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그들의 정치 - 파시즘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제이슨 스탠리 지음, 김정훈 옮김 / 솔출판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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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한국은 완전히, 의심의 여지 없이, 100퍼센트 파시즘이 득세하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 결과를 봐도 말할 것도 없고 일단 '우파'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극우 정당이 기득권을 놓치지 않는 나라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노키즈존이나 장애인 시위에 대한 인식도 그렇고, 날이 갈수록 시민사회 전반적인 의식 수준 자체도 그렇고.. 오히려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찾기가 어려운 나라죠. 자기가 파시스트인 줄도 모르는 파시스트들이 넘쳐나는 나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와 그들의 정치>는 한 구절 한 구절이 아주 그냥 심장에 콱 와서 박히는 그런 책이었어요. 읽는 내내 '이거 그냥 우리나라 얘기잖아' 하는 구절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몰라요. 이런 막장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니, 우리가 남들과 비슷한 속도로 망하고 있다는 걸 위안 삼아야 할지;;; 심지어 여기서 예시로 들고 있는 사례 중 상당수는 2010년 이후의 전세계 정치 이슈에서 가져온 거거든요? 미국, 미얀마, 헝가리, 터키, 러시아.. 저자가 한국 대통령선거를 알았다면 분명 거기서도 사례를 가져왔을 것 같아요ㅎ


인간은 자기가 편한 대로 생각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특권을 누리고 있는 자는 신경 써서 그것을 애써 자각하지 않으면 자기가 가진 특권을 생득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것을 책에서는 '위계'와 '피해자의식'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냥 자기가 순전히 운이 좋아서 남들보다 더 좋은 조건이나 환경을 누리는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고 거기에 꼭 하늘(또는 하느님 또는 신)이 우리를 선택했고 어쩌고저쩌고가 끼어 든다는 거죠.


그래서 자기 생각에는 당연히 자기가 누려야 하는 특권이 어느 순간 충족이 안 되면 피해자의식에 찌들어서 미쳐버리는 거예요! 심지어 자기가 누렸어야 하는 그 특권이 역사적으로 단 한번도 실현된 적이 없는 가짜 환상이라고 해도 말이에요. 예를 들어 '밖에서 열심히 일하고 돌아온 가장인 나를 돌보는 헌신적이고 아름다운 아내' 같은 개념이요ㅋㅋㅋ 하.. 정말 쓰면서도 너무 싫으네요... 모든 가부장주의, 제국주의는 위계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제일 꼭대기에서 같이 혜택을 누리던 인간들은 평등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 자기가 차별받는다고 느낀다는 거죠. 어디서 많이 본 얘기죠?


노동조합에 대한 얘기도 너무 뼈아팠습니다. 당장 얼마 전에 화물연대의 파업이 파쇄된 걸 지켜본 입장에서, 동료 시민의 노동조건에 그렇게까지 무관심하고 심지어 노골적으로 배척하는 지금의 이 한국 사회 분위기가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노동조합이 파시즘 정치가 발판을 얻는 것을 막는 장치가 된다는 말은, 반대로 말하면 노동조합을 꺾으면 파시즘 정치가 발판을 얻는다는 말과 일맥상통하잖아요? 실제로 모 대통령의 지지율이 올랐기도 했고요.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일을 하는데도 지지율이 오르다니! 하지만 왜 지지율이 오르는지도 책에 설명이 있더라구요. 쏘샏ㅠ)

저는 항상 좀 궁금했거든요. 예전이야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정보를 제대로 누리지 못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라서,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독재자나 파시스트를 지지할 수 있죠. 하지만 요즘은 아니잖아요. 다들 교육도 충분히 받을 만큼 받았고, 정보도 실시간으로 바로 공유되고요. 그런데도 왜 사람들이 언제나 이렇게까지 이기적이고 멍청한 선택을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 이유를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짚어주니까, 납득이 되면서도 살짝 기가 질리기도 하네요. 이걸 어떻게 바로잡지?

