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가 어딨어? - 아이디어를 찾아 밤을 지새우는 창작자들에게
그랜트 스나이더 지음, 공경희 옮김 / 윌북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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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제목만 보고 책에 대해서 잘못 판단했어요. 제목과 부제만 봤을 때는 실용서에 가까운 내용인가 싶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그보다는 훨씬 더 담담하게 써내려간 공감에세이툰에 가깝더라고요. 빈 종이 위를 어떻게든 채우려고 노력하면서 오늘 하루도 아이디어를 쥐어짜내고(!) 있는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그런 작품 같아요. 다른 사람들도 다 나랑 똑같구나, 하는 순간에 찾아오는 안도감 같은 게 있잖아요. 멋진 작품을 만날 때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하고 감탄하면서 자신의 평범함에 조금 기가 죽기도 하고요. 그러다 알고보면 모두가 저처럼 스트레스와 불안에 시달리고, 계속해서 압박감에 짓눌린다는 걸 확인받는 건 조금은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힘이 있어요.




 제가 특히 많이 시달리는 건 '과거의 창의력 유령'이에요. 예전에는 그냥 앉아있기만 해도 머릿속에서 온갖 이야기들이 저절로 떠올랐잖아? 근데 지금은 왜 안 돼? 하는 제 자신의 목소리가 빈 종이 앞에 앉을 때마다 자꾸 떠올라요. 꼭 창작이 아니라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라서 야 예전 같았으면 이 자격증 따는 데 한달이면 충분했을걸? 하고 제가 자꾸 저를 비아냥거려요ㅠ 이건 제가 의식해서 하는 게 아니라서 답도 없지 말입니다.. 반면에 '미래의 창의력 유령'에 시달린 적은 별로 없어요. 영원한 작품을 만들지 않으면 아무도 널 기억하지 않을거야, 같은 목소리를 듣기엔 제가 영원한 작품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영원 같은 건 너무 멀잖아요.



 

 인생을 충분히 즐기면서 살고 싶은데, 제가 그렇게까지 막 유머감각이 있고 즉흥적이고 모험을 즐기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어서 왠지 손해를 보는 듯한 기분이 될 때가 있어요. 엉뚱한 돌발상황에도 거기서 즐거움을 찾아내고 더 멋진 경험으로 바꿔놓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게 참 쉽지가 않더라고요. 내리는 비에 그림을 망쳐도 오히려 거기서 더 다채로운 색을 찾아내는 그런 사람이 되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같은 상황도 유연하고 매력적인 대처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라면 그렇게 못 했을 상황에 대처하는 사람들 보면 너무 멋져요!


 

 이 책에 있는 수많은 카툰 중 <월요일 아침>이라는 제목을 가진 만화가 정말 공감의 끝판왕이었습니다. 전 이 책의 저자가 아마 전업 만화가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 만화를 보고서는 그래도 직장 경험이 아예 없는 사람은 아니구나 싶었답니다. 아니 누가 봐도 평범한 직장인이잖아요ㅋㅋㅋ 전 커피를 맛으로 즐기는 편이 아닌데도, 평일에 회사에 가면 무조건 커피를 마시거든요. 그건 사실 음료가 아니라 거의 무슨 잠을 깨게 해주는 포션 같은 느낌으로 들이붓는 거라.. 잠옷을 입고 커피에 다이빙했다가 넥타이를 매고 뛰쳐나오는 모습이 어찌나 너나우리의 모습인지요. 어휴. 그래도 이런 경험이 있으니 이런 만화를 그릴 수 있는 거라 애써 생각해봅니다..ㅎ..

