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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ㅣ 변호사 고진 시리즈 5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16년 5월
평점 :
※ 이 글에는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중하게 스크롤을 내려주세요!
간만에 읽은 추리소설이었습니다. 원래 추리소설을 좋아해서 닥치는대로 읽는 편인데, 요즘은 다른 장르에 너무 빠져있어서 소설 자체에 대한 관심이 좀 시들시들하고 신작도 거의 흘려보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도진기 작가의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를 읽고나니 다시 추리소설에 관한 관심과 애정이 몽글몽글 솟아나네요! 아 정말 너무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최대한 많은 분들께 영업을 하고 싶은데, 장르의 특성상 리뷰에 어쩔 수 없이 스포가 포함될 것 같아요. 스포 없이 영업글을 쓰기엔 아직 내공이 부족한지라.. 양해 부탁드립니다ㅠㅠ 물론 내용을 전혀 모른 채로 보는 것이 가장 재미있기 때문에 속는 셈 치시고 그냥 바로 책을 읽으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본격추리와 법정물, 두 마리 토끼를 잡다
시작은 너무나도 매혹적인 한 여인이 변호사 고진을 찾아오면서부터입니다. "남편을 죽여주세요"라고 말하는 낯선 여인의 의뢰를 거절하고 난 몇일 후 그 여인의 남편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뒷골목에서 살해당한 채 발견됩니다. 당연하게도 여인은 제1순위 용의자에 오르고, 고진은 이 여인을 변호하기 위해 자신의 원칙을 깨고 법정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독자는 처음 남편의 살해의뢰를 했던 여인의 모습을 기억하기 때문에 여인의 무죄를 온전히 믿어줄 수 없어요. 과연 이 여인이 범인일까? 이 가련하고 연약한 모습 뒤에 독을 품은 마녀가 숨어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정말로 무죄이고 다른 친구들 중 한명이 범인일까? 그렇다면 범인은 셋 중 누구이고 어떤 트릭을 써서 빠져나간 것일까? 독자들은 끝까지 의심의 끈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증거가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는데, 그래서 오히려 그 한 사람이 범인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아예 제외하고 생각하자니 걸리는 게 너무 많거든요.
사실 범인은 처음에 제시한 다섯 명 중 한 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피고인인 김명진, 그녀의 동생 김해나, 남편이 되지못한 세 명의 동창생. 만약 고진의 의뢰인인 김명진이 무죄라면 나머지 네 사람 중 한 명이 범인이에요. 검사인 조현철이 지적했다시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뒷골목에서 면식범에 의해 한국에서만 판매하는 낚시줄로 살인이 일어났기 때문에 다른 교민이나 러시아인에 의한 살인일 가능성이 거의 없거든요. 동기와 접근성이 둘 다 있었던 네 사람 중 한 사람이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게 타당합니다. 그런데 김명진을 제외한 나머지 네 사람은 모두 알리바이가 명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명진이 범인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변호사 고진은 진범의 알리바이를 깨고 그 트릭을 밝혀야 하는 과제를 맡게 됩니다. 한마디로 "알리바이 깨기"가 관건인 거죠.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의 경우 전형적인 본격 추리소설 같으면서도 법정물 같은 느낌이 강합니다. 그러면서도 로맨스의 향기도 풍기죠. 장르가 섞여있어서 어느 한 장르가 취향이 아니신 분들이라도 재미있게 보실 수 있어요. 저같은 경우는 본격 추리의 경우 너무 '트릭만을 위한 트릭'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사회파나 일상, 하드보일드 등 다른 미스터리에 비해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법정물의 성격이 강하다 보니 무척 재미있게 읽히더라구요. 매 재판마다 분위기가 확확 뒤집어져서 끝까지 결말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들거든요. 반대로 법정물을 즐기지 않는 분이라 해도 후반부에 등장하는 알리바이 깨기 및 범인 찾기에 몰두하며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중간중간 깨알같은 미스터리들도 꽤 많이 포함되어 있어요. 과연 '그날의 달리기'에서 우승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긴 사람이 남편이 된 게 맞을까? 같은 소소한 미스터리는 글을 읽는데 계속 긴장감을 가지도록 유지시켜주면서도 빠르게 해결되기 때문에 너무 궁금해서 뒤부터 펼쳐보는 나쁜 습관을 막아줍니다. 달달한 걸 좋아하셔서 도대체 여기 어디에 로맨스가 있다는 거야? 싶으신 분들도 마지막까지 읽으시면 납득이 되실 거예요.