그런데 저보다 백 배는 더 고민하고 백만 배는 더 절망했을 저자는 마지막에 이런 문장으로 마무리 지었더라고요. "파시즘 신화에 현혹되기를 거부함으로써, 우리는 서로를 자유롭게 포용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결함이 있고, 우리는 모두 생각과 경험과 이해가 부분적이고 치우쳐 있다. 그러나 우리 중 그 누구도 악마가 아니다." 책을 덮은 순간부터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까지 수십 번을 계속 곱씹어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마주칠 수많은 파시즘에 이 문장 하나를 가슴에 품고 살고 싶어요. "그러나 우리 중 그 누구도 악마가 아니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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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셔 크로싱 - 소녀들의 수상한 기숙학교
앤디 위어 지음, 사라 앤더슨 그림, 황석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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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를 재해석하는, 더 정확히 말해서 동화의 뒷이야기를 재해석하는 이야기는 대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되지 않는다는 걸 전제로 깔고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타깃으로 삼는 독자층이 동화를 알지만 동화를 믿지 않는, 현실을 알아버린 어른들이라 그런 거겠죠? 이런 식의 접근은 결국 새로운 해석이 얼마나 신선하고 흥미로운지에 따라 성패가 갈리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체셔 크로싱>은 저에게 그야말로 즐거운 작품이었습니다. 보는 맛이 있었어요:)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 게일, <피터팬>의 웬디 달링,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 리델이 만난다? 그것도 다른 세계로 여행을 다녀왔다고 주장해 '분열성 정신병' 진단을 받은 10대 소녀들의 기숙 학교에서? 재미없을래야 재미없을 수가 없는 설정이잖아요. 이제는 더 이상 어리지도ㅡ 순진하지도 않은 3명의 소녀가 원작과 어떻게 달라졌을지 보는 것도 재미있었고, 서로 투닥거리면서도 한 팀이 되어가는 걸 보는 것도 좋았습니다. 3개의 세계관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것도 작가가 고심한 흔적이 보였어요.


다만 좀 슬픈 건, 다른 두 아이에 비해 앨리스가 너무 비호감으로 그려졌다는 거예요! 세 아이 모두 똑같이 비슷한 상황을 맞이했는데, 앨리스만 유독 경계심이 심하고, 타인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말재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려지거든요. 물론 비슷한 사건이나 상처를 가졌다고 해서 모든 이의 반응이 같지는 않겠죠. 어떤 사람들은 더 크게 슬퍼하거나 더 오래 분노합니다. 하지만 앨리스가 웬디를 처음 본 날 "원더랜드는 실제로 있지만 네버랜드는 미친 여자의 망상이니까."라고 상대를 후려쳤을 땐 정말 너무 슬펐답니다. 아니 세상 모든 사람이 안 믿어줘도! 너는 믿어줘야 되는 거 아니니?

하지만 처음부터 마음이 잘 맞고 바로 의기투합 할 수 있었으면 셋이서 도원결의를 하고 있지 또 목숨이 간당간당해지는 엉뚱한 모험을 하고 있진 않겠죠. 앨리스의 그런 비협조적인 태도와 그런 앨리스를 옆에서 계속 쿡쿡 찔러대는 웬디, 그리고 그 가운데서 한숨을 쉬면서 중재를 하는 도로시를 만들기 위한.. 큰 그림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하지만 앨리스가 좀만 더 예의와 배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앨리스를 사랑하는 독자의 소박한 바람..ㅎ..

3개의 세계, 3명의 히어로, 3명의 빌런이 합쳐진 이야기입니다. 서로 마음도 안 맞고 손발도 안 맞던 이들이 모여 팀플레이를 펼치는 장르는 언제 봐도 좋다니까요~ 그래서 이 뒤에 3명이 모여서 또 어떤 모험을 했을지, 뒷얘기가 궁금해지는 동화 뒤의 동화, <체셔 크로싱>입니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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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엣과 줄리엣 - 희곡집 에세이
한송희 지음 / 더퀘스트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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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재해석한 작품은 많잖아요~ 그래서 전 오히려 고전을 가지고 이리저리 2차 창작한 극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 '원작을 나는 이렇게 비틀었어요' 아무리 외쳐봤자 남이 만들어놓은 세계와 캐릭터에 기댄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줄리엣과 줄리엣>은 제목부터 딱! 컨셉이 와 닿으면서 와 너무 좋다 기대된다 했던 작품이었어요. 실제로 보니 기대만큼 좋아서 정말 연극 보는 맛을 느끼게 해준 공연이었습니다.



처음에 이 책이 나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대본집이 새롭게 나온다는 줄 알았어요. 그동안 나온 <줄리엣과 줄리엣> 희곡집의 경우, 공연장에서 파는 자체 엠디였다면 이건 출판사를 끼고 정식으로 나온 그런 MD인가보다 했죠. 그런데 책에 대한 소개를 보니 희곡집에 더해 이 연극을 만들면서 생각한 이런저런 얘기들까지 덧붙인 에세이가 아니겠어요? 와, 정말 궁금하고 재밌겠다 싶었습니다.


