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괴담 스토리콜렉터 104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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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을 처음 읽은 이후에, 미쓰다 신조의 책은 항상 읽고 있어요. 미스터리와 호러를 결합한다는 발상과 그 아이디어를 녹여낸 이야기들이 저에게는 너무나 천재적으로 느껴져서 매번 읽을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작가 중 하나입니다. 미스터리는 논리적으로 접근하죠. 하지만 호러는 정반대로, 완전히 비논리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전해내려오는 무서운 이야이가 으레 그렇듯이 원인이 있고, 그것을 막을 방법도 있고, 결과적으로 그것을 막아내기도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왜?'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아무도 제대로 답해줄 수 없어서 무서운 것. 저는 그것이 호러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알 수 없는 것'. 미지라는 이름의 공포죠.



 논리적인 장르와 비논리적인 장르를 결합해 둘 모두를 만족시킨다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인데, 미쓰다 신조는 그것을 꽤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아요. 모든 작품이 매번 소름끼치게 무섭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쩐지 뒷 얘기를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고 싶은 그런 찝찝함? 씁쓸함? 같은 느낌은 주거든요. 이번 <우중괴담>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에요. 작가 '나'가 여기저기서 들은 얘기들이 따로따로 펼쳐집니다. 그러다 마지막에 그 모두를 낚아서 하나의 궤로 이어 줘요. 그러면서 어쩐지 작가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듯한, 작가 시리즈의 계보를 잇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공간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어떤 공간에서만 가능한 살인이나 미스터리에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라, 미스터리 중에서도 관 시리즈나 집 시리즈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않습니다. '나'와는 정반대죠. 그래서 첫 번째 이야기 <은거의 집>이나 세 번째 이야기 <모 시설의 야간 경비>가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 두가지 이야기는 공간을 상상하면서, 그 공간에서 화자가 점점 더 몰리고 있다는 느낌을 확실히 받으면서 읽어야 더 쫄리는(?) 작품인데, 저는 그 공간을 제대로 상상할 수가 없거든요. 그냥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가 않아요.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미지화 되지 않으면 생각보다 그렇게까지 크게 무섭지 않거든요. 그래서 그냥 으음 이런 이야기구나, 하고 말게 돼요.


 반면에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이미지, 예를 들어서 문 앞에 서 있는 어떤 사람의 모습 같은 요소가 개입되면 오싹하면서 갑자기 확 무섭게 느껴집니다. 재밌었어요. 그래서 저는 <부르러 오는 것>을 가장 즐겁게(?) 읽었습니다. 여기서도 괴담이 펼쳐지는데, 두 가지 이야기가 섞여 있어요. 하나는 경찰관이셨던 아버지가 논리적으로 풀어낸 '정답' 버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정답이 석연치 않다고 생각하는 '괴담' 버전입니다. 항상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빠져나갈 설명을 주면서도 어딘가 미묘하게 딱 들어맞지 않는 느낌을 주는, 이런 게 바로 미쓰다 신조만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여름 장마철에 읽었으면 더 좋았을, 비 오는 날에 대한 이야기를 끝으로 마무리됩니다. 덥고 습하고 비 내리는 여름밤, 혼자서 읽으면 정말 분위기가 끝내줬을 텐데! 늦가을이라 타이밍이 살짝 아쉽습니다. 내년 여름에 맥주 한 잔 옆에 놓고 다시 읽어볼까봐요~ 딱 맞는 시간과, 장소와, 분위기 속에서 읽으면 책이 더더욱 재밌잖아요:)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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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이야기 전달자 - 2022년 뉴베리상 100주년 대상 수상작 오늘의 클래식
도나 바르바 이게라 지음, 김선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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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가 있습니다! 스포 없이 쓰려고 했더니 정작 제가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을 뭉뚱그려 써야 해서 후기가 너무 애매해져 버리더라고요. 최대한 직접적이지 않게 쓰려고 노력했으나, 눈치가 빠른 독자분들이라면 이 정도의 힌트만으로도 '흠 그렇게 되겠군' 하고 짐작해버릴 게 너무 확실합니다. 스포 없이 읽고 싶으시면 뒤로 가기를 눌러주십쇼!!