 
 전체적으로 술술 잘 읽히고 재미있었어요. 다만 조금 주제와 어긋나는 것 같은 만화가 있기도 했고 (다이빙을 망설이다가 뭘 망설였지? 하고 멋지게 뛰어내리는 서사였는데 아무리 봐도 그 전엔 뛰어내리지 않는 게 맞는 상황이 펼쳐졌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어떤 아이디어를 찾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주거나 하지 않아서, 실질적인 창작에의 도움보다는 위로와 공감 위주로 가볍게 읽고 싶으신 분들에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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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죽음을 깨워 길을 물었다 - 인간성의 기원을 찾아가는 역사 수업
닐 올리버 지음, 이진옥 옮김 / 윌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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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역사를 좋아해요. 하지만 대개 제가 흥미로워 하는 역사는 기록 이후의 역사입니다. 고인류 시대나 신석기 시대 정도는 사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도 너무 적고, 거기에서 어떤 '이야기'를 읽어내는 게 힘들잖아요? 실제로 그랬는지 아닌지 전문가끼리도 아직 의견이 분분한 것도 많고요. 문명 이후의 기록된 역사는 재미있는 반면 고인돌이나 동물 벽화 정도의 역사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곤 했습니다. 저는 모든 것들의 시작을 알고 싶은 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잠자는 죽음을 깨워 길을 물었다>를 읽으면서 고고학이라는 게 이런 매력이 있는 학문이구나! 화석이라는 게, 유적이라는 게 이래서 신기하고 재밌고 엄청난 거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고요. 문외한에게도 이런 식으로 학문의 매력을 전파할 수 있다니, 저자는 정말 굉장한 필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이 사람이 들려주는 유적 속에서 엿볼 수 있는 그 찰나의 순간들이 너무나 평범하면서도 특별하게 느껴져서 어쩐지 뭉클해지는 기분이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어떤 가족이 길을 걷고 있습니다. 남자와 아이와 여자로 이루어진 무리입니다. 여자는 한 걸음 떨어져서 걷다가, 어느 자리에서 잠시 멈춰 주변을 살피고, 다시 무리 뒤를 따라 걷습니다. 바로 그 흔적이 아주 잠깐 동안 세상에 드러나는 거예요. 몇천 년, 아니 몇만 년에 가까운 과거에 누군가가 그렇게 걸었던 흔적을 지금 우리가 발견하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거, 너무 대단하고 멋지지 않아요?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 사람도 자기가 걸었던 한 순간이 그런 식으로 엄청난 시간 동안 흔적이 남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겠죠.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요! 부싯돌로 석기를 만든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앉았던 자리를 발견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너무 대단했어요. 누군가에게는 찰나의 일상에 불과했을 어떤 흔적이, 시간이 흐르고 후대에 오면서는 중요한 흔적이 되고 사료가 된다는 게 정말 매력적이었습니다.


 반대로 그때 당시에는 엄청나게 중요했을 수도 있는 (그러나 지금은 남겨진 자료가 없어서 도대체 누군지, 어떤 의미에서 중요했는지 알 수 없는) 이의 고인돌 무덤을 얘기하는 것도 '기억과 역사란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사라질 수 있는가' 하는 측면에서 흥미로웠어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평범한 일상은 수천 년이 지나도 남아있는데 (물론 이런 흔적은 아주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가 빨리 부식되거나 사라진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엄청나게 중요하게 여겼고 의미를 두었던 건 지금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게 다 사라져버렸다는 게, 정말 기억이란 혹은 역사란 타이밍과 우연의 총체적 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단히 유명하지도 않고 역사에 이름이 남지도 않은, 수만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을 것이고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 또한 아무도 남지 않게 될 것'이라는 명제가 뼈저리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지구라는 행성에 아주 잠시 머무르다 사라져 버릴 존재들이에요. 저자의 말대로 우리가 이 땅에 소유권을 주장하는 건 "마치 말을 귀찮게 하는 파리들이 말이 누구의 것인지를 두고 싸우는 꼴과 같"다는 데 동의해요.


 이처럼 우리는 이 지구를 찰나에 스쳐지나갈 것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 죽는다는 게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그래서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하면서 한 순간 한 순간 살아야한다는 생각을 엄청나게 했습니다. 저는 환생이나 부활 같은 건 믿지 않거든요.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해요. 수만 년 전 누군가가 그랬듯, 수천 년 전 누군가가 그랬듯, 역사에 남지 못하고 죽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생이 의미 없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어요? 


