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터 아이 - A child born with algorithms=Test Ⅰ
김윤 지음 / 팩토리나인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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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보면 좀 뻔한 이야기입니다. 오류가 없는 멋진 신세계를 꿈꾸는 인간이 기술을 발전시키면, 거기에는 늘 생각지도 못했던 기묘한 독재와 전체주의의 감각이 따라오기 마련이니까요. 중간에 규석이 오류가 없는 세상 운운할 때 '아아 그 대사가 나와버렸군' 하고 생각한 사람이 저 뿐만은 아닐 거예요ㅋㅋㅋ 그건 이제 곧 펼쳐질 새로운 지옥도를 향한 복선이잖아요. 이런 클리셰가 어떻게 해결이 될지 구경하는 것도 재미죠.


 오류 없는 완벽한 세상에 대한 묘사가 확실히 예전에 비해서 더 구체적으로 와 닿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디에나 있을 수 있고 동시에 수천 수백 수만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뭔가를 조작하는 데 크게 시간이 들지 않는다는 묘사 같은 게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지는 지점 같은 것? 만약에 정말로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네트워크에 알파 같은 인공지능이 붙는다? 이건 뭐, 우리가 눈치채기도 전에 이미 모든 것은 알파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을 거예요.


 책 속에서 '알고리즘'이라는 워딩이 계속 등장하는데, 읽으면서 묘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특히 '기사를 읽는 생체를 분석해서 오래 머문 기사에 따라 자동적으로 투표가 된다'든가 하는 식으로 동작하는 알고리즘은 그 자체로 너무 모순적이라고 느껴졌어요. 그러니까 알고리즘으로 인해 끊임없이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나에게 익숙한 것만을 추천받고 받아들이게 된다면... 당연히 사람이 편향적으로 변하지 않겠어요? 취향이나 경험 혹은 인식이 폭넓어질 가능성이 제로가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심지어 이런 알고리즘이 미루어 짐작으로 (물론 꽤 정확도가 높겠지만요) 투표권 같은 중요한 권리를 행사한다? 으악. 상상만 해도 너무 싫어요.


 막판에 신에 대한 얘기도 잠깐 나오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신이 자유의지 없이 인간을 만들었다면?' 하는 가정과 잘 어울리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오로지 신(인공지능)이 정한 '옳은 길'로만 갈 수 있고, 그 외의 방향은 전부 차단된다면, 인간은 그냥 지금 20세기의 로봇과 마찬가지의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시키는 일만, 시키는 만큼 하는 존재. 뭔가 소리내거나 움직이거나 다른 사람과 만나거나 할 필요가 없는 존재. 세계를 굴러가게 하는 부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


 그런 완벽하게 엉망진창인 세계를 벗어나려면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오류를 저지를 것. 오류를 저지르게 할 것. 그러고보면 인간이란 여전히 오류투성이이기 때문에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동시에 세상을 한결 아름답게 만들기도 하는 괴상한 종족 같아요. 부디 제가 후자에 속하는, 아니 적어도 전자이면서 동시에 후자인 인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오류를 저지르지만, 저지르기 때문에, 그래서 더 나은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 동성이 그랬듯이요.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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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버드
밥 스택 지음, 이정아 옮김 / 우리동네책공장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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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는 후기입니다. 스포일러가 싫으신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 주세요


 자신이 느낀 바를 정확히 표현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마음은 문장으로만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기도 하고, 어떤 마음은 이미지로만 전달할 수 있는가 하면, 어떤 마음은 몸짓이나 행위로만 표현할 수 있기도 해요. 각각의 마음이 꼭 맞는 방법이 있다는 게 참 신기하면서도 멋지죠. 그래서 예술이 점점 더 세상을 풍요롭게 만드나봐요.


 <블루버드>는 일러스트로만 이루어진 동화책으로, 언어보다는 이미지로 더 많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작품입니다. 물론 스토리 흐름이라는 게 있으니, 독자들이 완전히 다른 해석을 하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같은 장면을 보면서도 모든 독자들이 주인공에게 자기만의 목소리를 불어넣게 될 겁니다. 누구나 인생에 한 번쯤은 원치 않게 혼자였던 순간이 있었을 테니까요. 온통 흑백인 세상에 교실에서, 길에서, 거리에서 혼자인 주인공에게 나를 투영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흑백인 세상에 어느 날 갑자기 파랑새가 나타나요. 그 파랑새는 이상하게도 '나'를 자꾸 따라다닙니다. 그게 참 기분이 좋다가도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숨어서 정말 파랑새가 '나'를 따라오는 게 맞는지 확인해요. 파랑새가 없어지자 자기도 모르게 실망하고, 다시 나타나자 괜시리 행복해집니다. 이 파랑새는 정말 여러 가지가 될 수 있겠죠? 저는 '누군가가 보내는 작은 관심'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SNS에 찍히는 좋아요 한 번일 수도 있고, 친구의 대단하다는 칭찬 한 마디일 수도 있고, 아님 그냥 지나가던 낯선 어른의 다정한 배려일 수도 있는... 그런 작은 날갯짓 하나가 우리를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게 해주는지!


