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어느 해 한국의 작은 섬 거문도에 영국 군함들이 몰려들어 점거를 시작했다. 영국은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견제한다며 이런 뜬금없는 짓을 벌인 것이다. 영국의 행동은 그네들의 세계 전략의 제일 교리에 따른 것이었다. 대륙 세력의 팽창을 저지하라! 이 교리는 오늘날에도 영국 정치인들의 DNA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외딴 나라 조선의 주권 따위는 고려할 여지가 없다.
베를린이 소련군 손에 떨어지며 나치 독일이 패망한 순간 영국의 수상 처칠은 긴급 작전 하나를 검토시켰다. 연합군을 재정비하여, 심지어는 독일군을 재무장시켜서 소련을 침공하자는 구상이었다. 태평양 전선에서의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구상은 실현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상호불가침 약속을 깨고 밀고 들어온 히틀러 독일을 패망시키느라 2천8백만 명의 인명 손실을 감수해야 했던, 연합국의 최종 승리의 논란의 여지가 없는 최대 기여국 소련에 대해 전쟁이 끝나자마자 영국이 우선적으로 떠올린 대응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3000만 명이 죽었단다. 소련이 약해져 있다. 때는 지금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직전 외교적 해법을 추구하는 일단의 노력이 있었다. 영국에는 위기였다.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포기할 지도 모른다! 영국 수상 보리스 존슨이 비행기를 타고 키예프로 날아갔다. 나토가 도와줄 것이니 겁내지 말라. 그렇게 우크라이나는 나라가 소멸해버릴 지도 모를 정도로 큰 판돈이 걸린, 그럼에도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 속으로 기꺼이 걸어들어갔다.
더웠던 이번 여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대공세를 펼쳤다. 러시아 정유 시설, 민간 상선, 심지어 온라인 쇼핑몰 물류 창고까지 닥치는 대로 때려부수었다. 화력 면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상대가 되는 않는다. 우크라이나가 드론으로 부수고 있는 것을 러시아는 탄도 미사일로 보복하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장관의 말을 인용하자면 물류창고의 90%가 파괴되었다. 도로에 몇 백 미터마다 있는 주유소 하나 하나를 러시아는 다 때려부수었다. 영국은 젤렌스키가 의기소침할까 걱정되었다. 그래서 미사일 설계도도 주고, 신형 드론도 공급해주기로 새로 약속했다. 독일도 곧 그렇게 할 것이다.
영국, 나토, EU 집행부의 생각은 명확하다. 우크라이나가 군사력으로 러시아를 이기기는 힘들다. 그러나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최대한 약화시킬 수만 있으면 된다. 러-우 전쟁의 본질은 경제 전쟁이라는 것이다. 유럽은 우크라이나 국민의 증발, 우크라이나 국토의 분할, 최악의 경우 우크라이나라는 나라의 소멸이라는 댓가를 감수하며 그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유럽의 냉혈한 엘리트 정치인들에게 이러한 피해는 전혀 신경을 거슬리는 것이 아니다. 우크라이나인이라 해봤자 결국 슬라브인 아닌가? 즉, 유럽인이 아니지 않은가?
독일의 메르츠는 비장한 어투로 이 전쟁에 유럽의 명운이 걸렸다고 말한다. 마치 이 전쟁에서 지면 붉은 제국이 유럽을 접수할 것처럼. 그러나 우크라이나를 필연적 전장으로 만든 것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서진이 아니라 나토의 동진이지 않은가? 이에 대해 유럽 엘리트들은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러시아가 전쟁을 먼저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에 대해서도 하나의 문장을 무한 반복하는 것처럼. 유럽의 엘리트 정치인들은 완벽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단 한 단어도 틀리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한다. 이스라엘은 자기 방어를 할 권리가 있다.
서구 세력에게 그러한 권리가 있다. 좋다. 그러면 서구권 밖의 사람들에게는? 예컨대 예멘 후티가 자기네 국토를 회복하려는 시도도 예멘의 권리에 속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서구의 세계 질서의 이익을 해하는 것이 된다면 예멘의 그러한 노력은 테러가 된다.
