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클리벤의 금화 1
신서로 지음 / 황금가지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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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요즘 가장 사랑하는 브릿G의 연재소설 <피어클리벤의 금화>가 드디어 종이책으로 정식 출간되었습니다!! 께이!!

 브릿G에서 온라인으로 읽는 것도 좋았지만, 저는 역시나 e북보다는 종이책 파라서, 아무래도 밤에 이불 속에서 손에 쥐고 넘겨가며 읽을 수 있는 종이책 쪽이 훨씬 더 좋네요. 그동안 한 편 한 편 외따로 볼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들을 한 호흡으로 쭉 읽어내릴 수 있다는 것도 너무나 마음에 듭니다. 이왕이면 4권까지 왕창 나왔으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은 2권으로도 만족할게요ㅎㅎ


 <피어클리벤의 금화>는 정통 판타지 소설입니다. 온라인 연재처가 이토록 활발해지기 전의 판타지 소설 같아요. 이 말인즉슨, 최근 들어 판타지/모험/로맨스 등의 장르에서 자주 보이는 '반칙'이 없다는 겁니다. 요즘은 어떤 소설을 읽어도 대개 시작이 회귀나 환생 혹은 읽었거나 알고 있던 소설 속으로 어쩌다 주인공이 떨어지면서 시작되잖아요? 그건 곧 주인공에게만 정보가 주어진 세계라는 겁니다. 이런 성향이 유행하는 자체가 주인공들이 빨리 뭔가를 성취하고 장애물을 치우길 바라는 '사이다 서사'를 원하는 사회적인 분위기와 관련되어 있지 싶지만.. 어쨌거나 이건 치트키이고, 기만이고, 반칙이죠. 주인공에 의해 미래가 조금씩 변한다고 해도, 정보를 알고 있는 주인공은 엄청나게 유리한 고지를 선점합니다. 이걸 부정할 순 없죠. 솔직히 작가들이 게으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천편일률적으로 난무하는 설정입니다. 이제 그만 좀 나와줬으면 싶어요;;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피어클리벤의 금화>는 꽤나 매력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도 반칙을 하지 않는 세계거든요. 주인공인 울리케는 그저 가난한 영주 남작의 13자식 중 여덟번째 딸일 뿐이고, 그가 가진 배포와 담력과 용기와 언변은 결코 외부에서 아무 노력 없이 거저 주어진 정보에 기인한 게 아닙니다. 울리케는 소설 속 등장하는 다른 모든 인간들과 마찬가지의 정보만 가지고 있을 뿐이에요. 용의 환심을 살 만한 다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을 먹으려고 납치한 용으로부터 협상을 이끌어내고 집으로 돌아간 겁니다! 어떻게 그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1권 내내 울리케가 보여주는 담대한 모습은 도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인생을 살았나 싶을 정도로 놀라움의 연속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울리케를 세상에 단 하나뿐인~ 절대적인~ 모두의 사랑을 받는~ 이런 식으로 그리지 않는 것도 이 작품의 강점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겠어요?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고, 호의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악의를 가진 사람이 있는 게 세상 이치인데 말이에요. 특히 1권 후반부에서 울리케가 아무리 가난하고 거칠게 자랐다 해도 어쩔 수 없는 귀족 영애로서 가지는 태도의 한계가 잘 드러납니다. '아니 왜 이렇게 쓸데없이 입바른 소리를 해서 일을 망치나' 한탄스럽게 대처하는 바람에 일행들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해요. 하지만 독자들이 답답함을 느낄 수 있는 이런 부분에서도 작품의 가장 큰 절대자인 용 빌러디저드의 입을 빌어 이렇게 일러주죠.


 "......제가 이 사달을 일으켰다고 어찌 아십니까?" (중략)

 "내가 너를 모르겠느냐? 하지만 혼은 충분히 나되, 너무 스스로를 비하하지는 말아라. 잘 다루기만 하면 그것은 분명 둘도 없는 너의 장점이 될 것이다."


 결국 울리케의 퇴보(?)는 앞으로의 전진을 위한 떡밥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씀! 사실 주인공이라고 말을 하고 있고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울리케는 등장하는 많은 인물 가운데 한 명일 뿐이고 다른 인물들도 모두 매력적입니다. 우선 지고한 빌러디저드는 물론이고 말이 통하는 고블린 대장 아우케트, 일당백을 해내는 사연많은 모험가 4인 파티에 당돌한 류그나 소녀 시야프리테, 자신의 본분과 의무를 잊지 않는 피어클리벤 남작가의 사람들, 뭔가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 암흑 속의 반란자들, 그 사이에 끼어든 불행하고 조금은 멍청한 범죄자들, 그리고 1권 말미에 드디어 등장한 울리케의 맞수(ㅋㅋ) 크누드 서리엇까지! 인물들 하나하나가 그 세계에 정말 딱 그대로 있을 법하면서도 각자의 입장이 어지러히 얽혀있는 게 정말 재미있어요. 모두가 주인공 킹왕짱의 세계를 만들어주기 위해 급조된 느낌이 나지 않는 게 가장 좋습니다.