 

 아.. 무서웠습니다. 정말 무서웠어요! 제가 읽었던 그 어떤 SF보다 끔찍했습니다. SF라는 게 결국에는 그 모든 과학기술의 눈부심 뒤에서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가' 혹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장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우리 신체를 조금씩 로봇으로 대체하기 시작한다면, 어디서부터 인간이고 어디서부터 로봇인가? 혹은 감정을 가진 로봇을 그저 로봇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등등의 이야기를 하는 장르잖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을 좀.. 극한 상황으로 내모는 경우가 많고요. 인류가 멸망했다거나,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인간을 지배한다거나, 나만이 온전한 진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거나...


 그래서 어느 날 주인공이 어떤 재앙으로 인해 지구도 잃고, 가족도 잃고, 심지어 인류도 거의 다 잃고 혼자가 되고 말았다- 여기까지는 꽤 익숙한 전개였습니다. 우리가 꿈꾸던 모든 미래는 산산조각 나 있고, 인류는 계획할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던 변수로 인해 멸망 일보직전이고, 주인공은 홀로 거대한 시스템과 싸워야 하고... 하지만 그 와중에 서로를 위한 사랑이나 희생을 묘사하는 방식이 너무 슬펐어요. 침대맡에 두고 자기 전에 읽다가 눈물이 너무 계속 나서 결국 멈춰야 했을 정도로요. 주인공 페트라를 아꼈던 사람 혹은 페트라가 아꼈던 사람이 서로를 위해 어떤 것까지 감수했는가를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납니다. 


 벤 같은 사람만 해도 그래요. 사실 거의 모르는 낯선 이에 불과했는데, 페트라를 위해 헌신했잖아요. 자신이 보살펴야 하는 어린 아이를 지켜주겠다는 의지로 죽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그의 다정한 선의를 생각나면 자꾸 울컥하게 됩니다. 나는 여기서 죽을 테지만, 그래도 너를 위해 최선을 다할게. 너를 지켜줄게. 하는 그 마음이 절절히 느껴져서요. 심지어 벤 입장에서는 자신이 뭘 포기하고 어떤 희생을 감내했는지 아무도 몰라줄 것이 100% 확실한 상황이었잖아요. 보답받지 못할 걸 알면서 자신의 모든 걸 바치는 숭고함. 저는 이런 서사에 약해요.. 이런 사람들이 언제나 인류를 한 발짝씩 더 위쪽으로 끌어올렸다고 생각합니다ㅠ



 이야기에 과몰입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사실 소설은 과몰입하는 맛으로 읽는 거 아니겠습니까? 책의 끝자락쯤 되니까 그때부터는 거의 휴지를 옆에 두고 눈물을 닦아가며 읽어내려갔던 것 같아요. 이야기의 힘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소설 읽을 시간에 자기계발서를 읽으라는 사람이 여전히 많죠) 언제나 목적과, 효율과, 정답만 있는 사회가 얼마나 끔찍한지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합니다. 소설 속 유령새우들이 그런 것처럼요. 하지만 아무리 세뇌와 교육으로 억눌러놔도, 모든 생명체에게는 각자의 개성과 의지와 생각과 신념이 있고 그건 막을 수가 없어요. 바로 그 덕분에 인류가 절멸하지 않고 굴러가는 거겠지요.


 아 정말 재밌었는데 제가 맛있는 부분을 다 망쳐버리면 안되니까 꾹 참겠습니다. 한 번 읽어봐주십쇼.. 정말 재밌습니다.. 인간의 선의와 다정함의 힘을 믿는 사람이라면 <마지막 이야기 전달자> 꼭 봐.. 두 번 봐..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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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석 기차 여행 당신을 위한 그림책, You
다니 토랑 지음, 엄지영 옮김 / 요요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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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가끔 동화책에 나오는 일러스트가 너무 좋아서, 권장나이와는 상관없이(ㅋㅋ) 동화를 소장하곤 합니다. 어른용으로 나오는 책은 대부분 일러스트가 많지 않잖아요. 표지 정도? 그런데 워낙 잘 그리시는 작가도 많고, 보는 순간 '꽂히는' 그림도 많아서 가끔 북페어 같은 곳에 가면 동화책 세션에서 실컷 구경하게 된다니까요! 다채로운 색감, 따뜻하고 다정한 이야기, 작가의 개성이 한껏 담긴 그림체가 어우러져서 너무 멋진 작품들이 많아요. <일등석 기차 여행>도 표지를 보고 반해서 당장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책이었습니다.


