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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신처에서 보낸 날들
장길수 지음 / 열아홉 / 2021년 11월
평점 :
북한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가? 탈북민에 대해서는 또 얼마나 아는가? 생각해보면 정말 아는 게 없어서 부끄러울 지경이에요. '한국판 안네의 일기'라는 홍보문구를 보고, <안네의 일기>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다들 읽는데 정작 현대판 안네인 탈북민의 일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구나 반성이 되서 펼쳐들게 된 책이었습니다. 장길수라는 청소년 탈북민의 일기인데, 정확한 날짜는 적혀있지 않고, 그날 그날의 제목만 달아놓았더라고요. 너무 솔직하게 써놔서 좀 놀랐습니다. 저라면 이렇게까지 못 썼을 것 같거든요. 애초에 이 일기는 세상에 공개될 목적으로 씌여졌는데, 이렇게까지 자기 치부를 드러낸다고? 싶은 부분이 많았어요.
구체적인 탈북 여정 같은 건 나오지 않습니다. 이 책은 탈북을 하고 나서, 장길수네 가족이 '큰아버지'라고 부르는 한국 남성을 만난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큰어머니'라고 부르는 조선족 여성 역시 나오는데 사실 이 두 사람이 장길수 가족의 망명의 핵심입니다. 탈북민은 중국 공안에게 잡히면 바로 북한으로 이송되어 버리기 때문에 정작 탈북하고 나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그저 '없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대요. 당연히 돈도 벌 수 없고, 뭘 배우거나 주변과 교류하기도 어렵죠. 그냥 잡힐 때까지 숨어 사는 거예요. 숨을 곳을 못 찾으면 일자리 구하다가 몇달 치 월급 못 받고 내쫓기고 그러는 경우도 많다네요;;; 그러다보니 큰아버지, 큰어머니처럼 탈북민을 돕는 제3자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사람들이 없으면 탈북민들은 그냥 잡혀갈 날을 받아놓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탈북 직후에 운 좋게 (모든 탈북자가 이런 조력자를 만나는 것은 아니니, 천운이라고 봐야겠죠?)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를 만났고, 두 사람의 비호 아래 여기저기 은신처에서 숨어 사는 생활을 했는데 이 때의 일기가 정말 솔직합니다. 이제 슬슬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먹을 수 있게 되니 반찬 투정이라는 것도 하고, 바깥에 나가고 싶은데 위험하다고 못 나가게 감독하는 사람이 짜증스럽고, 당장 한국으로 튀어가고 싶은데 계속 기다리라고만 하는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벼랑 끝 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아무래도 의심이 많아지기 마련이라, 15명이나 되는 대인원 사이에서 몇 번이나 싸움도 나고 이탈자도 생기고 여하튼 우여곡절이 많았던 모양이에요. 그런 심리를 굉장히 솔직하게 써놔서, 읽으면서 약간 질리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사람은 입체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보니, 으레 이렇게 되겠거니 싶어요. 우릴 도와주네? 고마운 사람이다! 하는 것도 처음 잠깐이고, 원하는대로 안 되면 원망부터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래도 장길수 일행은 거의 기적처럼 모두가 함께 한국 망명에 성공한 케이스이고, 그걸 처음부터 아는 상태로 읽으니까 좀 마음이 편했습니다.
처음에 서두를 읽을 때만 해도 큰아버지, 큰어머니 두 사람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좀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어요. 특히 사업을 했다는 큰어머니 쪽은 예전에 꽤 잘 살았던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탈북민을 돕고 그들을 지원하는 데 돈이 무한정 들어가다 보니, 현재는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것 같았습니다. 큰아버지 자식들이 학비가 없어서 힘들어한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몇 번 나오거든요.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하는 걸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어요. 특히 도움 받는 탈북민 쪽에서 적반하장 식으로 나오는 경우도 굉장히 많은 것 같은데, 사람이 선의로 하는 희생을 상대가 당연히 여기고 그걸 멸시하기까지 하면 당연히 마음이 안 좋을 수밖에 없잖아요. 저라면 진작에 포기해버렸을 것 같은데... 이런 사람 덕분에 그래도 세상이 조금씩 더 나아지는 거겠지 싶어요.
책을 읽고나서 자꾸 생각이 많아집니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는 탈북민들은 정말 다들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요? 제가 모든 걸 다 버리고 외국으로 급하게 몸만 탈출한 상황인데, 거기서 경찰에 걸리면 안 되는 처지라면 도대체 어디로 갈 수 있을까요? 아는 사람도 없고, 먼 친척을 찾아가봐도 남보다 못하다면요? 그리고 다시 잡혀가면 죽음 뿐이라면... 도대체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 걸까요? 다들 그저 사람답게 살고 싶을 뿐일 텐데, 잘못된 나라에 잘못된 순간에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고통받아야 한다는 게 너무 부당하게 느껴집니다. 저를 비롯한 한국인들이 좀 더 북한의 인권에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현재 저자인 장길수는 한국을 떠나 캐나다에 유학 생활 중이라고 해요. 사실 한국이 탈북민에게 그다지 호의적인 나라라는 걸 알기에, 한국에서 마음을 다쳐 해외로 간 건 아닐까 싶어서 그 소식에도 마음이 좋진 않았습니다. 현재 시점의 장길수 본인의 글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 부분이 좀 아쉽네요. 본인의 목소리를 들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 그리고 이건 정말 덧붙임이지만, 앞서 서두에서 여러 사람의 글이 등장하는데 정말 사람 그릇이 딱 보입니다. 탈북민의 인권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들은 관심 안 가지는데 나는! 관심 가졌다! 나는! 정말 좋은 사람이고! 나는!!! 내 당은!!! 내가 모시던 분은!!! 이렇게 좋은 일을 했다!!! 이렇게 자기 홍보하는 게 목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어쩜 그렇게 이런 책에서조차 자기 자랑만 늘어놓을 수 있는지;;; 어휴;;; 그 서두 읽고 책 그냥 덮을 뻔 했네요ㅋㅋㅋ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