 개인적으로 1권보다는 2권이, 2권보다는 그 뒷내용이 더 흥미진진한 소설이라 얼른 뒷권이 발간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습니다! 낯설고, 우아하고, 정치적이고, 그러면서도 흥미진진한 판타지 세계의 모험기를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피어클리벤의 금화>를 손에 잡으시길 추천합니다. 피어클리벤의 금화! 재미있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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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 1
배명은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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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싫으신 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참 신기한 게, 저는 어릴 때부터 귀신 이야기나 도시전설 같은 괴담은 재밌어하면서도 공포라는 장르 자체는 좋아하지 않았어요. 공포 영화나 소설을 보면 저는 그게 어쩐지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전개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작가가 날조한 '사기'나 '거짓말' 같다고 느껴버리는 겁니다. 예를 들어 갑자기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촛불이 스르륵 꺼지고 어둠 속에 주인공들이 홀로 남겨지게 되는 장면이 있다면, 그게 사람이 한 짓이든 귀신이 한 짓이든 타당한 이유나 과정을 설명해주지 않고 얼렁뚱땅 넘어가버리는 것에 대해 짜증이 치솟곤 했거든요. 범인이 사람이면 '아니, 도대체 어떻게 손도 안대고 한꺼번에 촛불을 다 꺼버릴 만큼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거야?' 하고 범인이 귀신이라면 '아니, 도대체 귀신이 왜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를 하겠어?' 싶어졌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결국 내가 지금 피부로 느끼고 있는 현실감이나 생활감이 제대로 묻어나지 않는 게 싫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그렇지 않아서 매우 좋았습니다! 확실히 한국을 배경으로, 당장 주변에서 들을 수 있는 이름의 주인공들을 만나는 것은 외국 작품을 볼 때와는 또 다른 친밀감을 주더라구요. 그러면서도 공포를 주는 정서가 정확히 지금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과 맞닿아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아!!! 하는 절박한 외침이 곳곳에서 느껴지는 단편들이었어요.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절망과 체념, 분노와 자포자기의 정서가 보였어요. '우린 안될거야 아마..'하는 자조적인 유행어처럼 답도 없는 바닥으로 자꾸만, 자꾸만 꺼지는 내 삶을 누가 대신 살아줬으면 좋겠고(위탁관리), 평생 뼈빠지게 일해도 내 몸 하나 누일 공간 하나 마련 못할 게 뻔하고(천장세),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가정폭력의 위협에서 도망쳐도 내 아이가 왕따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은 사라지지 않으며(그네), 독박육아로 아이가 악마로 보이는(이른 새벽의 울음소리) 등의 공포가 어떻게 현실로 와 닿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게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천장세」가 아닐까 해요. 읽으면서 너무 괴로워서 그냥 읽은 척 하고 넘어갈까 싶어질 정도로 생생한 지옥도였거든요. 왜 도시가 그 사람들을 아무런 노동력조차 제공하지 못하는 형태로라도 붙잡아두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설명이 더 필요하다고 느껴지지만, 일단 전세-월세-사글세-월월세-천장세 라는 피라미드 형태 자체는 알기 쉽고 또 공감하기 쉬운, 좋은 장치였다고 생각합니다. 샤워를 하면 변기에 부딪치는 좁은 화장실에서 신혼부부가 월월세를 사는 것도 모자라, 화장실 위 조그만 공간을 천장세로 놓는다는 발상은 끔찍하기 그지 없어요. 얼마 전에 강남 셰어하우스랍시고 홍보하던, 1인당 면적이 5평도 채 안되던 홍콩식 관짝쪽방 같던 주거형태 생각도 나면서 숨이 턱 막히더라구요. 이 소설이 지나친 상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듯한 전조들이 2017년의 한국 사회 사방에서 보이고 있잖아요? 가난한 소시민 입장에서, 천장세와 같은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만으로 얼마나 죽고 싶어지던지요. 그냥 언뜻 생각해봐도 천장세를 살 정도로 생활력이 떨어진 사람은 아무리 애를 써도 다시는 일반 시민으로 올라올 수가 없잖아요. 매일 누워지내야 하니 허리가 아작나고, 제대로 먹지도 싸지도 운동하지도 못하니 체력은 점점 떨어지고, 제대로 된 일이나 생활을 할 수도 없고.. 사실상 사회적인 보호 장치가 전무한 채로 그냥 죽으라고 내던져진 것이나 마찬가지라구요! 그리고 도시는 그들을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놓아주지 않구요. 정말 소름끼치도록 한국적인 디스토피아에요.

 

 반면 세계 어디에서도 보편적인 이입과 공포를 끌어낼 수 있는 작품은 뭐니뭐니해도 「증명된 사실」이겠죠. 살면서 죽음 그 이후를 궁금해하지 않는 인간은 그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요. 제가 브릿G라는 플랫폼을 알게 해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다른 커뮤니티에서도 끊임없이 추천글이 올라오며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에요. 저처럼 '영혼'이라는 게 있다고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글의 마지막에 섬뜩한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왜냐면.. 상상하게 되고 마니까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혹은 내가 죽었을 때, 그 뒤를 상상하게 되잖아요. 차라리 유물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영혼이 아예 없이 모두가 무(無)로 돌아가는 거라면 차라리 안심이 됩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빛'이나 죽은 자들의 '세상'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 역시 좀 두렵기는 하지만 금방 납득하고 적응할 만 하죠. 하지만, 정확하게 100%의 확률로, 살아 생전의 그 어떤 부와 권력과 명성을 누렸든 말든 상관없이, 죽음 뒤에 다가올 미래가 그런 것이라면... 온 인류가 우울증과 무기력, 트라우마에 빠지게 되지 않을까요? 아무리 발버둥쳐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잖아요. 그 어떤 대책도 마련할 수 없고, 그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완벽한 절망- 그것을 이토록 담담하고 꾸밈없는 문장으로 그려놓았다는 게 놀라울 뿐입니다. 게다가 실제로 '그럴지도 몰라'하고 내심 납득하게 된다는 점까지 어마무시한 작품이에요;;; 그동안 들었던 모든 이야기를 통틀어 제일 무서우면서도 현실적인 죽음 이후에 대한 가설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이 작품을 읽고 난 이후에 내심 이게 진실일지도 모른다고 믿고 있을 정도랍니다.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제발 영혼에게도 수명이라는 게 있어서 죽음 이후의 상황이 짧기만을 바랄 뿐이에요ㅜ