 전 정말 이 책의 표지가 대단히 멋지다고 생각해요. 겉표지가 하나의 창처럼 기능하면서, 마치 주인공이 기차 여행을 하면서 창 밖을 내다보는 구도가 됐잖아요? 책 속에서 은근 주인공의 정면 얼굴을 보기 힘들다는 사실까지 합쳐저서 대단히 매력적인 표지가 됐어요. 클레멘티나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도 잘 드러난 것 같고요. 책을 읽다보면 주인공인 클리멘티나를 계속 쫓아가지만, 대놓고 그 속마음이 나오지는 않거든요. 우리는 클레멘티나의 행적을 통해서 그 속마음을 유추해볼 수 있을 뿐이죠. 또, 멋진 일러스트가 암시하는 다양한 상황과 은유를 통해서도요!


 주인공인 클레멘타니는 굉장히 아름답다고 묘사되고, 아버지가 있는 힘을 다해 상류층의 삶으로 올려주려고 애쓴 덕분에 우아하기까지 하다고 해요. 실제 그림으로 봐도 조용하고, 정적이고, 단아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신비함이 느껴지는 인물입니다. 재밌는 건 앞서 언급했드듯, 클레멘타니는 상당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게 그려져 있어요. 고개를 숙이거나, 모자를 쓰거나, 풍경 속에 묻혀 있습니다. 그녀가 정면으로 생생하게 표정을 드러내는 건 후반부 딱 한 장면 뿐이에요. 그 대비가 무척 근사했습니다. 


  '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 때문이기도, 지금 막다른 처지에 몰려 있는 클레멘타니의 개인적 상황 떄문이기도 할 텐데 전반적으로 어둡고 스산한 느낌의 배경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 안에서 주인공은 가족도, 집도, 목적지도 없는 여행을 하며 방랑 중인 처지죠. 거대한 배경 속에서 클레멘타니는 작고 사소한 존재 같은 느낌으로 묘사된 컷도 제법 있어요. 이 부분 역시 뒤로 가면서 클레멘타니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무엇일까'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면서 점점 달라지죠. 대비되는 부분이긴 한데, 전 앞부분의 그 압도적인 느낌도 좋았어요. 사실 가족이 있고, 집이 있고, 직업이 있어도.. 우리 개개인은 작은 존재들일 뿐이잖아요.


 

 세 번의 계절을 지나고, 세 명의 남자들을 스쳐지나가면서, 클레멘타니가 자기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을 찾게 되는 과정은 굉장히 전형적인 스토리지만 아름답고 풍요로운 일러스트와 함께 하다보니 지루하지 않아요. 동화를 읽으면서 '모든 게 다 망하는 시궁창' 같은 결말을 기대하는 이도 없을 테니 장르적으로도 기대를 훌륭히 충족시키는 작품입니다! 행복을 찾아 떠났으나 행복이 내가 찾는 모양이나 형태는 아니더라~ 그럴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금세 익숙한 형태의 행복을 찾는 게 어른이 된 후의 슬픈 점이네요ㅠㅋㅋㅋ 아직 그런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조카랑 같이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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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의 공식 - 욕하면서 끌리는 마성의 악당 만들기 어차피 작품은 캐릭터다 1
사샤 블랙 지음, 정지현 옮김 / 윌북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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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블이 흥하면서 어느샌가 '히어로'나 '빌런' 같은 용어가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어요. 이제는 모두들 '악당'이라는 말보다 '빌런'이라는 말에 더 익숙해진 것 같아요. 일상 생활에서도 나를 괴롭히는 직장 내의 이상한 사람을 빌런이라고들 많이 칭하더라고요. 현실의 빌런은 굉장히 사랑하기 어려운 존재지만, 적어도 이야기에서는 다릅니다. 잘 만들어진 빌런 하나는 열 명의 히어로도 못한 일을 손쉽게 해낼 수 있거든요. 서사를 생각하지도 못한 방향으로 굴러가게 하는 일 말이에요!!


