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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는 어쩌면 이렇게 많은 작품들을 꾸준히 계속 써 낼 수 있는 걸까요? 정말 놀랍습니다. 보통 단편이면 단편, 중편이면 중편, 장편이면 장편, 작가가 특히 잘 쓰는 분야가 있기 마련인데 그런 것도 없는 것 같아요.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 같은 경우는 2001년에 일본에서 발표된 8편의 단편을 하나로 묶은 책입니다. 각 에피소드마다 분량이 짧아서 자투리 시간에 하나씩 읽기 좋아요! 하나같이 출판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어떤 작품은 전형적인 살인사건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작품은 살인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펼쳐지기도 합니다. 추리소설가의 압박이나 출판사와의 관계, 독자나 대중의 반응 같은 요소들이 곳곳에서 '웃프게' 튀어나와요. 히가시노 게이고의 블랙 유머가 빛을 발한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엄청나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기보다 가볍게 킬킬대면서 웃기 좋은 소설이었습니다.
[범인 맞추기 소설 살인사건]이나 [마카제관 살인사건] 같은 경우, 작가 본인이 작품이 안 풀릴 때 이런 상상을 꽤나 해봤을 것 같다는 합리적(?) 의심이 드는 작품이었습니다ㅋㅋㅋ 왜 아침에 지각할 것 같을 때 종종 '아 공간이동 능력 있으면 좋겠다' 이런 상상 해보는 것처럼, 작품이 잘 안 풀리고 참신한 트릭이 떠오르지 않을 때 작가가 이런 상상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독서 기계 살인사건]이나 [장편소설 살인사건]에서는 책을 정말로 읽는 사람은 점점 없어지는 것 같다는 작가의 한탄 아닌 한탄이 느껴지기도 했고요. 독자로서 동의할 수 없는데요?! 싶다가도, 본업이 출판계에 있는 사람이 실시간으로 피부로 느끼는 게 그렇다면 그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겠지 싶어서 수긍하게 되더라고요.
제일 재밌게 읽은 건 [장편소설 살인사건]입니다. 전체적인 리듬감이나 트릭의 복잡함, 캐릭터들의 관계 등등을 고려했을 때 작가가 바로 '이것은 어느 정도 분량이 될 만한 이야기다' 하고 바로 판단이 나오는 것도 신기했고(저는 제가 글을 쓰기 전까지는 최종 분량이 어떻게 나올지 도저히 감을 잡지 못하거든요), 그걸 또 억지로 늘리려는 편집부에게서 마치 과제 제출분량을 맞춰보려고 어떻게든 발버둥치는 대학생 때의 기억도 떠올랐고, 억지로 늘리기 전과 후의 내용을 그대로 싣어서 비교해놓은 걸 보니까 정말 확연히 늘어지는 것이 '단편은 단편인 이유가 있구나' 새삼 느끼기도 했어요. 저는 다양한 인간군상이 복잡하게 얽히는 장편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중편이나 단편도 좋아해서 각각 서로의 장점을 해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됐으면 좋겠어요. 단편이 상대적으로 더 가벼운 내용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절대적인 잣대도 아니고.. 분량으로 작품의 평이 결정된다니 이런 바보같은 일이 어디 있나요.
2001년에 일본에서 출간된 소설이 2020년 이제야 한국에 출간되다니.. 아니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의 작품은 그게 뭐든 재빨리 바다 건너 오는 거 아니었나요?! 왜 이렇게 늦었는지 모르겠네요. 재밌는데! 여러 가지 면에서 <명탐정의 규칙>이 생각나는 소설이었습니다. 이 소설 제목이 <추리소설가의 법칙>이어도 무방할 것 같아요ㅋㅋㅋ 작가의 단편을 사랑하셨던 분들이라면 이번 소설 역시 만족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