 

 그밖에 어디선가 많이 읽어보았던, 익숙한 문법의 이야기들도 있었습니다. 「완벽한 죽음을 팝니다」같은 경우, 원하는 것을 주는 듯 하지만 결국 어떤 식으로든 비극으로 이끌고야 마는 악마 혹은 신 같은 존재가 등장합니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고 상대가 그것을 받아들이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것으로는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게 만드는 식이에요. 일종의 공식으로 굳어진 형식이라, 이 경우 이야기의 참신함보다는 얼마나 더 교묘하게 상대를 회유하고 술책을 쓰는지가 관전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거래를 제안받는 입장에서는 나쁠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이걸 받아들이는 게 맞는 것 같은데, 항상 빼먹은 뭔가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독자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의 구멍을 찾아내어 쨘! 하고 내미는 것을 보는 쾌감이 있어요. 자살공화국 대한민국에 딱 어울리는 설정이기도 해서, 만약 나라면 어떤 걸 택했을까 생각해보는 재미도 있었습니다.「더 도어」는 일본 괴담 이야기에서 자주 보이는 패턴이죠. 사람들이 잡아먹는 그림이나 그에 얽힌 사연들이 굉장히 전형적이었어요. 하지만 마지막 주인공의 선택이 마음에 들어서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죄를 지었고, 또 자신에게도 해를 가하려고 했던 사람에게 온정이나 배려를 베풀 필요는 없으니까요. 권선징악 매우 좋아합니다ㅋㅋ

 

 아쉬운 이야기를 꼽자면 아무래도 「이른 새벽의 울음소리」가 될 것 같습니다. 일단 매맞고 사는 남편이 독박육아를 한다는, 굉장히 드물고 신선한 소재를 가져왔는데 결과적으로 그게 모두 서술트릭이었다는 것이 매력을 좀 떨어뜨려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별 의미없던 힌트들이 나중에 하나로 주르르 꿰이는 것 자체는 괜찮았지만, "아기한테 원한 샀다가는 평생 아기 울음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자." 하고 말하는 전문가라든가 갑자기 나타나 심판(?)받는 동생 같은 요소들은 좀 억지스러웠습니다. 전체적으로 나쁜 아내이자 엄마인 여자를 응징하겠다는 목표만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보였달까요? 차라리 이미 죽은 사람의 입을 빌려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편이 훨씬 더 자연스러웠을 것 같아요.

 

 

 오랜만에 장르소설, 그것도 단편소설들을 읽어서 행복했습니다. 확실히 단편은 틈틈이 가지고 다니면서 읽기 정말 좋은 것 같아요! 통근길 버스나 지하철에서, 혹은 식사를 주문하고 기다리면서, 모임시작 전 잠깐 동안에 얼른 한편을 해치울 수 있잖아요~ 게다가.. 이 중에 하나는 니 취향이 있겠지!! 같은 느낌ㅋㅋ​​ 여기 실린 10편의 단편은 브릿G에 게재된 2000여편의 작품 중 고르고 골라 엄선된 화제작이라고 들었는데, 덕분에 저같이 게으른 독자에게도 한번에 읽을 기회가 주어져서 좋네요ㅎㅎ 게다가 마음에 드는 작가님들의 다른 작품을 찾아읽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구요. 이렇게 각자 장르와 개성이 다른 단편들이 <한국 공포 문학의 밤>이라는 주제 아래 엮어 나왔다는 것도 재밌어요. 주로 해외 장르소설 위주로 편식이 심했던 저에게 새로운 자극이 되었습니다. 책날개에 보니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이나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도 있던데 찾아 읽고 싶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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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변호사 고진 시리즈 5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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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중하게 스크롤을 내려주세요! 


 간만에 읽은 추리소설이었습니다. 원래 추리소설을 좋아해서 닥치는대로 읽는 편인데, 요즘은 다른 장르에 너무 빠져있어서 소설 자체에 대한 관심이 좀 시들시들하고 신작도 거의 흘려보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도진기 작가의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를 읽고나니 다시 추리소설에 관한 관심과 애정이 몽글몽글 솟아나네요! 아 정말 너무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최대한 많은 분들께 영업을 하고 싶은데, 장르의 특성상 리뷰에 어쩔 수 없이 스포가 포함될 것 같아요. 스포 없이 영업글을 쓰기엔 아직 내공이 부족한지라.. 양해 부탁드립니다ㅠㅠ 물론 내용을 전혀 모른 채로 보는 것이 가장 재미있기 때문에 속는 셈 치시고 그냥 바로 책을 읽으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본격추리와 법정물, 두 마리 토끼를 잡다

 시작은 너무나도 매혹적인 한 여인이 변호사 고진을 찾아오면서부터입니다. "남편을 죽여주세요"라고 말하는 낯선 여인의 의뢰를 거절하고 난 몇일 후 그 여인의 남편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뒷골목에서 살해당한 채 발견됩니다. 당연하게도 여인은 제1순위 용의자에 오르고, 고진은 이 여인을 변호하기 위해 자신의 원칙을 깨고 법정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독자는 처음 남편의 살해의뢰를 했던 여인의 모습을 기억하기 때문에 여인의 무죄를 온전히 믿어줄 수 없어요. 과연 이 여인이 범인일까? 이 가련하고 연약한 모습 뒤에 독을 품은 마녀가 숨어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정말로 무죄이고 다른 친구들 중 한명이 범인일까? 그렇다면 범인은 셋 중 누구이고 어떤 트릭을 써서 빠져나간 것일까? 독자들은 끝까지 의심의 끈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증거가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는데, 그래서 오히려 그 한 사람이 범인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아예 제외하고 생각하자니 걸리는 게 너무 많거든요.  


