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시래기의 지식 한 장 - 뽀시래기 직장인을 위한 비즈니스 실무 용어
심인혜 외 지음 / 책밥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업무를 하다 보면 가끔 '뭘 모르는지 몰라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상황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고, 누구나 익숙해지고 나면 자기가 초보일 때 뭘 몰랐는지 알기가 참 어려워요. 특히 회사에서는 서로 어느 정도까지 아는지 가늠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모두들 '이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겠지?' 하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가끔 모르는 용어가 등장하면 검색 찬스를 쓰곤 했던 사람으로서, 업무 용어 한 장 정리를 해준다는 말에 솔깃했어요.


 특정 직군에만 활용되는 용어는 아니고, 회사 생활 하다보면 듣게 되는 이런 저런 분야의 용어가 총 망라되어 있습니다. 개발 쪽 용어가 한 챕터나 차지하고 있는 건 좀 놀라웠어요. 그만큼 요즘 IT 쪽과 같이 일해야 하는 상황이 많은가 싶기도 합니다. 완전 IT 쪽 신입을 위한 용어라기엔 너무 초보적이라, 개발 직종과 같이 일하게 된 사람들을 위한 용어 정리라는 느낌이었어요. 어쨌거나 정보처리기사 공부할 때 보던 용어를 여기서 보니까 괜히 반갑더라고요~


 전체적으로 구성이 맘에 듭니다. 우선 그 용어가 등장하는 상황을 간단히 제시하고, 밑에 일러스트로 개념을 쉽게 이미지화해준 다음, 오른쪽에 구체적으로 사전적인 용어에 대한 설명을 해 주는 식이에요. 모든 용어가 왼쪽-오른쪽 두 페이지를 넘기지 않아서 좋더라고요. 정말 급할 때 살짝 검색찬스 쓰는 것처럼 살펴보기 좋은 느낌? 몇몇 용어는 제가 듣고 그냥 감으로 때려맞춘 것들도 있더라고요ㅋㅋㅋ 그리고 확실히 일러스트가 있으니까, 글만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개념이 딱 잡혀요! 다만, 용어가 등장하는 상황 때마다 '뽀식'이가 너무 말도 안 되는 엉뚱한 헛소리를 하는데.. 그게 하나도 안 웃기고.. 너무 억지스러웠어요.. 차라리 그냥 물음표 살인마처럼 ??? 이런 게 있는 편이 나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용어별 난이도가 상이한 편이라, 어떤 건 너무 간단하게 이해가 되는데 어떤 건 한참 읽어봐도 무슨 소린가 싶은 것도 있었어요. 이게 그래도 좀 아는 분야의 용어는 '이렇게 간단한 것도 다 알려주는구나' 싶었는데, 반대로 제가 잘 모르는 분야의 경우는 뒤돌아서면 까먹을 것 같아요;; 특히 영어 약어가 많아서, 현업에서 자주 듣는 말 아니면 읽고 나서 뒤돌아서서 그게 뭐였더라 싶어요. 그치만 뭐, 이 책의 목적 자체가 '현업에서 쓰이는데 너무 쉬운 용어 같아서 물어보긴 좀 민망한 용어 알려주기'이다 보니, 자주 듣지 못하는 용어를 막 애써서 외울 필요는 없겠지요.



 급하게 써먹을 수 있는, 간단하고 실용적인 업무 용어 정리집입니다. 여러 모로 읽어두면 좋을 것 같아요!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길가메시 서사시 - 인류 최초의 신화 현대지성 클래식 40
앤드류 조지 엮음, 공경희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생'은 창작물에서 굉장히 흔하게 나오는 설정입니다. 너무나 오래 살아서 인류의 모든 역사를 지켜본 존재들은 여기저기서 출몰하곤 해요. 하지만 <길가메시 서사시>를 읽다보면 창작물 속 영생을 사는 존재들이 사실은 기껏해야 5천년 정도밖에(!) 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명조차도 겨우 그 정도니까, 문명 안에서 살려면 어찌됐건 그 언저리에 있어야 하는 거죠. 물론 엄청나게 긴 세월이고, 한 명의 인간으로서 살 수는 없겠죠. 하지만 영원이라는 단어에 비하면 너무 짧은 기간이잖아요ㅎㅎ 인류의 문명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생각보다 가까운 시간에서 시작했다는 실감을 하게 해주는 텍스트였습니다.