몇 년 전 유로비젼 송 콘테스트에 수염을 기른채 여성 복장을 입은 경연자가 출연해 화제, 또는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아이들이 테레비젼을 보다가 놀랐다 등등. 긍정적으로 보면 유럽의 개방성, 쿨함을 보여준 사례일 수 있다. 그러나 러-우 전쟁이 나자 러시아는 바로 유로비젼 송 콘테스트에서 퇴출되었다. 윔블던 테니스 대회는 러시아 선수들의 선전이 프로파간다로 이용될 수 있다며 러시아 선수들의 출전을 봉쇄해버렸다. 지금도 서구에서 벌어지는 각종 스포츠에서는 러시아 선수가 메달을 따도 러시아 국기를 게양하지 않고 국가를 틀어주지도 않는다. 얼마 전에 피겨 스케이트에서 우승한 러시아 선수가, 이등 삼등 선수들의 국가의 국기는 올라가는데 러시아 국기만 올라가지 않자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보았다. - 이것이 이른바 유럽식 쿨함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서 김정은 만세를 외친다고 체포되어 징역을 살 위험이 없다. 임박하고 실질적인 위협이 현존하지 않는 한 그러한 행위를 국가가 처벌할 수 없도록 판례가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거리에서, 이스라엘의 가자에서의 인종 청소를 규탄한다 라고 외치면 어떻게 될까? 즉각 체포되어 징역 5년형을 받을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실제 몇 달 전 런던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위한 시위가 있었을 때 휠체어를 탄 노인, 지팡이를 짚은 팔순 구순 노인들이 바로 그러한 이유로 현장에서 즉각 체포되었다.
또 몇 달 전에 러시아에 우호적인 뉴스를 전파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이 유럽 단위에서 준비되고 있다는 뉴스도 있었다.
나의 눈에는 이 모든 것들이 과도하게 민감한 반응으로 보인다. 화들짝 놀라는 반응으로 보인다. 콤플렉스나, 무슨 역린을 건들였을 때처럼.
그리고 나는 그 근저에 서구 제국주의 과거, 그리고 현재가 놓여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세상의 밝은 빛 아래 내보이고 싶지 않은 과거와 현재.
그런데 예컨대 러시아라는 붉은 제국을 눌러앉히는 것에 어떤 실질적인 의미가 있는가? 유럽 엘리트 정치인들의 머리 속에서 대의를 형성하고 있는 그 세계 전략은 그네들의 환상, 장난감은 혹 아닐까? 그런 만큼 유럽 각국의 시민들의 삶과 괴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유럽 엘리트 정치인들은 러시아에서 사오던 연료보다 10배 이상 비싼 가격으로 연료를 사는 한이 있어도 러시아와의 교역은 끊어야 한다고 믿는다.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그네들의 장난감 환상으로서의 그 대의를 위해서.
유럽은 안으로 무너져가고 있다. 독일에서는 기존 정치 문법 밖에서 들어온 독일 대안당이 제일 세력으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독일 대안당은 러-우 전쟁 종전과 러시아에서 다시 에너지를 수입할 것 등을 주장한다. 그러나 집권하고 나서도 그러한 정책들을 관철할 수 있을지 나는 의심스럽다. 대안당은 단지 혼란을 가중시키는 역할만을 할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영국. 영국의 10년물 국채 금리는 미국 것보다 훨씬 높다. 6% 가까이 된다. 그럼에도 아무런 위기 의식이 없다. 왜냐? 러-우 전쟁이 더 중요한 안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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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런 감독의 '오딧세이'가 호평을 받는 가운데 아내는 이 영화를 강력히 보고 싶어 했고 나는 강력히 안보고 싶어했다. 아내는 결국 혼자 동네 극장에 가서 보고 왔다. 내가 같이 갔었더라면 영화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투덜거렸을 것 같다고 하더라. 나는 요즘 서구 문명 일반에 대한 강력한 실망 상태에 있기 때문에 오딧세이를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사실 이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말이 너무 많아지고 잘 시간이 되었으므로 여기서 끝내기로 한다. 기분 좋은 얘기가 아니므로 내일까지 글을 끌고가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