 고고학이라는 학문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저 한 점에 불과한 찰나를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게 저는 무척 마음에 듭니다. 제가 부디 너무 아등바등하면서 주변을 괴롭히지 않기를, 그리고 세상이 좋아지는 데 일조하지는 못하더라도 모두가 개같이 멸망하는 데 일조하지는 않기를 바라게 되네요.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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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위한 도시는 없다 - 처음 만나는 페미니스트 지리학
레슬리 컨 지음, 황가한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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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제목을 듣고 이해가 잘 가지 않았습니다. 건축이나 도시설계에도 성별로 불평등이라는 게 존재하는지, 아니 존재할 수는 있는 건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도시는 콘크리트로 쓴 가부장제다' 하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이지? 도시 설계에 가부장제를 강화시킬 수 있는 요소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싶었어요. 그래서 궁금함에 읽게 되었는데, 결론적으로 굉장히 만족스러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몰랐던 페미니스트 지리학이라는 분야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1장 [엄마들의 도시]부터 확연히 이해가 쉽습니다. 도시는 엄마들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이건 제가 최근 몇 년 동안 장애인 이동권과 함께 관심을 가진 이슈여서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대도시의 대중교통이나 건물 설계는 이동에 제한이 있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자전거, 휠체어, 유모차, 바퀴 지팡이 등 이동에 신체 외 다른 물품이 필요한 경우는 굉장히 제약이 많아요. 우리나라에서도 매년 장애인이 이동하다가 지하철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잖아요? 외국은 유모차를 옮기다가 계단에서 굴러서 어머니가 사망한 사건도 있더라고요. 도시의 구석구석이 이렇게 말하는 거죠. 야! 네가 움직이면 민폐잖아! 집(혹은 시설)에나 있어!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이동권을 박탈당하고 고립됩니다. 


 한국은 워낙에 땅덩어리가 작은 나라라서 아직 '교외'에 대해서 북아메리카처럼 적극적인 계급화 이동이 이루어지진 않은 것 같아요. 그저 제가 모를 뿐일 수도 있겠지만요. 어쨌든 제가 알기론 미국이나 캐나다처럼 중상류층 주류 인종들이 대거 교외로 이동하고, 넓고 개인적인 공간에서 각자 시간을 보내는 그런 문화가 아닙니다. 전 교외야말로 모두가 서로를 잘 아는 동네, 누군가 외부인이 등장하면 바로 눈에 띄는 폐쇄적인 동네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한편으로 여성에게 엄청나게 많은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을 부담시키는 구조라는 건 몰랐어요. 집은 넓어서 관리할 곳은 많고, 슈퍼나 쇼핑몰은 멀고, 학교나 회사도 멀어서 이동에는 반드시 차가 필요하며, 2명 이상의 자녀가 있을 때는 동선이 매우 복잡하고 힘들어진대요. 교외 자체가 여성의 무급 노동력을 갈아서 유지되는 시스템인 셈입니다. 도시는 교외보다는 학교/직장/마트/어린이집 등이 가까워서 (충분하진 않지만) 여성이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해준다네요.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혼자 있을 권리에 대해 말한 3장 [혼자만의 도시]도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화장실에 대한 부분이 놀라웠어요. 한국은 무료로 개방된 공공 화장실이 꽤 많고, 공공 화장실이라 해도 관리가 잘 되어 깨끗한 편입니다. 외국에는 화장실이 위생 및 가격에서 이용하기가 꺼려지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밖에 있을 때는 화장실을 가지 못해 고통을 겪는다는 거예요. 인도에서는 여학생들이 학교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리가 시작되면 학교를 아예 가지 않기도 한다네요;;; 정말 놀라웠습니다. 화장실은 사적인 공간인 동시에 공적인 공간인데, 이런 공간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서 밤이 될 때까지 대소변을 참아야 한다는 건 정말 비인간적이에요! 오늘날의 도시 환경에서도 화장실 접근권이 이토록 누리기 힘든 권리라는 게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어요.


