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 1
배명은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이 글은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싫으신 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참 신기한 게, 저는 어릴 때부터 귀신 이야기나 도시전설 같은 괴담은 재밌어하면서도 공포라는 장르 자체는 좋아하지 않았어요. 공포 영화나 소설을 보면 저는 그게 어쩐지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전개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작가가 날조한 '사기'나 '거짓말' 같다고 느껴버리는 겁니다. 예를 들어 갑자기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촛불이 스르륵 꺼지고 어둠 속에 주인공들이 홀로 남겨지게 되는 장면이 있다면, 그게 사람이 한 짓이든 귀신이 한 짓이든 타당한 이유나 과정을 설명해주지 않고 얼렁뚱땅 넘어가버리는 것에 대해 짜증이 치솟곤 했거든요. 범인이 사람이면 '아니, 도대체 어떻게 손도 안대고 한꺼번에 촛불을 다 꺼버릴 만큼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거야?' 하고 범인이 귀신이라면 '아니, 도대체 귀신이 왜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를 하겠어?' 싶어졌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결국 내가 지금 피부로 느끼고 있는 현실감이나 생활감이 제대로 묻어나지 않는 게 싫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그렇지 않아서 매우 좋았습니다! 확실히 한국을 배경으로, 당장 주변에서 들을 수 있는 이름의 주인공들을 만나는 것은 외국 작품을 볼 때와는 또 다른 친밀감을 주더라구요. 그러면서도 공포를 주는 정서가 정확히 지금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과 맞닿아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아!!! 하는 절박한 외침이 곳곳에서 느껴지는 단편들이었어요.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절망과 체념, 분노와 자포자기의 정서가 보였어요. '우린 안될거야 아마..'하는 자조적인 유행어처럼 답도 없는 바닥으로 자꾸만, 자꾸만 꺼지는 내 삶을 누가 대신 살아줬으면 좋겠고(위탁관리), 평생 뼈빠지게 일해도 내 몸 하나 누일 공간 하나 마련 못할 게 뻔하고(천장세),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가정폭력의 위협에서 도망쳐도 내 아이가 왕따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은 사라지지 않으며(그네), 독박육아로 아이가 악마로 보이는(이른 새벽의 울음소리) 등의 공포가 어떻게 현실로 와 닿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게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천장세」가 아닐까 해요. 읽으면서 너무 괴로워서 그냥 읽은 척 하고 넘어갈까 싶어질 정도로 생생한 지옥도였거든요. 왜 도시가 그 사람들을 아무런 노동력조차 제공하지 못하는 형태로라도 붙잡아두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설명이 더 필요하다고 느껴지지만, 일단 전세-월세-사글세-월월세-천장세 라는 피라미드 형태 자체는 알기 쉽고 또 공감하기 쉬운, 좋은 장치였다고 생각합니다. 샤워를 하면 변기에 부딪치는 좁은 화장실에서 신혼부부가 월월세를 사는 것도 모자라, 화장실 위 조그만 공간을 천장세로 놓는다는 발상은 끔찍하기 그지 없어요. 얼마 전에 강남 셰어하우스랍시고 홍보하던, 1인당 면적이 5평도 채 안되던 홍콩식 관짝쪽방 같던 주거형태 생각도 나면서 숨이 턱 막히더라구요. 이 소설이 지나친 상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듯한 전조들이 2017년의 한국 사회 사방에서 보이고 있잖아요? 가난한 소시민 입장에서, 천장세와 같은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만으로 얼마나 죽고 싶어지던지요. 그냥 언뜻 생각해봐도 천장세를 살 정도로 생활력이 떨어진 사람은 아무리 애를 써도 다시는 일반 시민으로 올라올 수가 없잖아요. 매일 누워지내야 하니 허리가 아작나고, 제대로 먹지도 싸지도 운동하지도 못하니 체력은 점점 떨어지고, 제대로 된 일이나 생활을 할 수도 없고.. 사실상 사회적인 보호 장치가 전무한 채로 그냥 죽으라고 내던져진 것이나 마찬가지라구요! 그리고 도시는 그들을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놓아주지 않구요. 정말 소름끼치도록 한국적인 디스토피아에요.