 사실 범인은 처음에 제시한 다섯 명 중 한 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피고인인 김명진, 그녀의 동생 김해나, 남편이 되지못한 세 명의 동창생. 만약 고진의 의뢰인인 김명진이 무죄라면 나머지 네 사람 중 한 명이 범인이에요. 검사인 조현철이 지적했다시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뒷골목에서 면식범에 의해 한국에서만 판매하는 낚시줄로 살인이 일어났기 때문에 다른 교민이나 러시아인에 의한 살인일 가능성이 거의 없거든요. 동기와 접근성이 둘 다 있었던 네 사람 중 한 사람이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게 타당합니다. 그런데 김명진을 제외한 나머지 네 사람은 모두 알리바이가 명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명진이 범인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변호사 고진은 진범의 알리바이를 깨고 그 트릭을 밝혀야 하는 과제를 맡게 됩니다. 한마디로 "알리바이 깨기"가 관건인 거죠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의 경우 전형적인 본격 추리소설 같으면서도 법정물 같은 느낌이 강합니다. 그러면서도 로맨스의 향기도 풍기죠. 장르가 섞여있어서 어느 한 장르가 취향이 아니신 분들이라도 재미있게 보실 수 있어요. 저같은 경우는 본격 추리의 경우 너무 '트릭만을 위한 트릭'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사회파나 일상, 하드보일드 등 다른 미스터리에 비해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법정물의 성격이 강하다 보니 무척 재미있게 읽히더라구요. 매 재판마다 분위기가 확확 뒤집어져서 끝까지 결말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들거든요. 반대로 법정물을 즐기지 않는 분이라 해도 후반부에 등장하는 알리바이 깨기 및 범인 찾기에 몰두하며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중간중간 깨알같은 미스터리들도 꽤 많이 포함되어 있어요. 과연 '그날의 달리기'에서 우승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긴 사람이 남편이 된 게 맞을까? 같은 소소한 미스터리는 글을 읽는데 계속 긴장감을 가지도록 유지시켜주면서도 빠르게 해결되기 때문에 너무 궁금해서 뒤부터 펼쳐보는 나쁜 습관을 막아줍니다. 달달한 걸 좋아하셔서 도대체 여기 어디에 로맨스가 있다는 거야? 싶으신 분들도 마지막까지 읽으시면 납득이 되실 거예요.



그는 악마로소이다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라는 제목과 표지의 일러스트를 봤을 때, 저는 당연히 변호사 고진을 '악마'라고 칭하는 것인 줄 알았어요. 일단 고진은 법정에 서지 않는 걸로 유명한 뒷골목 변호사인데다, 그림자 속 악마의 넥타이나 법봉(이라고 생각한 망치 비슷한 무엇)이 화이트칼라, 그 중에서도 법조계 종사자를 뜻하는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은 그 내용에 골몰하느라 정작 제목과 표지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별로 없었어요. 책을 덮고나서 다시 한번 표지를 보고서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악마는 정말로 법정에 서지 않았다는 것을요.


 초반에는 언뜻 청춘물스러운 느낌마저도 들지만, 그 느낌은 물론 배신당해요. 이게 단순히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가 되지 못하고 파국을 맞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건이 전개되고 김명진이 왜 남편을 죽이고 싶어했는지 드러날수록 범인의 살해 동기가 명확해지는 동시에 앞부분의 싱그러움 또한 퇴색합니다. 그저 보통사람 같았던, 아니 오히려 남에게는 평판도 좋았고 "싹싹하고 붙임성있으며 정이 많다"는 소리를 듣던 남편이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오랜시간 아내에게 정신적/사회적/육체적 폭력을 가해왔다니.. 의뢰인인 김명진은 물론이고 대학 내내 붙어다녔던 친구들조차도 그의 가면을 꿰뚫어보지 못한 것이 너무 현실적이라 소름이 끼쳤습니다. 실제로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가정에서 학대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고, 그 내부자가 아니면 실체를 짐작도 하기 어려운 법이잖아요. 


 게다가 20여년의 세월을 지나 각자 사회인이 되어 다시 만난 동창들의 모습이 어찌나 속물적이고 실망스러운지요! 물론 멍청하고 바보같은 짓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마저도 청춘의 특권 같았던 풋풋한 대학생들은 온데간데 없고, 그저 돈만 밝히고 자기 유리한대로 느물거리는 중년 아저씨들만 남아 오히려 만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법했다고 느껴지기까지 해요. 게다가 사건이 전개될수록 더더욱 실망감은 커집니다. 웃는 모습을 보니 실망이라고 하지를 않나, 지금 니가 힘든 건 알지만 돈을 갚으라고 닥달하지를 않나.. 그 중에서도 제가 가장 배신감이 들었던 순간은 김명진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몰려 있었는지 나머지 네 사람이 알고 있었다는 게 드러나던 순간이에요. 아니, 사람이 그렇게까지 당하고 있으면 생판 남이라도 도와주는 게 인지상정 아닙니까?!!!!! 그토록 김명진을 사랑한다던 사람들이 알면서도 손 놓고 있었다는 게 말이 돼요???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

 이 모든 일의 사단은 물론 하필이면 김명진의 남편이 폭력적이고 집착이 쩔면서도 매우 매끈한 사회적 가면을 쓰고있는 개새끼였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날 밤의 달리기'가 없었다면 (다른 여자가 대신 희생되었겠지만) 적어도 김명진만은 지옥에 빠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어요. 결국 김명진의 인생을 망친 건 '그날 밤의 달리기'였던 셈입니다. 애초에 말도 안되는 내기였어요. 말도 안되는 제안이었구요. 처음엔 가볍게 생각하고 시작했을지 몰라도, 다들 전력투구로 덤비면 상황이 점차 진지하고 심각해지리라는 걸 그들 중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게 놀랐습니다. 적어도 한명쯤은 이 달리기 결과를 '아 미안 농담이었어~ 호호' 하고 웃으며 지나갈 수 없게 되리라는 걸 알았어야 해요. 물론 그렇게 심각해진 상황에서도 김명진이 자기 속마음을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여자였다면 상황이 달랐겠지요. 하지만 김명진은 거절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는 여자였고, 모두들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사랑받고 살았을 여자인가. 그저 보통의 남자만 만났더라도. - p.399


