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나남신서 377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윤형숙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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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들어 인문사회과학 쪽에서 가장 주목받는 몇 권의 책 중 하나가 이 책이다. 버만의 <현대성의 경험>과 앤더슨의 이 책은 웬만한 인문사회과학도들은 한번쯤 꼭 거쳐야 하는 입문서가 되었다.

언어가 그 기원을 따지기 힘들만큼 자연적 사실로서 인식되듯이 민족이라는 개념 역시 우리에게는 그 역사적 기원을 따지기가 힘든 자명한 실재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것이 분열된 왕조의 근대적 통합 단계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공동체 개념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경우에 놀라운 인식론적 전환을 이끌어내는 논점이다. 과거 민족사학자들이 주장해온 단군 이래의 단일 언어, 단일 혈통설에 기반한 민족만을 상상해온 관점에서 보자면 앤더슨의 이와 같은 주장은 '폭언' 수준의 해체성을 가지고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황산벌]의 백제와 신라의 전쟁을 우리는 하나의 민족 내부 간의 갈등이라고 기억하지만(배웠지만), 이것은 과거의 역사를 망각한 바탕 위에서 건축된 의식적인 기억의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쓰는 사람들이 과연 그들을 형제간이라고 상상할 수 있었을까? 신라 중심의 삼국통일을 왜 우리는 민족의 통합이라고 이야기하는가? 이런 논리는 적어도 앤더슨의 관점에서는 근대적 산물로서의 민족 탄생을 위해 조작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누구도 단군 중심의 단일 민족으로서의 한민족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 그 단일 민족이 배태한 부정적인 영향을 우리는 지금 주변에서 명백히 볼 수 있다. 피부와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 땅에서 성실하게 노동하는 이주노동자들을 정당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강제출국 시점을 눈앞에 둔 외국인 노동자들의 자살은 단일민족에 대한 상상이 가져온 부정적 영향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섞이는 것에 대한 불안, 맹목적인 순수성에 대한 집착.

이 책은 우리가 상상하는 민족 공동체를 해체적으로 접근하는 데 유용한 시사를 여럿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흔히 알려진 기본 논점보다는 페이지를 넘겨가며 문득 떠오르는 것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우리의 영토를 어떻게 상상하게 되었는가? 제주도는 언제부터 우리의 상상에 포함되었는가 하는 것들. 제주도 4.3은 과연 우연이었을까?

어떤 번역서도 그렇지만, 오역은 바로잡아야 한다. 몇 가지를 지적한다.

역자가 영어에 익숙한 탓인지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를 영어화하고 있다. 이렇게 바꿔야 할 것이다.
허난(->에르난), 버버(->베르베르) 허더(->헤르더) 찰스 페롤(->샤를 페로) 고유명은 고유명대로 번역하는 것이 번역의 기초 아닐까.

번역이 의심스러운 부분. 이 부분은 나중에 개정판 낼 때 확인해 주길 바라면서..

조지아(소련에 조지아란 데가 있던가요?)(->그루지아?)
데끼유꾸(Tekijuku->모르면 일본 전공자한테 물어서라도 주를 달아놓으셔야지...)
반-셈족주의(anti-semitism)(넓게는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요즘의 어법에서는 유태인에 대한 반감을 나타내므로, 반유대주의라고 해주는 게 정확할 것임)
1978년에 미슐레(이 사람 아직 살아 있나요?)
미디의 대학살(les massacres du midi-> 정오의 대학살, 조금만 찾아봐도 프랑스사에서는 이렇게 표현함)
성 마태에 의한 복음서(->마태복음, 왜 이렇게 길까)
관찰한다(observe, 이 말에는 주장한다는 뜻도 있다. 중3 수준의 영어 실력이면 충분함.)

정확하지 못한 번역은 명저를 태작으로, 혹은 난해서로 둔갑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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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의 역사 - 누벨 끌리오 총서 02
사빈 멜쉬오르 보네 지음, 윤진 옮김 / 에코리브르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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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어느 순간부터 거울이 궁금해졌다.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모습을 반사해주는 매개체가 필요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거울이 발명되지 않았거나 이용 가능하지 않았던 시절 사람들은 맑은 샘물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비쳐지는 반사상은 평면거울과는 달리 보는 위치에 따라서 끊임없이 유동하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 모습에서 보는 이는 자신과는 다른 괴물을 본 것처럼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거울의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사람들은 거울 속에 반사된 자신의 상을 정확하고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거울에 비친 상을 보면서 만족과 불쾌를 느끼고, 자신에 대한 환영이나 환상을 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진이나 동영상이 보편화된 요즘에는 자신의 반사상을 보는 일이 더 이상 두려운 일은 아니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거울은 외양을 확인하고 수정하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자아의 정체성을 시험하고 욕망과 환영을 개입시키는 정신분석의 매개체이기도 하다. 특히 감수성이 민감한 예술가나 철학자의 경우 거울은 우리가 보는 것의 이면에 보이는 것을 규율하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측면에서 거울은 신성이나 우주의 섭리를 보여주는 성스럽고 비밀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거울은 결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정신의 발전 과정을 추적하고 수많은 예술 작품의 비밀에 다가가는 중요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거울의 존재론이나 현상학에 다가가려 할 때, 서적이나 자료가 부족하다는 점을 실감하게 되었다. 정치사나 제도사 위주의 역사 연구에 대한 반성으로 시작된 미시사적, 문화사적 접근이 활발하게 시도되고 있다고는 하나, 국내에서는 여전히 초보적인 수준인 듯하다.