 빌런과 히어로라는 용어가 아무래도 장르 소설에 자주 등장하다 보니 <빌런의 공식>에 등장하는 많은 예시 역시 장르 소설에서 가져왔더라고요. 그런데 조금씩 다른 모습과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지, 모든 이야기에는 당연히 빌런이 등장합니다. 갈등이 등장하니 당연한 거겠지만요.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자주, 가장 많이 떠올렸던 빌런은 <오만과 편견>의 미세스 베넷과 리디아 베넷이었답니다.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저 경박스럽고 생각 없는 두 사람을 싫어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 두 사람이 없었다면? 어떻게 리지가 다아시와 맺어질 수 있었겠어요? 그들에게 두 번째 기회가 오도록 사건을 일으킨 게 저 두 사람인걸요! 그런 걸 생각해보면 빌런은 정말 너무너무 싫어서 치가 떨릴 때조차 그 역할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책은 그런 빌런을 '제대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몇 가지 가이드라인을 꼼꼼하게 알려줍니다. 


 저자가 굉장히 신경써서 항목을 선정했다는 게 느껴져서 정말 좋았습니다. 빌런의 정신적인 상처나 문제를 만들어내는 챕터에서 특히 그랬어요. 그 전까지는 관점의 제시에 가까웠다면, 빌런의 정신 질환에 대해서는 굉장히 단호하게 목소리를 내는 게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특히 제대로 된 조사 없이, 이제까지 미디어가 그려왔던 방식 그대로 정신질환을 써먹는 걸 굉장히 경계하더라고요. 미디어는 나쁜 방식으로 차별에 대한 근거를 퍼뜨리잖아요.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보고 들었던 '가상의 이야기'에서의 악당을 현실에도 대입합니다. 그래서 조현증에 걸린 누군가를 닥치는대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로 설정하면, 누군가는 그걸 보고 조현병 환자들에 대해 잘못된 고정관념을 품게 돼요. 당연하죠. 그러니 빌런에게 정신적인 문제를 주고 싶을 때는 신중히, 제대로 된 정보를 통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완전 100프로 동의해요!


 각 챕터의 마지막마다 그 챕터에서 했던 핵심 내용들을 요약해놔서 다시 복습하기 딱 좋았습니다. 나중에 급할 때는 요약본만 봐도 될 것 같아요. 이미 읽어봤으니 뭘 뜻하는지 알잖아요~ 그리고 생각해볼 문제를 던져놔서 이 책에서 제시하지 않는,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른 장르와 이야기를 가져다 대입할 수 있게 한 것도 좋았어요. 아까 말씀드렸듯, 제가 가장 많이 떠올린 건 <오만과 편견>이었답니다. 요즘 그 고전을 다룬 연극에 빠져있거든요ㅋㅋㅋ 이미 알던 이야기를 이렇게 빌런이라는 요소 하나를 뽑아서 새롭게 해제해서 뜯어보는 건 또 다른 재미를 줘요. 여러분도 그냥 슥 넘기지 말고 꼭 해보시기 바랍니다!


 윌북에서 나온 작법 시리즈는 대체로 만족도가 높네요. 예전에 OO의 힘 시리즈도 좋았었는데, OO의 공식 시리즈도 좋아요. 시리즈를 쭉 다 읽고 같은 소설을 각 시리즈의 내용대로 요리조리 뜯어서 보면 그것도 무척 재밌을 것 같아요. 연달아 히어로의 공식과 사이드킥의 공식이 나온다고 알고 있는데, 나머지도 얼른 읽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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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인 에어>를 처음 읽은 건 아마 초등학교 3학년? 그때쯤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판본이나 번역이 당연히 달랐을 테니 아마 좀 요약된 버전이었을 텐데, 그때도 엄청 몰입해서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나요. 그때까지는 저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스스로나 주변으로부터나 "예쁘지 않다"고 묘사된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거든요. 더군다나 로맨스가 있는 소설에서 말이죠! 미남미녀들만 가득한 세계에서 조용하고, 창백하고, 고집스럽고, 고분고분하지 않으면서, 지적인 여주의 등장은 정말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넘 좋았어요.