 길가메시는 아무도 대적할 사람이 없는 영웅이라는 묘사가 계속해서 나오는데, 그런 것 치고는 첫 태블릿부터 너무 비호감이에요! 일단 결혼을 하기 전에 신부는 왕에게 먼저 바쳐지는 풍습도 터무니없는데,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길가메시는 그 어떤 신부도 온전히 신랑에게 돌려보내지 않는다'고 떠들잖아요! 소개에서도 보면 길가메시가 '폭군에서 현자로' 바뀐다고 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폭군이었을 줄이야! 그리고 엔키두도 웃겨요. 아니, 결혼식 초야권에 분개해서 찾아간 주제에 싸움 한 번 졌다고 바로 절친을 맺다니? 정말 고대인들이란.


 아무튼 그렇게 도원결의 비스무리한 걸 맺은 길가메시-엔키두는 젊은 시절 멋진 모험을 즐깁니다. 그리고 엔키두는 늙어서?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약해져서 죽고 마는데 그때부터 길가메시는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기 시작해요. 분명 젊은 시절에는 엔키두한테 "죽음이 뭐가 두렵냐" 큰소리 땅땅 쳤으면서 영생 얻고 싶어서 온갖 짓을 다 하는 걸 보면ㅋㅋㅋㅋ 암튼 뭐 어찌어찌해서 영생을 준다는 해초를 얻지만 (이 부분에서 바리공주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말도 안 되는 고난 미션이 주어지지만 끝까지 해내 얻어낸다는 점에서요) 그걸 몸 씻는 사이에 홀랑 뱀에게 뺏겨버리고 말아요. 그리고는 온갖 후회와 번민과 절망 속에서 이제 삶과 죽음을 뛰어넘은 통찰력을 가진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는 거죠.


 정말 신기한 게, 번역본으로 봤을 때는 잘 못 느끼겠는데 중간중간에 점토판 출토된 걸 그림으로 삽입했거든요? 어떻게 그걸 보고 이런 이야기를 짜 맞춰서 번역했을까 놀랍습니다. 정말 이 작대기 그어놓은 점토판에 이 이야기가 들어있는 거야 싶거든요. 그것도 완전 조각조각난 점토판을 하나하나 복구해가면서 복원한 이야기잖아요. 언어라는 건 정말 너무 매력적이고 대단한 매개체 같아요. 어떻게 그렇게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문화에 따라 다 다를 수가 있죠? 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 수많은 언어와 문자들이 새삼 너무 아까워요ㅠ



 이야기라기보다는 한 편의 논문을 감상하는 기분으로 즐겁게 봤습니다. 서문도 그렇고, 해석도 그렇고, 뒤에 연대표라든가 레퍼런스도 그렇고 굉장히 꼼꼼하게 잘 정리해 놓으셨더라고요. 괜히 고대 문명을 탐사하는 학자의 조수? 학생? 정도가 된 느낌이었어요ㅋㅋ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휘슬블로어 - 세상을 바꾼 위대한 목소리
수잔 파울러 지음, 김승진 옮김 / 쌤앤파커스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가끔 제가 (사회적 계급과 상관없이) 정말 온실 속 화초처럼 범죄에 노출되지 않고 곱게 자랐구나, 나는 정말 꽃길만 걸은 사람이구나, 싶어요. 수많은 나라에서, 수많은 일터에서, 수많은 가정에서 여성들이 범죄 혹은 범죄에 가까운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을 때 적어도 저는 그 당사자가 되지 않았으니까요. 저는 미투운동 촉발 이후에 터져나온 수많은 사건사고가 30년 전, 50년 전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 세대에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런 건 몇 세대 전에서나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 아닌가? 어떻게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날 수가 있지?


 심지어 수전 파울러는 밑바닥에서 (정말 말도 안되는 노력과 천재성으로) 아이비리그까지 아득바득 올라온 여성입니다. 정규 교육도 한 번도 받은 적 없던 사람이, 거듭되는 온갖 '더 이상은 방법이 없는' 상황을 온 생을 걸고 뚫고 나가는 과정을 보는 건 경이로울 지경이었습니다. 1)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음악 외의 다른 과목을 신청했다는 이유만으로 날아갔을 때, 2) 중요한 오디션을 앞두고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며 평생 꿈이었던 음악가의 길이 닫혀 버렸을 때, 3) 자살사고에 빠진 동기생을 도우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동기생의 담당 보호자가 되어 그의 자살을 막는 미션을 받고 모든 수업과 연구에서 배제되었을 때, 4) 학교의 부당한 대처에 항의했기 때문에 수천 달러를 들여가며 이미 취득한 학위를 박탈당했을 때, 5) 실리콘 밸리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자마자 성차별과 성희롱을 일삼는 직장 내 문화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받아야 했을 때 등등... 저라면 절망하고 포기해버렸을 순간들이 끝도 없이 등장하더라고요. 드라마도 이렇게 쓰면 욕 먹을 것 같아요. 너무 심한 불행 몰빵 서사라고요! 이건 실화라는 점만이 다를 뿐이죠.