 돌이켜보면 세 남자 모두 김명진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계속 사랑했습니다. 처음엔 세상 풍파에 닳을대로 닳아서 이제 더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읽어보면 결국 세 남자 모두 마음 한 구석엔 김명진의 자리를 남겨놓고 있었죠. 다들 20여년 전의 일이라며, 지나간 감정이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지만요. 이루지 못한 첫사랑이라서 더 아련하고 미련이 남았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혹은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자신을 그리워한 것일지도요. 어쨌든 그들은 모두 김명진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아무도 김명진의 곁에 남아있지 않아요. 남아있을 수도 없구요. 그토록 매력적이고, 그토록 사랑받으면서도, 그토록 곁에 아무도 없을 수 있다니.. 그 운명이 너무나 가련합니다.


 남자 작가라 그런지 김명진의 매력을 묘사할 때 확실히 남성적인 시각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첫 등장에서도 고진의 시선으로 김명진을 묘사하고, 재판이 시작되었을 때는 이유현의 시선으로 김명진을 바라보고, 대학 생활에서마저도 네 남자의 시선으로 본 김명진은 명확하게 나오지만 김명진 본인은 시각은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드러나는 때는 네 남자 중 김명진이 누군가 한 사람을 마음에 품고 응원을 할 때뿐인데, 그것마저도 벌어진 사건이나 김명진의 인생에 그닥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죠. 김명진도 그렇고, 김해나도 그렇고, 주체성이나 독립적인 캐릭으로서의 매력은 아예 배제되어 있고 남성이 봤을 때 매력적인 부분, 남성의 눈으로 봤을 때 끌리는 부분만 중점적으로 부각되어 있는 건 개인적으로 아쉽습니다. 기본적으로 착한 심성을 가진 캐릭들은 다들 예쁘면서, 질투로 남의 인생을 망치는 캐릭은 외모가 부족하고 떨어진다는 묘사도 좀 아쉽고요. 물론 실제로 외모가 떨어지는 친구가 외모가 출중한 친구에게 질투를 느끼는 일이야 있을 수 있지만, 그 정도의 악의를 가진 친구를 눈치채지 못하고 친하게 지냈다는 것 자체가 약간 어색하게 느껴졌어요. 
 


도진기라는 이름, 고진이라는 브랜드

 도진기라는 이름은 현재 한국 추리소설 시장에서 여러모로 화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현직 판사가 추리소설 작가로 나섰다는 전무후무한 경력 때문이기도 하고, 추리소설이 제대로 뿌리 내리지 못한 한국에서 몇 안되는 본격 추리소설 작가라 그렇기도 해요. 일단 스토리적으로도 흥미로운데 트릭 역시 진공 속에서 만들어낸 느낌이 아니라 '이 정도면 있을지도 몰라' 싶은 느낌이 들게 짜여져 있고, 배경이나 설정이 너무 과하게 느껴지지 않아 이질감이 덜해요. 특히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같은 경우는 작가 본인의 직업을 잘 살려 재판의 풍경을 잘 그려냈어요. 법조계에 종사하지 않는 저로서는 조현철 검사가 영장청구를 빌미로 판사에게 구속을 강요하는 게 왜 저열한지, '공정한 재판'에 대한 판사와 검사가 왜 열망을 가지는지, 언뜻 유리하게 보이는 재판이 왜 불리하다는 것인지 하는 법조인의 눈으로 본 내부사정은 잘 알수가 없는데, 그 부분이 빠짐없이 설명되어 있더라구요. 작가들은 간혹 '내가 알고있으니 독자도 알고있겠지' 하고 넘어가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도진기 작가는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아무래도 '이것이 과연 가능한 트릭인가?', '현실성이 있는 이야기인가?' 하는 점이 가장 신경쓰이더라구요. 몇몇 부분에서는 분명 작가가 만들어낸 우연이 살짝 어색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트릭에 만족하는 편입니다. 제가 좀 억지스럽다고 느낀 부분은 등장인물 중 한명이 자신의 친구를 만나러 가는 와중에, 굳이 고진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가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었어요. 좋은 이야기가 오갈 것도 아니고 고진이 딱히 그 친구와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고(오히려 나쁜 편이었죠) 친구의 상태까지 알고 있는 상황에서.. 고진이 전체적인 그림을 맞춰볼 수 있게 힌트를 주려고 가야만 했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그외에는 조현철이 자신있게 형사와 고진의 뒤통수를 치며 내놓은 증인들이라든지, 가장 결정적인 범인의 알리바이 트릭 같은 큼지막한 부분들은 다 괜찮았어요~


 유명한 탐정 소설 주인공들처럼, 작가가 고진이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꾸준히 써줬으면 좋겠어요. 고진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 하나의 브랜드가 될 수 있게요! 소위 말하는 뒷골목 변호사, 법의 허점을 노리는 변칙적 해결만을 도모하는 변호사라는 고진은 캐릭터적으로 정말 매력적이거든요. 법조계의 인맥이나 관습에 휘둘리지 않는 변호사 캐릭은 그 자체만으로 멋집니다. 게다가 꼭 법정에서 싸우는 게 능사는 아니잖아요? 법정에서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공명정대한 정의가 실현되리라는 기대가 거의 없는 나라에서, 법정에 가기 전에 싸움을 끝내버리는 변호사가 하나쯤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도진기 작가는 공식대로 재판이 흘러가는 법정에서 이야기를 전개시키기가 더 까다로워서 그런 설정을 한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고진의 매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죠. 이번 편에서는 자신이 들여다보지 못하고 그저 지나쳤던 의뢰인으로 인해 법정에 섰지만, 아마 다음 편에서부터는 다시 법정 밖에서 사건을 해결하지 않을까 해요. 