 하지만 행복도 잠시, '나'는 무서운 곳에 잘못 들어가 곤경에 빠지고 그 와중에 파랑새는 그만 다쳐서 죽어버리고 말아요. 그리고 '나'는 그것을 하염없이 슬퍼하고요. 하지만 그 파랑새가 떠났다고 해서 상실만이 남는 것은 아닙니다. 그 자리에는 노랑, 빨강, 하양, 갈색 등 온갖 형형색색의 새가 날아들고 그 덕에 '나'는 하늘로 두둥실 떠오를 수 있게 돼요. 그리고 하늘로 떠오른 '나'의 손을 떠난 파랑새는 다시 생명을 얻어 돌아오고요. 이 부분이 얼마나 아름답고 시적인 일러스트로 가득 차 있는지 정말 감탄에 감탄이 나와요. 혼자였던 '나'를 위로하고 성장시키고 지켜줬던 그 모든 존재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가득 느껴진달까요?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이 읽기에도 좋은 동화입니다. 괜히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모든 어른들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작은 아이였던 때를, 혼자였던 순간을 기억한다면 세상이 더 풍요롭게 다정하고 아름다워지지 않을까요...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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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 남들보다 튀는 여자들의 목을 쳐라
모나 숄레 지음, 유정애 옮김 / 마음서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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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에게 '마녀' 하면 떠오르는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는 바로 "우리는 당신들이 불태우지 못한 마녀의 자손"이라는 슬로건입니다. 마녀사냥이라는 게 종교의 이름을 빌린 여성 학살이라는 걸, 사회가 용인하지 않았던 똑똑하거나 독립적이거나 능력 있는 여자들을 도려내기 위한 시도였다는 걸 아주 직관적으로 이해시키는 좋은 문구죠. 어떤 경우의 수라도,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완벽한 덫. 죽음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낙인. 마녀는 아주 오랫동안 공포의 대상이었다가, 이제는 저항과 페미니즘의 상징으로 변했습니다.


 페미니즘 도서를 읽을 때는 늘 그렇듯, 곳곳에 밑줄 치고 싶은 문장들로 가득합니다. 세계를 인식하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뭐라고 표현해야 할 지 몰라 속에만 묻어둔 이야기를, 정돈된 공적 발화로 듣게 될 때의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희뿌연 안경을 쓰고 거리를 걷다 갑자기 안경이 깨끗해진 기분? 세상이 더 또렷하고, 더 정확하고, 더 분명하게 보이는 기분이에요. 예를 들어 어째서 남자들만 나오고 여자가 나오지 않는 이야기는 이토록 자연스러운데, 반대로 여자들만 나오고 남자가 나오지 않는 이야기는 부자연스럽게 느껴질까? 어째서 여자 주인공은 반드시 사랑을 해야만 할까? 여기에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이렇게 답합니다. "인간의 자질 대부분이 '남성적인 것'으로 분류되고 그중 몇몇만이 '여성적인 것'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여성은 자신의 인생이 걸린 중요한 문제를 다른 존재에 투사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훨씬 더 많이 갖게 된다." 도대체 왜 여자들은 소년 이야기에 그렇게 쉽게 공감할 수 있는데, 반대로 남자들은 소녀 이야기에 도저히 공감할 수 없어 하는지, 공감이 얼마나 사회문화적인 교육에 따라 학습되는지 알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지요.



 저자인 모나 숄레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곳곳에서 프랑스가 얼마나 성차별적인지를 성토합니다. 하지만 저자가 한국에 살았다면 분명 한국의 성차별에 기함했을 걸요? 물론 우리 모두의 조국은 각자의 방식대로 성차별적이고 각자의 방식으로 여자를 착취하지만요. 프랑스가 단어에 설명을 붙이고, 여성의 공식적인 호칭을 나이에 따라 계급화한다면, 한국은 모든 경우에 여성에게 멸시하는 단어를 붙이고 어떤 경우에도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게 망치질합니다.'메갈'이나 '페미니스트'는 우리 시대의 '마녀' 낙인이죠. 거기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건 우스운 일입니다. 그냥 자기 의견이 있거나, 주관이 있거나, 아니 하다못해 그냥 여성이기만 해도 그 낙인을 피할 수가 없거든요. 애초에 피할 수 있는 낙인이 아니에요.

