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하고도 달콤한 성차별
다시 로크먼 지음, 정지호 옮김 / 푸른숲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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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밀하고도 달콤한 성차별>은 기혼 여성, 그 중에서도 아이를 갖게 된 여성이 어떻게 개인적으로 또 사회구조적으로 성차별에 내몰리면서 혼자 '독박육아'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꽤 깨어있고 열려있으며 공정한 역할분담을 한다고 '믿는' 부부들조차도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다양한 논문과 책, 사례들로 조목조목 보여주고 있어요. 읽으면 읽을수록 결혼을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새삼 차오르더라고요. 수많은 여성들이 당혹스러워하고, 화를 내고, 잔소리하고, 절망하다가, 결국 체념하고 우울에 빠지는 그 과정이 너무 생생해서 무서웠어요. 저도 자라면서 숱하게 봐왔던 풍경이었거든요.


 밑줄 긋고 싶은 문구가 너무 많아서 책 전체를 발췌해야 하는 수준입니다. 저는 막연하게 미국이 그래도 한국보다는 사정이 낫겠거니 했는데 전혀 아닌가봐요. 전세계에서 '어머니는 위대하며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는 신화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는 나라는 프랑스밖에 없는 수준이래요. 성평등이 그나마 앞서 있다고 평가받는 북유럽도 사회제도적으로 가정 안팎에서 육아를 도와주는 제도가 잘 되어 있다 뿐이지, 딱히 가정 내에서 남편이 아내와 동등하게 육아를 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한국이나 미국에 비하면 높은 육아 참여율을 보이겠지만요. 또 요즘은 페이스북 같은 SNS 덕분에 엄마들이 다른 집 엄마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이 정도는 해내야 해' 하고 받는 압박이 어마어마하게 높대요. 도저히 혼자서는 다 쫓아갈 수 없는, 불가능의 기준인 거죠.


 결혼을 하고나서 가사 분담으로는 나름 공정하고 공평하게 잘 굴러가던 집도, 아이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완벽하게 어그러집니다. 이 책은 그 이유를 여러 가지 문화적/사회적/생물학적 요인으로 분석을 시도해요. 좀 거친 요약일 수도 있겠지만, 읽다보니 결론은 '그래도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이 한 줄로 요약되는 것 같아요.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하나하나 세세하게 짜 놓지 않으면, 남자는 자신에게 이득으로 돌아오지 않는 모든 일은 죄다 미뤄버립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되기 때문에. 저는 '전략적 무능력'이나 '선택적 망각'이라는 용어가 참 마음에 듭니다. 적어도 남자들이 뭘 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드러내주잖아요. "여보 이거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나 "미안 깜빡했네" 같은 말로 끊임없이 계속해서 이것은 당신의 일이고 나는 결코 하지 않을 거라고 신호를 보내는 행동에 딱지를 붙이는 거예요.


 저자가 일본 여성의 대응을 소개한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도 지금 똑같이 일어나고 있거든요! 저자가 인용한 바에 따르면, 2011년 일본 18~34세 여성의 49퍼센트가 남녀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고 39퍼센트는 아예 한 번도 성관계를 갖지 않았대요. 전문가 용어로 '친밀한 관계로부터의 도피'입니다. 결혼과 육아가 여자의 인생에 그토록 많은 짐을 올려놓는데, 그걸 우리가 왜 져야 하지? 처음부터 남자를 만나지 않으면 되잖아? 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거죠. 요즘 한국의 비혼 열풍을 생각해보면 남의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한국은 출산율이 일본보다도 낮잖아요. 다들 눈치챈 거죠. 육아가 여자의 무덤이라는 걸.


 그렇다고 이 책이 결혼-출산-육아를 반대하느냐? 당연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런 식의 비정상적인 회피 전략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지금 각자 가정 내에서 겪고 있는 불평등을 인식하고 그걸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말해요. 정말 신기하죠? 이대로 가다가는 결혼 생활이 파경에 다다를 게 분명히 보이는데도 (외도와 관계소홀 다음으로 많은 이혼사유가 불평등한 가사&육아분담이래요) 많은 남편/아빠들이 그저 손놓고 아내 혼자서 잠도 못 자고 허덕거리며 모든 일을 처리하는 걸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는 게요. 의외로 결혼 생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득을 보는' 쪽도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내용도 나오는데.. 아니 그럴 거면 그냥 너도 하란 말이야! 하는 소리가 바로 목 밑까지 차오릅니다.