그는 악마로소이다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라는 제목과 표지의 일러스트를 봤을 때, 저는 당연히 변호사 고진을 '악마'라고 칭하는 것인 줄 알았어요. 일단 고진은 법정에 서지 않는 걸로 유명한 뒷골목 변호사인데다, 그림자 속 악마의 넥타이나 법봉(이라고 생각한 망치 비슷한 무엇)이 화이트칼라, 그 중에서도 법조계 종사자를 뜻하는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은 그 내용에 골몰하느라 정작 제목과 표지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별로 없었어요. 책을 덮고나서 다시 한번 표지를 보고서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악마는 정말로 법정에 서지 않았다는 것을요.
초반에는 언뜻 청춘물스러운 느낌마저도 들지만, 그 느낌은 물론 배신당해요. 이게 단순히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가 되지 못하고 파국을 맞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건이 전개되고 김명진이 왜 남편을 죽이고 싶어했는지 드러날수록 범인의 살해 동기가 명확해지는 동시에 앞부분의 싱그러움 또한 퇴색합니다. 그저 보통사람 같았던, 아니 오히려 남에게는 평판도 좋았고 "싹싹하고 붙임성있으며 정이 많다"는 소리를 듣던 남편이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오랜시간 아내에게 정신적/사회적/육체적 폭력을 가해왔다니.. 의뢰인인 김명진은 물론이고 대학 내내 붙어다녔던 친구들조차도 그의 가면을 꿰뚫어보지 못한 것이 너무 현실적이라 소름이 끼쳤습니다. 실제로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가정에서 학대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고, 그 내부자가 아니면 실체를 짐작도 하기 어려운 법이잖아요.
게다가 20여년의 세월을 지나 각자 사회인이 되어 다시 만난 동창들의 모습이 어찌나 속물적이고 실망스러운지요! 물론 멍청하고 바보같은 짓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마저도 청춘의 특권 같았던 풋풋한 대학생들은 온데간데 없고, 그저 돈만 밝히고 자기 유리한대로 느물거리는 중년 아저씨들만 남아 오히려 만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법했다고 느껴지기까지 해요. 게다가 사건이 전개될수록 더더욱 실망감은 커집니다. 웃는 모습을 보니 실망이라고 하지를 않나, 지금 니가 힘든 건 알지만 돈을 갚으라고 닥달하지를 않나.. 그 중에서도 제가 가장 배신감이 들었던 순간은 김명진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몰려 있었는지 나머지 네 사람이 알고 있었다는 게 드러나던 순간이에요. 아니, 사람이 그렇게까지 당하고 있으면 생판 남이라도 도와주는 게 인지상정 아닙니까?!!!!! 그토록 김명진을 사랑한다던 사람들이 알면서도 손 놓고 있었다는 게 말이 돼요???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
