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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하고도 달콤한 성차별
다시 로크먼 지음, 정지호 옮김 / 푸른숲 / 2020년 10월
평점 :
<은밀하고도 달콤한 성차별>은 기혼 여성, 그 중에서도 아이를 갖게 된 여성이 어떻게 개인적으로 또 사회구조적으로 성차별에 내몰리면서 혼자 '독박육아'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꽤 깨어있고 열려있으며 공정한 역할분담을 한다고 '믿는' 부부들조차도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다양한 논문과 책, 사례들로 조목조목 보여주고 있어요. 읽으면 읽을수록 결혼을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새삼 차오르더라고요. 수많은 여성들이 당혹스러워하고, 화를 내고, 잔소리하고, 절망하다가, 결국 체념하고 우울에 빠지는 그 과정이 너무 생생해서 무서웠어요. 저도 자라면서 숱하게 봐왔던 풍경이었거든요.
밑줄 긋고 싶은 문구가 너무 많아서 책 전체를 발췌해야 하는 수준입니다. 저는 막연하게 미국이 그래도 한국보다는 사정이 낫겠거니 했는데 전혀 아닌가봐요. 전세계에서 '어머니는 위대하며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는 신화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는 나라는 프랑스밖에 없는 수준이래요. 성평등이 그나마 앞서 있다고 평가받는 북유럽도 사회제도적으로 가정 안팎에서 육아를 도와주는 제도가 잘 되어 있다 뿐이지, 딱히 가정 내에서 남편이 아내와 동등하게 육아를 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한국이나 미국에 비하면 높은 육아 참여율을 보이겠지만요. 또 요즘은 페이스북 같은 SNS 덕분에 엄마들이 다른 집 엄마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이 정도는 해내야 해' 하고 받는 압박이 어마어마하게 높대요. 도저히 혼자서는 다 쫓아갈 수 없는, 불가능의 기준인 거죠.
결혼을 하고나서 가사 분담으로는 나름 공정하고 공평하게 잘 굴러가던 집도, 아이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완벽하게 어그러집니다. 이 책은 그 이유를 여러 가지 문화적/사회적/생물학적 요인으로 분석을 시도해요. 좀 거친 요약일 수도 있겠지만, 읽다보니 결론은 '그래도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이 한 줄로 요약되는 것 같아요.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하나하나 세세하게 짜 놓지 않으면, 남자는 자신에게 이득으로 돌아오지 않는 모든 일은 죄다 미뤄버립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되기 때문에. 저는 '전략적 무능력'이나 '선택적 망각'이라는 용어가 참 마음에 듭니다. 적어도 남자들이 뭘 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드러내주잖아요. "여보 이거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나 "미안 깜빡했네" 같은 말로 끊임없이 계속해서 이것은 당신의 일이고 나는 결코 하지 않을 거라고 신호를 보내는 행동에 딱지를 붙이는 거예요.
저자가 일본 여성의 대응을 소개한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도 지금 똑같이 일어나고 있거든요! 저자가 인용한 바에 따르면, 2011년 일본 18~34세 여성의 49퍼센트가 남녀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고 39퍼센트는 아예 한 번도 성관계를 갖지 않았대요. 전문가 용어로 '친밀한 관계로부터의 도피'입니다. 결혼과 육아가 여자의 인생에 그토록 많은 짐을 올려놓는데, 그걸 우리가 왜 져야 하지? 처음부터 남자를 만나지 않으면 되잖아? 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거죠. 요즘 한국의 비혼 열풍을 생각해보면 남의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한국은 출산율이 일본보다도 낮잖아요. 다들 눈치챈 거죠. 육아가 여자의 무덤이라는 걸.
그렇다고 이 책이 결혼-출산-육아를 반대하느냐? 당연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런 식의 비정상적인 회피 전략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지금 각자 가정 내에서 겪고 있는 불평등을 인식하고 그걸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말해요. 정말 신기하죠? 이대로 가다가는 결혼 생활이 파경에 다다를 게 분명히 보이는데도 (외도와 관계소홀 다음으로 많은 이혼사유가 불평등한 가사&육아분담이래요) 많은 남편/아빠들이 그저 손놓고 아내 혼자서 잠도 못 자고 허덕거리며 모든 일을 처리하는 걸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는 게요. 의외로 결혼 생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득을 보는' 쪽도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내용도 나오는데.. 아니 그럴 거면 그냥 너도 하란 말이야! 하는 소리가 바로 목 밑까지 차오릅니다.
저는 특권을 가진 쪽이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타인을 위해 노력할 거라고 믿지 않는 쪽입니다. 그래서 더 이렇게 회의적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정말로 상대를 사랑한다면, 아내의 희생이나 노력을 당연시하지 않고 자기도 그 짐을 나누려고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러지 않을거면 애시당초 결혼을 하지 말았으면 싶고요..
많은 분들이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지금 '독박육아라기엔 뭔가 애매하게 남편이 시키는 건 해주지만 시키지 않으면 절대로 하지 않고, 그 시키는 일을 생각하고 결정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알려주고 점검하는 것까지 전부 다 내가 해야한다'는 상황에 빠져 계신 분들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나의 분노와 울분이 단순히 내가 속이 좁고 까탈스러워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위안이 되는 지점이 있으니까요. 그 남편되시는 분들도 많이 읽었으면 좋겠는데, 책에 묘사된 남편들의 행태를 봐서는 본다고 해도 깨닫고 변화할지는 미지수네요.
'당신은 정말 좋은 엄마야' 혹은 '당신 없으면 굴러가지가 않아' 같은 사탕발림으로 모든 부당함을 떠맡고 계신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여.. 이제는 그딴 허울 좋은 말에 만족하는 대신 반은 당신의 몫이고 그건 당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라고 얘기합시다. 아직도 세상 대부분의 여자들이 이렇게 산다는 게 너무 슬프고 화가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