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 레이덴, 로테르담.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글이 길어지지 않도록 최대한 짧게 이야기하자.

-. 네덜란드 사람들은 매우 열심히 일하고, 일을 대단히 잘 하고, 대단히 친절한 것 같다. 친절함에 대해서만 예를 하나 들자. 기차를 타고 가는데 내 우산이 통로 쪽으로 또로로 굴러 갔다. 뒤쪽에서 누군가 다가와 우산을 주워 나에게 건네주는데 60대 할머니였다! 

-. 자전거. 특히 암스테르담에는 엄청난 수의 자전거가 도로를 누빈다. 도심 통행의 최우선 순위는 자전거인 듯 싶었다. 네덜란드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친구와 공원에 가서 가게에서 산 샌드위치를 먹었다. 친구는 빨간 문양이 든 화려한 색깔의 짧은 치마를 입고 도시를 누비고 싶어 했지만 날씨가 약간 쌀쌀하여 그 위에 코트를 입은 채 였다.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는 동안 우리가 발견한 것은, 치마를 입은 여성을 단 한명도 찾아낼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런던에 넘쳐나는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여성들의 여성적인 옷차림과 대비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자전거와 연결시켰다. 여성스러운 옷차림은 자전거 타기에 불편하다는 것! 어릴 때부터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자전거는 분명히 인간을 정의하게 될 터이다. 실용적으로, 외향적으로, 활동적으로. 네덜란드 사람들이 그러할 것 같았다. (우리도 자전거를 빌려 암스테르담을 쏘다녔다)

-. 레인스브르크에 있는 스피노자 집에 다녀왔다. 늘상 스피노자, 스피노자 하고 다니다가 드디어 스피노자 집 앞에 서니 심장이 살짝 흥분하더라. 문을 두드리자 다리를 저는 40, 50대로 보이는 아저씨가 함빡 웃으며 우리를 맞아 주었다. 점심이 지난 때였는데 우리가 그날의 첫번 방문자라고 하더라. 

-. 암스테르담에 있는 어떤 미술관에 갔다. 렘브란트의 야경이 전시되어 있는 미술관이다. 내게 가장 커다란 충격을 준 것을 말하라면, 17 세기 네덜란드의 회화 예술이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국민적 통합성을 제공한다는 점을 들어야 할 것 같다(미술관 1층 입구 앞에 걸려 있는 대형 작품에서부터 깜짝 놀란데다 위트 형제의 처형 그림 앞에서는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대단히 뛰어난 화가들이었으며, 널리 인정되는 대로 렘브란트는 발군이었다. 야경 한 작품만으로도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네덜란드로 날아갈 가치가 있다. 단연코!

-. 반 고흐 박물관에 갔다. 우산을 받쳐 들고 개장 시간 전부터 줄을 서서 기다렸다. 작품들이 연대 순으로 전시되어 있어서 고흐가 어떤 모색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실험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야망을 품고 있었는지를 이해하기 쉬웠다. 예술가는 스토리를 갖고 있지 말아야 한다. 고흐의 죽음을 설명하고 있는 판넬 앞에서 난데없이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젠장, 예술가는 자기 스토리를 갖지 말아야 해. 그냥 작품으로만 이야기해야 해." 하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나, 나를 프랑스의 엑상 프로방스로 끌고 간 것은 세잔의 그림이 아니라 그의 라이프 스토리였다. 인정하자, 예술가(사상가)의 라이프 스토리는 작품 앞으로 우리를 불러모은다는 것을.)

-. 렘브란트의 집에 갔다. 렘브란트는 독특한 개성의 남자다. 그 독특함이 그의 작품을 독창적으로 만든다. 나는 렘브란트에게서 쾌활한 자의식을 발견한다. 그 자의식은 함부러 경건한 척 할 수 없다는 자의식이라고 나는 느낀다. 나는 그의 경건함을 어떤 초상화 속 인물의 손에 가득 쏟아져 내리던 빛으로 알 수 있다고 느낀다.

-. 일요일마다 암스테르담의 조그마한 광장에서 열리는 미술 전시회에서 작은 에칭 작품을 하나 샀다. 우리의 첫 번째 콜렉션이다. 85 유로였는데 친구가 5 유로를 깍았다. (전날엔 중고 서적 장터가 열려서 비트겐쉬타인, 럿셀 등의 책을 샀었다.)

-. 레이든. 운하와 카페, 젊음의 도시 같더라. 즐거웠다.

-. 로테르담. 이차 대전때 독일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것을 재건한 도시란다. 독특한 건축물들이 많았기 때문에 촌닭처럼 계속 두리번 거려야 했다. 서울같은 현대적인 도시가 어떻게 진화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좋은 롤 모델이리라. 미술관에 가서 바벨탑 등의 그림을 보았다. 