젠더퀴어 승려 캐릭터가 무척 흥미로웠는데, 그에 대한 캐스팅 얘기도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저는 사실 첨부터 의도하고 쓴 캐릭터인 줄 알았는데 작가는 엄청 고민을 많이 했더라고요. 한 캐릭터에 너무 많은 소수자성을 부여한 게 아닐까? 너무 생뚱맞은 캐릭터를 끼워넣은 것은 아닐까? 작품 뚜껑이 열리기 전 창작자의 마음으로 상황을 보니까 제가 관객일 때와 또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약간만 삐끗했어도 비판받을 여지가 있었다 싶어요. 다행히 잘 풀렸지만요! 게다가 지혜 배우의 젠더퀴어 승려 너무 멋있고 매력적이었거든요. 배우 본연의 매력과 캐릭터의 매력이 합쳐져서 완전 대만족이었어요~



제가 좋아하고 잘 아는 작품과, 배우와, 창작진들의 뒷이야기를 듣는 건 연극을 보는 것과 또 다른 즐거움을 줘요. 창작자의 의도와 고군분투가 작품 내에도 그대로 녹아있어서 제가 느낀 그대로일 때, 정말 괜찮은 작품을 만났다는 만족감이 있습니다. 반면에 제가 눈치채지 못했거나 몰랐던 얘기를 하면, 와 이렇게 보면 작품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구나! 하고 작품을 보는 마음의 해상도를 높이는 기분이라 좋아요. 셰익스피어의 수많은 작품을 뜯어보며 '셰익스피어처럼 쓰려고' 노력한 대사들을 음미하다 보면, 작품 내의 그 고풍스럽고 우아한 말맛이 더 살아나는 기분이랄까요?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을 재밌게 보셨던 관객분이라면, 혹은 연극을 보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이 유명한 고전이 사실은 두 유명한 퀴어의 러브스토리였다는 데 흥미를 느끼시는 독자분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세요. 대본집 겸 에세이라니! 이런 기회 흔치 않다고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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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와 마고의 백 년
매리언 크로닌 지음, 조경실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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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만난 시한부 소녀와 할머니의 우정 이야기. <레니와 마고의 백 년>을 한 줄로 요약하면 아마 이런 이야기가 될 겁니다. 그래서 결말이 어떻게 될지 뻔히 알고 있었는데도, 읽다보면 우리의 주인공 레니를 사랑하게 되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흐르고 마는.. 그런 소설이었어요.


초반에는 레니의 눈으로, 레니의 시선으로 보다보니 사실 레니가 그렇게 특별한 아이라는 느낌은 없었어요. 그래서 중간에 간호사 재키가 "니가 말하기만 하면 뭐든 다 들어주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나는 아니다. 너는 그냥 관종일 뿐이다" 하는 식으로 말했을 때는 너무 놀라버렸지 뭐예요! 아니 레니가 뭘 그렇게까지 관종처럼 굴었다고??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레니가 또래가 아니라 80대 이상의 노인반에 들어가 미술 수업을 받는 것도 원래는 안 되는 거였잖아요? 병원에서 (쓸데없는 규칙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 규칙에 예외로 삼아준 건 맞으니, 못마땅하게 보는 사람이 있을 법도 해요.


중간중간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레니를 볼수록 레니가 더 특별한 아이처럼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엄마나 아빠가 병원에 오지 않는 이유만 해도 그래요. 떠나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렇게 단호하게 가족을 쳐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17살이 아니라 37살이어도 못 하는 일인데... 가끔 너무 일찍 어른이 된 아이를 보면 괜히 애틋해지곤 하는데, 레니가 자신의 엄마나 아빠에 대해 말할 때도 꼭 그랬습니다. 안아주고 싶었어요.


중간에 몇 번 멈춰서서 마음을 추슬러야 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아서 신부님의 마지막 미사 때라든지, 마고와 험프리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눌 때라든가, 마고가 혼자 설거지를 하다가 험프리에 대한 진실을 깨닫게 되는 장면이라든가 하는 그 모든 부분에서 잠깐씩 멈춰야 했답니다. 사실 초중반에도 죽음과 이별이 있는데, 후반부가 왜 더 찡한가 생각해봤어요. 그건 제가 초중반에 헤어진 인물들을 주인공들만큼 사랑하지는 않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더 몰입하게 되면서 레니와 마고만큼 그들을 사랑하게 되어서 더 힘들어진 듯 해요.


완벽한 수미상관은 아니에요. 하지만 첫 부분에, 아직 주인공을 사랑하지 않던 시절에 말했던 내용과 일어났던 사건이 마지막에 다시금 펼쳐집니다. 그 부분을 다시 만나게 되니까 감회가 새롭기도 하고, 몇 배는 더 감동적이었어요. 특히 마고가 도대체 쓰레기통에서 어떤 편지를 뒤지고 있었나 하는 부분이요. 마고에게 일어난 모든 일, 마고에게 그 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 후에 다시금 첫 장면으로 넘어가면 정말 레니가 너무 고맙게 느껴진다니까요! 마고의 눈으로 본 레니는 얼마나 특별한지!