거울을 존재론적이고 철학적으로 다룬 책을 찾다가 찾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프랑스 학자의 연구 결과이므로, 프랑스 중심의 역사 서술이 책의 초반부를 차지하고 있지만, 후반부의 서술은 거울과 관련해서 내가 기대한 점들을 잘 다뤄주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의 거울의 역사가 본질적인 관심사이기는 하지만, 이 책은 거울과 관련된 지적 갈급을 어느 정도 해소해주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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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자크 라깡 - 백의신서 31
마단 시럽 지음 / 백의 / 199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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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에 대한 개론서가 여러 권 나와 있지만, 그 중 많이 찾고 추천하는 책이 아니카 르메르의 개론서이다. 정신분석의로서의 라깡의 초기 문제를 잘 정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그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책은 전체의 일부분을 가시화함으로써 해저 심연 속에 가려진 전체를 비가시화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즉 대중적인 라깡 이해의 길을 열어놓았으면서도 정작 중요한 논의의 상당 부분을 베일에 가려둔 것이다.

라깡의 전반적인 면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적절한 책이 르메르의 책이다. 현재 번역된 책 중에서 그나마 가장 이해하기 쉽고 전면적으로 라깡을 다룬 책이 바로 사럽의 이 책이라고 생각된다. 라깡의 이론이 형성된 지적, 철학적 맥락을 보여줌으로써 텍스트 이해의 지평을 넓혀주고, 라깡의 중심 저작인 <에끄리>의 대표 논문을 해설함으로써 원저작 이해의 실마리를 마련해주고 있다. 그리고 라깡이 페미니즘, 영화, 문학 연구와 어떻게 접맥되는지를 밝혀 놓고 있다.

물론 다른 개론서들도 도움이 되겠지만, 이 책처럼 라깡 이론의 전반을 일관된 체계로, 이 정도로 명징한 언어로 풀어낸 책은 발견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국내 저자가 관여한 책들도 대체로 특정한 관심을 기반으로 편한 책들이라서 초심자에게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번역이 안 되어서 제대로 공부하기 어렵다는 게 흔한 불평이다. 원서를 찾아보면 될 게 아니냐 하는 반론도 나올 법하지만, 번역서가 있으면 그만큼 수월한 것도 사실이다. 번역서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만 아니면 있는 게 좋다. 그럼에도 우리는 항상 번역의 문제 때문에 약간은 괴로움을 느낀다. 일본이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국책사업으로 번역소를 만들어, 번역에 큰 역량을 집중시켰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도 무언가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이대로 가다간 지식의 식민화는 계속 심화되어 가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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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이론
자크 라캉 지음, 권택영.민승기.이미선 옮김 / 문예출판사 / 199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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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 원저작의 번역서로서는 아직까지 이 책이 유일하다. 번역이 잘 안 되는 이유는 자명하다. 영어나 불어 실력이 있다고 라깡을 번역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적어도 라깡의 지적 깊이와 폭을 아우르겠다는 열정 없이는 아무도 라깡 저작을 번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에끄리>, <여성적 성욕>(편저) 등 라깡의 저작 중 이해에 필요한 몇 편의 논문을 가려서 번역하였다. 라깡 저작 전체를 인간의 육체라고 한다면 아마 이 정도 분량은 엄지 손가락 정도나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미약하나마 이 정도의 번역은 최소한 라깡의 원저작을 접하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는 가뭄 속의 몇 방울 빗줄기 정도는 되리라 생각한다.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역의 가능성인데, 내가 보기에 이 번역서의 작업자들의 경우 번역에 있어 그다지 큰 오류를 범한 바는 없다고 생각한다. 라깡을 신비화한다, 라깡 이해가 부족하다 등의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무엇을 근거로 이야기하는지 선뜻 감이 오지 않을 뿐이다. 오히려 이 정도의 번역이라도 되었다는 것이 다행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 번역서 이후 그럴 듯한 번역서가 나오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적어도 이 번역서의 작업자들의 수준이 적어도 형편없는 수준이 아니라는 점을 반증해 준다고 생각한다.