 저는 특권을 가진 쪽이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타인을 위해 노력할 거라고 믿지 않는 쪽입니다. 그래서 더 이렇게 회의적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정말로 상대를 사랑한다면, 아내의 희생이나 노력을 당연시하지 않고 자기도 그 짐을 나누려고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러지 않을거면 애시당초 결혼을 하지 말았으면 싶고요.. 


 많은 분들이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지금 '독박육아라기엔 뭔가 애매하게 남편이 시키는 건 해주지만 시키지 않으면 절대로 하지 않고, 그 시키는 일을 생각하고 결정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알려주고 점검하는 것까지 전부 다 내가 해야한다'는 상황에 빠져 계신 분들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나의 분노와 울분이 단순히 내가 속이 좁고 까탈스러워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위안이 되는 지점이 있으니까요. 그 남편되시는 분들도 많이 읽었으면 좋겠는데, 책에 묘사된 남편들의 행태를 봐서는 본다고 해도 깨닫고 변화할지는 미지수네요.


 '당신은 정말 좋은 엄마야' 혹은 '당신 없으면 굴러가지가 않아' 같은 사탕발림으로 모든 부당함을 떠맡고 계신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여.. 이제는 그딴 허울 좋은 말에 만족하는 대신 반은 당신의 몫이고 그건 당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라고 얘기합시다. 아직도 세상 대부분의 여자들이 이렇게 산다는 게 너무 슬프고 화가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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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의 디테일 - 위대한 변화를 만드는 사소한 행동 설계
BJ 포그 지음, 김미정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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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습관은 간단한 것 같은데, 의외로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골치가 아파요. 매번 똑같은 후회를 반복하면서 '내일은 이러지 말아야지' 해놓고 그 다음 날도 똑같은 짓을 했던 경험.. 아마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런 습관에 관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거고요!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습관을 더 빨리, 더 쉽게 만들 수 있을까? BJ 포그는 반복이 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런저런 이론이나 행동양식을 많이 말하고 있지만, 다 읽은 지금 핵심은 '감정'으로 정리되는 것 같아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싶으시겠죠. 책 내내 습관을 만들려면 더 구체적으로, 더 작게, 더 잘게 쪼개는 거라고 외치고 있으니까요. 이건 기술적인 부분이잖아요. 예를 들어서 '운동을 30분 하겠어'가 아니라 '팔굽혀펴기를 딱 2번만 하겠어'나 '매일 런닝화를 신겠어' 하는 식으로 더 쉽고 간단하고 구체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식이거든요. 그런데 이 쪼개고,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는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 감정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구나 싶어져요. 그게 뭐든지 하고나서 어색하거나 불편하거나 힘들다는 느낌이나 기분이 들면 그 습관은 물 건너갔다는 거죠. 결국 '감정'이 핵심입니다.


 왜 하기 쉬운 일부터 하나씩 해 나가야 하는가? 왜 가장 피곤하고 힘들고 아픈 날에도 할 수 있는 그런 목표를 세워야 하는가? 그래야 잠깐이라도 '아 하기싫다' 하는 생각을 안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뇌는 순간적으로 스쳐가는 바로 그 느낌을 전력으로 받아들인대요.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가는 순간, 그 전에 아무리 반복해왔든 상관없이 습관으로 만들기 어렵다고 해요.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막연한 생각과 다르게, 의외로 시간은 습관을 만드는 데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고 해서 놀랐습니다. 보통 100일 정도를 기준점으로 잡는 걸 많이 봤는데 그보다 훨씬 짧은 시간으로도 습관을 만드는 게 가능하다나요?


 그런 의미에서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성공하고 나서 자기 스스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라는 꼭지가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실패한 상황에 대해 '짜증나' 같은 소리는 입에 달고 사는데 비해, 기분이 좋은 상황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거든요. 아마 저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그러실 것 같아요.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 습관을 꼭 바꿔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뇌에다 자꾸 부정적인 피드백은 계속 주고 긍정적인 피드백은 하나도 안 주고 있으니까, 계속 상황이 악화되는구나 싶었어요. 그게 뭐든지, 기분이 좋아야 계속 힘내서 뭘 자꾸 이어갈 수 있는데 저는 그게 정말 안 됐던 것 같아요. 이제라도 꼭 고쳐야겠다 싶어요.


