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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
모리 아키마로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블랙 로맨스 클럽》의 표지는 언제 봐도 정말 멋있습니다. 저는 애시당초 표지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블랙 로맨스 클럽>의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된 케이스라서, 언제나 표지의 아름다움과 적절함과 우아함을 찬양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특성이 있는데요. 특히나 제 마음을 사로잡은 건 언제나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겉표지를 한꺼풀 벗겨내면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속표지가 있다는 겁니다. 겉표지가 '밖으로 보여지는' 소설의 이미지라면 속표지는 '등장인물 내면을 보여주는' 표지 같아서 정말 좋아요! 겉표지를 보고 집어들었다가 속표지를 보고 속으로 짜릿함을 느끼는 재미가 항상 있답니다~ㅎㅎ <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의 속표지 역시 근사했어요. 제가 느낀 '봄에 읽는 청춘소설'에 부합하는 이미지라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실물로 확인해보시길..^^)
"여긴 추리연구회죠?"
"보시다시피, 여긴 취리연구회지."
주인공 사카즈키 조코는 한때 유명한 아역 배우였으나 본인이 원해서 선택한 일이 아니었기에 어느 순간 그 일을 내던져버리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에 도망치듯 진학한 학생입니다. 어머니가 원하는 배우의 길도, 아버지가 원하는 주조장의 가업을 잇는 길도 전부 싫지만, 그렇다고 딱히 하고 싶은 건 없어서 방황하는 중이에요. 아역이었던 시절을 숨기고 싶어 두꺼운 뿔테안경과 앞머리로 철저히 자신을 가리며 평범하고 흔한 소녀로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그녀가 단 하나 좋아하는 게 있다면 바로 미스터리! 유서 깊은 추리동아리 '추연'에 가입하기 위해 방황하던 그녀는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신비로운 선배에 놀라 '취연'이라는 동아리에 실수로 가입하고 맙니다. (둘의 일본어 표기는 똑같다고 해요) '취연'은 추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오로지 취하기 위해서 마신다는 모토를 가지고 있는 이상하고도 엉뚱한 동아리인데, 주조장 딸이었던 사카즈키 조코에게는 굉장히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운명적인 것 같은 곳이죠. 그렇게 1년을 보내면서 아무리 술에 마셔도 절대 취하지 않는 체질인 주인공이 서서히 다른 모든 것들에 취하는 이치를 깨닫게 돼요.
사실 이 책 같은 경우는 《블랙 로맨스 클럽》에서 나왔기 때문에 로맨스로 분류한 거지, 그냥 일반 일본 미스터리 장르로 나왔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을 것 같아요. 일본에서는 미스터리 장르가 굉장한 인기를 얻고 있기 때문에 굉장히 세세한 미스터리 하위장르들로 갈래가 나뉘어져 있거든요. 그 중에서도 일상 미스터리라고 하면, 소소한 일상의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될 법한 그런 미스터리들, 시체가 나오지도 않고 거대한 사건도 없지만 그냥 신경쓰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쳐버렸을 법한 사소한 비밀들을 다루는 장르입니다. <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 역시 일상 미스터리의 형식을 띄고 있어요. 몰라도 상관없지만 알게 되면 묘한 쾌감이 있는 이야기들이죠.
청춘소설로 읽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아요. 모든 순간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눈이 부시고, 싱그럽거든요. 어찌된 일인지 그냥 바닥에 축 늘어져 있다가 좀비처럼 꿈틀꿈틀 일어나는 동아리 회원들의 모습까지도 낭만에 젖어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빡빡하고 좁은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대학생활을 해서인지, 아니면 현재 대한민국에선 이렇게 여유로운 대학생활이 가능한 사람이 없다고 느껴져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뭔가 현실에서는 쉽사리 볼 수 없는 낭만이 숨쉬고 있어요. 몇번이나 출석을 하지 못해 1학년에 재학중인 전설의 선배라든가, 낯선 사람들과 금세 의기투합해 다같이 술에 취해 뻗는 모습이라든가, 우연히 만난 할아버지가 알고보면 상당한 실력자라든가, 이런 말도 안되고 엉망진창인 것 같으면서도 신기한 모습들이 장마다 널려있습니다. 부러워요, 그 반짝거림이~
사실은, 취해 있던 거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주제에, 취해 있었다
<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 같은 경우 총 5편의 단편소설들이 연작소설 형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각 꽃/공/해변/달/눈에 취하는 로직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어요. 제목의 '이름 없는 나비'는 주인공 조코를 의미합니다. 아직 뚜렷한 정체성을 찾지 못한 채 본인의 표현대로라면 "빛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그저 마구 달리는 중인" 청춘이지요. 조코는 사실 아무리 마셔도 절대로 술에 취하지 않는 체질인데, 그것을 '아직 취하지 않아' 라고 표현한 것 역시 의미심장하고도 멋집니다. 이 소설이 결국 "어떤 술에도 취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든 취할 수 있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화하는 1년의 이야기인 셈이니까요. 꽤 시적이지 않나요?
