기까지 하니까요;; 


 작가인 스위프트가 영국 종교-정치를 겪으며 넌더리를 냈던 경험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스위프트=걸리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화자인 걸리버가 엉뚱한 말을 하거나 잘못된 생각을 한다는 암시를 곳곳에 심어두는 방식으로, 스위프트는 걸리버마저도 하나의 풍자 대상으로 만들어버리고 있거든요. 걸리버는 '언어 습득에 뛰어나다'는 걸 자랑으로 삼고 그 덕에 어디에 떨어지든 놀라운 적응력으로 현지인들과 소통하는 걸 보여주는데, 정작 라틴어와 같이 독자가 알 수 있는 언어의 어원은 틀린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거인국이나 휘넘국에 다녀온 뒤에, 걸리버가 (본인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면서) 자기가 거인이나 휘넘이 되기라도 한 듯 착각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멸시하는 모습도 아주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고요. 


 그런데 스위프트와 걸리버가 분리되는 한편으로, 걸리버나 그가 묘사하는 신기한 나라의 사람들의 입을 통해 스위프트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장면도 꽤 있거든요. 그래서 스위프트가 진짜로 믿고 있는 것과 사실은 믿지 않으면서 능청을 떠는 것을 구분하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어요. 예를 들어 라퓨타에서 만난, 수학과 음악을 숭상하고 나머지 학문들을 다 하찮게 여기는 지배 계급이나 허황되고 가능성 없는 연구에 평생을 바치는 과학자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건 분명 걸리버를 앞세운 스위프트의 시각입니다. 하지만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다르게 영국은 식민지의 종교와 학문을 발전시키기 위해 아낌없는 은혜를 베푼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하는 건, 작가 본인의 진짜 사상인지 아닌지 좀 헷갈려요. 검열과 비판을 피하기 위한 작가의 방패막이일 수도 있겠다 싶다가도, 이렇게 주구장창 영국 사회 욕을 잔뜩 해댄 작품을 내면서 그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칭찬을 했을 리가 없다 싶기도 합니다. 그런 보여주기식 찬양 해봤자 이미 기분 나빠진 영국인들은 아무도 안 속을 것 같거든요ㅋㅋㅋ 


 여성을 보는 관점도 좀 오락가락하는 게, 교육에 있어서 성차별은 멍청한 짓이고 남녀 차별없이 가르치는 걸 엄청 높이 평가하는데 (거인국/휘넘국) 정작 그 와중에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은 또 끊임없이 하고 있어서.. 


 결제, 근면, 운동, 청결은 남녀 자녀 모두에게 독같이 부과되는 교훈들이었다. 내 주인은 여자 아이들에게, 우리가 가사 노동과 관련된 몇 가지 일들을 제외하고는, 차별 교육을 시킨다는 것을 기이하게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하면, 그가 보기에는 솔직히, 우리 인구의 절반이 그저 아이들을 출산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쓸모없는 사람들에게 아이들의 양육을 맡긴다면 그건 한층 더 야만적인 일이 아니겠냐고 말했다. - p.474

 이런 묘사를 보면 당대로서는 나름 깨어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지금의 시각으로는 그냥 성차별주의자죠. 가사 노동이나 아이들의 양육이 온전히 여성한테 있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모든 얘기가 진행되고 있잖아요. 그리고 여자의 본성 속에는 음탕과 호색, 추문의 기질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는 둥 하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거든요. 시대가 시대인만큼, 작가의 그런 태도를 '어쩔 수 없이' 감안하고 봐야 한다는 게 현대 여성 독자의 비극이죠. 우리는 어느 고전을 읽어도 이런 식으로 '너는 열등한 존재고 나는 너를 깔아보고 있어' 하는 작가의 속내를 참고 견뎌야 하니까요ㅠ


 여성에 대한 시각 외에도, 현대에서 보면 동의할 수 없는 지점들도 꽤 보입니다. 수학이나 과학을 실용성이 없는 학문이라고 엄청나게 멸시하는데, 사실 시(詩)보다야 수학이나 과학이 엄청나게 실용성이 높잖아요? 그 시대에는 쓸모없고 무익해 보였지만, 그런 한심하고 멍청한(ㅋㅋ) 연구를 끊임없이 한 덕에 지금 이렇게 발전한 기술 덕을 보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기분이 묘했어요. 스위프트가 현대에 와서 과학이 이루어낸 성과를 보면 도대체 뭐라고 할까 궁금해지기도 하고요!


