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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오페라의 유령 - 1911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ㅣ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가스통 르루 지음, 베스트트랜스 옮김 / 더스토리 / 2019년 12월
평점 :
<오페라의 유령>은 뮤지컬로 엄청나게 유명한 작품이죠! 저도 뮤지컬로 처음 접했는데, 샹들리에가 번쩍거리는 오프닝 장면이 음악과 합쳐지면서 만들어내는 웅장함은 다시 생각해도 감탄이 나와요. 워낙 인기있는 작품이라 몇 년 전에는 <오페라의 유령> 속 주인공의 사연을 뚝 떼서 아예 <팬텀>이라는 외전 격의 뮤지컬도 나왔었는데, 팬텀이 왜 오페라 극장에서 살게 되었는지, 어떻게 사랑에 빠졌고 그래서 얼마나 괴로웠는지 등등 주로 오페라의 유령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는 작품이었어요. 주인공 버프를 받아서 팬텀도 꽤나 동정을 많이 받았답니다. 추한 외모 때문에 부모에게조차 버려져 평생 숨어 살다니, 이렇게 가엾을 수가!
그러니 제가 원작 소설을 읽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어요.. 저는 정말 팬텀이, 아니 에릭이, 그렇게까지 나쁘고 비열하고 잔혹한 악한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원작에서 그려진 팬텀은 그냥 범죄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일단 크리스틴에게 반해서 몰래 재운 뒤에 납치 및 감금하는 것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일단 그건 주인공의 사랑 어쩌구저쩌구로 넘어간다 치더라도 (물론 현실에서는 이렇게 심각한 문제를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면 안됩니다) 자기만의 공간에 들어왔다고 사람을 죽여서 자살로 위장하질 않나, 오페라 극장에 살기 이전에 이미 고문실을 만들곤 그 안에서 고문과 살인을 자행하질 않나, 자기 사랑 안 받아주면 오페라 극장 폭파시키고 파리 전체랑 죽을 거라고 협박하질 않나.. 아무리 고운 눈으로 봐줘도 미친 싸이코패스 스토커라구요ㅠ
그런데 삼각관계의 한 축인 에릭이 그렇게 무너졌다면 다른 한 축인 라울이라도 매력적이어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라울 역시 완전 별로라서.. 둘 사이에 껴서 온갖 고생 다 하는 크리스틴이 너무 안쓰러워지는 거 있죠? 라울은 크리스틴과 어릴 적 친구지만 둘 사이 신분 차이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일부러 크리스틴에게 거리를 두면서 냉랭하게 굴거든요. 그래놓고 크리스틴 노랫소리를 듣고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지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와서 자기가 크리스틴에게 뭐라도 되는 것처럼 굽니다. 그런데 정작 크리스틴이 자기를 받아주는 것 같지 않으니까 바로 속으로 온갖 모욕을 다 퍼부어요. 제가 경악하고 라울이라는 놈팽이는 못 써먹을 놈이다 싶었던 장면이 있는데, 바로 다음 묘사입니다.
음악의 정령이라고! 지금에서야 그 정령의 정체를 제대로 알게 되다니! 그 모습이 눈에 선했다. 분명 곱상한 외모를 가진 테너 가수로, 노래 하나로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놈이 분명했다. 아, 샤니 자작은 보잘것없고 초라한 젊은이에 불과했다. 라울의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뻗어 나가, 크리스틴이 너무나 괘씸하고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계집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 p.165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계집'이라뇨?! 저게 사랑하는 여자를 묘사하는 워딩이라니까요? 너무, 너무 치졸하고 성급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잖아요. 자기 마음에 조금만 안 차면 바로 뒤돌아서서 없는 루머도 만들어낼 인간 아닙니까? 순결 정숙 운운하는 것도 꼴보기 싫은데,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계급의식도 있고 심지어 숭배를 가장한 멸시까지 하잖아요! 이런 사람이 '오해였군요 미안합니다 당신은 순결한 천사고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같은 소리를 해봤자 그걸 얼마나 믿을 수 있겠어요? 차라리 다이아몬드를 믿는 편이 훨씬 낫겠다 싶어요. 크리스틴의 경우 빛나는 재능이 있으니 그 목소리로 평생 디바나 하면서 라울을 뻥 찼으면 좋겠습니다...만! 왜인지 모르지만 크리스틴은 라울을 사랑한답니다. 참.. 속이 터지는 일이죠..
물론 소설은 뮤지컬과 다르게 러브라인이 메인이 아니고 오히려 추리-스릴러에 가까운 작품이라 누구랑 누가 이어지느냐 하는 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요. <오페라의 유령>은 에릭이 오페라 극장에 살면서 원하는 장소에 드나들고, 유령의 짓이라고 믿게끔 만든 교묘한 트릭들 덕분에 추리 소설로도 읽히는 것 같아요. 앞에서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인물의 행동들이 뒤에서는 자기 딴에 합리적인 이유로 설명되는데, 그게 꽤 재밌었습니다. 예를 들어 극장장 둘이서 갑자기 뒤로 걷거나 안전핀을 달라고 소리치는 등, 직원들이 보기에는 정신이 나간 것 같은 모습을 보이는데 뒤에 가면 자기들끼리 테스트를 하는 중이어서 그게 무엇보다 중요했다는 식이에요. 페르시아인이 총을 못 쏴도 되니까 총을 쏠 것 같은 자세를 취하라고 하고 라울이 내심 어처구니없어 하는 것도, 뒤에 가면 에릭이 올가미를 사용한 트릭을 자주 썼기 때문에 그걸 방지하는 차원이라는 설명이 나오고요. 이런 식으로 미스터리-합리적 설명이 왔다갔다 하는 게 추리소설 같아 재밌었습니다.
다만 완전히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에릭을 너무 전지전능하게 만들어놨어요. 아무리 복화술이 있다고 해도, 목소리가 기둥 뒤쪽에서 나오게 한다든가 상자 속에서 나오게 한다든가 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유령이 아니라 사람인 이상, 보고 듣고 감시하는 것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 한계가 마치 없는 것처럼 일이 진행되는 것도 의아했습니다. 고문실의 숲 묘사도 너무 과장됐다고 생각하고요. 여러모로 추리보다는 스릴러, 완전한 트릭 해설보다는 분위기와 캐릭터에 기댄 소설이라는 느낌입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나 <팬텀>과는 전혀 다른, 한 편의 스릴러 작품으로 읽으시면 좋을 것 같아요!
+) 소설을 읽으면서 '아니 유령이 왜 돈이 필요해? 아니 왜 유령이 자리가 필요해?'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는 극장주와 극장 직원들이 좀 신기했습니다. 이미 에릭이 사람인 걸 아는 입장이니까 더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르지만요. 사람들은 설명하기 어려운 걸 맞닥뜨리면 바로 신비주의나 미신으로 넘어가는 속성이 있는 것 같아요. 저도 현실에서 저런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지 하고 괜히 뜨끔했답니다ㅋㅋㅋ 생각하는 게 어렵다고 생각을 멈추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아야겠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