라깡 하면 거울단계나 상상계, 상징계, 아버지의 이름, 팰러스나 욕망, 기표나 결여 같은 용어들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라깡의 문제 의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속 유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계속 상상계와 상징계, 거울 단계 같은 초기의 라깡 문제 의식만을 동어반복적으로 되풀이하고, 그 이후로 나아가지 못하는 느낌이다.

라깡의 문제 의식을 창의적으로 계승한 지젝이 지적 유행화하면서 라깡에 대한 관심이 새로이 고조되고 있다. 지젝을 통해 본 라깡이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지젝의 창의적 접근에만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협소화된 틀로만 접근해 온 우리의 지적 풍토에도 어느 정도 문제가 있는 듯하다.

작년에는 푸코, 올해는 라깡 하는 식으로 단기간 정복에 익숙한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적어도 라깡의 이론이나 학설은 수십년에 걸친 말과 글쓰기의 결과였다.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데 수십 년이 걸리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몇 년을 투자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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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위치
호미 바바 지음, 나병철 옮김 / 소명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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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탈식민주의가 문제시되기 전인 90년대 중반 이 책의 원본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는 특별한 인상도 없는 한 권의 원서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탈식민주의의 중심에 놓인 문제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책이 번역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 될 만큼 바바의 책은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원서를 읽어나가면서 논의 내용이 정리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도 되돌아보면 나의 무지와는 달리, 바바가 구사하는 표현상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적지 않은 분량에 역주까지 붙여가며 번역의 수고를 다한 저자의 노고에는 두 손을 마주쳐 박수를 보냄이 당연하다. 그런데 몇 가지 지적하고 싶은 점이 있다. 간혹 본문과 중복되는 내용이 역주에 포함되어 있다. 역주라면 풀어서 알기 쉽게 함이 목적이지, 저자의 말을 반복함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불필요한 구석도 꽤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요건 또 다른 문제이겠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오류가 많이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번역이나 교정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뒤로 갈수록 지치게 마련이라 허점을 노출할 가능성이 많은 게 사실이다. 그리고 색인 역시 해당 단어가 언급된 전체가 제시되어 있지 않아서 부족한 느낌이 있다.

풍부한 배경 지식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인쇄된 한 권의 책에만 의존할 경우, 생각하지 못한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4페이지 저자의 서문에는 조안 고프젝(joan gopjec)이라는 인명은 이와 같은 오류의 전형적 사례일 것이다. 원서에서는 C와 G를 구분할 때 가끔 착오를 일으킬 수 있다. 이는 이와 같은 착오에서 빚어지는 실수이다. 조안 콥젝이 누구인지 알만한 사람은 대충 알고 있다는 말씀. 이 외 이 책의 독자들로부터 여러 가지 지적이 출판사나 저자에게 전해졌을 것이라 믿고 나머지는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직접적인 식민지 경험 속에서 근대화를 추구해온 우리 입장에서 탈식민주의는 새삼 또 다른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서구와 우리라는 이분법 속에서만 사유하고 저항을 생각해 온 우리에게 있어 탈식민주의는 우리의 지난 근대적 경험들을 우리라는 정체성을 분열과 혼성의 입장에서 되돌아보게 만든다. 단순한 반식민주의가 아닌 탈식민주의는 본질적 정체성을 가정하지 않으면서 그 혼성화의 계기들이 만들어내는 제3의 공간이 있을 수 있음을 지적하고, 거기에서 문화를 재구성하는 방법을 시사한다. 굳어진 이분법적 사유에 식상할대로 식상해진 우리에게 있어 이런 제안은 참신한 발상이다.

그러나 바바가 주장하는 기호의 공간, 언표작용과 분열의 공간이 우리의 경험을 반추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흥미로운 서사를 제공해줄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런 입지점을 전면적으로 내세우기 위해서 기존의 거대서사를 가볍게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거대사서와 미시서사가 결합된 관점으로 우리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바바의 논의는 우리에게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바바의 탈식민주의가 비서구를 가정하는 것같으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서구 지식을 세련되게 변형시킨 산물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는 것은 당연하며, 전략적으로도 필요한 태도이다. 바바가 아무리 중요한 이론가로 상찬된다 하더라도 우리의 경험을 이해하고 서술할 수 없다면 그 얼마나 공허할까. 바바의 서문에서 드러나듯이 바바의 이론은 1980년대 미국에서 발생한 신역사주의와 비슷한 입지점을 가지고 있다. 기존의 역사에서 배제된 소수자의 관점으로 역사를 읽어내겠다는 것과 특히 문화라는 프리즘으로 다양한 영역을 포괄하는 문화사로서 위치짓겠다는 것 등이 그 둘의 유사점이다. 그러고 보면 신역사주의나 탈식민주의는 서구적 산물, 그것도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 중심부 학계에서 발생한 문화적 산물이다. 그 점을 인지한 상태에서 우리는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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