 나름 재밌긴 하고 여러 가지 신비한 존재들이 잔뜩 등장하는 판타지도 맞는데, 절대 아동용 동화는 아닙니다. 그러기엔 인간에 대한 환멸과 절망, 체념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어요. 정치에 참여도 해보고 실망도 해보고 인간관계 다 때려치고 산이나 들어가서 살고 싶다는 충동도 느껴본.. 그런 성인 분들이야말로 오히려 어릴 때보다 더 재밌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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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마법사 1 - 오즈의 위대한 마법사, 1900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라이먼 프랭크 바움 지음, 손인혜 옮김, 윌리엄 월리스 덴슬로우 그림 / 더스토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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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즈의 마법사>는 아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함께 현대 환상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명작일 겁니다. 평범한 소녀가 낯선 세계로 떨어져 모험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온다는, 단순하면서도 이입하기 쉬운 구도로 되어 있어요. 출판 당시부터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영화로, 애니로, 뮤지컬로, 드라마로 다양하게 만들어지면서 대중문화에 어마어마한 족적을 남겼죠! 지금도 '도로시'나 '토토'라는 이름뿐만 아니라 '하늘로 떠오르는 집'이나 '은 구두', '노란 벽돌 길' 같은 요소가 영미 작품에 나온다면 거의 100%의 확률로 <오즈의 마법사>에 대한 오마쥬라고 보시면 돼요.


 <오즈의 마법사>는 14권이나 될 정도로 긴 시리즈인데, 우리가 대부분 알고 있는 '도로시가 토네이도에 휘말려 오즈의 나라에 떨어지고, 집으로 가기 위해 허수아비-양철 나무꾼-겁쟁이 사자와 함께 오즈의 마법사를 만난다' 하는 줄거리는 1권 내용입니다. 사실 작가는 처음에 장편 시리즈로 만들 계획이 아니었던지라 뒤로 갈수록 설정에 모순되는 점이 보인다고 해요. 당연하게도 1권만 놓고 보면 그런 설정충돌 없이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지만요. 짧은 내용인데도 도로시가 몇 번이나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이를 해결하는 과정이 정말 좋아요. 그냥 단순히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기만 하면 모든 게 다 잘 되는 식이 아니잖아요.


 <오즈의 마법사>가 1900년에 출간되었는데, 그 후 한참이 지나도록 여기에 담긴 상징이나 은유를 시대와 연관지어 생각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용기를 원하는 겁쟁이 사자는 그저 용기가 필요한 우리네 보통 사람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여진 거죠. 그러다 1964년 고등학교 선생님이던 헨리 리틀필드라는 사람이 1900년대 당시 시대와 엮여서 <오즈의 마법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노란 벽돌 길은 '금본위제도', 은 구두는 '은본위제도', 에메랄드 시티는 '워싱턴 D.C.', 허수아비는 '농민', 양철 나무꾼은 '공장 노동자', 겁쟁이 사자는 '민주당', 도로시는 '평범한 미국의 중산층 서민' 이런 식으로 바꿔서 보면 딱 맞아떨어진다는 거죠. 작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지만 워낙에 딱 맞아떨어지는 비유라 지금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해요. 


 물론 저 해석을 지지하지 않으셔도 OK입니다. 환상문학의 매력이 뭐겠어요? 시대적 배경을 읽어내도 재밌지만 그냥 이야기 그 자체로 봐도 재밌다는 거 아니겠어요? 모든 훌륭한 작품이 그렇듯, 그냥 인간 본성에 대한 우화라고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예를 들어 각각 뇌-심장-용기가 없어서 불행하던 허수아비-양철 나무꾼-겁쟁이 사자에게 오즈가 약간의 사기를 쳐서(?) 각자 원하던 것을 가졌다고 믿게 하는 장면을 볼까요. 각자 자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스스로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사실은 네 속에 이미 네가 원하는 미덕이 있다고, 너는 충분히 멋진 존재고 네가 그걸 믿기만 하면 된다고 일러주는 내용으로 볼 수도 있잖아요. 주인공 4인방이 모두 알고보니 자기가 이미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어린이를 위한 동화로서 정말 멋진 메세지 아닙니까?!ㅎㅎ