 실리콘밸리의 성차별 문화가 그렇게 심각하고 만연한 줄 몰랐어요. 수전이 상사의 성차별을 들으면서 굉장히 공포스러워 하는 부분이 있는데, 정말 공감되더라고요. 자기가 퀴어인 건 (수전은 양성애자입니다) 숨길 수 있다, 자신의 조상 중에 유대계가 있다는 것도 숨길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여성이라는 건 숨길 수 없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숨길 수 없는 속성을 저 사람은 혐오한다. 어떻게 이걸 극복할 수 있단 말인가? 당연히 극복할 수 없죠. 잘못하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차별'이라고 하는 거고요. 우버 이전에 수전이 도대체 왜 그렇게 직장을 빨리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자꾸 옮겼는지 너무 절절하게 이해가 됩니다. 두 직장 다 도저히 멀쩡한 곳이 아니었잖아요.


 우버. 아, 우버. 한국에서는 비록 이미 독과점 되어있는 시장에 진입을 실패해서 망해버렸지만, 전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성공한 기업인 우버! 이미 대학+전직장1+전직장2에서 혹독한 경험을 한 수전은 우버에 입사하기 전에 나름대로 열심히 기업에 대해 알아보고 '여기라면 안심해도 되겠다' 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첫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대놓고 여자를 차별하는 임원을 만나게 되죠. 입사 첫날부터 자기랑 섹스하자는 암시를 끊임없이 메신저로 던지는 X 같은 상사놈을 인사과에 고발해보지만, 돌아오는 건 부당한 대우 뿐. 정말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다 주옥 같지만, 그 중에서도 전사 엔지니어에게 가죽 자켓을 사주면서 여성 엔지니어만 쏙 빼놓은 건... 뭐랄까, 치졸을 넘어서서 그냥 너무 없어보이지 않아요? 우버 정도 되는 대기업이 여성 엔지니어 가죽 자켓 하나를 못 사주는데 그 이유가 '여성 옷은 할인을 못 받아서'라니, 이게 말입니까 방구입니까.


 저는 이 책을 통해서 미국의 대부분의 기업들이 입사 계약서에 '비밀유지조항'을 넣고 있으며, 그래서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직장 내에서 겪는 범죄 및 부당상황을 외부에 알릴 수 없다는 걸 처음 알게 됐어요. 수전 파울러의 우버 고발글을 계기로 그 조항이 입사 계약서에서 빠지게 되었다는 것도요. 우버를 그만두고 나와서 해당 고발글을 쓰기 전까지의 갈등이 생생하게 나와 있는데, 솔직히 저 같아도 용기가 안 났을 것 같아요. 고발글이 엄청나게 이슈화되어 터지고 나서, 임원이나 주주처럼 나름 힘 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우버의 범죄적인 내부 문화를 알고 (비난하거나 바꾸려고 노력한 경우도 있었지만) 어쩄거나 외부에는 모두 침묵했다는 게 밝혀집니다. 거기서 다시 한 번 내부고발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했습니다. 개인이, 그것이 아무리 힘 있는 개인이라고 해도, 기업을 상대로 싸우는 건 쉽지 않죠. 내부고발자가 되는 건 많은 고통을 치러야 하는 일이고, 그걸 알면서도 뛰어드는 사람들 덕분에 이 세상은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하죠!