 각 장마다 마지막에 핵심 내용을 정리해놨고, 책 제일 뒤쪽에는 아예 책 내용을 4페이지 정도로 간략하게 요약을 해놨더라고요. 빠르게 내용을 파악하고 싶은 분들은 뒤쪽부터 봐도 괜찮을 것 같아요. 다만 책에서도 말하지만 '아는' 것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찬찬히 읽으면서 그 아는 내용을 실천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설득시키는 과정을 가지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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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
스튜어트 터튼 지음, 최필원 옮김 / 책세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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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은 제목부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한 사람은 한 번만 죽을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도대체 에블린 하드캐슬이 누구길래 일곱 번을 죽는다는 것인지 궁금해지잖아요. 뒷표지에는 이 소설을 두고 '애거서 크리스티와 인셉션이 만났다' 하는 홍보문구를 사용했더라고요. 읽다보니 틀린 말은 아닌데, 인셉션보다는 오히려 메멘토에 가까운 느낌이었습니다. 정확히 자기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채로 던져져 미스터리를 해결해야만 하는 주인공의 혼란스러움이 엄청나거든요. 그 심리를 고스란히 따라가는 독자도 마찬가지고요.


 일어나는 사건, 즉 진범을 찾아내야만 하는 사건은 사실 그동안 어디서 많~이 봐왔던 이너서클 미스터리 그 자체입니다. 19년 전의 살인사건.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살인사건. 둘은 연결되어 있고, 이 외딴 섬 같은 별장에는 19년 전 살인사건이 있었던 그때의 그 손님들이 정확히 똑같이 초대됩니다. 누가 봐도 이 중에 범인이 있다! 하는 모양새죠. 그런데 이 익숙한 도식에 시간여행을 하며 다양한 인물들의 시선을 경험하게 되는 주인공이 끼어들면서 신선해져요. 처음 몇 장을 읽는 동안에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주인공만큼이나 독자도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주인공에게 주어진 시간은 8일. 하지만 사실상 하루나 마찬가지에요. 매번 몸의 주인이 잠이 들거나 의식을 잃을 때마다, 새로운 사람의 몸에서 깨어나 다시 똑같은 하루를 시작하게 되니까요. 에블린 하드캐슬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살해당하는 바로 그 하루요. 이 소설의 시간여행 설정에서 흥미로운 점은, 주인공이 의도치 않게 계속해서 시간을 점프하는 바람에 자신이 누구로, 어디에, 몇 시쯤에 있는지 계속 체크해야 한다는 겁니다. 주인공이 첫 번째 호스트의 몸으로 24시간을 살고, 두 번째 호스트의 몸으로 다시 24시간을 살고, 세 번째 호스트의 몸으로 24시간을 살고.. 이런 식으로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아요. 누군가 의식을 잃으면 바로 전의 호스트가 의식을 잃었다 다시 차린 시점으로 이동합니다. 예를 들어 진행 중에 네 번째 호스트가 오후 5시에 까무룩 잠이 들었다면? 그 전 호스트의 의식이 끊겼다가 다시 복구되는 순간으로  이동합니다. 오후 5시가 아니라 오전 11시일 수도 있는 거죠. 같은 하루인데도 시간이 계속 뒤죽박죽 이어집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끼어드는 순간도 뒤죽박죽이에요.


 여기에 조력자와 경쟁자, 살인자까지 겹쳐지면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도대체 누구를 믿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아요. 보통 SF물은 작품마다 설정이 조금씩 달라서 기본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품이 들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그 시간과 노력이 상당히 많이 들어갑니다. 중반까지도 저는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쏭달쏭했다니까요. 그러다 서서히 뒤로 갈수록 파티 참가자들의 면면과 그 비밀들을 알게 되고, 각 호스트가 서로 맞물리면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게 되니까 그제서야 재밌어지더라고요! 주인공이 자기가 각 호스트일 때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상황 파악 한 후에도 예전 호스트에게 가서 "야 내가 넌데 사실은 이렇게저렇게 된 거니까 넌 이대로 해"라고 말해도 그가 안 믿을 걸 알아서 약간 시무룩해 하는 것도 귀여웠어요ㅋㅋㅋ 내가 난데! 내가 나라서! 내가 안 믿을 걸 알아!ㅋㅋㅋㅋ