 <오즈의 마법사> 같은 유명한 작품은 읽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다른 장르로 접했을 뿐 정작 원본 책을 읽어본 사람은 의외로 적다고 해요. 저는 개인적으로 환상문학을 너무너무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환상문학을 좀 더 많이 읽고 좀 더 많이 이야기하고 좀 더 많이 만들어내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환상의 세계를 구경하는 것도, 그리고 거기서 은유나 상징을 읽어내는 것도, 그리고 지금 현재의 모습을 겹쳐보는 것도 무척 재밌고 근사한 경험이니까요. 혹시 아직까지 <오즈의 마법사>를 읽어보지 않으셨다면, 오늘이 바로 기회입니다. 저랑 같이 오즈의 세계로 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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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빨강머리 앤 (티파니 민트 에디션) - 1908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루시 모드 몽고메리 저자, 박혜원 역자 / 더스토리 / 202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빨강 머리 앤>은 ANNE 시리즈의 첫 번째 책입니다. 워낙에 인기가 많은 작품이라 단편까지 포함하면 11권이나 되는 시리즈인데, 대부분의 독자들이 익숙한 내용은 1권인 <빨강 머리 앤> 정도인 것 같아요. 앤이라는 고아 소녀가 마릴라와 매슈에게 실수로(!) 입양되고, 옆집의 다이애나와 천년의 우정(ㅋㅋ)을 나누고, 길버트와 서로 1등하겠다고 경쟁하면서 눈에 불을 켜고, 좌충우돌 사고를 쳐가면서 마을에 녹아드는.. 그 모든 과정이 1권에 다 담겨 있답니다. 2권부터는 이제 앤이 대학생이 되고, 일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점점 나이들어 결국에는 세상을 떠나는 장면까지 천천히 나온다고 해요. 어릴 때 이 작품을 만나 커가면서 한 권씩 차례로 읽다보면, 말 그대로 앤과 함께 같이 늙어가는 기분일 것 같아요!


 일본 애니메이션 덕분에 활자 속에서 살아숨쉬는 앤과 다이애나의 모습을 상상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애니메이션을 직접 본 세대가 아닌데도, 워낙에 인터넷으로 그 애니메이션 이미지를 많이 접해서 자꾸 떠오르더라고요. 그 밖의 인물들은 최근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캐나다 드라마와 창작뮤지컬 <앤ANNE>에서 등장했던 배우들로 상상했어요. 3D로 이미 접해서 상상의 폭이 줄어드는 건 조금 아쉽지만, 대신 훨씬 더 생생하게 그릴 수 있는 건 좋았습니다. 특히 목소리나 말투가 귀에 들리니까 대화 장면이 더 술술 읽히더라고요~ 하지만 역시 가장 좋은 순서는 책-영상-책인 것 같아요.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모습과 비교하는 재미도 있잖아요.


 사실 지금 시대도 마찬가지겠지만, 소설 곳곳에서 '고아'에 대한 인식이 형편없다는 게 드러나서 씁씁했습니다. 처음에 마릴라와 매슈가 일꾼 남자아이를 하나 입양할 거라는 얘길 했을 때 린드 부인이 자꾸 어디에서는 고아가 집을 태웠다더라, 어디에서는 고아가 우물에 독을 풀었다더라 하는 얘기를 하면서 겁을 잔뜩 주죠. 이후에 앤이 과격한 행동을 보이거나 잘못을 저질렀(다고 오해했)을 때 마릴라가 믿을 수 없는 애를 집에 들였다고 내심 생각한다거나, 앤의 좋은 친구인 조세핀 할머니가 고아원에서 여자아이를 입양하다니 멍청하다고 생각했다는 묘사를 봐도 그래요. 부모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 보호자 없이 일정 기간 동안 자랐다는 것이 이렇게 큰 낙인이 찍히는 사회라니! 앤이 초록 지붕 집에 처음 왔을 때 마릴라와 한 대화를 보면 이 쪼끄만 소녀가 그동안 얼마나 형편없는 환경에서 지냈는지 보여서 눈물이 난다니까요.


 "그 사람들, 그러니까 토머스 아주머니나 해먼드 아주머니는 잘해 주셨니?"

 "아, 네......."