 물론 수전 파울러 혼자만 해낸 건 아닙니다. 본인도 책에 썼지만 우버에 대한 고발글을 썼을 때 조용히 묻힐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세상이 내부고발을 한 여성들의 말을 들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실명을 걸고 자기 피해를 밝히며 실제로 피해자가 있다고 외쳤어야 했던가요. 심지어 이제 겨우 말을 들어주기 시작했을 뿐이지, 잘못을 바로잡고 차별하는 놈들이 오히려 핍박받고 멸시받고 손가락질받고 직업을 잃고 패가망신하는 시대는 아직 멀었다는 느낌입니다. 그나마 성차별에 대한 인식이 있는 미국에서 이럴진대 한국의 수많은 블랙기업에서 비슷한 일을 겪으며 고통받는 피해자는 또 얼마나 많을까요. 그 모두가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 말도 안 되는 고난을 끊임없이 뚫고 나가는 수전 파울러의 모습을 보면서, 엄청나게 임파워링 됐습니다.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그녀의 천재성과 노력이 있기야 하겠지만 (예를 들어 3개월만에 초6 수준에서 아이비리그 대학생 수준으로 수학을 마스터하는 건 보통 사람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겠죠) 어쨌든 그녀도 몇 번이나 고꾸라졌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었고, 거의 포기해 손놓고 있었던 적이 있었잖아요. 정말 죽을 힘을 다해서 매달리면, 꿈꾸던 것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비스무리한 어떤 길이 생길 수도 있겠다, 나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봐야겠다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다큐로 읽어도, 자기계발로 읽어도, 사회고발로 읽어도, 에세이로 읽어도 훌륭한 책입니다. 추천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가의 편지 - 제인 오스틴부터 수전 손택까지
마이클 버드. 올랜도 버드 지음, 황종민 옮김 / 미술문화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는 글 쓰는 걸 별로 어려워하지 않고 그냥 쭉쭉 생각나는대로 써 내려가는 편인데, 이상하게 편지만큼은 그게 잘 되지 않더라고요. 누군가 특정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쓴다는 생각을 하면 뭔가 대화처럼 자연스럽고 흐름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쓰다보면 모든 문장이 다 제멋대로에 종잡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한때는 서간문 형식으로 된 소설을 열심히 탐독하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내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상대방이 자연스럽게 읽는 글을 쓰는지 궁금했거든요.


 <작가의 편지>의 소개를 봤을 땐 이거다! 싶었어요. 세계적으로 글 좀 쓴다~ 하는 작가들이 남긴 편지를 수십장 넘게 볼 수 있는 기회잖아요!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자연스럽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지, 그러면서도 억지로 꾸며낸 티가 안 나는지를 중점으로 열심히 봤습니다. 읽는 내내 즐거웠어요. 제가 절대로 쓰지 않을 문장이나 표현이 신기하기도 했고, 유명한 작가들이 남긴 사생활을 살짝 엿보면서 뭔가 좀 더 그 작가에 대해 많이 알게 된 기분도 들더라고요~ 좋아하는 작가님들이 여기저기서 출몰(?)하실 때마다 괜히 살짝 설레기도 했어요.


 편지라는 건 발신인도, 수신인도 명확하다보니 배경지식이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아무 맥락 없이 읽었으면 '이게 뭐야' 싶었을 내용이 꽤 있어요. 그래서인지 편집자는 친절하게도 왼쪽에는 실물 편지 사진을, 오른쪽 위에는 꼭지로 간략한 정보를, 오른쪽 아래에는 편지 번역을 배치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정보 꼭지가 맘에 들었어요. 몇 년도에 쓴 편지인지, 그때 이 작가의 상황이 어땠는지, 누구에게 무슨 목적으로 쓴 편지인지, 그리고 이 편지에서 눈여겨봐야 할 포인트는 뭔지 짚어주는데 그게 참 좋았어요. 사실 편지가 100% 진실은 아닌 경우가 꽤 있는데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거짓말을 하니까요) 그걸 알고 보니까 더 재밌더라고요.


 읽기 전에는 사실 러브레터를 제일 기대했는데, 의외로 제일 인상깊었던 건 아첨과 술수였어요. 역시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청탁도 잘 하는군... 같은 생각이 절로 들어요. <걸리버 여행기> 작가인 조너선 스위프트가 평생 궁정에서 한 자리 얻어보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안된 것까지는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최선을 다하는 과정을 막상 글로 만나니까 어쩐지 제가 다 민망한 기분이에요. 물론 굉장히 세련되고 재치 있는 유머로 가득찬 편지이긴 했지만, 목적이 너무 분명하니까 별로 멋져보이지 않더라고요. 실라 딜레이니가 한껏 자기를 '연극을 2주 전에 처음 보고 단숨에 새로운 희곡을 써내려간 순진한 천재 극작가'를 꾸며내는 것도 그렇고요. 뭐, 사람은 누구나 다 치졸하고 교묘한 짓을 할 때가 있으니까, 비난할 수만은 없지만요. 


 이건 좀 다른 소린데 <작가의 편지>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편집자가 고려시대 이규보의 편지를 알았다면 분명히 여기 실어줬을 거라고 생각해요. '금림의 버들에 의탁하길 기대하오니, 원컨대 긴 가지 하나를 빌려주소서' 어쩜 청탁을 해도 저렇게 멋들어지게 해서 후세에 길이길이 남았을까요. 문인들이란.