이 모든 일의 사단은 물론 하필이면 김명진의 남편이 폭력적이고 집착이 쩔면서도 매우 매끈한 사회적 가면을 쓰고있는 개새끼였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날 밤의 달리기'가 없었다면 (다른 여자가 대신 희생되었겠지만) 적어도 김명진만은 지옥에 빠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어요. 결국 김명진의 인생을 망친 건 '그날 밤의 달리기'였던 셈입니다. 애초에 말도 안되는 내기였어요. 말도 안되는 제안이었구요. 처음엔 가볍게 생각하고 시작했을지 몰라도, 다들 전력투구로 덤비면 상황이 점차 진지하고 심각해지리라는 걸 그들 중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게 놀랐습니다. 적어도 한명쯤은 이 달리기 결과를 '아 미안 농담이었어~ 호호' 하고 웃으며 지나갈 수 없게 되리라는 걸 알았어야 해요. 물론 그렇게 심각해진 상황에서도 김명진이 자기 속마음을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여자였다면 상황이 달랐겠지요. 하지만 김명진은 거절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는 여자였고, 모두들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사랑받고 살았을 여자인가. 그저 보통의 남자만 만났더라도. - p.399
돌이켜보면 세 남자 모두 김명진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계속 사랑했습니다. 처음엔 세상 풍파에 닳을대로 닳아서 이제 더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읽어보면 결국 세 남자 모두 마음 한 구석엔 김명진의 자리를 남겨놓고 있었죠. 다들 20여년 전의 일이라며, 지나간 감정이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지만요. 이루지 못한 첫사랑이라서 더 아련하고 미련이 남았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혹은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자신을 그리워한 것일지도요. 어쨌든 그들은 모두 김명진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아무도 김명진의 곁에 남아있지 않아요. 남아있을 수도 없구요. 그토록 매력적이고, 그토록 사랑받으면서도, 그토록 곁에 아무도 없을 수 있다니.. 그 운명이 너무나 가련합니다.
남자 작가라 그런지 김명진의 매력을 묘사할 때 확실히 남성적인 시각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첫 등장에서도 고진의 시선으로 김명진을 묘사하고, 재판이 시작되었을 때는 이유현의 시선으로 김명진을 바라보고, 대학 생활에서마저도 네 남자의 시선으로 본 김명진은 명확하게 나오지만 김명진 본인은 시각은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드러나는 때는 네 남자 중 김명진이 누군가 한 사람을 마음에 품고 응원을 할 때뿐인데, 그것마저도 벌어진 사건이나 김명진의 인생에 그닥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죠. 김명진도 그렇고, 김해나도 그렇고, 주체성이나 독립적인 캐릭으로서의 매력은 아예 배제되어 있고 남성이 봤을 때 매력적인 부분, 남성의 눈으로 봤을 때 끌리는 부분만 중점적으로 부각되어 있는 건 개인적으로 아쉽습니다. 기본적으로 착한 심성을 가진 캐릭들은 다들 예쁘면서, 질투로 남의 인생을 망치는 캐릭은 외모가 부족하고 떨어진다는 묘사도 좀 아쉽고요. 물론 실제로 외모가 떨어지는 친구가 외모가 출중한 친구에게 질투를 느끼는 일이야 있을 수 있지만, 그 정도의 악의를 가진 친구를 눈치채지 못하고 친하게 지냈다는 것 자체가 약간 어색하게 느껴졌어요.