 

 반면 세계 어디에서도 보편적인 이입과 공포를 끌어낼 수 있는 작품은 뭐니뭐니해도 「증명된 사실」이겠죠. 살면서 죽음 그 이후를 궁금해하지 않는 인간은 그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요. 제가 브릿G라는 플랫폼을 알게 해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다른 커뮤니티에서도 끊임없이 추천글이 올라오며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에요. 저처럼 '영혼'이라는 게 있다고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글의 마지막에 섬뜩한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왜냐면.. 상상하게 되고 마니까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혹은 내가 죽었을 때, 그 뒤를 상상하게 되잖아요. 차라리 유물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영혼이 아예 없이 모두가 무(無)로 돌아가는 거라면 차라리 안심이 됩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빛'이나 죽은 자들의 '세상'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 역시 좀 두렵기는 하지만 금방 납득하고 적응할 만 하죠. 하지만, 정확하게 100%의 확률로, 살아 생전의 그 어떤 부와 권력과 명성을 누렸든 말든 상관없이, 죽음 뒤에 다가올 미래가 그런 것이라면... 온 인류가 우울증과 무기력, 트라우마에 빠지게 되지 않을까요? 아무리 발버둥쳐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잖아요. 그 어떤 대책도 마련할 수 없고, 그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완벽한 절망- 그것을 이토록 담담하고 꾸밈없는 문장으로 그려놓았다는 게 놀라울 뿐입니다. 게다가 실제로 '그럴지도 몰라'하고 내심 납득하게 된다는 점까지 어마무시한 작품이에요;;; 그동안 들었던 모든 이야기를 통틀어 제일 무서우면서도 현실적인 죽음 이후에 대한 가설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이 작품을 읽고 난 이후에 내심 이게 진실일지도 모른다고 믿고 있을 정도랍니다.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제발 영혼에게도 수명이라는 게 있어서 죽음 이후의 상황이 짧기만을 바랄 뿐이에요ㅜ

 

 그밖에 어디선가 많이 읽어보았던, 익숙한 문법의 이야기들도 있었습니다. 「완벽한 죽음을 팝니다」같은 경우, 원하는 것을 주는 듯 하지만 결국 어떤 식으로든 비극으로 이끌고야 마는 악마 혹은 신 같은 존재가 등장합니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고 상대가 그것을 받아들이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것으로는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게 만드는 식이에요. 일종의 공식으로 굳어진 형식이라, 이 경우 이야기의 참신함보다는 얼마나 더 교묘하게 상대를 회유하고 술책을 쓰는지가 관전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거래를 제안받는 입장에서는 나쁠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이걸 받아들이는 게 맞는 것 같은데, 항상 빼먹은 뭔가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독자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의 구멍을 찾아내어 쨘! 하고 내미는 것을 보는 쾌감이 있어요. 자살공화국 대한민국에 딱 어울리는 설정이기도 해서, 만약 나라면 어떤 걸 택했을까 생각해보는 재미도 있었습니다.「더 도어」는 일본 괴담 이야기에서 자주 보이는 패턴이죠. 사람들이 잡아먹는 그림이나 그에 얽힌 사연들이 굉장히 전형적이었어요. 하지만 마지막 주인공의 선택이 마음에 들어서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죄를 지었고, 또 자신에게도 해를 가하려고 했던 사람에게 온정이나 배려를 베풀 필요는 없으니까요. 권선징악 매우 좋아합니다ㅋㅋ

 

 아쉬운 이야기를 꼽자면 아무래도 「이른 새벽의 울음소리」가 될 것 같습니다. 일단 매맞고 사는 남편이 독박육아를 한다는, 굉장히 드물고 신선한 소재를 가져왔는데 결과적으로 그게 모두 서술트릭이었다는 것이 매력을 좀 떨어뜨려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별 의미없던 힌트들이 나중에 하나로 주르르 꿰이는 것 자체는 괜찮았지만, "아기한테 원한 샀다가는 평생 아기 울음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자." 하고 말하는 전문가라든가 갑자기 나타나 심판(?)받는 동생 같은 요소들은 좀 억지스러웠습니다. 전체적으로 나쁜 아내이자 엄마인 여자를 응징하겠다는 목표만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보였달까요? 차라리 이미 죽은 사람의 입을 빌려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편이 훨씬 더 자연스러웠을 것 같아요.

 

 

 오랜만에 장르소설, 그것도 단편소설들을 읽어서 행복했습니다. 확실히 단편은 틈틈이 가지고 다니면서 읽기 정말 좋은 것 같아요! 통근길 버스나 지하철에서, 혹은 식사를 주문하고 기다리면서, 모임시작 전 잠깐 동안에 얼른 한편을 해치울 수 있잖아요~ 게다가.. 이 중에 하나는 니 취향이 있겠지!! 같은 느낌ㅋㅋ​​ 여기 실린 10편의 단편은 브릿G에 게재된 2000여편의 작품 중 고르고 골라 엄선된 화제작이라고 들었는데, 덕분에 저같이 게으른 독자에게도 한번에 읽을 기회가 주어져서 좋네요ㅎㅎ 게다가 마음에 드는 작가님들의 다른 작품을 찾아읽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구요. 이렇게 각자 장르와 개성이 다른 단편들이 <한국 공포 문학의 밤>이라는 주제 아래 엮어 나왔다는 것도 재밌어요. 주로 해외 장르소설 위주로 편식이 심했던 저에게 새로운 자극이 되었습니다. 책날개에 보니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이나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도 있던데 찾아 읽고 싶어졌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