 여러모로 재밌는 책이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도 '일상'을 살고 견뎌야 했다는 건, 당연하지만 여전히 위안이 되는 사실이에요. 친구랑 싸우고 난 뒤에 화해를 청하고, 싫은 사람 뒷담화도 좀 하고, 자기가 잘못을 고해성사하면서 괜히 앓는 소리를 내고, 명절이라고 친척들 선물 사러 순회하고... 그저 그런 보통의 하루가 이들에게도 끊임없이 펼쳐졌다는 게 새삼 와 닿아서 좋았습니다. 저도 이런 일상들을 이렇게 재밌게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 참, 여기 서문에 뭔가 편집이 잘못된 것 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8페이지에서 9페이지로 넘어가는 문장이 이상해요. 뭔가 그 사이에 있던 문장을 실수로 날려버린 것 같은? 몇 번을 읽어봐도 이어지지 않더라고요. 출판사에서 이거 확인해줬으면 좋겠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의 은밀한 취향 - 왕과 왕비의 사적인 취미와 오락
곽희원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괜히 제목에 '은밀한'이 붙으니까 뭔가 숨어서 해야 하는 취향에 대한 것 같은데, 제목에 살짝 노이즈 마케팅 느낌이 있습니다. 읽어보면사실 놀라울 정도로 건전한 취향들이거든요ㅋㅋㅋ 꽃이나 식물 보는 걸 즐겨서 정원을 가꿨다거나, 고양이나 원숭이 같은 동물을 아꼈다거나, 판소리나 당구 같은 취미에 열을 올렸다거나... 술이나 마약, 도박에 빠진 것도 아니고 이만하면 그냥 평범한 취미생활이죠. 다만, 조선의 왕족들이 즐겼던 유희를 따라가다 보면 그 시대의 생활상이나 역사적 흐름이 보이는 게 꽤 신기하고 재밌는 지점이에요.


 예를 들자면, 조선 시대는 청자보다는 백자를 더 사랑하고 아꼈다! 이건 역사 시간에도 배우는 기초적인 내용입니다. 그런데 세조 시대에 중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전반에서 백자가 크게 유행했고, 조선 전반에 백자에 대한 선망과 수요가 커졌으며, 세조 또한 백자를 아꼈기 때문에 아예 백자 제작장이 설치되면서 아예 국가적인 사업으로까지 확대되었다는 건 몰랐어요. 또 세조는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만큼 정통성에 민감했기 때문에, 신하는 물론이고 세자와 같은 그릇을 쓰는 것조차 싫어했고 그로 인해 조선 왕실에서 계급에 따라 그릇을 달리 쓰는 일이 엄격하게 지켜졌다는 것도요!


 이런 식으로 전반적으로 '어떤 왕/세자/공주/부마는 무엇무엇을 좋아했다더라~'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취미가 언제 조선에 들어왔고 어떻게 유행하게 되었는지, 이게 취미인지 아님 고도의 정치적 제스쳐였는지 하는 걸 꼼꼼하게 훑어줍니다. 개인적으로 영조가 지난 시대의 충신들 초상화를 좋아해서 수소문해서 봤다는 게 좀 웃겼어요. 그냥 딱 들어도 그림 때문이 아니라 그림을 빙자해서 '너네도 이런 충신 되라 알았지?!' 하는 의도가 다분히 느껴지잖아요. 숙종처럼 그림 자체를 좋아해서 이것저것 모으고 즐기다 보니 정치랑 연관되더라 하는 것도 아니고ㅋㅋㅋㅋ


 취미와 놀이라는 것도 꽤나 시대와 문화를 많이 탄다는 느낌이에요. 예를 들자면, 음악을 즐기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지금은 힙합이나 랩이 유행이라면 그때는 판소리가 유행하는 그런 거요. 예술은 시대마다 문법이 있으니, 즐기는 데에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증거 아닐까요?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판소리가 있지만, 우리는 판소리를 흥선대원군이나 고종처럼 온전히 '재미'로 즐기지는 못하잖아요. 그때는 정말 세상 재밌는 놀이였을 텐데 말이에요. 우린 과거의 왕족들이 누렸던 모든 사치들을 고스란히 일상으로 누리고 있는 복 받은 세대라는 생각도 듭니다. 


 전반적으로 글이 깔끔하고, 정말 딱 교양서적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글쓴이들이 전부 역사 전공자에 관련 일을 하시는 분들이라, 사료도 꼼꼼하고 지금 실존해 남아있는지 아닌지도 짚어주시는 편입니다. 사극 보면서 역사 속 인물들의 뒷얘기 같은 거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재밌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