도진기라는 이름, 고진이라는 브랜드
도진기라는 이름은 현재 한국 추리소설 시장에서 여러모로 화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현직 판사가 추리소설 작가로 나섰다는 전무후무한 경력 때문이기도 하고, 추리소설이 제대로 뿌리 내리지 못한 한국에서 몇 안되는 본격 추리소설 작가라 그렇기도 해요. 일단 스토리적으로도 흥미로운데 트릭 역시 진공 속에서 만들어낸 느낌이 아니라 '이 정도면 있을지도 몰라' 싶은 느낌이 들게 짜여져 있고, 배경이나 설정이 너무 과하게 느껴지지 않아 이질감이 덜해요. 특히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같은 경우는 작가 본인의 직업을 잘 살려 재판의 풍경을 잘 그려냈어요. 법조계에 종사하지 않는 저로서는 조현철 검사가 영장청구를 빌미로 판사에게 구속을 강요하는 게 왜 저열한지, '공정한 재판'에 대한 판사와 검사가 왜 열망을 가지는지, 언뜻 유리하게 보이는 재판이 왜 불리하다는 것인지 하는 법조인의 눈으로 본 내부사정은 잘 알수가 없는데, 그 부분이 빠짐없이 설명되어 있더라구요. 작가들은 간혹 '내가 알고있으니 독자도 알고있겠지' 하고 넘어가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도진기 작가는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아무래도 '이것이 과연 가능한 트릭인가?', '현실성이 있는 이야기인가?' 하는 점이 가장 신경쓰이더라구요. 몇몇 부분에서는 분명 작가가 만들어낸 우연이 살짝 어색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트릭에 만족하는 편입니다. 제가 좀 억지스럽다고 느낀 부분은 등장인물 중 한명이 자신의 친구를 만나러 가는 와중에, 굳이 고진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가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었어요. 좋은 이야기가 오갈 것도 아니고 고진이 딱히 그 친구와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고(오히려 나쁜 편이었죠) 친구의 상태까지 알고 있는 상황에서.. 고진이 전체적인 그림을 맞춰볼 수 있게 힌트를 주려고 가야만 했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그외에는 조현철이 자신있게 형사와 고진의 뒤통수를 치며 내놓은 증인들이라든지, 가장 결정적인 범인의 알리바이 트릭 같은 큼지막한 부분들은 다 괜찮았어요~
유명한 탐정 소설 주인공들처럼, 작가가 고진이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꾸준히 써줬으면 좋겠어요. 고진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 하나의 브랜드가 될 수 있게요! 소위 말하는 뒷골목 변호사, 법의 허점을 노리는 변칙적 해결만을 도모하는 변호사라는 고진은 캐릭터적으로 정말 매력적이거든요. 법조계의 인맥이나 관습에 휘둘리지 않는 변호사 캐릭은 그 자체만으로 멋집니다. 게다가 꼭 법정에서 싸우는 게 능사는 아니잖아요? 법정에서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공명정대한 정의가 실현되리라는 기대가 거의 없는 나라에서, 법정에 가기 전에 싸움을 끝내버리는 변호사가 하나쯤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도진기 작가는 공식대로 재판이 흘러가는 법정에서 이야기를 전개시키기가 더 까다로워서 그런 설정을 한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고진의 매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죠. 이번 편에서는 자신이 들여다보지 못하고 그저 지나쳤던 의뢰인으로 인해 법정에 섰지만, 아마 다음 편에서부터는 다시 법정 밖에서 사건을 해결하지 않을까 해요.
더군다나 한번 쓰고 버리기에 아까운 등장인물들이 많아요. 저는 경구란이 어느 순간 도진의 일을 돕는 주요인물로 성장하지 않을까 기대중입니다. 처음엔 서로 싫어했다가 점점 편한 사이가 되는 식으로 감정선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고, 예쁜데다 머리까지 잘 돌아가는 피아니스트라니.. 고진 변호사가 할 수 없는 일을 해주거나 갈 수 없는 곳을 가주거나 알 수 없는 정보를 가져다줄 것 같아요. 조현철 검사 같은 경우에도 악착같긴 해도 흥미로운 빌런입니다. 같은 사건을 맡아 조사했던 이유현 형사마저 깜짝 놀랄 정도로 세세한 지점까지 파고들어 재판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게다가 딱히 정의롭지도 않지만 맡은 일은 잘해내는 유능함이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고진 변호사와 합작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는 너무 사심을 듬뿍 담은 발언인가요ㅋㅋ
간만에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얼마나 재밌었는지 다시금 일깨워준 책입니다. 이 책 덕분에 다시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불이 붙어서 연이어 책을 주문했답니다. 다행히도(?) 아직 읽지 않은 시리즈 전작 <붉은집 살인사건>이 남아있어서 행복하네요. 이번 주말은 안방에서 시원하게 바람이나 쐬면서 추리소설 읽는 즐거움을 누리려고요! 무더운 여름, 뒷장이 절로 궁금해지는 추리소설 한권,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