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는 정말 위대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여당이 국회를 지배하고 있고, 개인적인 카리스마가 있고, 우호적인 여론이 있다. 이번 대통령 임기는 정말 험난하다. 전세계적으로 암울한 경제 환경, 엄청난 규모로 쌓여가는 공공/가계 부채, 점증해 가는 복지 수요 등이 산 너머 산 처럼 앞에 놓여 있다. 즉, 이번 대통령의 가장 중대한 과제는 국민들을 잘 설득하여 부드럽게 증세에 대한 합의를 이루어 내는 것일 수 밖에 없다. 간단히 말하면 국민 저항을 최소화하면서 소득세율을 올리는 것이다. 하려고만 한다면 이 문제를 박근혜 이상으로 잘 다룰 수 있는 정치인이 없으리라.
그런데 오늘 보니 박근혜 정권은 이미 끝난 거나 마찬가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박근혜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은 폭탄을 안전하게 다음 정권까지 전달하는 것 뿐인 거 같다. 그 이상을 기대했다가는 실망을 자초할 뿐일 거다.
박근혜의 대선 구호를 요약하자면 증세없는 복지였다. 물론,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쨌든 박근혜는 당선되었고, 거의 9~10 달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서야 박근혜는 기초 연금을 공약대로 실행하는 것이 어렵다고 사과하고 있다.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
첫째는, 이번 사과가 예산안을 내놓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미루고 미루다 개학날이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숙제를 하려고 책상에 앉은 셈이라는 것이다. 욕을 먹더라도 인수위 기간 때, 늦어도 취임초에는 이 문제를 매듭지었어야 했다. 이제 거의 일년을 허비하고 이런 큰 폭탄이 터지니 아무리 박근혜라 한들 여기서 회복할 힘이 있을런지 모르겠다.
둘째는, 기초연금을 국민연금과 연계해 차등지급하기로 한 것은 정말 큰 실수라는 것이다. 기초연금을 65세 이상 국민 모두에게 주지 못하는 것도, 또 대상자에게 차등 지급하는 것도, 여건이 안되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연금과 연계한 것은 치명적인 실수라고 본다. 심정적으로 이렇게 이해될 수는 있다. 박근혜가, 근대화의 역군으로 고생한 노년 세대, 특히 가난한 노년 세대에 정말 애정과 관심이 많구나. 그래서 노인분들 중, 적어도 가난한 분들에게는 애초 약속한 20만원을 다 주려고 한 것이구나... -아마 이런 기조 위에서 국민연금 연계안이 관철되었으리라.
그러나 대통령이 이런 식으로 일을 하면, 당연히 안된다. 이번 대통령이 할 일은 납세자들을 잘 설득하여 국민 통합을 유지하면서 증세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국민연금 연계안으로 정책의 자의성이 노출되어 버렸고, 대통령의 신뢰성이 허물어져 버렸다. 국민 설득의 가능성은 완전히 물건너 갔다고 본다.
증세야 결국 이루어지겠지만 이미 정치적 신뢰성을 잃어버린 판이니 그 범위는 매우 한정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남은 4년을 버틸까? 국채? 민영화?
박근혜는 종부세 복원 등 부유층에 부담을 분담시키는 정책 등을 제시하면서 국민 설득에 나섰어야 했다. 그것도 취임 초에. 그랬었다면 감히 누가 반발하고 나설 수 있었을까? 조선일보? 이제 시간은 지나갔다. 우리는 박근혜의 거의 모든 정책이 폐기되는 과정을 보게 될 것이다. 기존에 있었던 복지 정책도 축소되거나 폐기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딱 바로 앞에 공공요금 인상도 대기하고 있다. 만일 이것이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라는 비젼이 있으면 감내 가능하겠지만 그런 것 없이 그저 막장일 뿐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