 5장 [공포의 도시]는 여성들이 느끼는 공포가 비이성적인 것이 아님을 밝힘과 동시에 그래서 도시 설계는, 도시 환경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슬픈 건 이게 수학처럼 딱 떨어지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지리학과 학생들도 이 부분에서 낙담하거나 짜증을 낸다고 하던데, 환경적/설계적 해결책을 아무리 찾아도 모든 문제를 해결할 단 하나의 절대방법 같은 건 없다는 데 맥이 빠질 만도 합니다. 저도 그랬고요. 하지만 저자는 그래도 여성 친화적(일 뿐만 아니라 노인이나 장애인 등 약자 친화적)인 도시에 가까워질 희망은 있다고 얘기합니다. 문제가 있다는 걸 인식하고, 그걸 바꾸기 위해 당사자들의 말을 듣는 것부터가 그 시이 될 거라고요. 제가 사는 이 나라, 이 도시가 앞으로는 나쁜 사례가 아닌 (나쁜 사례의 예로 실려 있더라고요ㅠ) 좋은 사례로서 페미니스트 지리학 책에 언젠가 등장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언젠가는, 가능하겠죠?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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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을 위한 우정의 사회학 - 서로에게 힘이 되는 관계의 재발견
케일린 셰이퍼 지음, 한진영 옮김 / 반니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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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어릴 때 연인이나 부부라는 관계에 대해서 엄청난 환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온갖 버전의 '세기의 로맨스'를 보고 자라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어요. 정작 현실에서는 한 번도 그렇게 행복하고 서로를 미친 듯이 사랑하는 커플을 본 적이 없었는데도 (한국의 수많은 커플들은 거의 역할놀이 비스무리한 걸 하고 있잖아요?) 어릴 적부터 제가 봐온 모든 창작물이 사랑의 위대함을 노래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 역시도 언젠가는 그런 영혼의 짝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점점 커 가면서 사랑보다는 오히려 우정이 제가 꿈꾸는 사랑의 모습에 더 들어맞지 않나 싶어지는 거예요ㅋㅋㅋ 이 책은 꼭 저 같은 사람이 자신과 자신 주변의 여자들의 우정에 대해 말해주는 책이에요.


 저는 책에 등장하는 아미나투처럼 보험수령자에 친구를 적어놓은 건 아니지만, 내 죽음으로 혜택을 받는 누군가를 내가 마음대로 지정할 수 있다면 그 관계에 '친구'나 '동반자' 같은 개념이 들어가야 한다는 데는 적극 동의합니다. 세상에는 정말 남보다도 못한 가족이 수두룩뺵빽하잖아요. 아니면 가족이나 연인, 친척 같은 다른 관계가 없는 사람도 있고요. 진심으로 나를 위해줄 사람, 나를 위해 기꺼이 자기 인생의 일부분을 포기하거나 희생을 감내해줄 사람이 단지 혈연이나 성애로 엮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된 법적인 보증인이 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돼요?! 정말 한국에도 빨리 생활동반자법이 통과되어야 한다고 이 연사 힘차게 주장하는 바입니다! (갑분이지만 진심입니다)


 "저는 제 가장 친한 친구와 결혼했어요" 하는 멘트를 제가 좋아하는 영화 배우의 인터뷰에서 처음 읽었는데, 그때는 정말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보통 친구는 친구, 연인은 연인, 이렇게 떼어놓고 생각했던지라 그 둘을 묶는 사고방식 자체가 충격이었거든요. 늘 함께 있고 싶고 헤어지기 싫은 베스트 프렌드가 배우자가 된다면? 너무 멋질 것 같은 거예요! 그런데 그게 굉장히 미국적인 사고방식이고, 사실 그렇게 권장할 만한 관계가 아니라는 걸 듣고는 좀 놀랐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에게 모든 인간관계를 쏟아붓게 되면, 다른 관계들이 단절되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 사람과 틀어졌을 때 굉장히 힘들어진다고 해요. 서로에게 의존도가 너무 높아지는 것도 문제고요.


 읽는 내내 요즘 제 주변에서 저를 든든하게 지원해주고 있는 여자친구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사람들이 없었다면 도대체 인생을 어떻게 견뎠을까? 싶을 정도로 저에게 많은 위로와 힘이 되어주고 있거든요. 세상은 요즘도 우정보다는 사랑에 더 방점을 찍고, 아직도 온갖 창작물들이 영원한 세기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죠. 하지만 어떤 우정은 사랑보다도 더 강력하고, 사랑보다도 더 영원합니다. 아니, 어쩌면 우정이야말로 사랑의 궁극적인 형태일지도 모르겠어요. 내 선택으로, 어떤 구체적인 바람도 없이 그저 함께하는 관계잖아요.