 더군다나 한번 쓰고 버리기에 아까운 등장인물들이 많아요. 저는 경구란이 어느 순간 도진의 일을 돕는 주요인물로 성장하지 않을까 기대중입니다. 처음엔 서로 싫어했다가 점점 편한 사이가 되는 식으로 감정선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고, 예쁜데다 머리까지 잘 돌아가는 피아니스트라니.. 고진 변호사가 할 수 없는 일을 해주거나 갈 수 없는 곳을 가주거나 알 수 없는 정보를 가져다줄 것 같아요. 조현철 검사 같은 경우에도 악착같긴 해도 흥미로운 빌런입니다. 같은 사건을 맡아 조사했던 이유현 형사마저 깜짝 놀랄 정도로 세세한 지점까지 파고들어 재판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게다가 딱히 정의롭지도 않지만 맡은 일은 잘해내는 유능함이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고진 변호사와 합작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는 너무 사심을 듬뿍 담은 발언인가요ㅋㅋ



 간만에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얼마나 재밌었는지 다시금 일깨워준 책입니다. 이 책 덕분에 다시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불이 붙어서 연이어 책을 주문했답니다. 다행히도(?) 아직 읽지 않은 시리즈 전작 <붉은집 살인사건>이 남아있어서 행복하네요. 이번 주말은 안방에서 시원하게 바람이나 쐬면서 추리소설 읽는 즐거움을 누리려고요! 무더운 여름, 뒷장이 절로 궁금해지는 추리소설 한권,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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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아이들 1부 : 동굴곰족 1 대지의 아이들 1
진 M. 아우얼 지음, 정서진 옮김 / 검은숲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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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지의 아이들>은 미국에서 1980년에 출간되어 60여개국에서 4500만부 이상 판매된, 초대형 베스트셀러 시리즈입니다. 총 6편으로 이루어진 이 시리즈는 완결에만 거의 30년 가까이 걸렸다고 하는데, 저는 이번에 검은숲의 출간으로 처음 그 존재를 알게 되었네요. 개인적으로 애정을 가진 인물들을 오래오래 만날 수 있는 장편소설 시리즈를 좋아하는 편인데, 이런 제 기호에도 딱 맞게 6부작이나 되다니.. 앞으로 읽어야 할 책이 아직 한참이나 더 남아있어서 너무 행복합니다~ 선사시대를 이렇게 정교하게 그려낸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는데.. 역시 해외의 장르소설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폭넓구나 하는 생각에 부러워졌어요.


 일단 현생인류인 크로마뇽인과 같이 공존했던 네안데르탈인을 같이 등장시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것에 놀랐습니다. 두 인류가 공존한 시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는데, "네안데르탈인 부족 사이에 거둬진 크로마뇽인 여자 아이"라니! 너무 세련되면서도 의미심장한 구도에요. 주인공 에일라는 결국 멸종해간 인류와 대비되는 살아남은 인류이면서, 동시에 전통적이고 반복되는 것에 대항하는 새롭고 혁신적인 것의 상징이며, 또한 남자에게 복종하는 여자라는 구도에서 탈피하는 진정한 의미의 신여성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에 매혹되어 딸의 이름을 에일라로 지었다는 독자의 반응은 정말이지 수긍할 만 합니다. 저도 제 딸이 에일라처럼 "넌 여자니까 안돼"라는 소리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길을 찾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는걸요!


 극중에서 에일라는 인종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아주 못생긴" 아이입니다. 게다가 "여자다운 구석도 없"고 "너무 강한 토템을 가지고 있어서" 누군가의 짝이 될 확률도 아주 낮은 여자 아이죠. 남자에게 무조건 순종하고, 무조건 복종하고, 남자를 잘 보필하는 것만이 여자가 해야 할 일인데 그 너머의 일, 남자만의 일인 사냥을 욕심내기까지 해요. 게다가 만약 자신의 능력을 들킨다면 당장 부족에서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하게 될 테니, 아무도 모르게 조심조심 자신의 기술을 연마합니다. ...자,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나요? 우리는 지금도 수없이 많은 에일라들의 고군분투를 보고 살고 있으니까 말이에요. 지금으로부터 몇만 년이나 전의 이야기를 읽고 있지만 사실상 오늘날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요. 씁쓸한 일이죠.


 이자-에일라-크렙-우바로 이어지는 어떤 가족의 형태에는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이자와 크렙은 한 어머니 밑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사실상 짝이 될 수 없는 운명이고, 에일라는 길에서 주워온 아이, 우바는 다른 사내의 아이입니다. 결국 씨족 사회의 평범한 가족과는 거리가 먼 이 네 사람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그 누구보다도 가족의 의미를 보여줘요. 1권을 통틀어 가장 사랑스러웠던 부분은 늘 다정하게 대해주던 크렙이 혼을 내자 에일라가 서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마는데, 슬플 때 울지 않는 습성의 네안데르탈인 크렙은 당황하며 "아이가 어디 눈병이 난 것 같다"고 안절부절하다 이자를 불러 치료해주라고 한 장면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종족의 특성 때문에 웃기면서도, 울고 있는 에일라의 마음이 이해가 가서 귀엽고, 또 당황하며 에일라가 병에 걸린 건 아닌가 걱정하는 크렙은 따뜻해요. 아 정말 이 가족들이 앞으로도 내내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근데 1권 마지막에 너무 큰 사건이 터져버리고 끝났어요...... 에일라.. 왜 그랬어ㅠㅠㅠ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원래 선사시대나 공룡시대에 대한 관심이 좀 있기는 한데,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 알거나 그쪽 분야에 해박하지는 못하거든요. 딱 다른 사람들이 아는 그 수준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어요. 그런 제가 읽어도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걸 보니 작가가 정말 쉽고 단순하면서도 재미있게 글을 썼다는 생각이 듭니다. 1권을 딱 덮자마자 "아니, 그래서 도대체 이 뒤가 어떻게 되는 거야?!" 하고 절로 탄성이 나왔을 정도라니까요! 얼른 2권을 읽고 에일라의 운명에 대해 알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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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citly5 2016-04-17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처음 소개된 것은 아니고 여러 번 출간된 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 동서문화사 판의 에이브 시리즈로 읽었었고요, 그 뒤로도 몇 차례 다른 제목으로 출간되었었어요. ;;;

