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1
시미즈 레이코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시미즈 레이코의 <월광천녀>에는 고위인사들의 '복제'들이 나온다. 최근 인간 복제를 주장하는 이들이 이런 '대체용 자신 복제'의 이점을 거론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선견에 꽤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 책 <비밀>의 소재-뇌를 통해 기억을 본다는 설정-도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시미즈 레이코를 자극한 소재 대부분은 나 자신도 거의 5년전부터 보아온 뉴스들이었고, 따라서 이 작품의 설정은 전혀 참신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과학적 상상력이 평범함을 인정하고 있는 듯, 아이디어 자체보다 그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인간의 문제에 더욱 관심을 보인다. 그녀의 작품들이 특별하게 보이는 것은 바로 참신하진 않지만 독특한 소재로 인간 내면의 모습들을 성실하게 탐구하기 때문인 듯 하다. 그리고 오늘의 과학기술로 근미래에 펼쳐질 수 있을법한 내용을 다룬 탓에 섬뜩한 현실감마저 느낀다.

이 책을 보면서 <돌연변이(사토라레)>와 구성면에서 상당히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둘 다 독특한 설정하에 일어날법한 갖가지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감성적인 온기 면에서는 큰 차이를 보인다. 시미즈 레이코의 작품은 좀더 금속성의 서늘한 느낌이 난다. 미소년물의 그림체로 잔인한 장면을 무감각하게-무슨 해부학 책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만큼- 그려놓은 것이며 그런 장면들 속에서 객관적 증거를 찾아내는 내용하며, 어찌보면 감정이입을 원치 않는 듯한 냉정함을 유지한다. 그래서 감동적으로 배치된 장면을 보면서도 덤덤하게 책장을 넘기게 된다. 감성에 호소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런 일이 생긴다면 어떨까?'라는 작가의 지적탐구가 더 강한 만화. 시미즈 레이코의 만화를 보면서 느끼는 점이다.

특히 <비밀>은 -현재 나와있는 2권까지는- 이러한 지적유희에 가장 공들인 작품이 아닌가 싶다. (작가후기에서조차 법의학이나 과학수사를 얘기하는 모습이 상당히 이쪽에 심취한 듯 하다) 장편에서 보기 힘든 잘 짜여진 구성감각도 이 작품의 묘미다. 여러면에서 괜찮은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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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메이크 업 12
아이카와 모모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보통 전문가물(?)이라고 하면 스포츠물처럼 경쟁을 통해 목표를 이뤄가는 플롯과, 탐정류처럼 그때그때 당면한 에피소드를 해결하는 플롯으로 나뉜다. <해피 메이크 업>은 -탐정도 아니면서!- 일개 화장품매장 직원이 고객의 문제를 해결해간다는 플롯이 우선 당돌하고도 흥미롭다. 그것도 고작 '메이크업'이라는 매개로.

이 만화에서 주장하는 메이크업의 행복효과라는 것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아니, 화장에 이런 심오한 뜻이?' 하고 놀랄만큼 주인공이 제시하는 화장(치료)법은 비약적이면서 또한 인간적이다. 왜 화장을 하는가. 단순히 남에게 예뻐보이기 위해서라고 치부해버리기엔 화장이 주는 즐거움과 자신감은 무시 못할 정도로 크다.

작가는 화장이 -운동으로 몸을 가꾸고 센스있게 옷을 입는 것처럼- 일상적이면서도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주는 수단이라고 외치고 있다. 여성만의 족쇄도, 남자에게 잘보이기 위한 치장도 아닌 내면을 돋보이게 해주는 도구. 그러한 시각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이, 화장술보다 내면의 변화를 그리는 점이 뒤로 갈수록 끼워맞춘듯 엮어지고 반복되는 내용에도 불구하고 이 만화를 계속 보고싶게 만드는 매력이다. 물론 그 비약이 심하긴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충분히 설득력 있다.

