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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
스튜어트 터튼 지음, 최필원 옮김 / 책세상 / 2020년 10월
평점 :
절판
<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은 제목부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한 사람은 한 번만 죽을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도대체 에블린 하드캐슬이 누구길래 일곱 번을 죽는다는 것인지 궁금해지잖아요. 뒷표지에는 이 소설을 두고 '애거서 크리스티와 인셉션이 만났다' 하는 홍보문구를 사용했더라고요. 읽다보니 틀린 말은 아닌데, 인셉션보다는 오히려 메멘토에 가까운 느낌이었습니다. 정확히 자기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채로 던져져 미스터리를 해결해야만 하는 주인공의 혼란스러움이 엄청나거든요. 그 심리를 고스란히 따라가는 독자도 마찬가지고요.
일어나는 사건, 즉 진범을 찾아내야만 하는 사건은 사실 그동안 어디서 많~이 봐왔던 이너서클 미스터리 그 자체입니다. 19년 전의 살인사건.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살인사건. 둘은 연결되어 있고, 이 외딴 섬 같은 별장에는 19년 전 살인사건이 있었던 그때의 그 손님들이 정확히 똑같이 초대됩니다. 누가 봐도 이 중에 범인이 있다! 하는 모양새죠. 그런데 이 익숙한 도식에 시간여행을 하며 다양한 인물들의 시선을 경험하게 되는 주인공이 끼어들면서 신선해져요. 처음 몇 장을 읽는 동안에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주인공만큼이나 독자도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주인공에게 주어진 시간은 8일. 하지만 사실상 하루나 마찬가지에요. 매번 몸의 주인이 잠이 들거나 의식을 잃을 때마다, 새로운 사람의 몸에서 깨어나 다시 똑같은 하루를 시작하게 되니까요. 에블린 하드캐슬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살해당하는 바로 그 하루요. 이 소설의 시간여행 설정에서 흥미로운 점은, 주인공이 의도치 않게 계속해서 시간을 점프하는 바람에 자신이 누구로, 어디에, 몇 시쯤에 있는지 계속 체크해야 한다는 겁니다. 주인공이 첫 번째 호스트의 몸으로 24시간을 살고, 두 번째 호스트의 몸으로 다시 24시간을 살고, 세 번째 호스트의 몸으로 24시간을 살고.. 이런 식으로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아요. 누군가 의식을 잃으면 바로 전의 호스트가 의식을 잃었다 다시 차린 시점으로 이동합니다. 예를 들어 진행 중에 네 번째 호스트가 오후 5시에 까무룩 잠이 들었다면? 그 전 호스트의 의식이 끊겼다가 다시 복구되는 순간으로 이동합니다. 오후 5시가 아니라 오전 11시일 수도 있는 거죠. 같은 하루인데도 시간이 계속 뒤죽박죽 이어집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끼어드는 순간도 뒤죽박죽이에요.
여기에 조력자와 경쟁자, 살인자까지 겹쳐지면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도대체 누구를 믿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아요. 보통 SF물은 작품마다 설정이 조금씩 달라서 기본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품이 들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그 시간과 노력이 상당히 많이 들어갑니다. 중반까지도 저는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쏭달쏭했다니까요. 그러다 서서히 뒤로 갈수록 파티 참가자들의 면면과 그 비밀들을 알게 되고, 각 호스트가 서로 맞물리면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게 되니까 그제서야 재밌어지더라고요! 주인공이 자기가 각 호스트일 때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상황 파악 한 후에도 예전 호스트에게 가서 "야 내가 넌데 사실은 이렇게저렇게 된 거니까 넌 이대로 해"라고 말해도 그가 안 믿을 걸 알아서 약간 시무룩해 하는 것도 귀여웠어요ㅋㅋㅋ 내가 난데! 내가 나라서! 내가 안 믿을 걸 알아!ㅋㅋㅋㅋ
결말 부분도 마음에 듭니다. 저는 일단 '사람은 (아주 드물지만) 변할 수 있다'고 믿는 쪽이거든요. 이 작품이 내내 말하는 게 바로 그거잖아요. 처음에 세바스찬 벨의 몸으로 깨어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에블린을 만났을 때, 그녀가 한 위로(?)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입니다. "이제 당신에겐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어요. 우리처럼 어둠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조립하려 하지 말아요. 나중에 또다시 정신이 들면 그때도 지금처럼 어리둥절하게 될 테니까요. 그러지 말고 세상을 제대로 봐요. 주변 사람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마음에 드는 부분을 잘 추려내 자기 것으로 만들어보는 거예요. 이렇게 말이죠. '저 남자의 정직함과 저 여자의 낙관주의를 배워야겠어.' 마치 새빌 로에서 정장 쇼핑을 하듯이." 매번 각기 다른 호스트의 몸에서 그들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가진 각자의 재능을 누릴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고요. 우리에겐 한계와 능력이 동시에 있다는 것. 그리고 매일 매 순간이 기회라는 것.
영화보다는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아요. 10부작쯤으로 되서 매번 새로운 호스트의 눈으로 사건을 해결하면서 조금씩 다르게 상황을 보게 되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거든요. 이미 판권이 팔려서 드라마로 만들어질 예정이라니, 빨리 만나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