 


 능력있는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마녀라는 낙인에 대한 고찰이나, 임신과 육아라는 굴레에서 고통받고 착취당하는 사회 구조에 대한 고찰, 그리고 노화를 금지당한 존재로서의 고찰,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장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도 임신 중단권이 굉장히 현재진행형인 이슈이기 때문에 관심이 많이 가더라고요. 특히 낙태 반대론자들은 실제로는 생명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삶을 악화시키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라는 관점에 적극 동의합니다. 그치들이 정말로 생명의 소중함에 관심이 있었으면, 태어난 생명에게도 똑같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잖아요? N번방의 나라에서, 조두순의 나라에서, 손정우의 나라에서, 버닝썬의 나라에서 생명을 존중해서 낙태를 반대한다니 무슨 개소리에요? 태어난 애들이나 어떻게 잘 좀 보호해줘 보라지!


 여러모로 생각을 정리하기에 좋은 책입니다. 저자가 굉장히 온건한 편에 속하는 편이라 (예를 들어 결혼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노화에 대한 시각 같은 것) 부담없이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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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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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정말 너무 멋진 작품이에요!! 읽는 내내 어떻게 이렇게 자폐인의 시선으로 그의 세상을 그려낼 수 있는지 감탄에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습니다. 초반의 도입부부터 전개, 결말까지 독자에게 정말 끊임없이 '정상과 비정상'에 대해 생각을 하게 해요. 막 엄청난 과학 기술이 있는 미래 배경이 아니라서 SF라는 걸 잊어버리기도 하는데, 아직은 없는 특정한 기술을 통해 어떤 존재의 영속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정말 훌륭한 SF 소설입니다.


 '글'이라는 형식이 아니라면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은 요소가 곳곳에 있습니다. 만약 이게 영상 매체였다면, 자폐인들끼리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언어를 통하지 않고 교류하는 부분을 표현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각자의 규칙과 리듬을 존중하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자연스럽게 이해합니다. 우리는 한번도 해보지 않은 방식으로요. 머릿 속에서 잘못된 음악이 떠올라 운전을 하기 어렵다든가, 지금 현재 필요한 음악이 몸에 스며들게 하기 위해서 체육관에서 뜀뛰기가 필요하다든가, 언어가 아니라 패턴과 규칙으로 대화한다든가, 쿠션어나 인사 치레 같은 것으로 서로에게 '해석'이 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요소들은 영상 매체로 가면 나레이션이 아닌 이상 처리하기가 굉장히 힘들 것 같아요. 글이기 때문에, 글이라서, 온전히 이해되는 지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작가가 자폐증이 있는 아들을 키웠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정말 자폐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 존중을 갖고 있구나 하는 게 곳곳에서 느껴져요. 자폐증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지켜야 하지만, 자폐증이 없는 사람은 지키지 않는 수많은 예의와 규칙에 관한 내용을 읽고 있으면 그게 너무 끔찍하게 느껴지거든요. 예를 들어 주인공인 루는 누군가에게 나쁜 일이 있어났을 때 "괜찮아?"라든가 "유감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꼭 해야 한다고 교육받았는데, 정작 루가 나쁜 일을 당했을 때 그의 상사는 빈말로라도 그런 말을 하지 않고 그래도 괜찮습니다. 왜냐면 그는 자폐증 환자가 아니고, 그게 본인을 낙인 찍는 데 사용되지 않기 떄문이죠. 하지만 자폐증이 있는 사람은, 그게 뭐가 됐든, 사람들은 모든 특성을 자폐증으로 연결시키고, 한 번 찍힌 낙인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곳곳에서 그런 부당함이 느껴질 때마다, 정작 루는 분개하지 않고 다만 이해하기 어려워할 뿐인데 저는 굉장히 분개하게 되더라고요. 마치 루를 사랑하는 톰이나 루시아, 마저리처럼요.


 작품을 읽을수록 루라는 사람이 점점 더 좋아졌기 때문에, 결말 부분이 너무 슬펐습니다. 저는 사실 다른 사람은 다 치료를 선택해도 루만은 치료를 선택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남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제 예상과 다른 길을 가고.. 심지어 루의 경우는 그게 꽤 잘 풀린 케이스라고 보이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은 거예요. 제가 톰이라도 된 것처럼 슬펐습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그 사람이 아닌 거죠. 심지어 루 본인조차도 '예전의 루'라고 표현을 하잖아요. 누군가에게서 하나의 정체성을 떼어낸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거라는 게 너무 분명하게 보여요. 물론 '지금의 루'는 훨씬 더 만족하고 행복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예전의 루' 역시 만족하고 행복해진 걸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괜히 가슴이 아프고 속상합니다. 제 인생이 아니지만, 제가 사랑한 누군가의 인생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요ㅠ


 중간중간 오타가 있습니다. 초반에는 귀찮아서 그냥 넘겼는데, 중후반부에 가도 몇 개 있더라고요. 203페이지 셋째 줄 "형을 돕고 시죠"는 싶죠로 바뀌어야 하고, 453페이지 밑에서 열번째 줄 "너에게 대단한 가회군"은 기회군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 앞에도 두세 개 정도 오타가 있었는데 페이지 수를 안 적어놨더니 다시 찾기가 힘드네요. 