 앤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정을 고스라니 드러낸 작은 얼굴이 갑자기 빨개지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네, 두 분 다 잘해 주려고 하셨어요. 될 수 있는 한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려고 하셨을 거예요. 잘해 주려고 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 그 사람이 항상 잘해 주지 못해도 괜찮잖아요. 두 분은 나 말고도 걱정거리가 많았으니까요. 술주정뱅이 남편을 둔 것도 정말 괴로운 일인데, 세 번이나 연달아 쌍둥이를 낳았으니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아주머니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래도 두 분은 제게 잘해 주려 하셨던 게 확실해요." - p.72

  워낙 어릴 때 읽었던 책이라 그런지 다시 읽으니 새로운 부분이 많이 보였습니다. 이렇게 짧은 대화를 들으며 책에는 나오지 않는 고아 소녀의 전사(前史)를 추측하고, 어떻게든 자기를 키워줬던 어른을 나쁘게 말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아이의 심정을 비통해하며 눈물 흘리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아마 제가 이제는 앤에게 이입하기보다는 앤을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마릴라에 심정적으로 더 가까워져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릴 때는 마냥 신나는 모험 같기만 했는데, 어른이 된 지금 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걱정도 되서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그래서인지 마릴라의 훈육 방식에 동의했다가 동의하지 못했다가, 제가 앤을 키우는 것도 아닌데 책을 읽으면서 혼자 막 심각했답니다. 제 기억보다 앤이.. 정말 과격하더라고요..ㅎ


 특히 길버트가 홍당무라고 놀렸다고 바로 석판을 들어 머리를 내려쳤던 사건! 만약 제 동생이나 조카가 그랬다면 기겁하고 상담을 알아봤을 거예요. 그 또래 애들이 서로 별명 만들어 부르고 놀리고 하는 건 흔한 일이잖아요. 그런데 놀림받았을 때 앤의 대처가 너무 잘못됐어요. 제 기억 속에서는 길버트가 앤을 많이 괴롭혔던 것 같은데, 정작 소설 속에서 길버트가 한 일이라고는 처음 만난 빨강 머리 여자애한테 "홍당무" 하고 딱 한 번 놀린 게 다라서 앤의 대응이 너무 과격하고 일방적이었다 싶더라고요. 이 부분만큼은 정말 마릴라가 심각하게 걱정할 만 했다니까요. 그런데 오히려 앤의 일방적인 잘못이 아니었던 '딸기주스 사건'이나 '보트 침몰 사건'에 비해 어른들이 가볍게 넘어가서 좀 놀랐어요. 1900년대의 캐나다와 2020년의 한국의 인식은 정말이지 큰 차이가 있나봐요;; 하지만 저 석판 사건만 빼면, 대체로 앤은 이렇다 할 문제 없이 그저 일상 속에서 소소하게 좌충우돌하면서 무럭무럭 잘 자랍니다.


 앤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다이애나죠! 제가 봤을 때 <빨강 머리 앤>이 가지는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여자아이들의 사랑과 우정을 제대로 그려냈다는 점인 것 같아요. 보통 소녀의 성장담을 그리는 작품들을 보면 로맨스의 비중이 지나치게 크단 말이죠. 마치 여자아이의 모든 관심과 로망은 연애와 결혼에 있는 것처럼 그려지잖아요. 하지만 <빨강 머리 앤> 같은 경우, 앤의 옆에 설 수 있는 딱 한 사람을 꼽는다면 쥐똥만큼의 로맨스를 보여주는 길버트가 아니라 서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 에이버리에서의 모든 인생과 추억을 함께한 다이애나가 될 거예요. 서로 만남도, 우정도, 비밀도, 약속도, 심지어 절연과 재회까지도 너무너무 운명적이고 드라마틱하지 않나요? 어린 시절 친구랑 교환 다이어리 쓰고 "우리는 평생 베프야" 같은 맹세를 해본 소녀들이라면 앤과 다이애나의 우정에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니까요ㅋㅋㅋ 어른들은 조금 우스워하지만 본인들은 엄숙하고 진지하다는 점이 너무 너무에요ㅋㅋㅋ


 성장소설을 읽다 보면 왠지 저 자신도 주인공과 함께 그 시절을 살고, 주인공과 함께 한 단계 뛰어넘은 것 같은 아련한 기분이 들곤 하는데 <빨강 머리 앤>도 마찬가지입니다. 후반부 보면 제가 키운 것도 아닌데 막 마릴라-매슈에 이입해서 앤이 1등으로 시험 통과하고, 심지어 퀸스에서도 딱 한 명만 주는 장학금을 받고, 도시 전체가 모인 앞에서 시 낭송을 하는 게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어요. 아이고 내 새끼 모드에요. 가슴으로 낳은 내 딸이라니까요 하 진짜.. 한 번 읽기 시작하니까 다음 시리즈도 계속 읽고 싶어요. 앤처럼 똑똑하고 매력적인 아이가 어떻게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지 보고 싶으니까요. 에이버리로 돌아온 후의 이야기는 거의 몰라서, 아예 새로운 기분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됩니다. 더스토리에서 민트 에디션으로 시리즈 전체 쭉 내줬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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