봄봄 2016-04-17 01:23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전 이번에 처음 소개되는 시리즈인 줄 알았어요.. 지적 감사합니다

tacitly5 2016-04-17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자명만 눌러보셔도 우선 절판된 정신세계사 판과 현대문화센터 판이 검색되네요.

봄봄 2016-04-17 01:43   좋아요 0 | URL
제가 검색하기 전에 책을 먼저 읽고 리뷰를 바로 써서 몰랐습니다. 불쾌하신 것 같으니 최대한 빠르게 수정할게요
 
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
모리 아키마로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블랙 로맨스 클럽》의 표지는 언제 봐도 정말 멋있습니다. 저는 애시당초 표지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블랙 로맨스 클럽>의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된 케이스라서, 언제나 표지의 아름다움과 적절함과 우아함을 찬양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특성이 있는데요. 특히나 제 마음을 사로잡은 건 언제나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겉표지를 한꺼풀 벗겨내면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속표지가 있다는 겁니다. 겉표지가 '밖으로 보여지는' 소설의 이미지라면 속표지는 '등장인물 내면을 보여주는' 표지 같아서 정말 좋아요! 겉표지를 보고 집어들었다가 속표지를 보고 속으로 짜릿함을 느끼는 재미가 항상 있답니다~ㅎㅎ <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의 속표지 역시 근사했어요. 제가 느낀 '봄에 읽는 청춘소설'에 부합하는 이미지라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실물로 확인해보시길..^^)




"여긴 추리연구회죠?"

"보시다시피, 여긴 취리연구회지."


 주인공 사카즈키 조코는 한때 유명한 아역 배우였으나 본인이 원해서 선택한 일이 아니었기에 어느 순간 그 일을 내던져버리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에 도망치듯 진학한 학생입니다. 어머니가 원하는 배우의 길도, 아버지가 원하는 주조장의 가업을 잇는 길도 전부 싫지만, 그렇다고 딱히 하고 싶은 건 없어서 방황하는 중이에요. 아역이었던 시절을 숨기고 싶어 두꺼운 뿔테안경과 앞머리로 철저히 자신을 가리며 평범하고 흔한 소녀로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그녀가 단 하나 좋아하는 게 있다면 바로 미스터리! 유서 깊은 추리동아리 '추연'에 가입하기 위해 방황하던 그녀는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신비로운 선배에 놀라 '취연'이라는 동아리에 실수로 가입하고 맙니다. (둘의 일본어 표기는 똑같다고 해요) '취연'은 추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오로지 취하기 위해서 마신다는 모토를 가지고 있는 이상하고도 엉뚱한 동아리인데, 주조장 딸이었던 사카즈키 조코에게는 굉장히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운명적인 것 같은 곳이죠. 그렇게 1년을 보내면서 아무리 술에 마셔도 절대 취하지 않는 체질인 주인공이 서서히 다른 모든 것들에 취하는 이치를 깨닫게 돼요.


 사실 이 책 같은 경우는 《블랙 로맨스 클럽》에서 나왔기 때문에 로맨스로 분류한 거지, 그냥 일반 일본 미스터리 장르로 나왔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을 것 같아요. 일본에서는 미스터리 장르가 굉장한 인기를 얻고 있기 때문에 굉장히 세세한 미스터리 하위장르들로 갈래가 나뉘어져 있거든요. 그 중에서도 일상 미스터리라고 하면, 소소한 일상의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될 법한 그런 미스터리들, 시체가 나오지도 않고 거대한 사건도 없지만 그냥 신경쓰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쳐버렸을 법한 사소한 비밀들을 다루는 장르입니다. <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 역시 일상 미스터리의 형식을 띄고 있어요. 몰라도 상관없지만 알게 되면 묘한 쾌감이 있는 이야기들이죠.


 청춘소설로 읽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아요. 모든 순간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눈이 부시고, 싱그럽거든요. 어찌된 일인지 그냥 바닥에 축 늘어져 있다가 좀비처럼 꿈틀꿈틀 일어나는 동아리 회원들의 모습까지도 낭만에 젖어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빡빡하고 좁은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대학생활을 해서인지, 아니면 현재 대한민국에선 이렇게 여유로운 대학생활이 가능한 사람이 없다고 느껴져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뭔가 현실에서는 쉽사리 볼 수 없는 낭만이 숨쉬고 있어요. 몇번이나 출석을 하지 못해 1학년에 재학중인 전설의 선배라든가, 낯선 사람들과 금세 의기투합해 다같이 술에 취해 뻗는 모습이라든가, 우연히 만난 할아버지가 알고보면 상당한 실력자라든가, 이런 말도 안되고 엉망진창인 것 같으면서도 신기한 모습들이 장마다 널려있습니다. 부러워요, 그 반짝거림이~




사실은, 취해 있던 거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주제에, 취해 있었다

 

 <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 같은 경우 총 5편의 단편소설들이 연작소설 형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각 꽃/공/해변/달/눈에 취하는 로직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어요. 제목의 '이름 없는 나비'는 주인공 조코를 의미합니다. 아직 뚜렷한 정체성을 찾지 못한 채 본인의 표현대로라면 "빛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그저 마구 달리는 중인" 청춘이지요. 조코는 사실 아무리 마셔도 절대로 술에 취하지 않는 체질인데, 그것을 '아직 취하지 않아' 라고 표현한 것 역시 의미심장하고도 멋집니다. 이 소설이 결국 "어떤 술에도 취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든 취할 수 있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화하는 1년의 이야기인 셈이니까요. 꽤 시적이지 않나요?


