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인 에어>를 처음 읽은 건 아마 초등학교 3학년? 그때쯤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판본이나 번역이 당연히 달랐을 테니 아마 좀 요약된 버전이었을 텐데, 그때도 엄청 몰입해서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나요. 그때까지는 저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스스로나 주변으로부터나 "예쁘지 않다"고 묘사된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거든요. 더군다나 로맨스가 있는 소설에서 말이죠! 미남미녀들만 가득한 세계에서 조용하고, 창백하고, 고집스럽고, 고분고분하지 않으면서, 지적인 여주의 등장은 정말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넘 좋았어요.
그 후로도 몇 번 읽긴 했는데,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나온 버전을 다시 찬찬히 읽으면서 생각한 게 제가 은근히 큼직한 줄기만 기억하고 세세한 설정은 다 잊어버렸더라고요. 대충 '선교사 부인으로 데리고 갈랬는데 제인이 거절함' 정도로 기억하고 있던 사건이 그렇게까지 많은 분량과 끊임없는 기싸움으로 점철되었을 줄이야!ㅋㅋㅋ 로체스터도 어느 덧 제 안에서 도둑놈 같은 이미지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는데, 보다보니 주저리주저리 말이 어찌나 많은지! 어휴, 이미 속내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입장에서 제인이 그놈이랑 사랑에 빠지는 걸 지켜봐야만 하는 게 어찌나 속이 터지던지요.
마냥 즐겁고 재미있게, 주인공을 응원하면서 읽을 수 있었던 어린 시절과 달리, 이미 다 커서 읽다보니까 비판적인 의견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싶습니다. 일단 필연적으로 치사함을 품고 있을 수밖에 없는 구석이 있잖아요? 원칙과 사랑 사이에 고뇌하던 제인이 결국 로체스터를 떠나버리는데, 원칙만을 강요하는 사람을 만나 힘들어하던 찰나에 돌아와보니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애물은 (하늘의 도우심으로) 모두 사라져있더라, 라니 이 얼마나 편리합니까. 심지어 그 장애물이라고 불리는 대상은 멀쩡하게 살아있으면서 남편에게 감금된 여성인데, 그 사람의 목소리는 책에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잖아요. 그냥 로체스터가 악녀라고 했다~ 미쳤다고 했다~ 그러니 악녀이고 미친 거고 로체스터가 사기 결혼 당한 건 확실한데 다만 그래도 여전히 중혼은 불법이니 안된다 뭐 이 정도 수준이잖아요. 버사 메이슨이 차별받던 인도 쪽 태생이라는 말이 있던데, 아무래도 당시의 인종 차별적인 시선이 없다고 볼 순 없겠죠.
<제인 에어>의 결말이 해피엔딩인 이유는 결국 로체스터와 제인이 동등해져서입니다. 그런데 둘이 동등해지기 위해서는 로체스터에게 그 정도의 흠결이 필요했어요. 둘은 서로를 처음부터 진심으로 사랑했을지 몰라도, 사회적으로 둘이 맺어지기 위해서는 로체스터가 도덕적으로 굉장히 큰 잘못을 저질러서 일단 제인과의 관계에서 약자가 되어야 했고, 또한 주변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게 살아있는 아내가 죽어줘야 했고, 그리고 제인에게 돈이 생겨서 '남자 덕에 팔자 핀' 느낌도 지워야 했고, 기타등등.. 암튼 작가가 부지런히 장치들을 깔아놓은 덕분에 둘이 결국 동등해져서 마음 편한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보니까 상당히 작위적인 냄새가 강하긴 하지만, 그때 당시로서는 이 정도의 장치가 있었어도 어쨌거나 남녀 주인공이 동등한 입장에서 사랑한다는 게 엄청 신선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보통은 로맨스 소설로 많이 읽지만, 미스터리 소설로 봐도 꽤나 재밌어요. '누가 봐도 오해할 수밖에 없게끔' 판이 돌아가는데, 그 와중에 충실하게 저택에 비밀이 있고 제인만 그걸 모른다는 떡밥을 꾸준히 뿌리거든요. 하지만 독자들은 제인이 서술하는 대로만 읽게 되니까, 아무래도 처음 읽다 보면 하이라이트의 그 순간까지는 별다른 방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한 대 얻어맞는 거죠! 비밀을 이미 알고 있는 입장에서도 교묘하게 말을 잘 돌리고, 이리저리 회피 잘 하다가 딱 걸리는 느낌이라 쾌감(?)이 있습니다ㅋㅋㅋ 기만한 게 괘씸한 만큼 나중에 제인이 로체스터 마음고생 시킨 것도 마음에 들고요.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말하면 사이다 감성이 좀 있죠ㅋㅋㅋ
고전 로맨스 소설 하면 '제인에어 vs 폭풍의 언덕 vs 오만과편견' 이렇게 셋 중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에 따라 그 이후로의 취향이 결정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하나의 대명사화 된 작품인데, 다시 읽으니 여러 가지 부분에서 어릴 때와는 다르게 새롭게 발견하거나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좋더라고요. 좋은 소설이 늘 항상 그렇지만요!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