세상이 이렇게 단순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화장 하나로 자신감을 되찾고 자신감을 되찾았다고 주변이 변화되는 에피소드마다의 해피엔딩... 순진할 정도의 스토리이지만 그래서 읽는내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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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의 기술 - 머리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는 (양장본)
사카토 켄지 지음, 고은진 옮김 / 해바라기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솔직히 실망이었다. 컴팩트한 두께 일목요연한 편집 다 맞는 말인데 정작 내용은 새로울게 없었다. 그냥 모두가 다 아는 메모기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을 총정리해놓은 책이다. 그나마 낙서나 메모를 한때라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스스로 터득한 메모법들 뿐이다. 물론 행간에서 참신한 아이디어도 찾아볼 수 있었지만, 그정도 반짝임도 없이 어찌 책을 만들 생각을 했으랴. 장점이라고 말하긴 힘들어 보인다. 메모라는 텍스트에 관심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모를까, 진짜 메모기술을 기대하는 독자에겐 절대로 추천하고 싶지 않다. 이 책에 메모'기술'은 없다. 정리가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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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과일가게
이명랑 지음 / 샘터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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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느 서점에서 50%나 할인할 때 이 책을 사보았다. 개인적으로 전혀, 아무런 기대도 없이 읽었고 처음엔 횡재했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이명랑의 시장 이야기는 뭉클하기도 하고 미소짓게도 하는 삶의 냄새가 묻어있다. 그러나 그녀가 나와 동갑이어서일까? 작가가 속한 입장이 시장통에서 과일을 파는 '소설가'이기 때문일까? 철저하게 시장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범한 생활자도 아닌 작가의 시선에 나는 어느순간부터 더이상 매력을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작가가 현재는 소설에만 전념하고 있다는 프로필을 보고는 그야말로 흥미가 떨어졌다. 작가가 아무리 시장통에서 자라났다곤 해도, 아무리 시장사람의 습성이 몸에 배었다고 해도, 그녀의 위치는 '장사를 해본 소설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과일가게'를 운영하는 '소설가'라는 흥미로운 상황이 빛을 바래는 순간, 이 수필은 고만고만한 30대 초반의 일기로 전락한다. 그냥 한 여자의 살아가는 이야기이며 그녀의 시각으로 본 시장의 모습이나 사회의 모습에 불과한 것이다. 솔직히 난,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삶에 대한 관조라던가 새로운 시각따위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그 나이또래라면 특별할 것도 없는 생각들이기에 '깊은 맛'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열심히 사는 사람의 이야기가 다 감동적이거나 깨달음을 주는 게 아님을 이 책을 읽고 느꼈다. 수필보다는 시장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을만큼, 이 책은 수필도 르뽀도 자서전(성공기)도 아닌 어정쩡한 과일가게 안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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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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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유명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작가에 대한 아무런 기대나 선입견 없이, 기발한 발상에 끌려 선택한 책 '나무'.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은 내게 소설적인 즐거움은 주지 못했다. 어쩌면 필립K딕의 단편집을 먼저 봐서 그럴지도 모른다. 비슷하게 암울하고 유니크하게 그려내고 있는 미래세계(혹은 이異세계), 과학과 상상력이 결합된 내용과 반전까지. '나무'와 필립K딕의 단편집은 닮은 점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를 읽고 기발하다고 생각했으니, 일단 상상력 부분에선 합격이다.

하지만 콩트처럼 짧은 글들은 읽을수록 문체를 느낄 수 없었고, 아이디어로만 이루어진 건조한 글이란 느낌마저 들었다. 그렇다. 베르베르의 문체는 신문기사처럼 건조하다. 하지만 가장 아쉬웠던 점은, 그 감탄스러운 기발함마저도 전권에 걸쳐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가 세계를 비틀어보는 관점이 이런것인가보다..느껴지는 순간, 기발한 상상력도 빛을 바랜다. 결국 이 책은, 작가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독자를 염두에 둔 소설이 아니라 장편을 쓰는 틈틈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쓴 글인 것이다. 그런 글이 이 정도의 은유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이 또한 놀랍고 부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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