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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죽음을 깨워 길을 물었다 - 인간성의 기원을 찾아가는 역사 수업
닐 올리버 지음, 이진옥 옮김 / 윌북 / 2022년 7월
평점 :
저는 역사를 좋아해요. 하지만 대개 제가 흥미로워 하는 역사는 기록 이후의 역사입니다. 고인류 시대나 신석기 시대 정도는 사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도 너무 적고, 거기에서 어떤 '이야기'를 읽어내는 게 힘들잖아요? 실제로 그랬는지 아닌지 전문가끼리도 아직 의견이 분분한 것도 많고요. 문명 이후의 기록된 역사는 재미있는 반면 고인돌이나 동물 벽화 정도의 역사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곤 했습니다. 저는 모든 것들의 시작을 알고 싶은 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잠자는 죽음을 깨워 길을 물었다>를 읽으면서 고고학이라는 게 이런 매력이 있는 학문이구나! 화석이라는 게, 유적이라는 게 이래서 신기하고 재밌고 엄청난 거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고요. 문외한에게도 이런 식으로 학문의 매력을 전파할 수 있다니, 저자는 정말 굉장한 필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이 사람이 들려주는 유적 속에서 엿볼 수 있는 그 찰나의 순간들이 너무나 평범하면서도 특별하게 느껴져서 어쩐지 뭉클해지는 기분이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어떤 가족이 길을 걷고 있습니다. 남자와 아이와 여자로 이루어진 무리입니다. 여자는 한 걸음 떨어져서 걷다가, 어느 자리에서 잠시 멈춰 주변을 살피고, 다시 무리 뒤를 따라 걷습니다. 바로 그 흔적이 아주 잠깐 동안 세상에 드러나는 거예요. 몇천 년, 아니 몇만 년에 가까운 과거에 누군가가 그렇게 걸었던 흔적을 지금 우리가 발견하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거, 너무 대단하고 멋지지 않아요?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 사람도 자기가 걸었던 한 순간이 그런 식으로 엄청난 시간 동안 흔적이 남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겠죠.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요! 부싯돌로 석기를 만든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앉았던 자리를 발견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너무 대단했어요. 누군가에게는 찰나의 일상에 불과했을 어떤 흔적이, 시간이 흐르고 후대에 오면서는 중요한 흔적이 되고 사료가 된다는 게 정말 매력적이었습니다.
반대로 그때 당시에는 엄청나게 중요했을 수도 있는 (그러나 지금은 남겨진 자료가 없어서 도대체 누군지, 어떤 의미에서 중요했는지 알 수 없는) 이의 고인돌 무덤을 얘기하는 것도 '기억과 역사란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사라질 수 있는가' 하는 측면에서 흥미로웠어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평범한 일상은 수천 년이 지나도 남아있는데 (물론 이런 흔적은 아주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가 빨리 부식되거나 사라진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엄청나게 중요하게 여겼고 의미를 두었던 건 지금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게 다 사라져버렸다는 게, 정말 기억이란 혹은 역사란 타이밍과 우연의 총체적 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단히 유명하지도 않고 역사에 이름이 남지도 않은, 수만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을 것이고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 또한 아무도 남지 않게 될 것'이라는 명제가 뼈저리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지구라는 행성에 아주 잠시 머무르다 사라져 버릴 존재들이에요. 저자의 말대로 우리가 이 땅에 소유권을 주장하는 건 "마치 말을 귀찮게 하는 파리들이 말이 누구의 것인지를 두고 싸우는 꼴과 같"다는 데 동의해요.
이처럼 우리는 이 지구를 찰나에 스쳐지나갈 것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 죽는다는 게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그래서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하면서 한 순간 한 순간 살아야한다는 생각을 엄청나게 했습니다. 저는 환생이나 부활 같은 건 믿지 않거든요.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해요. 수만 년 전 누군가가 그랬듯, 수천 년 전 누군가가 그랬듯, 역사에 남지 못하고 죽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생이 의미 없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어요?
고고학이라는 학문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저 한 점에 불과한 찰나를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게 저는 무척 마음에 듭니다. 제가 부디 너무 아등바등하면서 주변을 괴롭히지 않기를, 그리고 세상이 좋아지는 데 일조하지는 못하더라도 모두가 개같이 멸망하는 데 일조하지는 않기를 바라게 되네요.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