 수많은 여성들이 자기 소울메이트에 대해, 단짝에 대해, 친구에 대해 얘기하는 걸 듣고 싶으신 분들께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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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는 좀 당황했습니다. 일본 작가가 쓴 글인데 배경이 대만이에요. 게다가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집어들었는데 딱히 미스터리가 나오는 것 같지도 않은 겁니다. 살인사건이 나오긴 한데, 그 범인이 누구이고 그 사건의 여파가 무엇인지 쫓아가지도 않거든요. 그보다는 개인과 가족의 삶에 집중했을 뿐인데 격동의 근현대사를 쫘르르 훑게 되는 역사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미스터리의 작법에도 꽤나 충실합니다. 분명하게 던져진 힌트들이 있어서 '어? 이 부분?' 싶은 떡밥들이 나중에 차곡차곡 수거돼요.


 확실히 한국뿐만 아니라 대만이나 중국 역시 격동과 격변의 근현대사를 보냈다는 걸 읽는 내내 느꼈습니다. 사실 70~80년대의 대만이라고 다 그렇지는 않겠고, 주인공인 예치우성의 집안이나 환경이 좀 더 거칠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완전 사회 하층민 쪽이라기보다는 서민 쪽에 가까운 느낌이고, 시대가 시대인만큼 모두가 폭력과 야만에 익숙한 시대라는 것을 감안하긴 해야겠지만요. 전쟁에 휘말린 말단 병사의 손자가 주인공이니 뭐 대단히 혜택받은 환경이 아닌 건 확실하죠.


 대만(국민당)-중국(공산당)이 서로 죽고 죽이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아무래도 한국전쟁 생각이 안 날 수가 없더라고요. 오늘은 국민당이 쳐들어와서 마을 모두를 죽이고, 그 다음 날은 공산당이 와서 그 복수를 한답시고 민간인들까지 싹 다 쓸어버리고, 딱히 대단한 이념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적당히 나에게 '먹을 걸 주는' 쪽에 붙어서 그게 그대로 국적과 소속이 되고... 한국에서도 흔하게 벌어진 일이잖아요. 복수가 복수를 낳고, 폭력이 폭력을 부르는 것도 너무 익숙한 얘기라 씁쓸하더라고요.


 이 소설 속 문장들이 너무 생생하게 번들거리는 땀방울과, 비릿한 피냄새와, 초조하게 빙글빙글 돌며 기싸움 하는 깡패들과, 시끄러운 시장 골목의 소음을 묘사하고 있어서 감탄했습니다. 어쩜 이렇게 글에서 냄새와 소음이 배어나올 것 같은지! 개인적으로 뒷골목의 거친 마초들의 인생사 같은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도 굉장히 몰입이 잘 됐어요. 다만 문화 차이? 같은 것 때문에 신기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꽤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의형제'라는 개념은 사실 한국에서는 거의 없잖아요. 의형제의 의형제도 내 형제다! 내 의형제가 부탁했으니 내가 모르는 사람이지만 난 목숨을 걸겠다! 하는 부분은 피부로 와닿고 그런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뭐랄까, 삼국지에서 도원결의 보듯 좀 신기하게 보게 돼요ㅋㅋㅋ


 '나는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혹은 '나는 이미 사람을 죽였다'의 시대를 건너온 사람의 이야기를, '너 사람 죽일 수 있어? 그렇게 살거야?'의 시대의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현재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의 서술이기 때문에 이미 결말을 아는 거나 다름없는데도, 어떤 부분에서는 일이 잘못될까봐 조마조마하면서 봤어요. 크고 작은 미스터리가 중첩되어 있어서 생각지도 않았던 부분에서 뒤통수 맞게 되는 부분도 여럿 있고, 여러 장르를 다양하게 오가면서 시침 떼는 솜씨도 일품입니다. 나오키상-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일본 서점 대상 한꺼번에 받았다고 하는데 확실히 그럴 만한 작품이에요. 초반에 익숙하지 않은 중국 이름과 관계도를 견딜 수만 있다면, 정말 재미있습니다! 추천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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