 결말 부분도 마음에 듭니다. 저는 일단 '사람은 (아주 드물지만) 변할 수 있다'고 믿는 쪽이거든요. 이 작품이 내내 말하는 게 바로 그거잖아요. 처음에 세바스찬 벨의 몸으로 깨어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에블린을 만났을 때, 그녀가 한 위로(?)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입니다. "이제 당신에겐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어요. 우리처럼 어둠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조립하려 하지 말아요. 나중에 또다시 정신이 들면 그때도 지금처럼 어리둥절하게 될 테니까요. 그러지 말고 세상을 제대로 봐요. 주변 사람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마음에 드는 부분을 잘 추려내 자기 것으로 만들어보는 거예요. 이렇게 말이죠. '저 남자의 정직함과 저 여자의 낙관주의를 배워야겠어.' 마치 새빌 로에서 정장 쇼핑을 하듯이." 매번 각기 다른 호스트의 몸에서 그들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가진 각자의 재능을 누릴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고요. 우리에겐 한계와 능력이 동시에 있다는 것. 그리고 매일 매 순간이 기회라는 것.


 영화보다는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아요. 10부작쯤으로 되서 매번 새로운 호스트의 눈으로 사건을 해결하면서 조금씩 다르게 상황을 보게 되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거든요. 이미 판권이 팔려서 드라마로 만들어질 예정이라니, 빨리 만나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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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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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가시노 게이고는 어쩌면 이렇게 많은 작품들을 꾸준히 계속 써 낼 수 있는 걸까요? 정말 놀랍습니다. 보통 단편이면 단편, 중편이면 중편, 장편이면 장편, 작가가 특히 잘 쓰는 분야가 있기 마련인데 그런 것도 없는 것 같아요.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 같은 경우는 2001년에 일본에서 발표된 8편의 단편을 하나로 묶은 책입니다. 각 에피소드마다 분량이 짧아서 자투리 시간에 하나씩 읽기 좋아요! 하나같이 출판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어떤 작품은 전형적인 살인사건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작품은 살인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펼쳐지기도 합니다. 추리소설가의 압박이나 출판사와의 관계, 독자나 대중의 반응 같은 요소들이 곳곳에서 '웃프게' 튀어나와요. 히가시노 게이고의 블랙 유머가 빛을 발한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엄청나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기보다 가볍게 킬킬대면서 웃기 좋은 소설이었습니다.


 [범인 맞추기 소설 살인사건]이나 [마카제관 살인사건] 같은 경우, 작가 본인이 작품이 안 풀릴 때 이런 상상을 꽤나 해봤을 것 같다는 합리적(?) 의심이 드는 작품이었습니다ㅋㅋㅋ 왜 아침에 지각할 것 같을 때 종종 '아 공간이동 능력 있으면 좋겠다' 이런 상상 해보는 것처럼, 작품이 잘 안 풀리고 참신한 트릭이 떠오르지 않을 때 작가가 이런 상상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독서 기계 살인사건]이나 [장편소설 살인사건]에서는 책을 정말로 읽는 사람은 점점 없어지는 것 같다는 작가의 한탄 아닌 한탄이 느껴지기도 했고요. 독자로서 동의할 수 없는데요?! 싶다가도, 본업이 출판계에 있는 사람이 실시간으로 피부로 느끼는 게 그렇다면 그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겠지 싶어서 수긍하게 되더라고요.


 제일 재밌게 읽은 건 [장편소설 살인사건]입니다. 전체적인 리듬감이나 트릭의 복잡함, 캐릭터들의 관계 등등을 고려했을 때 작가가 바로 '이것은 어느 정도 분량이 될 만한 이야기다' 하고 바로 판단이 나오는 것도 신기했고(저는 제가 글을 쓰기 전까지는 최종 분량이 어떻게 나올지 도저히 감을 잡지 못하거든요), 그걸 또 억지로 늘리려는 편집부에게서 마치 과제 제출분량을 맞춰보려고 어떻게든 발버둥치는 대학생 때의 기억도 떠올랐고, 억지로 늘리기 전과 후의 내용을 그대로 싣어서 비교해놓은 걸 보니까 정말 확연히 늘어지는 것이 '단편은 단편인 이유가 있구나' 새삼 느끼기도 했어요. 저는 다양한 인간군상이 복잡하게 얽히는 장편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중편이나 단편도 좋아해서 각각 서로의 장점을 해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됐으면 좋겠어요. 단편이 상대적으로 더 가벼운 내용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절대적인 잣대도 아니고.. 분량으로 작품의 평이 결정된다니 이런 바보같은 일이 어디 있나요.