그 중에서도 제1장 꽃에 취하는 로직은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분위기와 정서를 담아냈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미키지마 선배는 조코 자신도 몰랐던 조코의 체질에 얽힌 비밀을 쨘 하고 풀어냅니다. 사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오호' 하고 새삼 미키지마 선배의 숨겨진 관찰력과 추리력에 감탄했습니다. 앞서 자연스럽게 미스터리와 힌트들을 함께 흩뿌려 뒀는데, 저로서는 조코의 체질에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거든요. 봄에다, 벚꽃에다, 신입생 환영회에다, 술판에다, 신비로운 눈을 가진 낯선 선배와의 독대에다, 달에다, 첫키스에다.. 아주 그냥 싱그럽고 반짝거리는 청춘의 향기가 책에서 배어나오는 것 같은 1장입니다. '꽃에 취하는 로직'을 읽다가 저도 꽃에 취해버렸나 봐요ㅋㅋ
로맨스의 주인공은 (당연히) 주인공인 조코와 (예상대로) 조코를 매의 눈으로 낚아채 취리연구회에 가입시킨 미키지마 선배입니다. 이 둘은 시종일관 간질간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일본 특유의 별거인 듯 별거아닌 별거같은 관계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이 관계가 정말로 천~~~천히 쌓여가기 때문에 때론 좀 답답하기까지 해요. 독자인 나는 이미 눈치를 챘는데!! 둘은 이미 쌍방인데!! 짝사랑 좀 고만하고 얼른 고백하라고 이 바보야!!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나왔다가 들어가곤 합니다. 하지만 역시 남의 연애란 쌍방이 짝사랑일 때 답답하면서도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법이죠. 선배가 넌지시 흘려주는 힌트들을 분명히 받고 있으면서도 확신이 없는 조코는 썸타는 우리네 모습과 다르지 않아서 사랑스럽습니다. 조코의 마음을 분명히 눈치채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좀 야속하기까지했던 미키지마 선배도 마지막 장에서 순정남의 면모를 드러내며 캐릭터를 완성합니다. 사실 끝까지 모른 척하면서 조코 애를 태웠으면 많이 얄미웠을 거예요!!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런데 일본 소설이라 그런지 확실히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들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5장 눈에 취하는 로직을 보면 주인공 조코가 집으로 돌아가보니 아버지가 가업을 이으라며 결혼 상대를 정해놓고, 결혼 날짜까지 잡아놓고, 심지어 상대방 일가친척들까지 다 불러놓고(!!) 당장 식을 올리라고 억지를 부리는 장면이 나와요. 물론 조코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그 반항의 정도 같은 게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확실히 떨어진달까요. 심지어 '내게 이렇게 온화한 사람과 결혼해 차분하게 일생을 보내는 선택지도 있다'라고까지 이야기합니다. 물론 진짜로 결혼하지는 않지만, 미키지마 선배만 없었어도 어, 어, 하고 등떠밀려서 저도 모르게 결혼했을 것 같은 느낌이라 좀 놀라웠어요.
그리고 이건 아마 일본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처음 만난 여성이 갑자기 조코의 얼굴에 드롭킥을 날려서 조코가 복도 미닫이문을 뚫고 붕 날아가서 눈 속에 털썩 떨어지는 일이 있거든요. 일방적으로 엄청나게 얻어맞은 거죠!!!!! 그리고 그 여성은 사과 한 마디 없이 사라져 버려요. 물론 이것 역시 수수께끼에 얽힌 일이었고 나중에 무슨 사정인지 다 밝혀지기는 했지만, 정말 생각할수록 황당하고 어이없고 무례한 경우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도 화를 내지 않는 조코가 너무너무 신기하고도 걱정됐습니다. 이대로 살아도 이 사람, 정말 괜찮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밖에도 일본 역사에 얽힌 일화라든가, 일본 대학 내에서 야구라는 스포츠가 가지는 위상 같은 것이 수수께끼 풀이에 영향을 미치는지라, 일본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 잘 읽힐 것 같기는 합니다. 저 역시 일본 소설을 꽤나 많이 읽고 일본 역사에 대해 그래도 남들보다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이런 게 있었구나 싶어서 약간 공부하는 기분으로 읽기도 했어요. 아 물론 이 책은 결국 로맨스소설이니까, 이거저거 다 빼고 조코와 미키지마 선배 위주로만 읽는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들이지만 말이죠^^
요즘 《블랙 로맨스 클럽》에서 로맨스를 가장한 장르소설을 많이 내줘서 정말 좋습니다. 한 가지 장르에 충실한 소설도 재미있지만, 이렇게 여러 장르가 뒤섞인 책들은 여러 가지 감각을 동시에 만족시켜줘서 왠지 체감상 더 만족도가 높은 것 같아요. 공포물에다, 동화에다, SF에다, 판타지에다, 이제는 미스터리까지!! 로맨스가 이토록 다양한 장르에서 꽤나 잘 버무려지고 있다는 건 독자로서 행복한 일이네요. 앞으로 또 어떤 장르의 로맨스가 나올지 기대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