모든 책이 그렇지만, 모르고 봐야 좋은 부분이 있어요. 후반부로 갈수록 그런 부분이 많아지기 때문에 저를 울렸던 많은 부분을 자세히 얘기할 수가 없어서 아쉬워요ㅠ 그치만 모르고 봐야 좋으니까.. 아서 신부님과 마고에 대한 묘사가 정말 좋았거든요. 방금 전까지는 아서 신부님과 마고였는데, 그 다음 순간에는 아니었다는 그 부분이 정말 세상 모든 관계에 대한 정의가 아닐까 싶어요.


정말 좋은 작품이었어요. 영상화된다고 하던데, 꼭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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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가출 에놀라 홈즈 시리즈 8
낸시 스프링어 지음, 김진희 옮김 / 북레시피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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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놀라 홈즈>를 넷플릭스에서 영화로 먼저 접했는데, 상당히 재밌더라고요. 아직 미성년자인 만큼, 실수도 하고 엉엉 울면서 오빠에게 끌려가기도 하고 헛다리 짚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생기발랄하게 빛나는 소녀 탐정이었어요! 원작이 있는 건 나중에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벌써 8편이나 나온 시리즈물이지 뭡니까? 마침 8편이 나왔길래 영화 2편을 보기 전에 먼저 읽어보기로 했어요. 이미 영상화된 모습을 보고 난 후라 읽는 내내 배우들 얼굴이 자동으로 재생되는 건 좋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습니다. 손쉽게 상상할 수 있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동시에 제 상상력을 딱 고정시켜 버리니까 아쉽기도 하네요.


 벌써 8편까지 이어온 시리즈물이라 그런지, 곳곳에서 '이전 작품에서 등장했어요' 하는 식으로 묘사가 되는 인물이나 사건이 꽤 자주 나옵니다. 이게 약간 애매한데, 설명을 주구장창 반복해줘서 그만 좀 말해줘 싶은 건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설명이 안 된 것 같은데 이전에 있었던 사건 때문에 이렇게 진행되는 거겠지? 싶은 건도 있어서 약간 뒤죽박죽이에요.


 예를 들자면 8편 사건의 주인공인 세실리에 대해서는 자꾸만 왼손 인격과 오른손 인격이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사실 너무 강조하니까 흠 이렇게까지 딱 나눠진다고? 싶어서 약간 삐딱해지는 마음이 없잖아 있을 정도에요ㅋㅋㅋㅋ 세실리는 왼손을 쓰면 똑똑하고, 사회의 고정관념에 굴하지 않고, 아버지로부터 탈출하려고 하는 독립적인 인격이 되고 반대로 오른손을 쓰면 순종적이고, 얌전하고, 아버지 말에 복종하는 온실 속 화초 같은 인격이 되는데.. 아니 이중인격이라는 병이 실존한다는 걸 감안해도 너무 작위적이라는 느낌이에요. 왼손잡이가 가지는 고정관념이나 상징성을 생각하면 더 그렇고요ㅋㅋㅋ


 그렇지만 좌충우돌 몸으로 부딪혀가며 사건을 냅다 들이받아버리는(!) 에놀라 홈즈 덕에 뭔가가 굴러가는 게 시원시원한 속도감이 느껴져서 페이지가 휙휙 넘어가는 맛이 있습니다. 셜록 홈즈만큼 대단한 논리와 추리력으로 무장하진 않았지만 (에놀라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을 딱 보고 추리를 완벽하게 해내진 않죠) 가끔 셜록 홈즈를 핀잔 주고 가르쳐가며 (이 부분 때문에 셜록 원작 팬들에게서 원성을 꽤 듣는 모양이더라고요) '당시 시대상 기득권자 귀족 남성'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고요. 전반적으로 에놀라 홈즈 시리즈에는 쭉 변화하는 시대라는 키워드가 반드시 들어가는 것 같아요. 언제까지 그런 후진 생각을 하면서 살거야? 이제 시대가 변했다고!


 8편의 주인공인 세실리가 2편과 4편에서 각각 등장했다고 하던데, 어떤 식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나 궁금해서라도 꼭 그 두 편은 봐야겠어요. 특히 2편의 경우 영화로 나와있으니 훨씬 더 접하기가 쉽네요. 극 중 1편부터 8편까지의 시간이 1년 반 정도밖에 되지 않던데, 영화로 8편까지 그렇게 단숨에 찍기는 어렵겠죠? 몇 편까지나 이어질지 궁금하네요. 원작도, 영화도, 계속 쭉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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