-. 나에게 네덜란드는 스피노자의 나라이다.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민주화되고 개방적인 나라라고 하니 스피노자가 자랑스러워 할 만하리라. 그러나 네덜란드가 스피노자에 빚진 것보다는 스피노자가 네덜란드에 빚진 것이 훨씬 많으리라. 당대의 네덜란드 사회가 제공한 자유와 관용이 아니었다면 스피노자의 사상은 씨도 터보지 못했으리라. 우리는 스피노자의 집 근처에 있다는 스피노자 상을 찾아 동네를 헤매었었다. 길 가던 총각한테 물어보니 어떤 노부부에게 뛰어 가서 몇 마디 주고 받고는 "이 분들이 여기서 수십년을 살았는데도 스피노자 상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단다. 그러므로..." 라고 하더라. 결국 택배 배달하는 사람에게 물어 대형 할인 매장 앞에 놓여 있는 스피노자 입상을 찾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고가는 길목이었는데도 스피노자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못했던 것 같다. 스피노자는 언제나 홀로 사색하는 이미지다. 이 입상도 마찬가지였다. 스피노자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이해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스피노자의 입상에 아무런 아이디어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는 사진을 찍는다고 시간을 끄는 친구에게 사진 그만 찍고 빨리 가자고 툴툴거렸다. 네덜란드를 만든 것은 스피노자의 사상이 아니다. 스페인 제국을 격파하고 얻어낸 공화국의 독립, 상업을 위주로 한 포토폴리오, 대규모 간척 사업, 운하, 도시 시스템, 꽃, 자전거... 이런 것들이 네덜란드의 영혼을 만든 것이리라. 그러므로 사색하고 있는 스피노자의 표정은 나에게도 낯설었다. 차라리 렘브란트의 자화상처럼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면! 스피노자는 자전거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이해되고 있어야 했다! 네덜란드는 좁은 국토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다. 쓰레기통을 따로 비치하지 않고 집 앞에다 그냥 쓰레기 봉투를 내놓게 할 정도로 사랑스러운 실용주의의 나라다. 높은 인구 밀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아웅다웅하거나 각박해 하지 않는 것 같다. 대단히 실용적인 사람들인 것 같은데도 세속적이라는 느낌이 별로 없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우리는 스피노자의 고독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고독이란 내향성을 뜻하지 않는다. 고독이란 자유인의 근거다.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주체성, 결단력, 활동성이 고독에 근거한다. 이러한 고독을 회화적으로 표현한 걸작이 바로 렘브란트의 야경이다. 야경은 스페인 제국에 대항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의용군을 형성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으니까. 시민들의 오합지졸같은 복장 꼬라지를 보라! 그게 바로 고독의 절대적인 징표이다. 즉, 자발성의 절대적인 징표이다. 그리고 그런 고독, 다시 말해 자발성을 철학적으로 서술해 놓은 작품이 바로 스피노자의 에티카다. 불행하게도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그리고 아마 세계의 대다수의 사람에게 에티카는 이렇게 이해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러므로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스피노자는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나쁘지 않다. 철학은 무용하고 네덜란드는 렘브란트로 이미 차고도 넘친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도 여전히 네덜란드는 스피노자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질문에 대한 나의 거친 대답은 시민적 자발성이다. 그러나 시민적 자발성은 우리의 전통에서 매우 미약하다. 한국은 가족을 볼모로 개개인을 극한적으로 경쟁시켜 사회를 유지하는 구조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개인적 자발성이란 가족적 이해의 표현에 지나지 않으며, 시민적 자발성이란 가족 영역 밖의 시민적 타율성(즉, 외적 규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질문에 대한 답이 시민적 자발성이라면 우리는 다시 이렇게 물어야 한다. 스피노자적 이상(적 개인과 사회)이 보편적인가, 지역적인가? 이 물음에  전자를 선택한다면 시민적 자발성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만일 후자를 선택한다면 우리에게 스피노자란 그저 다른 문화권의 사람일 뿐이다. 우리는 다른 삶들을 엿볼 필요가 없다. 그네들은 그네들대로 모순이 있고 갈등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물론 전자를 선택했다. 그러므로 나는 "어떻게"에 대한 고민을 안게 된다. 아마 나는 소수에 속할 것이다. 나는 활동적인 소수에 속하기를 원한다. 

-. 네덜란드를 떠나면서 내 머리 속을 차지한 이미지는 렘브란트가 그린 초상화 인물의 손 위로 쏟아져 내리던 빛이었다. 네덜란드는 손에 대한 많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렌즈를 가는 스피노자의 손, 방죽에 뚫린 구멍을 막는 소년 한스의 손,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기름 묻은 손... 렘브란트 집에 갔더니 화가 한 분이 직접 에칭을 찍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러시아에서 온 10살이 안되어 보이는 아이에게 윤착기 핸들을 돌리게 했는데 힘겹게 핸들을 돌리던 그 아이의 손도 내 머리 속에 이미지로 남아 있다. 손은 내게 직접적인 삶의 상징이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만 경탄하는 것이 아니라, 렘브란트가 행한 작업을 직접 해봄으로써 렘브란트의 깊이를 손으로 이해하는 것, 그것이 내게는 직접적인 삶, 혹은 자발적인 삶의 상징인 것이다(자발성이란 나와 그것 사이에 아무런 매개도 없음을 뜻한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육체적 힘(자발적 컨트롤의 강도)은 정신적 힘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에릭 호퍼 또한 옳았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분명 손일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네덜란드를 여전히 스피노자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 이리 저리 방치되어 있는 스피노자의 흔적들을 보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그 나라의 도로들을 누비고 다니는 자전거들, 도로변에 엄청나게 쌓여 있는 자전거들을 보고 하는 말이다. 네덜란드는 내게, 자신의 근육의 힘으로 자전거 바퀴를 돌리며 한 손으로는 스마트 폰을 들고 수다를 떨면서 다른 한손으로는 핸들을 조정하며 가볍게 질주하는 스피노자들의 나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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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2-06-06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로 세로 크기가 거의 4미터나 되니.. 저도 렘브란트 보러 암스테르담에 한번 가보고 싶어지네요.

weekly 2012-06-07 14:44   좋아요 0 | URL
예, 크기가 주는 압도감도 굉장합니다. 작품의 규모에, 군상들의 배치에, 그 주제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렘브란트의 신기를 받은 곳에서 자체발광하는 그 신비한 빛에, 약간 어둡게 되어 있는 방에 들어서는 순간 입이 딱 벌어지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