 2001년에 일본에서 출간된 소설이 2020년 이제야 한국에 출간되다니.. 아니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의 작품은 그게 뭐든 재빨리 바다 건너 오는 거 아니었나요?! 왜 이렇게 늦었는지 모르겠네요. 재밌는데! 여러 가지 면에서 <명탐정의 규칙>이 생각나는 소설이었습니다. 이 소설 제목이 <추리소설가의 법칙>이어도 무방할 것 같아요ㅋㅋㅋ 작가의 단편을 사랑하셨던 분들이라면 이번 소설 역시 만족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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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곤 우화 - 교훈 없는 일러스트 현실 동화
이곤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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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곤 우화>는 아주 예쁜 일러스트가 귀여운 동화책입니다. 하지만 아동용은 아닌 느낌이에요. 사회에 통용되는 수많은 속담과 숙어와 대중문화에 익숙한 어른이 읽는 게 훨씬 더 작품의 메시지와 더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거든요.


 예를 들어 '우물 안 개구리'로만 몇 개나 되는 에피스드가 펼쳐지는데, 우물 안 개구리가 뭔지 또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을 가리킬 때 쓰이는 말인지 모른다면 작품 속에 포함된 전복과 반전의 느낌이 없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어른을 위한 우화라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고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비유나 숙어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어요ㅋㅋㅋ 개미와 베짱이는 워낙 유명하고 많이들 비틀었는데, 사족이나 뱀의 꼬리 같은 단어의 쓰임을 뒤트는 것도 재밌었고, 우리가 흔히 어떤 단어나 상황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다시 한 번 뒤집어서 보는 것도 좋았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 에피소드가 4개나 되는데, 각 에피소드마다 완결성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기존의 아이디어에 허를 찌른다는 설정은 그대로인데 어디서 끊어도 무리가 없었어요. 저는 결국 어떤 개구리는 바다에 적응했고 거기서 살아남았다는 마지막 에피소드가 정말 마음에 들더라고요! 작가가 쓴 후기를 보니 그 뒤에 훨씬 혹독하고 비극적인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었던데, 지금도 좋지만 그 에피소드를 넣었어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아요. 훨씬 절망적이긴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은 명암이 있는 거니까요. 개구리가 바다에 도달했더니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고 개구리는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이 책을 읽는 어른이라면 다들 알고있을 거예요. 하지만 개구리가 훨씬 더 넓은 세계를 만났다는 건 사실이니, 이전과는 또 다르겠지요. 그러니 비극으로 끝났어도 완전히 체념하게 되진 않을 것 같아요.


 우화답게 전체적으로 동물이야기가 많은데, 저는 <어린왕자>의 장미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가 그렇게 좋더라고요~ 아무래도 어른이 된 후 <어린왕자>를 다시 읽으면 장미에 대한 작가의 시각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거든요. 아무리 봐도 장미는 어린 왕자의 첫사랑이 형상화된 존재인데 제대로 존중한다는 느낌이 아니라서요. "장미가 하는 말은 듣지 말걸 향기만 맡을걸" 이런 대사는 좀 불쾌하기까지 하고요. 그런 와중에 장미가 어린왕자에게 "왜 네 이야기에는 전부 남자밖에 없어?" 하고 의문을 표하는 거 너무 좋았어요!!! 장미가 직접 여행을 떠나 당신을 만날 수도 있으니 당신만의 이야기를 잘 간직해두라는 메시지에는 왠지 두근거리기까지 하더라고요ㅋㅋㅋ




 사실 <한 컷 우화>라는 원래 제목답게, 한 컷만으로도 전체 핵심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뭘 찍어도 스포(?)가 되는 느낌이라 사진 찍기가 좀 조심스러웠습니다. 정말 좋았던 건 오히려 사진으로 찍지 않았어요. 직접 보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혹시나 기회 되시면 한번씩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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