 그 중에서도 제1장 꽃에 취하는 로직은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분위기와 정서를 담아냈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미키지마 선배는 조코 자신도 몰랐던 조코의 체질에 얽힌 비밀을 쨘 하고 풀어냅니다. 사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오호' 하고 새삼 미키지마 선배의 숨겨진 관찰력과 추리력에 감탄했습니다. 앞서 자연스럽게 미스터리와 힌트들을 함께 흩뿌려 뒀는데, 저로서는 조코의 체질에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거든요. 봄에다, 벚꽃에다, 신입생 환영회에다, 술판에다, 신비로운 눈을 가진 낯선 선배와의 독대에다, 달에다, 첫키스에다.. 아주 그냥 싱그럽고 반짝거리는 청춘의 향기가 책에서 배어나오는 것 같은 1장입니다. '꽃에 취하는 로직'을 읽다가 저도 꽃에 취해버렸나 봐요ㅋㅋ


 로맨스의 주인공은 (당연히) 주인공인 조코와 (예상대로) 조코를 매의 눈으로 낚아채 취리연구회에 가입시킨 미키지마 선배입니다. 이 둘은 시종일관 간질간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일본 특유의 별거인 듯 별거아닌 별거같은 관계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이 관계가 정말로 천~~~천히 쌓여가기 때문에 때론 좀 답답하기까지 해요. 독자인 나는 이미 눈치를 챘는데!! 둘은 이미 쌍방인데!! 짝사랑 좀 고만하고 얼른 고백하라고 이 바보야!!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나왔다가 들어가곤 합니다. 하지만 역시 남의 연애란 쌍방이 짝사랑일 때 답답하면서도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법이죠. 선배가 넌지시 흘려주는 힌트들을 분명히 받고 있으면서도 확신이 없는 조코는 썸타는 우리네 모습과 다르지 않아서 사랑스럽습니다. 조코의 마음을 분명히 눈치채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좀 야속하기까지했던 미키지마 선배도 마지막 장에서 순정남의 면모를 드러내며 캐릭터를 완성합니다. 사실 끝까지 모른 척하면서 조코 애를 태웠으면 많이 얄미웠을 거예요!!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런데 일본 소설이라 그런지 확실히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들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5장 눈에 취하는 로직을 보면 주인공 조코가 집으로 돌아가보니 아버지가 가업을 이으라며 결혼 상대를 정해놓고, 결혼 날짜까지 잡아놓고, 심지어 상대방 일가친척들까지 다 불러놓고(!!) 당장 식을 올리라고 억지를 부리는 장면이 나와요. 물론 조코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그 반항의 정도 같은 게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확실히 떨어진달까요. 심지어 '내게 이렇게 온화한 사람과 결혼해 차분하게 일생을 보내는 선택지도 있다'라고까지 이야기합니다. 물론 진짜로 결혼하지는 않지만, 미키지마 선배만 없었어도 어, 어, 하고 등떠밀려서 저도 모르게 결혼했을 것 같은 느낌이라 좀 놀라웠어요.


 그리고 이건 아마 일본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처음 만난 여성이 갑자기 조코의 얼굴에 드롭킥을 날려서 조코가 복도 미닫이문을 뚫고 붕 날아가서 눈 속에 털썩 떨어지는 일이 있거든요. 일방적으로 엄청나게 얻어맞은 거죠!!!!! 그리고 그 여성은 사과 한 마디 없이 사라져 버려요. 물론 이것 역시 수수께끼에 얽힌 일이었고 나중에 무슨 사정인지 다 밝혀지기는 했지만, 정말 생각할수록 황당하고 어이없고 무례한 경우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도 화를 내지 않는 조코가 너무너무 신기하고도 걱정됐습니다. 이대로 살아도 이 사람, 정말 괜찮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밖에도 일본 역사에 얽힌 일화라든가, 일본 대학 내에서 야구라는 스포츠가 가지는 위상 같은 것이 수수께끼 풀이에 영향을 미치는지라, 일본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 잘 읽힐 것 같기는 합니다. 저 역시 일본 소설을 꽤나 많이 읽고 일본 역사에 대해 그래도 남들보다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이런 게 있었구나 싶어서 약간 공부하는 기분으로 읽기도 했어요. 아 물론 이 책은 결국 로맨스소설이니까, 이거저거 다 빼고 조코와 미키지마 선배 위주로만 읽는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들이지만 말이죠^^




 요즘 《블랙 로맨스 클럽》에서 로맨스를 가장한 장르소설을 많이 내줘서 정말 좋습니다. 한 가지 장르에 충실한 소설도 재미있지만, 이렇게 여러 장르가 뒤섞인 책들은 여러 가지 감각을 동시에 만족시켜줘서 왠지 체감상 더 만족도가 높은 것 같아요. 공포물에다, 동화에다, SF에다, 판타지에다, 이제는 미스터리까지!! 로맨스가 이토록 다양한 장르에서 꽤나 잘 버무려지고 있다는 건 독자로서 행복한 일이네요. 앞으로 또 어떤 장르의 로맨스가 나올지 기대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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