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할아버지. 시가 없어도 조금도 불편하지 않다는 것 밖에는."

"시가 있었으면 지금보다 살기가 불편했을 지도 모르지.그렇지만 지금보다 살맛이 있었을 거야."

" 살맛이 뭔데요? 그것은 초콜릿 맛하고 닮은 건가요? 바나나 맛하고 닮은 건가요?"

"그건 몸으로 본 맛이기 때문에 마음으로 보는 살맛하고는 비교를 할 수가 없지.살맛이란, 나야말

로 남과 바꿔치기 할수 없는 하나뿐이라는 나라는 것을 깨닫는 기쁨이고,남들의 삶도 서로 바꿔

치기할 수 없는 각기 제나름의 삶이라는 것을 깨달아 아껴주고 사랑하는 기쁨이란다."

 

(중략)

 

"지금 궁전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아무도 상아빛 신발장을 의심하지 않지?그러나 시를 읽는 사람

이 생기면 그걸 의심하는 사람도 생길 거야.나는 상아빛을 좋아하나? 아닌데 나는 노랑을 좋아하

는데,그러면서 어느날 노랑색 페인트를 사다가 신발장을 칠해서 자기만의 신발장을 갖는 사람이

생겨난단 말이다.물론 파랑 신발장,빨강 신발장을 갖는 사람도 생겨나지.그래서 궁전 아파트 신

발장이 아닌 제나름의 신발장을 갖게 되는 거야.또 어린이 중에서도 어른이 가르쳐 준 놀이말고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내는 어린이가 생겨날 테지. 그 어린이는 판판한 아스팔트 밑에는 도대체

뭐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해 그것을 파헤쳐 그 속에 숨은 흙을 보고 말 거야.그래서 그

속에서 몇 년째 잠자던 강아지풀과 명아주와 조리풀과 토끼풀과 민들레의 씨앗을 눈뜨게 하고,매

미의 마지막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가로수를 향해 날아오르게 할 거야."

 

할아버지의 주름투성이 얼굴이 아이들의 얼굴처럼 맑아지고 눈은 꿈꾸는 것처럼 한없이 먼 곳을

보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이상해요. 할아버지 말씀을 듣고 있으려니까 괜히 가슴이 울렁거려요. 이런 느낌은 처

음이에요."

"아이야,고맙다.할아버지가 이제부터 말을 얻어다 시를 써도 늦지는 않겠구나.시인의 꿈은 가슴

이 울렁거리는 사람과 만나는 거란다."

 

_ 박완서  / 시인의 꿈

다림 출판사   박완서 동화집  자전거 도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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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erald Green 2004-02-20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경아,너무나 좋은 말이고,또 지금의 내게 필요한 말이기도 하구나.
나란 존재의 소중함을 잊고 산 지가 정말 오래된 것 같아.

좋은사람 2004-02-20 0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희야..나도 요즘 심각한 우울증이었단다..
신랑이 자기랑 얘기 좀 하자고..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했을 정도였으니까..
살맛을 알고 살아야 되는데..요즘의 나는 그녀처럼 붕떠있는 것 같아.....
그래도 이렇게 가슴 울렁거리는 사람들을 만나니 희망은 있다 ㅎㅎ

비로그인 2004-03-08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말엔가... 디트로이트 아트 뮤지엄에 갔을 때 어떤 일본 작가의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그런 종류의 작품은 뭐라고 그러나 모르겠어.. 아무튼 여러 켤레의 신에 은색 금색 빤짝이를 뿌려놓고 나름대로 늘어놓은 거였는데, 그 신들이 모두 누군가 신던 거였어. (분명 그런 것 같았어) 신 주인의 세월과 성별과 빈부정도와 성격과 취향이 느껴지는... 참 신기했던 게, 사람이 사람 모르겠다고, 전신으로 부딪히며 살아도 그런 말을 자주 하게 되는데, 단지 신을 보면서도 그 사람을 다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그리고...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지. 할아버지의 신발장 이야기를 들으니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헌데 마랴. 궁전 아파트..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어디였는지 생각이 안 난다. 실제 있던 이름인지 아니면 어느 소설에선가 읽었던 이름인지...

좋은사람 2004-03-10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전아파트..아마 방배동에 실제 있지않나..
박완서는 그게 실제 생길줄 모르고 상징적으로 궁전이라는 이름을 붙인거라고 보는데 ..
영선이 네가 신발 이야기를 하니까 난 워싱턴의 아메리칸 히스토리 뮤지엄에 있던
주디 갈란드가 오즈의 마법사에서 신고 나왔던 반짝이던 마법 구두가 생각나는 구나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