 그 후로도 몇 번 읽긴 했는데,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나온 버전을 다시 찬찬히 읽으면서 생각한 게 제가 은근히 큼직한 줄기만 기억하고 세세한 설정은 다 잊어버렸더라고요. 대충 '선교사 부인으로 데리고 갈랬는데 제인이 거절함' 정도로 기억하고 있던 사건이 그렇게까지 많은 분량과 끊임없는 기싸움으로 점철되었을 줄이야!ㅋㅋㅋ 로체스터도 어느 덧 제 안에서 도둑놈 같은 이미지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는데, 보다보니 주저리주저리 말이 어찌나 많은지! 어휴, 이미 속내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입장에서 제인이 그놈이랑 사랑에 빠지는 걸 지켜봐야만 하는 게 어찌나 속이 터지던지요.


 마냥 즐겁고 재미있게, 주인공을 응원하면서 읽을 수 있었던 어린 시절과 달리, 이미 다 커서 읽다보니까 비판적인 의견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싶습니다. 일단 필연적으로 치사함을 품고 있을 수밖에 없는 구석이 있잖아요? 원칙과 사랑 사이에 고뇌하던 제인이 결국 로체스터를 떠나버리는데, 원칙만을 강요하는 사람을 만나 힘들어하던 찰나에 돌아와보니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애물은 (하늘의 도우심으로) 모두 사라져있더라, 라니 이 얼마나 편리합니까. 심지어 그 장애물이라고 불리는 대상은 멀쩡하게 살아있으면서 남편에게 감금된 여성인데, 그 사람의 목소리는 책에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잖아요. 그냥 로체스터가 악녀라고 했다~ 미쳤다고 했다~ 그러니 악녀이고 미친 거고 로체스터가 사기 결혼 당한 건 확실한데 다만 그래도 여전히 중혼은 불법이니 안된다 뭐 이 정도 수준이잖아요. 버사 메이슨이 차별받던 인도 쪽 태생이라는 말이 있던데, 아무래도 당시의 인종 차별적인 시선이 없다고 볼 순 없겠죠.


 <제인 에어>의 결말이 해피엔딩인 이유는 결국 로체스터와 제인이 동등해져서입니다. 그런데 둘이 동등해지기 위해서는 로체스터에게 그 정도의 흠결이 필요했어요. 둘은 서로를 처음부터 진심으로 사랑했을지 몰라도, 사회적으로 둘이 맺어지기 위해서는 로체스터가 도덕적으로 굉장히 큰 잘못을 저질러서 일단 제인과의 관계에서 약자가 되어야 했고, 또한 주변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게 살아있는 아내가 죽어줘야 했고, 그리고 제인에게 돈이 생겨서 '남자 덕에 팔자 핀' 느낌도 지워야 했고, 기타등등.. 암튼 작가가 부지런히 장치들을 깔아놓은 덕분에 둘이 결국 동등해져서 마음 편한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보니까 상당히 작위적인 냄새가 강하긴 하지만, 그때 당시로서는 이 정도의 장치가 있었어도 어쨌거나 남녀 주인공이 동등한 입장에서 사랑한다는 게 엄청 신선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보통은 로맨스 소설로 많이 읽지만, 미스터리 소설로 봐도 꽤나 재밌어요. '누가 봐도 오해할 수밖에 없게끔' 판이 돌아가는데, 그 와중에 충실하게 저택에 비밀이 있고 제인만 그걸 모른다는 떡밥을 꾸준히 뿌리거든요. 하지만 독자들은 제인이 서술하는 대로만 읽게 되니까, 아무래도 처음 읽다 보면 하이라이트의 그 순간까지는 별다른 방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한 대 얻어맞는 거죠! 비밀을 이미 알고 있는 입장에서도 교묘하게 말을 잘 돌리고, 이리저리 회피 잘 하다가 딱 걸리는 느낌이라 쾌감(?)이 있습니다ㅋㅋㅋ 기만한 게 괘씸한 만큼 나중에 제인이 로체스터 마음고생 시킨 것도 마음에 들고요.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말하면 사이다 감성이 좀 있죠ㅋㅋㅋ


 고전 로맨스 소설 하면 '제인에어 vs 폭풍의 언덕 vs 오만과편견' 이렇게 셋 중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에 따라 그 이후로의 취향이 결정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하나의 대명사화 된 작품인데, 다시 읽으니 여러 가지 부분에서 어릴 때와는 다르게 새롭게 발견하거나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좋더라고요. 좋은 소설이 늘 항상 그렇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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