 읽는 내내 제가 얼마나 자폐증이라는 증세에 대해 무지한지, 정상이라는 사람들이 비정상이라는 사람들에 비해 얼마나 폭력적이고 일방적인지, 대부분의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꼭 흠결이나 어둠으로 치부되어야 하는 것인지, 계속 생각하게 되는 작품입니다. 곱씹을수록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책을 덮고 나서도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요! 작가가 노인을 주인공으로 썼다는 다른 작품도 꼭 찾아서 읽어 보고 싶어졌어요.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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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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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이 소설이 일상 추리물인 줄 모르고 집어들었어요. 제목과 표지의 홍보문구를 보고, 정말로 '신'이 등장하는 소설인 줄 착각했거든요. "그날도 우리는 신에게 물었다" 하는 문구에서 제가 떠올린 건, 어딘지 모르게 땅에 발 붙이지 않은 느낌을 주는 누군가가 아이들이 뭘 물을 때마다 무심하게 툭 툭 선문답을 하는 이미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신이라는 존재가 정말로 육체를 입고 극 속에 등장하는, 판타지와 스릴러를 섞은 소설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막상 극이 전개되면서 보여지는 건, 남들보다 좀 더 뛰어난 관찰력을 가진 셜록 홈즈 주니어입니다. 구도가 딱 그래요. 뛰어난 관찰력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탐정과, 그의 곁에서 그를 적극 지지하고 도우며 떄로는 그에게 사건에 개입할 명분이나 추진력을 만들어주는 조력자!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지 번역자도 '너무 일찍 홈즈를 만나버린 왓슨'으로 주인공을 평가하셨더라고요. 왓슨이긴 한데, 홈즈에게 동경과 질투와 분노와 원망과 맹목 등등의 감정을 복합적으로 느끼는 왓슨이거든요. 전체적으로 정신연령이 어리다는 게 확 보여요. 아무래도 나이가 초등학생으로 설정되어 있어서 더 그런 듯 합니다. 홈즈도 왓슨도 다 초등학교 5학년생들이에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 다시 봄까지. 5학년을 보내면서 겪는 사건들이 연작 형식으로 실려 있어요. 저는 소소하게 일상 얘기를 하던 첫 번째 봄과 여름의 초입 부분이 제일 좋았습니다. 특히 '왜 미술 시간에 야노가 가와카미에게 물통을 던졌을까?'라는 질문에 미즈타니가 왜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는지를 묻는 부분이요. 둘의 갈등은 당사자들끼리 이야기해서 잘 해결되었고, 딱히 악의에 찬 괴롭힘 같지도 않은데, 그렇다고 선생님이 말한 내용은 너무 가짜인 티가 나고... 그런 상황에서 제3자가 도대체 왜 그 진실을 궁금해하냐? 미즈타니는 그것을 '의분'이라고 표현합니다. 자기가 사태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이 올바른지 알고 싶은 상태라는 거죠. 여론의 상당수가 이런 감정에 기대고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꽤 정확한 표현이다 싶어요.

 


 아무래도 여름부터 등장하는 아동 학대 관련 이야기가 작가가 건드리고 싶었던 주제일 것 같은데... 저는 주인공이 너무나 순진한 온실 속 세계의 아이라는 점이 부각되는 바람에 오히려 그 부분은 좀 튕겨져 나왔습니다. 게다가 5학년 소년 둘이서 해결할 수 없는 규모의 문제이다보니, 결국 어른들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착한 아이'인 주인공의 시선 바깥에서 해결이 이뤄진다는 점이 별로였어요. 그래서 오히려 이 아이들이 훌쩍 자라고 난 뒤, 그러니까 고등학생이나 성인이 되었을 즈음을 배경으로 했으면 어떘을까 하는 상상을 해 봤습니다. 훨씬 더 활동의 폭이 넓어졌을 테고, 그에 따라 '신'이 멋지게 해결하는 비중도 훨씬 더 커지지 않았을까요?



 소소한 일상 추리물을 좋아하신다면, 혹은 홈즈-왓슨식 관계를 좋아하신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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